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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철 박사 대요리문답 강해 88] 세례의 의미문 165. 세례란 무엇인가? / 문 166.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가? / 문 167. 우리의 세례를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는가?
문 165. 세례란 무엇인가?
답.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음을 정하신 신약의 한 성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접붙이고,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그의 영으로 거듭나고, 양자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의 표와 인침이다. 이로써 세례받은 당사자들은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되어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함으로 맺게 되는 것이다 (행 8:36-37, 2:38; 창 17:7, 9; 갈 3:9, 14; 마 28:19 등).
1. 세례는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신약의 성례이다. 세례의 방법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세례 시에 사용되는 물의 양이나 그것을 적용하는 방식은 성경에 지정되어 있지 않다. 교회 역사에 있어서 세례의 방식은 물 부음, 물 뿌림, 침수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러한 세 가지 방식 중에 어느 한 가지만이 확실한 세례의 시행법칙은 아니다.
2. 신약에서 ‘세례를 주다'라는 헬라어가 문자적으로 ‘침수’를 의미한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헬라어 밥티조는 (baptizo) 문자적으로 ‘씻다'를 의미한다 (막 7:4, 눅 11:38). 헬라어 명사 밥티스모스도 (baptismos) 문자적으로 ‘씻음을 의미한다 (막 7:4, 히 9:10). 빕티조와 밥티스모스가 신약에서 ‘침수하다’와 ‘침수’를 의미한다는 침례교의 주장은 유효하지 않다.
3. 세례의 본질적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과의 연합이 세례의 뜻이다 (롬 6:1-11). 이 연합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특별은혜를 주신다. 거기에 우리 죄를 씻음과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거듭남이 포함된다. 침례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기 위해 참수를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연합을 위해서는 죄 씻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죄 용서가 있어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능하다. 죄 용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죄 용서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다 중요하다.
4.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의 상태에 진입함을 의미한다. 이런 접붙임을 통하여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영적 몸의 구성원이 되고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된다.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면 그와 함께 연합하여 살고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영적 영양분과 힘을 공급받는다.
5. 세례는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그의 죄를 사면한다는 표와 인침이다. 일상생활에서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내듯이 구원의 계획에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그의 백성의 죄를 씻는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그의 사망을 의미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고 말할 때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근거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세례는 바로 이것들의 외부적인 표이다.
6. 세례 자체가 중생을 수여하지 않는다. 세례와 중생은 실질적으로 같지 않다. 세례와 중생은 표와 그 표식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디도서 3:5은 이 점에 있어서 적절하다. ‘씻음의 중생’이 아니라 ‘중생의 씻음'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둘은 차이가 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중생 되지 않고 중생을 통하여 영적으로 정화된다.
7. 세례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는 표와 인침이다 (갈 3:26-27). 세례를 받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계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신자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다. 그래서 세례는 양자의 표요 인침이다.
8. 세례는 영생으로의 부활의 표와 인침이다 (고전 15:29; 롬 6:3-5). 고린도전서 15:29은 죽은 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고린도교회의 독단적 관습을 인가하거나 찬성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이 당시 존재하고 있었음을 지시한다. 부활이 없다면 그러한 세례 역시 전혀 의미가 없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는 그의 부활의 때에도 그리스도와 연합이 지속된다.
9. 세례받은 자는 유형적 교회에 엄숙히 가입된다. 세례는 표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개인적 믿음의 고백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유형적 교회에 출석하는 자는 세례를 통하여 공개적으로 교회 회원으로 인식되고 엄숙히 유형적 교회에 가입하게 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세례받은 자들이 공개적으로 유형적 교회의 회원이 된다.
10. 세례는 전적으로 오직 주께만 속한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관계한다. 성인의 세례의 경우 이러한 맹세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 유아들의 경우는 유아들의 대표자로서의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세례가 하나님의 은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무와도 관계된다. 언제나 세례는 하나님의 축복과 우리의 엄숙한 맹세와 관계한다.
문 166.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가?
답.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에게 대한 순조을 고백하기까지는, 유형적 교회밖에 있어 약속의 언약에 외인인 자들에게는 세례를 베풀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를 향한 순종을 고백하는 양친 또는 그중 한 사람만 믿는 부모에게서 난 어린 아기들은 그 점에서 언약 안에 있으므로 세례를 베풀 수 있다 (행 8:36-37, 2:38, 창 17:7, 9; 갈 3:9, 14 등).
1. 정당하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유형적 교회의 회원이다. 유형적 교회를 구성하는 두 부류의 회원은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 믿음의 고백과 순종을 보이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 된 유아들, 즉 아직 개인적인 믿음의 고백을 하지 못한 자들이다. 성인의 나이에 있는 자 또는 책임질 나이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겠다는 공개적인 믿음을 고백함으로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공개적으로 믿음 고백을 한 자들은 교회의 회원으로 간주 된다. 따라서 세례는 교회 회원의 공식적 승인의 표이고 회원으로서 특권이다.
2. 한쪽 그리스도인 부모나 양편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유아가 출생하면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가 그 즉시 미국 시민이 되는 것처럼 날 때부터 교회의 회원이 된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미 교회의 회원이 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다.
3.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자녀들이 출생 시부터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연속성에 있어서 그들의 부모와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교회의 회원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자녀들은 성장해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인 믿음을 고백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성찬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교회원으로서의 특권을 다 누리지 못한다.
