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기념논문] 이승구 교수, “벤자민 B. 워필드의 개혁신학적 특징”

김순정 | 기사입력 2021/11/13 [18:10]

[종교개혁기념논문] 이승구 교수, “벤자민 B. 워필드의 개혁신학적 특징”

김순정 | 입력 : 2021/11/13 [18:10]

 

▲ 총신대학교 개혁신학연구센터(RTRC)가 주관하는 종교개혁기념 학술세미나     ©리폼드뉴스

 

 

이 논문은 합신대학원대학교의 이승구 교수가 2021.10.26에 총신대학교에서 발표한 종교개혁기념 학술세미나 논문으로 요약하여 소개한다.

  

I. 서론: 워필드, 그는 누구인가?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 11. 5 1921. 2. 16)A. A. Hodge를 이어 교수직(the Charles Hodge Chair of Didactic and Polemic theology)에 취임한 1887년부터 그가 심장 마비로 죽던 해인 1921년까지 34년 동안 프린스톤신학교의 신학 교수였다. 워필드는 켄터키주 렉싱톤(Lexington, Kentucky) 가까운 곳인 그라스미어(Grasmere)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버지니아 출신의 부유한 윌리엄 워필드(William Warfield)와 메리 워필드(Mary Cabell (Breckinridge) Warfield)였다. 그들은 렉싱톤 제 2 장로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워필드의 외할아버지는 구학파의 지도적 인사였던 장로교 목사로 1853년에 켄터키주 댄빌(Danville 또는 Danbury)의 새로 세워진 장로교 신학교의 초대 학장(1853-69)이었던 로버트 제퍼슨 브렉킨리쥐(Robert Jefferson Breckinridge, 18001871)였다. 그는 미국 상원 의원이요 검찰 총장(Attorney General)이었던 John Breckinridge의 아들이었다.

 

로버트 브레킨리쥐 목사의 동생인 존 브레킨리쥐(1997-1841)는 프린스톤의 2대 교수였던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의 사위로 그 또한 프린스톤의 실천신학 교수였다(1836-1838). 또한 로버트 브리킨리쥐 목사의 아들이요 워필드의 외심촌은 하원의원을 두번 했으며, 미국 14대 부통령이었던 John Cabell Breckinridge (1821-1875)이었고, 워필드의 동생인 Ethelbert Dudley Warfield도 장로교 목사였고 독일과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후에 마이애미 대학과 라파라예트 대학 총장을 지냈다.

 

당시 많은 부유한 가족들에서 그리했던 것처럼 워필드의 초기 교육도 가정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후 그는 1868년에 뉴저지 컬리쥐(the College of New Jersey, 오늘의 Princeton University)2학년생으로 입학하여 수학과 과학을 전공하여 1871년에 최우등으로(first in his class) 졸업하였고,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1872년 봄에 유럽으로 가서 에딘버러와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하던 중에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여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873년 프린스톤 신학교에 진학하여 노년의 챨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에게서 조직신학을, 그리고 그의 아들인 Caspar Wistar Hodge(1830-1891)에게서 신약학을 배우고 1876년 졸업한다. 신학교 졸업 후 워필드는 켄터키 주 콩코드(Concord, Kentucky)와 오하오주 데이톤(Dayton, Ohio)의 제일장로교회의 임시 목사(“supply pastor”)로 설교했고, 데이톤 제일장로교회는 그를 담임 목사로 청빙했으나 그가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187683일에 애니 피어스 킨키드(Annie Pierce Kinkead)와 결혼한 워필드는 독일 라이쁘찌히로 가서 1876-77년 사이에 에른스트 루따르트(Ernst Luthardt, 1823-1902),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 그리고 프란츠 델리취(Franz Delitzsch, 1813-1890)에게서 각기 신약과 교리사와 구약학을 공부하게 된다. 독일에 있는 동안에 천둥번개가 치는 경험 후에 부인인 애니가 신경적 손상으로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893년 이후에는 거의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어, 1915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워필드는 사역을 하면서 그녀를 돌보는 역할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 후 1877년 늦은 여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Baltimore, Maryland)의 제일장로교회에서 잠시 보조 목회를 하게 된다. 펜실베니아주 알레게니(Allegheny, Pennsylvania)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 현재의 Pittsburgh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을 가르쳐 달라는 청빙을 18789월 큰 관심을 가지고 수낙하여 신약학을 교수하면서(instructor), 1879426일에 에벤에셀 노회에서 목사로 장립 받고 웨스턴신학교의 신약학 교수(Professor of New Testament Exegesis and Literature)로 세워진다.

