함평지역 교회 선교역사 재논의해야!

성정리교회가 용성교회로 그 동일성이 유지된 교회인가?

소재열 | 기사입력 2022/05/04 [07:51]

함평지역 교회 선교역사 재논의해야!

성정리교회가 용성교회로 그 동일성이 유지된 교회인가?

소재열 | 입력 : 2022/05/04 [07:51]

 필자가 용성교회 앞마당 기념비 앞에서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필자가 남평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할 때 교회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있었다. 필자가 질문을 했다. “남평교회가 1903년에 설립했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그러나 한결같이 답변은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단지 구전으로 내려온 것을 교회 요람에 기록한 것이 전부라는 이야기였다. 역사를 가진 교회 중에 간혹 이런 일들이 있다. 역사에 대한 중요성이 없다. 보존해 온 자료가 없다.

  

그때부터 남평교회 역사를 추적했다. 불행하게도 공적인 공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전국 노회를 통해 초기 교회의 역사적인 자료를 집대성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가 있는데 그 사기에도 남평교회의 기록은 없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용성교회  © 리폼드뉴스


교회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분명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없었다.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에 의해 교회 설립기념을 지키고 있었다. 그로부터 역사를 추적했다.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공적으로 내놓은 문헌집에 남평교회 설립년도와 설립일이 있었다.

 

또한 여기에 연동된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 미국에 보낸 선교 보고서에 기록된 남평교회 초기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당회는 100주년을 103주년으로 하여 교회 설립일을 확정하고 올해 2022년은 122주년의 기념식을 가졌다.

 

아울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에서 남평교회의 역사를 인정하여 한국기독교역사 사적지 제36로 지정했다. 이에 감사예배를 2022. 5. 2. 남평교회 본당에서 성대하게 가졌다.

  

필자는 한국장로교회와 본 교단이 합동 측 중심의 역사를 집대성하면서 목포지역과 나주지역의 역사 집필을 완료하고 전남·광주지역의 역사 중에 특히 그동안 미루어 왔던 함평지역 역사와 현재 교회들의 사진 자료를 위해 함평을 방문했다. 

 

▲ 광주 삼도교회 표지석    ©리폼드뉴스

  

함평지역 교회를 살피면서 당시 나주군의 최초의 교회였던 삼도리교회인 삼도교회를 방문했다. 삼도 입구에 설치한 광주지역 최초 설립에 대한 기념석과 교회 내에 설치된 광주지역 최초 복음 도래지, 광주 근대문화 전파의 진원지등은 앞으로 재론하여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삼도리교회가 “12 교회 분립이라는 표지석의 설명 역시 재론해야 한다. 왜냐하면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서 분립은 오늘날 교회 분립과 전혀 다른 개념의 용어이다. 앞으로 이 부분은 연구 논문을 밝히기로 하고 함평지역 교회를 살펴보자.

 

삼도교회 전경  © 리폼드뉴스


함평군기독교연합회는 2005510일에 용성교회 앞마당에 함평군기독교선교백오주년기념석을 설치했다. 용성교회가 1900년에 설립되었기에 용성교회는 함평군의 기독교 선교 발상지로 상정하여 기념식을 가졌다.

 

문장교회 역시 1900년에 설립되었는데 함평의 기독교 역사 발상지로 채택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용성교회가 1900년에 설립되었으며, 함평군의 기독교 선교 발상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 소견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장교회 교회 설립 1900년 기념석 © 리폼드뉴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1900년에 시년에 나주군 삼도리교회가 가옥을 매수하야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수년 후에난 12간을 증축하였고 교회 점왕하야 함평군 성정, 마암, 방동등 교회를 분립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시 상정에 교회를 분립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분립은 오늘날 교회의 분립과 다른 개념이다.

