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1] 말세학 부흥사 길선주목사

조선의 최초 7인 목사 중 한 사람, 말세론 부흥사, 시한부종말론

소재열 | 기사입력 2016/03/12 [13:17]

[역사1] 말세학 부흥사 길선주목사

조선의 최초 7인 목사 중 한 사람, 말세론 부흥사, 시한부종말론

소재열 | 입력 : 2016/03/12 [13:17]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린서, 뒤줄 왼쪽부터 방기창, 서경조, 량전백 ; 이 사진은 목사임직 기념이 아니라 평양신학교 졸업기념사진이다.  손에는 졸업증서가 들려져 있다.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 길선주 목사는 평양대부흥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의 7인의 목사로 임직받은 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장대현교회 담임목사였으며, 1919년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자로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35년에 세상을 떠나기 까지 부흥사로서 전국의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부흥회 주제는 언제나 종말론(말세학)이었다.

1920년대에 부흥사로서 말세론을 통해 일제 식민치하에 있는 민족의 고통을 위로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여 현실의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게 했다.

▲ 길선주 목사    © 리폼드뉴스
길선주 목사는 1926년에 장대현교회를 사임한 이후 소천한 1935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메시지의 중심은 말세론(종말론)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유작은 말세학(末世學)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사도 바울의 생애를 조명하며 세계 기독교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디모데, 폴리갑,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칼빈, 웨슬레 등의 행적을 기리는 중에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창업(韓國敎會創業) 50년의 한국교회사에 지대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며, 바울의 사도적 생애를 재연출한 가장 경애하는 분이라고 추앙했다.

길선주 목사는 전국에 60개 처에 달하는 교회설립과 1만 7천회의 걸쳐 설교를 했다. 송길섭은 그의 저서인 「한국신학사상사」에서 장로교 내의 배타적 보수주의는 바로 길선주에 의해서 기초가 놓여지고 박형룡에 의해 집대성되었다고 주장하며, 길선주 목사를 보수주의 신앙의 대표적 인물 평가하면서 장로교의 보수주의 신학을 비판했다.

길선주 목사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19세에서 29세이 이르기까지 약 10년에 걸쳐 선도에 몸담고 수련에 힘썼지만 선도의 이념인 영생불사의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채 회의감과 염세관을 극복하지 못한 가운데 기독교에 입문했다.

그는 「천로역정」에 심취한 가운데 조선말기의 혼란과 망국과 국권피탈, 그리고 일제 식민치하라는 불행한 시대의 역사현장을 거치면서 이는 종말론에 심취한 배경이 됐다.

길선주 목사는 자신이 성장해 온 과정속에서 자신의 주변에서 목격한 부조리한 윤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개혁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부친이 기생첩을 둠으로써 어머니가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자신의 고통으로 인내하며 살아왔다.

▲왼쪽사진은 길선주 목사 , 오른쪽은 길선주 목사가 담임했던 장대현교회 성도들    © 리폼드뉴스
그의 생애를 통하여 성경에 입각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부부윤리, 결혼윤리, 가정의 질서, 효의 실천, 사회를 향한 소임 실천, 허례허식과 무속 타파, 금주 금연 실천 등 가정과 사회 윤리의 정립을 촉구했던 것 역시 그의 개혁의식이 기독교 정신으로 고취된 결정체라 볼 수 있다(안수강, 박사학위 논문 참조).

그는 일생의 가시로 여겼던 시력이 1900년에 완전 실명하여 1903년 수술을 받고 다소 회복될 수 있었지만 그의 시력 저하는 목회사역과 저술활동에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삼일운동이 발발하자 일본 경찰은 기독교계 목회자들이었던 감선두, 양전백, 함태영 등을 비롯하여 길선주를 경성 서대문 감옥에 수감됐다. 2년 동안 감옥안에서 그는 요한계시록에 심취하였고, 말세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옥 후 옥중에서 정리한 말세론에 대한 강의안은 전국의 부흥회에서 강론되어졌으며, 특히 주님의 재림을 지나치게 사모한 나머지 재림의 징조를 통해 1919년 재림설과 202년 재림설을 주장함으로써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다는 점이 이례적이다.

길선주 목사는 희년제도에 근거하여 2002년 재림설을 주장하면서 희년의 안식년 7년에 7을 곱한 연수이고 이 수에 다시 70희년을 곱하면 3500년이 된다. 모세가 희년을 선포한 것은 주전 1458년이므로 그 때로부터 계산하면 70희년, 즉 재림의 해는 ‘주전 1458년+3500=2002년’이라는 계산에 의해 2002년이 된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연대 수치계산의 정확성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 시대의 신학적 한계가 드러난 셈이다.

실제로 그의 임박한 재림과 심판에 관한 설교를 들었던 서북지역의 일부 교인들 중에서는 이남지역으로 이동하는 무리가 있었을 정도로 그의 매시지는 근시안적 현세조명적 재림론의 특성을 지녔다. 또한 그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앞줄 중앙이 길선주 목사 왼쪽은 마펫(마포삼열) 선교사, 오른쪽은 이길함 선교사     © 리폼드뉴스

어려운 일제 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 시대의 목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에 대한 종말론적 개념은 현실의 고통스러운 성도들을 위로하고 하늘의 소망을 갖게 하는 주님의 재림론에 대한 강조는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아직 신학적인 면이 체계화되기 이전인 만큼 개혁신학에 근거한 체계적인 성경적 교리와 신학을 담아내지 못한 그런 시대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장로교회가 세워져 교리와 교회운영을 위한 원칙들이 체계화 되는 과정속에서 그 시대를 이끌었던 주요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시대 교회와 교단을 이끌 수 있는 인물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런 인물들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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