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종교단체법 휴지조각 만든 해방

소재열 | 기사입력 2020/08/11 [07:22]

일제강점기의 종교단체법 휴지조각 만든 해방

소재열 | 입력 : 2020/08/11 [07:22]

 

▲ 1945년 8월 16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당시 명칭)에서 석방된 항일운동가들이 환영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다.

 

【(리폼드뉴스)일제강점기 시대인 1939년 1월 18일 일본은 종교단체법안을 통과시켰다. 일본정부는 모든 종교단체가 국가신도(國家神道), 즉 천황을 중심으로 일체화 되고 국가신도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일본은 신도의 나라로 신도의 길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신도의 길을 따르지 않는 일본 국민이란 있을 수 없고, 신도를 거스르고 이에 저촉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신도를 종교라고 칭하지 않고 모든 종교 위에 있는 일본고유의 초월적인 것으로 존재로 상정한다.

 

1940년부터 시행된 종교단체법 제16조에서는 “종교단체 혹은 교사가 행하는 종교의 교의 선포 혹은 의식의 집행 또는 종교상의 행사가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신민으로서의 의무에 위배될 때 주무대신은 그것을 제한, 금지하고 교사의 의무를 정지하고 혹은 종교단체의 설립 인가를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규정은 주무대신에게 종교의식과 집행에 관한 모든 종교행사를 제한,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예배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나아가 성직자들의 해직, 종교단체의 해체에 이르는 모든 권한을 정부가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단체법 제17조, “종교단체 및 그 기관 직을 맡은 자가 법령 또는 교칙, 종교제도, 교단규칙, 사원규칙, 혹은 교회규칙을 위반하거나 공익에 해가 되는 행위를 할 경우 주무대신은 그 직무를 취소, 정지, 또는 금지할 수 있고 그 기관의 직무를 다른 사람에게 이임할 수 있는 임명권을 가진다.”고 했다.

 

종교단체의 각 기관 직에 대한 해임, 선임의 권한이 주무대신에게 주어진다. 각 종교단체 안에서 정부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기관직 자들을 색출하고 해임하겠다는 법을 만든 것이다.


1939년 4월 종교단체법이 공포되고 1년 후인 1940년 4월 종교단체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자 ‘일본기독교 연맹’은 일본기독교단은 1941년 6월 24일, 나가노현 후지미초(富士見町)교회에서 ‘일본기독교단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합법적 종교단체로 인정받은 일본기독교단은 교단 창립과 함께 ‘일본기독교단 교단규칙(日本基督敎團敎團規則)’을 제정하였다. 본 규칙 생활강령인 제7조1항에 의하면 “황국(皇國)의 도(道)를 따라 신앙을 철저히 하고, 황운(皇運)을 보필하고 받들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설립임원 및 교수장들(45. 5. 7)  © 리폼드뉴스

이 규정은 황국의 도를 따르고 황운을 보필하는 것이 일본기독교단 생활강령의 첫 번째 항목이다. 이는 기독교적 신앙규칙에 앞서 국가에의 의무, 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전시체제에 순응할 것을 강조하는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정부는 전시기 ‘종교단체법’을 시행하여 일본기독교계 전체를 하나의 단체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일본기독교단’을 종교단체로 인허가하는 조건으로 ‘교단규칙’안에 일본정부의 요구를 반영하는 ‘생활강령’조항을 제정했다. 전 기독교인들의 생활통제까지 가능하게 되어 일본기독교단을 합법적 전쟁총후(戰爭銃後)로 동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종교단체법 등을 제정하면서 종교탄압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일제는 1942년 6월까지 전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하여 출국케 하였다. 그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제31회 총회(1942년 10월 16일)가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회집되었는데 개회 전에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지지하는 선언문 채택하기도 했다. 

 

결국 1942년 총회를 끝으로 폐쇄되었고 1943년 5월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만들에 이에 편입하고 말았다. 그해 10월에 감리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만들에 이에 편입시켰다.