4. 유아 때 세례를 받은 청년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할 때 교회의 회원 가입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자녀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교회의 회원이다. 그들이 받은 세례가 그 증거이다. 교회에 가입하는 것은 과거에 교회의 회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입교예식을 통하여 교회 회원의 특권과 의무를 지닌다. 그러면 그들은 예배와 봉사와 헌금의 의무와 더불어 선거권과 피선거권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5.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인 부모를 둔 유아들은 반드시 세례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침례교회와 유사한 믿음을 고백하는 교회들은 개인적인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런 믿음은 지상에 있는 소수의 교회만이 견지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유아 세례를 믿고 있다.
6. 유아 세례는 일반적으로 침례교회에 의해 반대되었다.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신약 성경에 유아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이 없고, 성경에 유아에게 세례를 베푼 실례가 없으며, 유아들은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유아 때 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대부분 자라면서 불경해지고 명목적 그리스도인이 될 뿐이며, 유아 세례는 로마 가톨릭의 미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7. 유아 세례는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다. 구약시대에 유아들은 언약의 표로 할례를 받았다. 신약시대에서도 언약의 표로서 세례를 받는다. 만일 침례교의 입장이 옳은 것이라면 성경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라는 단정적인 명령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령은 없고, 있다면 오히려 구약의 관습을 변경하는 것이 될 것이다.
8. 신약 성경에 유아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증명이 없고 세례받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유아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추정케 하는 적지 않은 신약의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면, 빌립보 간수는 자신이 “세례를 받고 그의 온 집도 세례를 받았다 (행 16:33). 바울은 스데바나 집의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고전 1:6). 고넬료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이 세례를 받았다 (행 10:24, 48). 이 모든 가정에 유아들과 어린아이들은 없고 성인만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9. 예수님께서는 부모들의 요청에 따라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이것이 세례는 아니지만 유아 세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가 무엇을 하시는지를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품에 안고 축복하셨다. 누가 이것이 무익한 일이고 아이들에게 어떤 혜택도 가져오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모의 믿음은 아이들을 대표한 믿음으로 인정된다 (막 9:24-27).
10. 유아 때 세례를 받은 거의 모든 자들이 자라면서 불경해지고 단지 명목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주장을 입증할만한 그 어떤 정확한 통계도 없다. 어린 나이에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과 성인 때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이 불경하게 되고 명목적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교회가 그것을 실행하는 교회보다 더욱 순수하다고 증명된 적은 없다. 더욱이 성인 때 세례를 받은 자들이 유아 때 세례를 받은 자들보다 더 신실하고 견고한 신앙을 유지한다는 증명도 없다.
문 167. 우리의 세례를 어떻게 잘 사용할 수 있는가?
답. 필요하지만 많이 소홀히 되어 온 바 세례를 잘 사용하는 의무는 우리가 평생 동안 이행해야 할 것이니 특별히 시험을 당할 때와, 다른 사람들이 세례받고 있는 자리에 참석했을 때, 세례의 성질과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제정하신 목적, 그것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보증된 특권 및 혜택, 그것에서 행한 엄숙한 서약 등을 심각히 또는 감사히 고찰함으로써, 우리의 죄악한 더러움과 세례의 은혜 및 우리의 약속들에 미급 또는 역행하는 것 때문에 겸손하여짐으로써, 그 성례 안에서 우리에게 보증된 죄 사함과 다른 모든 행복에 대한 확신에 이르기까지 성숙함으로써, 우리가 향하여 세례받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힘을 얻어 죄를 억제하며 은혜를 소생시킴으로써, 그리고 신앙으로 살기를,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자기들의 이름들을 바쳐 버린 자들로서 거룩함과 의로운 생활을 살기를 같은 성령으로 세례받아 한 몸을 이룬 자들로서 형제의 사랑으로 행하기를 노력함으로써 할 것이다 (골 2:11-12; 롬 6:4-11; 고전 1:11-13 등).
1. 세례를 사용함은 매일의 생활에 선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그 의미를 경험하는 것이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세례는 성례요 교리요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봉사를 증진해야 할 의무이다. 기독교 교리를 믿고 이해해야 한다. 즉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답게 세례의 본질과 의미를 이해하고 그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한다.
2. 세례의 효용성이 세례를 베풀 때만 국한되어 있다는 잘못된 개념은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세례의 효용성은 세례받은 이후부터 전 인생을 보호한다. 유아 때 세례를 받은 자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경험을 심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나이에 진입할 때 회개하고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으며 성화를 추구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한 번 출생하지만 전 인생을 통하여 해마다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를 한다. 세례도 역시 단 한 번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 세례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경험할 수 있다.
3. 우리는 특별히 세례를 사용해야 하는 때는 우리가 유혹에 직면해 있을 때이다. 유혹의 때에 세례를 사용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생각나게 하고 불경한 자와 세속적인 자들처럼 죄와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살 것을 상기한다. 또한 우리가 다른 이들이 세례받는 자리에 참석하면 세례의 의미와 그것과 관계된 맹세가 특별히 우리 마음과 지성에 움직이는 실재가 된다.
4. 세례를 사용할 때 우리는 그 의무를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 가장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생각에서 말과 행동으로 매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산다. 그러므로 세례를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그 엄숙한 맹세대로 살지 못했던 지난 과거의 불신앙과 실패로 인해 겸손해야 한다. 5. 세례는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겸손케 하고 구원의 확신을 증가시키며 죄를 억제하고 은혜를 소생케 한다. 세례를 사용하는 것은 실생활에서 죄로부터의 탈출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세례의 실재와 그 목적 그리고 효과적 소명과 칭의와 양자와 성화와 이생에서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많은 혜택과 관계된다.
6. 세례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암시한다. 성령세례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유형적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고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유형적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같은 세례와 같은 몸의 지체에 참여하는 자들과의 연합과 형제 사랑을 촉진한다.
정 규 철 목사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및 이사 전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예수인교회 협동목사 <저작권자 ⓒ 리폼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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