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재3]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3)

존 웨슬리와 서철원 박사의 견해

유창형 | 기사입력 2021/03/04 [05:54]

[신학연재3]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3)

존 웨슬리와 서철원 박사의 견해

유창형 | 입력 : 2021/03/04 [05:54]

 

▲     ©리폼드뉴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에 대한 유창형 교수(칼빈대학교 조교수, 역사신학)의 논문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Ⅰ. 들어가는 말

 Ⅱ. 이 교리를 부정하는 학자들

 

2.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1)

1) 신호섭은 존 웨슬리의 견해는 리처드 백스터의 이론이 부분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호섭, 『개혁주의 전가 교리』, 165. 좀 더 자세한 내용은 Iain H Murray, “Richard Baxter-‘Reluctant Puritian’? in The Westminster Conference 1991: Advancing in Adversity (The Westminster Conference, 1991), 18-9를 참조하라. 그리고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인정했다고 보는 학자들과 부정했다고 보는 학자들에 대해서는 유창형, “웨슬리와 휫필들의 칭의론 연구”, 「한국개혁신학」 30(2011), 137에서 각주 3번을 참조하라.


웨슬리는 1765년의 설교, “주 우리의 의”에서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의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하고, 수동적인 의는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그리스도의 의라고 하고 이 의는 신앙에 의해서 신자에게 전가되어 칭의를 구성한다고 보았다.2)

2) John Wesley, Works 5, 237.


 이런 견해는 바빙크의 견해와 같다. 그리고 웨슬리는 “나는 전가된 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 다른 불친절하고 부당한 고소이다. 나는 항상 그랬고 아직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신자에게 전가된다고 확실하게 주장한다”3)고 하였다.

3) Wesley, Works 5, 242.


그러나 이 설교의 후반부에서 웨슬리는 모든 율법에 대한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즉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싫어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신자 대신 율법을 성취했다면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을 순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리차드 백스터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교리를 반대할 때 제시한 이유와 같다.4)

4) Baxter, Richard Baxter’s Catholic Theologie, 59.


 실제로 웨슬리는 “율법폐기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가장 추잡한 혐오스런 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5) 그는 자신들의 죄를 덮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천 번이나 보았다”고 언급했다.6)

5) John Wesley, Works 10, 315; Works 10, 244. 

6) Wesley, Works 5, 244.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가 성화를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본 것이다. 만약에 율법폐기주의적인 남용만 없다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는 사용될 수 있다고 하였다.7) 웨슬리는 자신의 생애에 따라 칭의에 대한 관점이 변했다. 1738-39년에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칭의된다고 주장했고,8)

7) Wesley, Works 5, 245.

8) Wesley, Works 5, 62.


1746년에도 “믿음이 현재와 최종구원으로 귀결되는 칭의의 조건”9)이라고 하였다. 1765년에는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신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확고히 증거한다고 하였다.”10) 이 세 가지 설교는 의의 전가를 인정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9) Wesley, Works 10, 62.

10) Wesley, Works 5, 241.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해 반대하는 진술들은 다음과 같다. 웨슬리는 1755년에는 “바울과 야고보가 둘 다 믿음과 행위로 칭의된다고 가르쳤다”11)고 주장했다.

11)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1755), 221-22.


1756년에는 “우리는 더 이상 최종 용납의 기초를 놓기 위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의 최종 용납을 위해 복종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복종에 의해서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선한 기초를 놓는다”12)고 하였다.

12) Wesley, “A Preface to a Treatise on Justification,” Works 10, 320; 웨슬리에게 최종구원과 최종칭의가 같은 것이라는 논증은 유창형, “웨슬리와 휫필들의 칭의론 연구”, 「한국개혁신학」 30(2011), 159를 참조하라.


그리고 1789년에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위해서 일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에 의거하여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공로만큼이나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신실함에 의지한다”고 주장했다. 1790년에는 “혼인 예복에 대하여”란 설교에서 “거룩함이 영생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으며, 이 예복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인 희고 깨끗한 세마포”13)라고 보았다.

13) Wesley, Sermon CXX, Works 7, 312-13.


