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 한기총 갈등

한기총은 합동과 통합의 대표자의 대결, W.C.C. 문제로 인한 갈등

소재열 | 기사입력 2011/01/31 [21:05]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 한기총 갈등

한기총은 합동과 통합의 대표자의 대결, W.C.C. 문제로 인한 갈등

소재열 | 입력 : 2011/01/31 [21:05]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이 분열되었다. 그 분열의 배경은 W.C.C. 문제로 인한 정치적, 신학적 문제가 핵심이었다. 2010년 한기총 대표회장 인준을 위한 정기총회의 정회와 속회의 와중에서 불거진 갈등과 분쟁, 그리고 한기총 직전 대표회장은 이광선 목사로서 W.C.C. 입장에 서 있는 통합측 인사이며, 현 한기총 대표회장인 길자연 목사는 W.C.C.를 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합동측 인사이다. 이와 같은 이해관계와 회의 모습들은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과 너무나 흡사한 것 같다. 그 현장을 가 본다.
 

 
새 선교정책에 따른 선교사들의 동향과 편향성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북미연합장로회가 1958년 6월 연합총회에서 합동승인이 됨으로써 한국총회는 종래의 미북장로회 명칭을 미국연합장로회로 개정하는 결의를 해야할 것과 여기에 따라 헌법 9장 33조 1항을 개정하는 일, 그리고 종래의 미국장로회 선교부를 해체하고 총회 내에 통합하는 상호약정서를 승인한 후 연합장로회 선교부 사업을 인수하는 일이었다.

해외 선교부의 모든 일이 총회 내로 통합하는 일은 해외선교부로부터 온 선교비를 어떻게 사용하고 분배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상당한 이권으로 등장하였다.

여기에 W.C.C.측과 N.A.E. 측 사이에 긴장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선교비를 주관하고 처리하는 총회선교기구 본부 임원 중 한국교회 총회원 서기 1명과 5개 협동사업부서에 7명의 한국인 책임자와 총회원 서기 1명 각 사업분야에 대표 2명 등이 어느 측의 인물이 선정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느 측이 총회 임원회를 주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총회 임원 선거 운동이 치열했고 그 임원선거를 위해 자파 인사들이 총회 총대로 많이 파송되는 것이 각 노회에서 최대 이슈였다.

자동적으로 W.C.C.에 가입된 선교사들은  N.A.E.측 인사보다도 W.C.C.측 인사가 총회임원과 예수교 장로회 총회 내에 통합된 선교회의 실권을 장악하여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합동과 통합측의 분열은 미국연합장로교회 본부와 그들의 한국선교부의 주도 면밀한 배후 조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동진 박사는 그 근거로 “미국연합장로교회 에큐메니칼 선교부와 한국선교부 대표 안두화(Adams)를 필두로 선교사 전원 명의로 11월 24일까지 정회하기로 한 총회의 결의가 불법이라고 한 성명서”가 그 증거라고 말한다. 성명서는 1959년 9월 29일 연동교회에서 속회한 총회가 “합법적 제44회 총회”라고 주장하고 “이후 11월 24일 모이려는 회의를 합법적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속회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선교부의 조정 증거가 나타났다. 조동진 박사가 밝힌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열 후 선교사들의) 성명서의 배후에는 한 해 전부터 미국 본부에서 짜놓은 세밀한 전략 계획이 있었다. 미국연합장로교회 총회 본부는 한 해 전인 1958 년 총회에 제출된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W.C.C. 탈퇴 건의서’가 또 다시 1959 년 제44회 총회에 정식으로 상정될 것이기 때문에 이 반 에큐메니칼 세력을 총회에서 제거하든지 그렇지 못할 경우 총회를 분리하라는 지시를 한국선교부에 내려 놓고 있었다.

