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래적 부활(요 11:1-44)

김근수 | 기사입력 2009/03/31 [15:20]

현재 미래적 부활(요 11:1-44)

김근수 | 입력 : 2009/03/31 [15:20]
요한복음은 그 내용이나 구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공관복음과 구별되는 독특한 강조점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메시야성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표적 사건을 들 수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이적 사건들은 그 표현 방식이나 특성, 그리고 나타내고자하는 의미가 공관복음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표적 사건을 단순한 기적의 의미를 초월한 새 시대의 징조로 새롭게 재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활동을 일반적으로 4대 사역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교육사역(Teaching), 설교사역(Preaching), 신유사역(Healing)과 축사사역(Exorcism)이 그것들이다. 이 중에서 이적과 관계되는 것은 신유와 축사이나 이외에도 다양한 기적 사건들이 포함되므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이적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마가의 경우에 전체의 약 삼분의 일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만일 수난 기사를 제외시키고 본다면, 전체 내용의 절반이나 이적 사건과 깊은 관계되고 있는 셈이다( A. Richardson, The Miracle Stories of The Gospel (London : SCM Press, 1959), p.36.)

이에 비해 요한복음에는 모두 7개의 이적 사건이 나온다. 물론, 요약 기사로 나오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할지라도 다른 복음서에 비하면 그 수가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이적은 양적 비중보다는 질적 비중이 더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이적 사건으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이어 그 이적이 가리키고 있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관한 긴 가르침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적을 “표적”이라는 어휘로 채용했는데, 이것은 매우 독특한 의미의 명칭이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든 활동을 표적과 가르침의 구조로 이해케하여, 예수께서 표적을 통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게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표적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다(Kittel, TDNT, (Mich. Grand Rapids : Eerdmans, 1975), Vol. Ⅶ, p. 243ff.)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요한의 표적-가르침의 신학적 구조를 이해한다면, 나사로의 부활 표적 사건을 통해서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온전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 표적의 개념

표적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서에 나타난 기적들이 어떠한 용어들로 쓰여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약에서 “기사”, “능력”, “표적”, 그리고 단순히 “일”로 표현하고 있다.

1) 기사

이적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기사”(te,raj)가 있다. 이 단어는 4복음서 안에서 마 24:24과 막 13:22 그리고 요 4:48에 각각 한 번씩 나온다. 이것은 어떤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나타내는 놀라움을 말하며 그 자체가 경이적인 사건이며 놀랄만한 일이다. 표적(shmei/on)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는데 비해 기사(te,raj)는 주목을 끄는 외적인 면에 치중한다( Ibid., 이상근, 「신약주해 요한복음」(서울 : 예장총회 교육부, 1968), p. 67.) .
 
만약, 예수의 이적이 단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 뿐이라면 이적의 참 의미는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은 기사라는 단독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고 항상 다른 용어와 같이 사용되었다. 즉 “표적과 기사”(마 24:24, 행 4:30, 14:13, 롬 5:19, 히 2:4)라는 이중 표현이 그것이다. “표적”(요 2:11, 행 8:6)과 “능력”(막 5:4, 행 19:11)이라는 말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기사라는 용어만은 독립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Ibid.). 따라서, 기사는 “표적과 기사”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어질 때 계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적으로 사용되었다.

2) 능력

표적과 유사어로서 공관복음에서는 이적을 나타내는 용어로 “능력”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어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있다. 마가복음 5:30은 예수께서 병고침을 행하셨을 때에 그의 능력이 그에게서 나갔음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마가복음 6:5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어떠한 권능도 행하실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의 능력은 이적의 동질의미로 채용된 다른 표현이다.

예수의 이적에 관한 주요 용어로서 공관복음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이 용어는 마태복음에 13번, 마가복음에 10번, 누가복음에 15번 정도 나타난다. 이 용어는 세속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되지만 공관복음서 안에서는 그러한 것들과 구별되어 그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권능”(마 7:22, 막 6:2, 5, 눅 10:23), “능력”(마 22:19, 눅 1:35), “능한 일”(막 9:39)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G. Kittel, TDNT (Mich Grand Rapide : Eerdmans, 1984), p. 301.).

이적 기사 안에서의 이 용어의 사용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곧 이적 자체와 이적을 행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께서 의식하고 계신 것이었다. 막 5:30에서 능력이란 인간을 살리고 치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이 인간세계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의 활동이나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고 인정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초자연적으로 현저하게 나타났음을 보게 되었다.

3) 일

표적과 유사한 용어로서 “일”이 있는데 이 용어는 공관복음서에서 10번 나타나고 요한복음에서는 25회 정도 나타난다. 이처럼 “일”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 저자는 요한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적을 “표적”이라 하기도 하고, “일”이라 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표적”과 “일”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표적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행하신 일도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행하신 일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요(요 5:20) 믿음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요한이 볼 때 주님께서 행하신 이러한 여러 가지 이적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기이하고 놀랄만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전능하신 주님께는 그저 당연히 수반되는 사역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창조의 대행자이시기 때문이다(요 1:1-4).

래드(G. E. Ladd)는 요한복음의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예수님의 행동이 아버지께서 그(Him) 속에 임한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요 10:32), 그의 행동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의 역사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 속에 임하여 활약하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G. E.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Lutterworthk, 1975/ Eerdmans, 1974), p. 214.).

