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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새 사람”(3)

김순정 | 기사입력 2023/11/25 [17:27]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새 사람”(3)

김순정 | 입력 : 2023/11/25 [17:27]

▲     ©리폼드뉴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친히 말씀하신 원리다.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34:14)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이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이 헌신은 결혼 관계에서 요구되는 질투하는 사랑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분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너무도 자주 영적인 간음을 범하였다.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가장 강대했고 번영을 누렸던 당시의 왕 솔로몬을 생각해 보라. 그는 돌과 백향목으로 성전을 짓고 그것을 모두 금으로 입혔다. 그는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하여 이 성전을 봉헌했다. 그는 봉헌식에서 땅의 모든 백성이 그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으로 성전 동편에 있는 감람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솔로몬을 보게 된다. 그는 그 산꼭대기에 세울 이방신들을 위한 신전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건너편 산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께 아름다운 성전을 봉헌했던 그가 이제는 모압의 신 그모스에게 바칠 신전을 세우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그는 세상적 지혜는 충만하나 믿음은 텅빈 정치가가 되어 그곳에 왔다. 그는 주변 민족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이스라엘의 안전과 평화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는 모스의 신전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압 왕비를 위하여 세운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철면피와 같은 짓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의 모든 제단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셨다(34:12-13).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34:14)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심판을 보류하시고, 회개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그들을 부르신다.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간음한 아내 이스라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이스라엘에게 마침내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에게로 모으기 위하여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을 신랑으로 나타내셨고, 그의 교회를 자기의 신부라 부르셨다. 이런 표현은 신약에 와서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성경에 계시되어 온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잘 나타낼 만한 그러한 인간 관계를 찾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다가 우연히 결혼이라는 관계를 찾아 내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창조 시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드셨을 때 이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배타적인 사랑의 기쁨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제도를 제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역시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경쟁자를 허용할 수 없는 배타적인 사랑이었다.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별 어려움 없이 그모스에게 신전을 세워줄 수 있다. 다신교는 항상 신 하나쯤은 더 첨가할 수 있다. 범신론에서는 신은 곧 만유이기 때문에 그모스는 무한한 영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힌두교에서는 브라마는 비인격적인 절대자이며, 그모스는 브라마에게로 곧장 갈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위하여 길을 평탄케 해주는 또 하나의 신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신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한 후 손을 떼고 저 멀리 계신다는 신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신에게는 여러 가지 형태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모스 역시 그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한 신은 우리가 그를 그모스라 부르든, 또는 그가 없을 때에 그모스를 예배할지라도 괴로워하거나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배타적인 유대 관계는 구약성경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것은 신약성경에 완전하게 표현되어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4:12)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질투열심"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이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서 타오른다. 아버지를 위한 아들의 열심 역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열심 못지 않다.

 

성전을 시장으로 만드는 상인들을 쫓아 내어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의 거룩함에 대한 열심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또한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서의 하나님의 전을 위한 열심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상징된,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위해 열심이 있었다. 그 열심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채찍을 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등을 채찍에 내놓게 하였다.

 

오직 예수님의 사랑의 열심에 의해서만 자기 백성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질투하는 사랑은 만족될 수 있었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까지도 하나님의 집을 위한 예수님의 열심이 그를 불태웠다. 그는 자기의 몸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교회를 주님의 신부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인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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