즉 의롭고 거룩한 삶이 “어린 양의 결혼예식에 필요한 예복”이라고 함으로 이 예복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 즉 능동적 순종이라는 주장14)을 정면으로 반박했다.15)

14) George Whitefield, Sermon on Important Subjects by George Whitefield (1714-1770), 서창원 역, 『와서 최고의 신랑 그리스도를 보라』 (서울: 지평서원, 2003), 126, 344.

15) 유창형, “웨슬리의 칭의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중심으로,” 「한국개혁신학」 24 (2008), 219.


 일반적으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영생의 권리가 성화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칭의의 열매로 간주되지만, 웨슬리에게는 영생이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아니라 신자의 거룩과 관련된다. 영생을 위해서는 신자의 거룩이 칭의시키는 믿음과 더불어 필수적인 조건이다.


결론적으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단지 수동적 순종, 즉 대리적 속죄를 위한 준비일 뿐이지 영생을 위한 완전한 조건으로서 전가된다는 것을 부정한다. 능동적 순종 교리는 신자를 방종하게 하여 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시하게 하는 위험한 교리라고 본다. 최종칭의는 믿음과 거룩(회개)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런 입장은 백스터의 관점을 답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서철원

 

3.1.『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이 책에서 서철원은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의 기능만 있지 구원의 길로는 종결되었다고 주장하였다.16) 율법은 구원받은 신자에게는 삶의 규범으로 존재하고, 영으로 따라 사는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진다고 하였다.17)

16) 서철원,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2000), 12.

17) 서철원,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1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 곧 그의 의를 자기들의 것으로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18)

18) 서철원,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47.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그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이 구원을 제공한다. “믿음은 그리스도께 이룬 계명들의 성취, 곧 의를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다 지키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지고 죽으므로 율법의 요구가 다 성취되었다.”19)

19) 서철원,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47-48.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의 의”고,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키셨고”, “율법의 요구가 다 성취되었고”라는 표현들은 마치 서철원이 그리스도의 의, 즉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20)

20) 이런 진술은 박채동으로 하여금 서철원 박사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계,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제자 정이철 목사 주장대로 ‘그리스도 능동순종’ 개념을 거부하셨을까?” 접속일 2020.1.15. http://blog.daum.net/1907re/95?fbclid=IwAR1uhbLmo7tyta_iVxvT03frHpMZG   5iXuWgxdpx4y-AQbrESVs6S9ba67Iw.


 그런데 그 바로 다음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요 19:30)을 보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서 감당한 것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전반적인 초점은 여전히 수동적 순종의 전가, 즉 대리적 속죄 제사에 있다. 이런 관점은 그가 이 책 4장 이후에 온통 히브리서의 주해를 따라 구원의 방식을 논하기 때문에 더욱 강화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의 완전성을 말하기 때문에 이런 논자의 주장은 타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이 책에서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이란 말을 결코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이 책에서 서철원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하신 것이 신자에게 믿음으로 전가된다는 표현을 했다. 그러나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 수동적 순종으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사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는 데에 있다.

 

3.2. 『하나님의 구속 경륜』21)

21) 서철원, 『하나님의 구속 경륜』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6).

 

이 책에서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나 수동적 순종,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아담이 첫 언약을 어긴 후에 하나님께서는 속죄 제사를 알려주셨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로 드림으로 구속의 방식이 희생의 속죄의 방식임을 분명히 알게 하셨다.”22)

22) 서철원, 『하나님의 구속 경륜』, 11-12.


 생명의 길은 율법을 지키는 길이지만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대신 율법을 성취할 자를 바라고 기대”23)하게 하셨다.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서철원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즉 능동적 순종의 전가와 유사한 내용의 진술을 했다는 것이다.

23) 이런 진술은 주로 율법의 제1 용법인 신학적 용법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을 살고 존속하는 길은 하나님의 계명 준수에 성립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들이 해야 할 계명 준수를 구속 주로 대신 수행하게 하므로, 그 계명 준수 곧 의를 획득하여 백성들에게 그 의를 선사하게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24)

24) 서철원, 『하나님의 구속 경륜』, 12. 이런 진술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해설』과 유사하다. “복음적 의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다른 분이 율법을 성취하고 이행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시키신 것을 의미한다.” Zacharias Ursinus,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원광연 역,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해설』(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531.


