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 분열사 8]기장측의 분열에 대한 역사적 배경(1)

리폼드뉴스 | 기사입력 2015/03/14 [18:25]

[한국장로교회 분열사 8]기장측의 분열에 대한 역사적 배경(1)

리폼드뉴스 | 입력 : 2015/03/14 [18:25]

제2차 기장측과 분열은 신학적인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인 문제가 복합되어 일어났다. 조선신학교 학생 51인이 제33회 장로회 총회(1947년)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조선신학교에서 교육되어진 자유주의 신학에 관한 심각한 문제를 총회적으로 쟁점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으로 구성된 신앙동지회(회장 정규오)는 총회에 제출한 진정서를 통해서 “우리는 유시로부터 믿어오던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지적하고 김재준 교수의 가르침이 부실하고 자유주의신학이라고 지적하면서 “근대주의 신학 사상과 성경의 고등비판을 거부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계가 다 신학 사상의 자유화에 물들여져도 “단신 순복음의 전사가 되어 전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신학적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되면서 폭발됐다. 특히 조선신학교 학생 51인이 제33회 장로회 총회(1947년)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조선신학교에서 교육되어진 자유주의 신학에 관한 심각한 문제를 총회적으로 쟁점화 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51인 신앙동지회가 제기한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의 비판과 논쟁은 결국 제38회 총회인 1953년에 김재준 교수와 그를 추종한 세력이 교단을 형성하여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된 역사이다.

당시 조선신학교(1940년 설립)와 장로회신학교(1948년 설립)측의 교권적 대립은 계속되었다. 총회가 순수하게 신학적 문제를 다루면서 장로회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해 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접근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당시의 상황은 많은 분쟁과 갈등을 낳게 했다. 보수신학을 추구하는 계열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유주의 신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신학교를 침몰시키려는 시도를 단행하려 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단일화하여 교단의 신학교를 정화하고 개혁하려 했고, 이 일의 성공 여부가 한국장로교회의 장래가 보장된다고 보았다. 박형룡 박사 중심의 보수신학 계열은 자유주의 신학인 조선신학교측이 배제된 상태에서 장로회 총회의 직영신학을 확립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이것이 기장측 분열과 상관관계에 있다.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는 스스로 문을 닫았다. 한국장로교 총회의 유일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장로회 총회 내에는 목회자를 양성할 수 있는 신학교가 없어져 버렸다. 1939년 3월에 한국장로교의 목회자 양성 기관을 설립하고자 김영주, 차재명 등이 조선신학교 기성회를 조직한 후 총회 직영신학교 설립을 총회에 청원하였다.
 
그러나 총회는 조선신학교의 직영신학교 설립을 기각하고 신학교로서 승인만 해 주었다. 조선신학교의 청원을 기각한 이유는 당시 평양을 중심한 서북지방 장로교 인사들은 해외 선교부가 평양신학교를 개교하지 않자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1939년 10월 17일 평남도청에 신학교 설립을 청원하여 인가를 얻어 1940년 2월 9일 조선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4월 11일에 개교하였다.

제28회 총회(1939년)에서 조선신학교는 서울에 설립을 허락받았으나 제29회 총회(1929년)에서는 평양신학교 측의 반대로 “목회자 양성”이 아닌 “장로회 교역자 양성”으로 허락을 받아 1940년 4월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교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설립 초기부터 평양신학교의 전통인 보수주의 신학과는 단절을 꾀하였고 교수진도 1930년대 성경관 논쟁 때에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인물들로 구성하였다. 따라서 학교의 교육 이념 자체도 진보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으로, “1) 학적, 사상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할 것 2) 자유로운 연구를 통하여 가장 복음적인 신앙에 도달할 것 3) 칼빈신학의 정당성을 재확인할 것 4) 성서비판학을 소개할 것 5) 교회의 건설적인 실제 면을 고려해 놓는 신학을 할 것(한신대학교 50년사」, 21-22).

칼빈신학사상과 성서비평학에 대한 언급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미국장로교회의 신학을 뛰어 넘어 선교사들이 가르친 신학이 아닌 자유주의 신학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를 위해 성경무오설과 같은 보수신학의 성경관을 타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조선신학교와 해방이전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을지라도 아무런 거칠 것 없는 독무대적 활동과 교육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설정한 신학적 틀 안에서 많은 새 일군들을 배출시켰다.

해방이후에도 자유주의신학을 교육한 조선신학교가 남부총회(1946년)의 직영인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김의환 박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만일에 일제 말엽 신사참배를 통한 배도의 공백이 없었던들 조선신학의 총회 직영이란 아마 반세기 전에는 꿈도 못꾸어 볼 일이었다. 알고 보면 배도의 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그렇게 떳떳하게 자신을 내놓을 수 없는 분들이 해방된 후에도 자숙을 하지 아니하고 계속 총회지도자로서 자처하면서 “조선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남한에서는 총회에 인정받는 신학교로서는 조선신학교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조선신학교의 초기 재학생들은 대부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과 보수신학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었기에 이러한 조선신학교의 진보적인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기에서부터 구체적인 교회 분열의 씨앗이 점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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