그 1차적 계획은 경기노회에서 반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총회 안의 W.C.C. 탈퇴 결의를 부결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적 계획은 총회신학교 교장 박형룡에게 신학교 건축 재정 불법 지출의 책임을 물어 그를 면직시킴으로써 선교회가 신학교의 운영권을 되찾아 신학교 안의 반 에큐메니칼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3차적 계획은「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연합장로교회 에큐메니칼 선교부」로 개편된 것을 한국장로교회 총회가 그대로 인준할 것인가를 산하 노회에 수의한 것이 노회 수 과반수를 얻어 총회의 인준을 받아야 법적 절차에 차질 없이 통과 되도록 하기 위하여 총회 총대의 절대 다수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경기노회 총회총대 문제

경기노회의 총회 총대 선거에 대한 문제는 제44회 총회의 표면적인 최대의 쟁점이었다. W.C.C.측과  N.A.E.측의 양보할 수 없는 대립은 총회 총대 선거에 대한 문제로 나타났다. 이 사건은 “경기노회에서 반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총회 안의 W.C.C. 탈퇴 결의를 부결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자파 총대를 다수 총회로 파송해야 한다는 절박한 정치적인 복안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과열현상은 1959년 봄노회부터 전국 34개 노회가 일제히 총회 총대선거를 자파총대를 확보하기 위해 교권의 장으로 변했으며 제44회 총회 분열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졌다.

문제는 경기노회에서 일어났다. 경기노회는 총회 내 가장 큰 노회였다. 무려 총회 총대만 28명을 파송하는 총회 내 모 노회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경기노회의 총대를 선출하는 그 방법과 회의 진행, 회의 진행에 대한 적법성 논란 등이 문제점으로 등장하지만 근본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고 W.C.C.와 N.A.E.와의 치열한 대치국면이 문제로 등장하면서 경기노회의 파행이 그대로 총회가 개회되는 현장으로 옮겨져 총회가 파행으로 이어져 끝내 분열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결국 경기노회 총회 총대 문제 역시 박형룡 박사 문제를 그 근본 원인으로 설명하지만 사실은 W.C.C.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를 반대한 사람들을 제거하여 미국선교회의 선교사들과 함께 자파 인사들을 총회 임원으로 옹립하여 에큐메니칼 총회로 만들기 위한 전단계로서 총회 총대를 자파 인사로 많이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었다. W.C.C.를 반대한 세력들이  N.A.E.를 중심으로 W.C.C.와 다를 바 없이 자파 총대를 많이 확보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게 되었다.

처음서부터 박형룡 교장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이미 진행되어 오고 있었던 W.C.C.와 그에 대한 신학적 문제로 인한 지지파와 반대파와의 대립이 이어져 왔고 그 결과 경기노회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전국노회에서 가장 많은 총대를 파송한 경기노회를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총회의 판도가 달라질 형편이었고 무엇보다도 W.C.C.를 지지하고 이끄는 지도자가 경기노회에 있었기 때문에 그 치열했던 싸움은 경기노회로부터 그 불씨가 점화되어 총회에서 폭발하여 총회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경기노회의 총회총대 문제는 총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총회에 소원건이 접수되었다. 경기노회 총회총대건의 문제는 총회 내 두 부류인 W.C.C.을 지지하는 측과 반대한 측( N.A.E.)의 대립으로 총회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비춰졌다. 1959년 9월 24일 오후 7시에 대전중앙교회에서 254명 중에 251명의 참석으로 제44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경기노회는 정기회에서 선출한 총대와 임시노회에서 선출한 총대 명단을 함께 총회에 제출하였다. 개회 선언 후 경기노회 회원권에 관한 문제로 장내는 소란하였다. 소란 속에 회의는 진행되지 못했고 정회 시간이 되어 회의를 중단하고 정회되었다.

총회 첫날에는 오전에 경기노회 회원권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합의안은 쌍방에서 대표 2명씩과 일반 회원 중에서 각 1인씩 합 3인씩을 택하여 설명을 청취한 후 오후 2시까지 정회하기로 가결되었다. 2일째 되는 날 오후 2시에 양쪽 대표의 발언을 청취한 후 투표한 결과 임시노회에서 선출한 총대를 받기로 가결되었다.

총회 3일째 되는 26일 오전에 제44회 총회에서 경기노회 회원권 문제는 일달락 되는 듯 보였다. 총회가 개회되려면 “정기회측 총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임시노회 측 총대를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에 이 문제는 표결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경기노회 제72회 제1차 임시노회의 불법과 임시노회가 불법으로 총대를 선출한 건에 대한 소원건이 이미 총회에 상정되었기 때문에 회장은 “노회측(정기노회에서 선출한 총대를 제출한 측)의 제출한 소장이 살아 있음을 회장이 선언함으로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치부와 증경 총회장단에게 맡겨 보고 채용키로 하고 오후 2시까지 정회”하기로 가결되었다.
 