위에서 분명 서철원은 계명 준수를 의로 해석하고, 구속주가 계명을 대신 준수하여 획득한 의를 자기 백성들에게 선사하는 방식을  취하셨다고 하고 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세상을 구원할 구속주가 이스라엘에게서 나오고 그가 인류가 범한 하나님의 계명 준수를 이루어내고, 죄과를 완전히 속량할 제사를 드린다”25)

25) 서철원,  『하나님의 구속 경륜』, 147.


고 함으로 대리적 계명 준수와 대리적 속죄를 인정한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기독론』과 『구원론』과 다소 모순되는 진술이다.26)

26) 박채동은 정이철과의 논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철원 목사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쓰신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복음과 율법의 관계}, 서철원 목사님 초기 대표작인 이 두 책에서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개혁 교회 ‘그리스도 능동순종’ 교리를 서술하십니다.” 박채동,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 제자들에게 분서갱유를 당해야만 하는 서철원 목사님 초기 저서들.” 접속일 2020.1.13. http://cafe.daum.net/reformedcafe/jMaU/85. 박채동의 견해가 논리적이긴 하지만 정이철 목사를 “이단들처럼”이라고 하고, “분서갱유”라는 식의 과격한 표현들은 성도로서 마땅히 피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 책에서 서철원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로서의 그리스도의 의와 수동적 순종으로서의 속죄 제사를 별개로 진술했다고 볼 수 있다.

 

 3.3. 『그리스도론』


서철원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낮아지심으로 설명한다. 그는 능동적 순종, 수동적 순종이란 말을 『그리스도론』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낮아지심의 시작은 성육신인데, 성육신은 종의 형상을 입은 것이요 율법에 종속되신 것이므로 낮아지심이다.27)

27) 서철원, 『서철원박사교의신학 IV 그리스도론』, 141-43.


 의의 성취는 고난의 삶으로서 낮아지심으로 두 번째 단계로 칭한다. 이 단계는 인간의 모든 죄악 아래 사심, 외로움을 당함, 수치를 당함, 세례를 받음, 성령세례를 받음, 시험을 받음, 감람산에서 시험, 율법의 성취라는 용어로 설명된다.28)

28) 이런 설명은 박형룡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진술과 일맥상통한다. 박형룡, 『박형룡박사조직신학 4 기독론』, 173-74.

 
서철원에 의하면, 예수는 “출생 후 할례받음으로 언약 백성의 표를 받아 율법의 요구를 다 담당하셨다.” 그의 삶은 “다 율법준수의 삶”이었으며, “율법 성취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짊어지셨다.” 그 목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가 능동적 순종으로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이 율법의 성취에는 세례받음도 포함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서철원이 “율법성취의 요구”를 “죄값을 갚으라는 요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죄값을 치름으로 사람들을 “율법준수의 의무에서 해방시켰다”29)

29) 서철원, 『그리스도론』, 165-66.


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구별하지 않고 순종의 목표를 죄값을 치른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한다.


서철원은 “전통적 신학에서 예수의 율법준수를 능동적 순종,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피동적 순종이라고 한 구분과 가르침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30)고 한다.

30) 서철원, 『그리스도론』, 167.


그는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의를 획득하여 우리에게 전가한 것이 아니고, 피 흘려 죗값을 다 치르시므로 죄용서를 이루신 것이 의”라고 하며 이 의를 전가 받아 영생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서철원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한다고 할 수 있다.

 

3.4. 『구원론』


서철원에 의하면, 의롭다 하심, 곧 칭의는 “예수 믿음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여 무죄하다고 선언하심”이다. 칭의는 “주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 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 선언”이다.31)

31) 이런 진술은 칭의가 법정적인 선언이라는 면에서 벌코프와 유사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칭의가 선언된다는 면에서는 벌코프와 서철원이 다소 다르다. 루이스 벌코프,『벌코프조직신학』, 765.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기초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죄인에 대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이다.” 서철원, 『서철원박사교의신학 V 구원론』 (서울: 쿰란출판사, 2018), 29.