4) 표적

요한복음은 이적에 대하여 다른 어떤 용어보다도 “표적”(shmei/on)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4복음서 안에서 마태복음에 9번, 마가복음에 7번, 누가복음에 9번, 요한복음에 17번 정도 나온다(G. A. Buttrick, "sign"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4 (Nashiville : Abinddn Press, 1982), p. 347.). 표적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계시하는 표지로서, 인간의 합리적인 지식으로만은 알 수 없는데, 이는 표적은 결과보다 그것을 주신 동기와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표적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리는 신성한 징표이며, 메시아 나라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 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역사 하시는 표이다. 따라서, 표적은 단순히 이적이 아닌 메시아와 그 나라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중 의미를 지닌 징표이며 보증이다. 이런 의미는 요한이 “능력”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않고 “표적”만을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에서 더욱 빛이난다(G. A. buttrick, p. 347.).

공관복음에서는 요한복음에서 사용되어지는 용법과는 달리 이 표적이 여러 가지 다른 면에서 사용되어진다. 주로 단순한 기적의 의미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즉 표적이 아닌 초자연적인 기적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표적이 메시야의 임재나 하나님 나라의 현존성을 보여주는 의미가 없다. 또한, 종말론적 상황을 의미하는 마지막 때 재림 등과 관련되어 사용되어지는 경우가 있다( 마 24:3, 24, 30.). 이 때 표적의 의미는 종말론적 징표이다. 또한 믿음이 없는 자들이 예수님께 메시아로서의 증거를 보여달라는 의미에서 표적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경우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외적 증거이다. 간혹 표적과 기사라는 이중표현으로도 사용되어지는 경우는 표적은 단순한 기적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관복음의 의미들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표적”이란 어휘가 “기사”와 관련하여 단순한 기적이란 의미로는 단지 한 번 채용되고(요 4:48) 대부분이 메시아 나라의 현존성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이 어휘가 사용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요한복음은 표적사건으로 메시아와 그의 나라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의 표적은 단순한 초자연적 기적이나 능력 혹은 일의 의미를 초월하고 있는데, 곧 종말론적 현재성과 미래성(Present-Future Eschatology)을 보여주는 이중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표적사건 이해에 종말론적 의미를 반드시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말의 역사화가 진행됨으로써, 새 시대가 새 창조로 새 역사 속에 진입하였고, 지금도 진입하고 있으며 장차 완전히 진입하게 될 것을 표적사건들을 통하여 해석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2. 나사로의 부활 표적

나사로의 부활 표적은 참으로 요한복음의 정점을 이루는 표적 중의 하나이다. 이 표적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7대 표적중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행하신 마지막 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이 표적은 그리스도에게 죽음을 이기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할 것을 미리 암시해 주시는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김근수, 「복음서 이해」, (서울 : 나단, 1996), pp. 196-197; C. H. Dodd,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 pp. 67-68.). 더구나 이 표적은 그리스도의 원수들로 하여금 그를 잡아죽이려 하는 일을 더욱 촉진시키게 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일후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및 부활이라는 종국으로 거침없이 치닫게 된다.

마르다와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모두가 한결 같이 미래의 부활을 믿었다(요11:21, 24).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가 미래의 어느 날엔가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은 미래에 놓여있었을 뿐 현재를 향한 소망은 포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자기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때는 늦었던 것이었다. 죽음이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최후의 세력이다. 오직 한 가닥의 소망이 있다면 오직 마지막 날의 부활시에 이 죽음이 뒤바뀔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것이 마르다가 믿었던 신앙의 내용이었다(요 5:28, 29).

예수님은 이러한 마르다의 신앙을 교정해 주셨다. 부활이란 미래에 있을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가르치려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표적(sign) 중의 마지막 기적사건이다. 이 기적은 곧 표적이며, 징조이다. 다시 말해, 이 기적은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인이며 표적이란 뜻이다. 생명의 시대, 자유함의 시대, 풍성함의 시대, 샬롬의 시대를 가리켜주는 표적인 것이다. 미래의 삶과 생명이 이미 예수님 안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그분이 주신 생명 속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며(10;28), 풍성한 삶이다(10:10). 이러한 삶과 생명은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서도 결단코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이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결단코 멸망하지 않으며(10:28), 항상 사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고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할 것이라”(11:26) 왜냐하면 신자가 육체적으로 죽을 때라도 그는 생명의 주이시며, 생명 그 자체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기 때문이며, 바로 하나님과의 계속적 교제와 사귐이 곧 영원한 삶의 본질인 것이다(17:3)

그러나 나사로가 다시 살았던 것은 최후의 부활이 아니었다. 그 사건은 오직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그분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그분이 생명 그 자체이심을 알려주는 사인(sign)이며, 표적이었다. 다시 말해 나사로가 이 세상에서 다시 죽게된다 하더라도 새로운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징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만이 제시한 일곱 번째 예수의 표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이 주는 구속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7대 표적들이 다 예수의 신성과 구속주 메시야 되심을 증거 하는 것이지만 특히 나사로를 살리신 이 마지막 표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 두 가지 사실을 가장 명확히 들어내는 심오한 구속사적 진리를 보여준다, 먼저 이 표적은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닥친 가장 무서운 결과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 구속주라는 진리를 보여준다. 또한 이 표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유일무이한 전 우주의 구속주 이심을 세계 만방에 알리시며, 또 장차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신약 성도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도록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근거로서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라는 초대, 최후의 표적을 예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사로의 부활표적이 던져주는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곧 미래가 이미 여기, 이곳에 와있다는 것이다. 부활생명을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지금 여기에서 이미 그 감격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뇌리속에, 피와 뼈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부활은 미래의 확신(Not yet)일 뿐만아니라, 현재의 삶으로(Already) 와 있는 것이다. 승리는 “지금” 존재한다. 심지어 부활과 영원한 생명마저도 “지금”에 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죽음이 결단코 최종적인 세력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며, 그분만이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깨어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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