오후 2시에 속회된 회의는 이 문제로 인하여 정치부 보고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정치부 보고와 토론, 그로 인한 소란 등으로 총회 3일째는 저녁시간까지 해결되지 않고 회의는 정회되었다. 총회 4일째 되는 27일 오전 시간에 회의는 속회되었고 역시 회의가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때 노진현 총회장은 중재안을 제시하여 회원들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총회 회의록 서기인 정규오 목사가 기록한 총회 회의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내가 소란함으로 회장의 요청에 의하여 증경 총회장들에게 사무 집행에 대한 대책을 강구 보고케 하기로 하고 상오 10시 반까지 정회하기로 결의하고 김형모 목사로 기도하고 정회하다. 회록 서기 정규오”

11시에 속회되었다. 증경 총회장 일동의 중재안에 대한 보고는 다음과 같다.

“1. 현 총회의 정세 하에서는 회무를 원만히 진행하기 곤란하므로 금년 11월 24일 화요일 오후 7시까지 정회하고 그 전으로 경기노회 총대는 개선하여 오도록 할 것.
(단, 계속 총회 장소는 서울 새문안교회당으로 할 것)

2. 특별위원회를 원, 부총회장과 증경 총회장과 각 노회장으로 구성하고 총회 당면한 문제를 수습하도록 하여 주실 것. 증경 총회장 일동.”

이와 같은 증경 총회장단의 중재안을 발표하게 되자 동의와 재청에 의해 총회장은 가부를 물어 가결을 선포하였다. 이 안은 이미 총회가 증경총회장단에게 위임한 사항이요, 증경총회장단은 총회를 화합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비상정회를 건의하여 총회에 상정하므로 총회는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W.C.C.측에서는 이렇게 이 부분의 역사를 기록하며 평가한다:

“증경총회장 회의 제안대로 총회를 11월 24일에 속개하고, 경기노회 총대를 개선케 하자는 제안이 있자 이것을 받자는 동의가 있었다. 이때 쌍방 대표 5인씩과 선교부 대표 각 1인씩과 총회장으로 타협점을 갖게 하자는 개의가 있었다. 이때 총회장 노진현씨는 개의는 묻지 않고 동의만 묻고자 하였다.”

이영헌 교수는 이 부분에서 비상정회의 결정에 있어서 “개의는 묻지 않고 동의를 물어 100명의  N.A.E.측 ‘예’ 보다 에큐메니칼측 ‘아니오’ 소리가 누가 듣든지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가결을 선포했다”라고 한다. 소리를 듣고 소리의 강약으로 결정하는 법은 없다. 당시 장로회 헌법에서 회의장이 소란할 때 회장이 판단하여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수 없을 때 회원들의 동의를 묻지 않고도 회장의 직권으로 비상정회를 선언할 수 있는 것이 당시 법이었다.
 
그러나 노진현 목사는 증경 총회장단에게 일임한 사항을 보고로 듣고 그대로 동의를 물어 비상정회를 선언한 것이 교단을 나뉘어 질 정도로 불법이라는 말인가? 이미 계획된 대로 분열의 길로 가면서 분열의 명분을 “회장이 개의를 묻지 않았다”는 데서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총회나 노회에서 회의 진행상 “개의”를 묻지 않았다거나 “동의에 ‘아니오’라는 목소리가 더 컸는데 ‘예’쪽으로 가결했다”고 분열한다면 오늘날 온전한 총회가 존재하겠는가? 에큐메니칼을 반대한 자들을 축출하고 미국 선교본부와 선교사들과 함께 에큐메니칼 총회를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분열 후 제일 먼저 선교사들이 W.C.C.측인 연동측을 옹호한 성명서를 발표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선교사들도 총회장이 “개의”를 묻지 않았기에 연동측에 합류했다고 할 것인가?

