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70주년기념①] 한국교회, 해방 직전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1943년 5월에 장로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조직하였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15/04/19 [21:58]

[해방70주년기념①] 한국교회, 해방 직전의 ‘일본기독교조선교단’

1943년 5월에 장로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조직하였다

소재열 | 입력 : 2015/04/19 [21:58]

▲일제 황민화정책은 성경을 파괴     ©설동욱
일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제31회, 1942)를 해산시키고 그 대신 모든 교파를 합친“일본기독교교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교회를 장악하려 했다. 1943년 1월부터 5개 교파의 대표들이 새문안교회에 모여 “조선기독교 합동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7, 8월경에 혁신교단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3월에 열린 제2차 합동준비위원회는 뜨거운 논쟁으로 혁신교단을 개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감리교측 대표들이“구약성경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없애자”라는 이른바 구약성경을 폐기하려는 혁신안을 제출하였기 때문이다.
 
1943년 4월에 “조선기독교 혁신교단”(The Federation of Reformed Churches of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조선의 기독교 통합 교단을 획책하였다. 감리교 대표들이 장로교측의 전필순 목사(경기노회 부회장)과 손을 잡고 혁신교단을 조직하였고 이 교단의 통리로 전필순 목사가 추대되었다.
 
이 교단은 성경에서 유대주의와 관련된 부분, 특히 구약의 출애굽기와 다니엘서, 그리고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삭제하도록 했다. 일제는 한국교회를 장악하고 성도들의 신앙과 말씀에 대한 소망을 억압하였다. 이를 위해 시간이 지나면서 구약성경 전부를 폐기시키고 신약성경도 사복음서 이외에는 전부 없애게 하였다.
 
그러나 전필순 목사가 소속한 경기노회는 크게 반발하였다. 오히려 전필순 목사를 탄핵하였다. 감리교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혁신교단은 해체되었고 교파 합동의 시도는 결국은 결렬되었다. 교파합동이 결렬되자 각 교파는 개별적으로 일본 기독교에 예속되었고 1943년 5월에 장로교회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8월에는 감리교회가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이때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통리는 채필근 목사였다.
 
그러나 1945년 7월 19일에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으로 완전 통합되었다. 초대 통리에 김관식 목사, 부통리에 김응태 목사, 총무에 송창근 목사였다. 일제는 8⋅15광복을 불과 한 달 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 개신교회에 대한 일제의 황민화정책이 완결된 셈이었다.
 
소재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계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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