 

같은 1900년에 시년에 함평군 문장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박찬익 임봉춘 정기선 등이 영광 하라리교회에 왕래하다가 신자 점가하야 교회를 분립하고 선교사 배유지 남대리 조사 변창연, 마서규, 정순모, 이계수, 허원삼등이 계속 시무하니라라고 기록하여 문장교회의 설립년도가 1900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00년에 상정리교회가 설립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1905년에 함평군 용성교회가 성립하다 초에 서경구 정도련 최치문등이 신교하고 나주 마암리 윤상삼과 같이 성정리교회로 다니면서 예배하다가 후에 예배당을 용성리에 설치하다라고 하여 용성교회는 1905년에 설립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새로 건축된 문장교회  © 리폼드뉴스


용성교회 측은 성정리교회가 1905년에 용성리로 이전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였다고 본다. 즉 성정리교회가 용성교회로 변경되었으니 용성교회 역사는 1900년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성정리교회가 용성리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는지에 대한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근거를 내놓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로회 사기에는 성정리교회가 용성리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근거가 있다.

 

1905년에 성정리교회가 용성리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면 1905년 이후에 성정리교회가 역사 기록에 없어야 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기록은 성정리교회가 용성리교회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용성교회 함평기독교연합회가 설치한 기념석 뒷면  © 리폼드뉴스


당시 함평지역의 교회는 전라노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1916(병진) 825일 제6회 전라노회 임시회가 전주 동문외예배당에 개최하니 회원은 목사 25, 장로는 38, 63인이오, 임원은 회장 김인전, 부회장 이기풍, 서기 홍종필, 부서기 곽우영, 회계에 남궁혁, 부 최의덕이 피선되었다.

 

이때 제주 전도사업에 관한 토의 회에서 연보한 금액이 39원영이었으며, 각 지방 시찰위원회가 그 지방 각 교회의 보고를 수합하여 총괄 보고하고 각 당회 총계표도 수합하여 사권보하게 하고 각 당회 회록은 검사한 후 보고만 하기 규정했다.

 

신문위원은 교인들이 기독신부를 잘 구람하게 할 방침을 연구 보고하였는데 목사, 장로, 조사는 개인이 의례히 구독하고 교인에게 특별히 권면하여 구람하게 하기로 하였다. 목사 이기풍은 광주 북문내교회에 위임목사로, 이자익은 구봉리, 밧정리교회에 전도목사로, 최대진은 1년간 제주도에 자업 전도목사로 허락됐다. 

 

성정마을에 있는 성정리교회 터, 지금은 성정교회가 없어졌다.  © 리폼드뉴스


목포교회 이원필 목사는 군산부 개복동교회에 위임목사로 이임하게 하고, 장성군 하나말, 전주군 보상리, 해남군 우수영, 무안군 비금, 해남군 좌당리, 진도군 분로동, 완도군 조약도, 함평군 성정리교회에 장로 각 1인씩 택할 것을 허하고 신학 지원자 강병준의 취학을 허락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하권 참조).

  

여기 기록에서 함평군 성정리교회에 장로 각 1인씩 택할 것을 허하고 신학 지원자 강병준의 취학을 허락했다라는 기록은 1905년에 용성리교회가 성립되면서 1916년에 여전히 성정리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성교회 정원에 설치된 기념비  © 리폼드뉴스


이 이야기는 성정리교회가 1900년에 설립되었다면 용성리교회는 1905년에 설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함평군은 용성교회가 상정교회의 동일성을 유지한 동일교회로 보고 용성교회가 함평군 선교의 발상지로 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용성교회 앞 마당에 설치된 십자가와 종탑  © 리폼드뉴스


개 교회 역사는 철저히 고증되어야 한다. 현재 용성교회는 성정리교회의 1900년 설립일보다 2년을 앞당겨 1898년으로 설립일을 지키고 있다. 그 이유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연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성정리교회는 곧 용성리교회가 아니기에 현재의 용성교회는 장로회 사기의 기록에 따라 1905년을 설립일로 하여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용성교회가 성정리교회임을 입증하는 특별한 어떤 역사적인 근거 자료가 나올 때 상황은 또 달라질 것이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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