그런 상황 중에서도 노진현 회장은 기도하고 11월 24일 하오 7시까지 정회됨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W.C.C. 지지파는 불법으로 임원 불신임안을 가결하여 의도했던 대로 에큐메니칼 총회를 만들었다. 1958년 6월 미국 연합총회에서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북미연합장로회가 합동이 승인되고 미국 연합장로교회로 개정하는 결의를 하고 종래의 미국장로회 선교부를 해체하고 총회 내에 통합하는 상호약정서를 승인한 후 연합장로회 선교부 사업을 총회가 인수하여 많은 해외 선교비를 통해서 합동측 교회와 목회자를 어떻게 유혹했는지는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제44회 총회 석상에서 임원 불신임을 낭독한 안광국 목사

이미 전술한 대로 총회에서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는 제44회 총회 분열의 표면적인 원인이었다. 이 문제로 총회가 비상 정회되고 각각 다른 장소에서 자신들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총회를 속회하여 합동(승동측)과 통합(연동측)으로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광국 목사는 총회장이 회의를 불법으로 진행했다는 이유로 불법적으로 총회장 불신임을 제안하고 직전 총회장 전필순 목사가 가부를 묻는 초헌법적이 일이 벌어졌다. 안광국 목사는 불법으로 임원 불신임을 발의했다. 그 ‘불법’ 판단은 누가하느냐이다. 특정 개인인 안광국 목사가 불법이라고 하면 불법이 되는가? 총회는 최고의 치리회이다. ‘불법’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치리회가 하는 것이다.
 
불법의 혐의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아 청원을 하여 처리하는 것이 순리이다. 또한 최고 치리회 중에 특정 사안에 관해 자신들의 의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나 회의 도중에 나와서 불법이라고 단정하고, 회장의 권한이 없는 자가 회장을 권한을 찬탈하여 가부를 묻는 것은 오히려 치리를 받아야 마땅하다. 총회를 기만하는 해당행위이다.

안광국 목사는 총회장인 노진현 목사가 회의를 불법으로 진행했다고 주장한 “증경총회장 회의 제안대로 총회를 10월 24일에 속회하고, 경기노회 총대를 개선케 하자는 제안이 있자 이것을 받자는 동의가 있었다”, “이때 쌍방 대표 5인씩과 선교부 대표 1인씩과 총회장으로 타협점을 갖게 하자는 개의가 있었다. 이때 총회장 노진현씨는 개의는 묻지 않고 동의만 묻고자 하였다”라고 한다. 안광국 목사는 이것이 불법이어서 총회장 불신임을 묻게 되었고 그 결과 총회가 분열되었으니 책임은 노진현 목사와 그 추종자들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회장인 노진현 목사가 증경 총회장단의 제안대로 총회는 11월 24일 속회 때까지 가부를 물어 정회를 선언하였다. 문제는 “이때 회원 중 안광국 목사는 회장을 부르며 회장 앞으로 나가 임원 불신임 안을 낭독하였다” 그는 “단위로 뛰어 놀라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가하면 ‘예’ 하십시오, ‘가결되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 번개같이 하단하였다. 안광국 목사는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총회장의 회의 진행을 불법이라고 정죄한다. 그리고 나서 총회장의 회의 진행과 상관없는 총회 임원들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안하였다.

불신임안의 내용을 보면 총회장의 회의 진행에 있어서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미 임원불신임안을 사전에 모의하고 계획했다는 증거이다. 이 이야기는 총회장의 회의 진행에 문제라기보다는 이미 W.C.C. 문제로 인한 지지파와 반대와의 대립, 현 임원의 다수가 W.C.C. 반대파였다는 사실, 또한 그 임원회가 안광국 목사를 종교교육국 총무직을 파면한 사실에 대한 감정적인 대립으로 총회를 분란으로 몰고 간 장본이었으며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총회가 분열된 이후 안광국 목사는 연동측, 즉 통합측에 가담했고 총회에서 임원불신임한 공로로 속회된 통합측 총회에서 안광국 목사의 종교교육국 총무직을 복직시켜 주는 일부터 단행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가?

통합측 총회록은 안광국 목사가 임원 불신임안을 설명하자, 직전 총회장인 전필순 목사가 가부를 물었다고 기록한다. “안광국 목사는 임원불신임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불법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제43회 총회 임원에게 회의를 맡길 수 없다고 말한 후, 직전 총회장 전필순 목사가 가부를 물으니 회중이 예라고 대답하였다.”(통합 제44회 총회록, 26) 그러나 당시 회의록 서기였던 정규오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안광국 목사는 단에 뛰어올라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자신이 가부를 물어 몇 사람의 호응을 받아 나중에는 서울 연동에서 불법집회를 하고 총회라 자칭하는 것입니다.”(정규오, 교회사 상, 177)
 
소재열 목사 /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에서 교회헌법과 정치 주제로 목회학박사학위(D.Min)와 칼빈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철학박사 학위(Ph.D)를 취득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석사를 마친 후 법학박사 과정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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