 

1945년 7월 19일과 20일에 장로교 및 감리교의 양 교단과 구세군 등 대의원 59명과 총독부 학무국 대표들이 정동감리교회에 모여 모든 교단이 통합하여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발족시켰으며, 일본 내 단일 교단인 일본기독교단의 하부에 소속됨으로써 교단 전체를 일제의 통제하에 두게 되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중앙 조직은 양대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통리와 부통리를 각각 맡고, 지방 조직 각기 다른 교단 출신의 개신교 목사 두 명이 교구장의 책임을 함께 맡는 식으로 조직되었다.

 

▲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한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왕 히로히토가 일본방송협회(現 NHK) 라디오로 항복선언을 하여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조선이 일제 통치에서 해방되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폐쇄되었다. 그해 10월 11월에 전국적으로 각 교구는 다시 노회를 복구하고 교회를 재건하였다.

 

1942년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까지 회록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해방의 해인 1945년까지 역사적인 사료들이 인멸되었다. 특히 경기노회는 1940년부터 1951년까지 모든 회의록이 인멸되어 사료가 없는 상태이다. 이 기간 교회 역사의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전남노회의 경우, 이 기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전남노회에는 이런 역사의 사료가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복사본도 갖고 있지 않다. 교회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다.

 

일본의 패망으로 조선에서 일장기 하강 1945년 9월 9일 © 리폼드뉴스

1945년 12월에 이북에 있는 다섯 도의 노회가 모여 소위 「5도연합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남에는 1945년 「남부대회」와 1946년 「남부총회」를 조직하였다. 남부총회에 참석했던 이남 노회는 경기, 전남, 전북, 충북, 순천, 충남, 군산, 경북, 경남,경동, 경안 등 11개 노회였다.

 

이북에 들어선 공산주의자들과의 충돌을 피해, 선교사들을 통해 전수받은 정통보수신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많은 신학생들은 이남으로 피난와서 남부총회의 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또한 남한 남부총회에 소속된 산하 지교회에서 정통보수신학의 훈련을 받은 학생들도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동자동 캠퍼스에 모여든 학생들 중에는 평양신학교와 일본의 도쿄신학교를 비롯한 타 신학교에서 전학해 오기도 하였고 감리교, 성결교를 비롯한 다른 교파에서 온 사람들도 있어서 초교파적인 학원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20대로부터 30대, 40대의 연령차가 있는 학생들이 또한 섞여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중에는 정통보수신학으로 잘 훈련된 신학생들이 있었는데, 이런 학생들에게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면서 정통보수신학을 공격하니 당연히 그들은 그러한 교육에 저항하며 투쟁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다.

 

▲ 조선신학교에서 나온 이후 노량진에서 합숙 훈련 중 신앙동지회 회원 결혼식 축하사진  © 리폼드뉴스

 

이들은 신학생의 신분이지만 교회에서는 장로의 직분을 받은 자들로서 정치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다. 처음 조선신학교 내 자유주의 신학의 가르침에 대해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51인 신앙동지회”에 소속된 자들은 신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장로의 신분으로 교회에서 봉사하다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동지의 핵심 회원들인 정규오, 박경한, 손치호, 이노수 등은 장로였다.

 

그리고 회장인 정규오의 연장자로 임창희, 차남진이 있었다. 교회에서 일정한 정치력을 발휘한 장로의 신분들을 갖고 있는 회원들이 있었고 그래서 이들은 교회와 교계를 바라보는 신학적, 신앙적 안목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신학적으로 혼란의 때에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 전승하는데 그 일익을 감당하였다. 이들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이다.

 

51인 신앙동지회는 박형룡 박사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자들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남산장로회신학교가 세워졌으며, 제1회 졸업생이 된다. 이들 중심으로 해방 10년 동안 자유주의 신학과 투쟁하하였다. 그 결과 분열이라는 아픔이 있었다. 1950년대 하나의 장로회가 4개의 교단총회로 분열되는 아픔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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