 즉, 법정적 선언이지 도덕적 선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는 인간의 죄책을 제거한다. “죄책의 제거가 바로 의”다. 서철원이 율법의 준수를 의라고 하지 않고 죄책의 제거가 의라고 하는 것은 의를 하나님 앞에서의 “생존권”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죄책이 제거되면 죄가 용서되는 것이고, 죄가 용서되면 천국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결과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결과로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의”32)라고 한다. 예수를 믿어야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생존할 권리를 얻기 때문이다. “주 예수를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갚은 죗값을 내가 갚은 것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33)이다.

32) 서철원, 『구원론』, 112.

33) 서철원, 『구원론』, 113.


 “주 예수의 죽음을 믿고 고백하는 자들은 아무 선행이나 율법을 행함 없이 단지 그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의미다. 믿음을 신자의 의로 간주하는 것은 백스터와 입장이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백스터는 믿음을 칭의의 공식적 원인으로 이해했고, 서철원은 믿음을 칭의의 통로라고 이해했다는 차이가 있다.34)

34) Baxter, A Treatise of Justifying Righteousness, In Two Books (London, 1676), 178.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와 신자가 연합되기 때문에 예수의 고난과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적용하여 의롭다고 하신다고 한다.35)

35) 서철원, 『구원론』, 113.


 여기서도 그는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9)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피 흘리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셨다”(엡 1:7). 이것이 완전한 의를 이루심이다. “예수의 피로 죄를 완전히 제거함이 의”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완전히 제거한 것은 죄짓지 않은 상태와 같다”고 본다.


이것은 칭의를 죄 사함과 의의 전가로 나누는 방식과 다른 것이다. 그는 칭의를 죄 사함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죄 사함은 죄를 짓지 않은 것과 같고 죄를 짓지 않은 것이 곧 의로운 상태라고 본다. 따라서 신자가 율법을 완전히 지킨 것으로 간주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개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서철원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서 얻은 의를 전가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합당한 신학이 아니라고 한다.36)

36) 서철원, 『구원론』, 114.


 그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 의를 이루셨다고 하면,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다 지켜야 의롭다 함을 얻는 데 이르게 된다”고 한다. 논자는 이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단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의의 전가 교리를 신자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서철원이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들에게 전가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한 의를 신자들에게 전가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피 흘려 이루신 죄 용서를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37)

37) 서철원, 『구원론』, 11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 곧 구속 사역을 믿는 죄인에게 전가하여 의롭다고 선언하심”이다.


그리고 그는 최초칭의와 최종칭의를 구별하지 않았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의롭다 하시는 선언을 사람이 믿음 고백을 할 때에 선언하셨다 ... 믿음고백을 할 때 이루어진 의롭다 하심의 선언은 마지막 날에 변경되거나 달라질 것이 전혀 없다.”38)

38) 서철원, 『구원론』, 134.

 

정리하자면, 서철원은 죄 사함을 받으면 의인인 것이지, 그리스도의 율법준수가 신자에게 전가되어 신자가 율법을 지킨 것으로 간주되는 방식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수동적 의의 전가만 인정하고,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박채동은 이런 서철원 박사의 견해를 알미니안과 새관점주의자들을 따른 것39)이라고 비판했다.

39) 박채동, “행위언약과 그리스도 능동순종을 부정한 톰 라이트 신학 = 서철원 신학’을 비평함: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바울 사도 증거에 담긴 뜻(암시).” 여기에서 박채동은 “새 관점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톰 라이트는 ‘{칭의를 말하다.} 최현만 역 (서울: 에클레시아북스, 2016)’ 22쪽에서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하나님의 언약]과 [제19장: 하나님의 율법]에서 고백하는 행위언약 개념과 이를 받든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행위언약 개념’을 부정하신 서철원 목사님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접속일. 2020.1.28.   http://cafe.daum.net/reformedcafe/jMaU/79.


그러나 그의 비판은 톰 라이트와 서철원이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거부했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새관점주의자들이 최초칭의와 최종칭의를 나누는 면에서는 서철원과 다르다는 면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 서철원은 알미니안이나 톰 라이트와 달리, 초기칭의나 최종칭의가 다 오직 믿음으로만 받고 최초칭의가 최종심판에서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철원은 알미니안과 로마교회의 인간의 행위가 개입된 칭의론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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