 

웨스턴 신학교에서 9년을 섬긴 후에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887년에 35세의 나이로 프린스톤신학교의 조직신학 담당 교수로 청빙되어, 그의 생애가 마칠 때까지 34년 동안 봉직하였다. 그는 여러 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는데 모교인 뉴 저지 대학으로부터 명예 신학 박사(D. D., 1880) 학위와 명예 법학박사학위(LL. D., 1892), 데이비드슨 대학에서 또 다른 명예 법학박사학위를(LL. D., 1911), 라파레에트 대학(Lafayette College)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D. Litt., 1911)를 그리고 화란의 우트레흐트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학위(Sacrae Theologiae Doctor, 1913)를 받았다.

 

1881년에 WarfieldA. A. Hodge와 함께 성경의 영감(靈感)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강력한 변증으로 학계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그의 많은 글 가운데서 워필드는 성경 무오성 교리가 정통적 가르침이지 17세기나 19세기에 새롭게 발견된 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드러내었다.

 

그는 또한 미국 장로교회와 기독교 안의 자유주의적 요소들을 반박하는 것에 열심을 내었다. 그는 1890년부터 1902년까지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Review의 편집을 감당하였고, 1903년부터는 그와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단이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의 편집을 했다. 그는 거의 40여 권의 책을 썼고, 700여 편의 학술지에 기고한 논문을 썼으며, 1,000여 편의 서평을 썼다고 한다.

 

II. 워필드 신학의 개혁신학적 특성

 

워필드는 가장 전형적인 장로교 신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워필드는 칼빈주의는 인간이 쓴 것 가운데 기독교 신앙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는 칼빈주의가 세상의 모든 질서를 은혜 교리와 합리적 통일성을 지닌 체계로 제시하는 유일한 체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워필드를 정통주의를 20세기에로 추진시킨 사람이라고 한 앤드류 호페커의 평가는 지나친 것이 아니다. 마크 놀은 그를 가리켜 프린스톤에서 칼빈주의 정통주의(개혁파 정통주의)를 변호한 위대한 보수 신학자들 중의 최후의 인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워필드가 드러낸 칼빈주의 신학의 전형적인 모습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실히 믿고, 이를 성경의 내증과 여러 외증에 근거하여 드러내려고 노력한 성경에 대한 변증. 성경의 성격과 권위가 심각하게 문제되던 시기에 살던 워필드에게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성경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영감관이 매우 중요했다.

 

둘째, 그리스도의 양성론에 대한 정통파적 이해와 변증. 워필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내고 변증하며 동시의 그의 온전한 인성을 잘 드러내어 논의하여 그리스도의 양성을 확실히 드러내고, 그 어떤 형태의 케노티시즘(kenoticism)도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주해적, 변증적 작업을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강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셋째, 철저한 개혁파적 구원론 제시. 워필드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제한 속죄와 이중 예정을 말하며 강조하지 않을 수 없음을 드러내었다. 어거스틴적 구원론이 성경적임과 이런 입장에서 유아 세례에 대한 입장을 변호한다. 또한 워필드는 성경에 의하면 그 어떤 종류의 완전주의”(perfectionism)도 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모든 사람을 구해 보려고 하나 한 사람도 구할 수 없는 사상이라는 것을 성경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잘 드러낸다.

 

넷째, 여러 종류의 이원론에 대한 공격과 균형 잡힌 신학 제시. 워필드는 성경과 학문이 대립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과 이성과 감정이 신앙 안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학문과 경건은 대립하지 않고 항상 같이 가야만 한다는 것, 또한 영혼과 몸이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드러낸 균형 잡힌 신학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섯째, 철저한 성경 주해에 근거하여 신학적 작업. 워필드는 그가 다룬 신학적 문제와 관련하여 깊이 있는 성경 주해에 근거한 작업을 하였다.

 

여섯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개혁파 사상에 충실한 신학. 워필드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특히 신앙고백서의 작성 과정에 예민한 역사적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신학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III. 특별 계시의 진전 과정에 유의하는 신학을 제시한 워필드

 

워필드는 성경 계시를 단번에 주어진 계시로 여기지 않는다. 계시의 점진성을 유의하면서 신학을 전개한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교리를 다루는 워필드의 기본적인 방법은 구속사적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그의 글은 스코틀란드의 제임스 오어(James Orr)가 편집한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1915)에 기고한 삼위일체”(Trinity)라는 소논문이다.

 

다른 소논문들에서 워필드는 구약에서 시사되는 메시야의 신성에 대한 사사들이나 성령님의 독자적 위격되심에 대한 사사들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때에도 메시야의 신성에 대한 시사가 그대로 하나님의 위격의 복수성(multiplicity)을 필연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논의는 매우 조심스럽다. 워필드는 메시야는 전능한 하나님이요, 영원한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9:6분명한 의미”(the obvious meaning)는 약속된 메시야는 신적이라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예언이 메시야와 연관된다는 주장은, ()-기독교적인 논쟁이 있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에 의해서도 논박되지 않았었다고 논의한다.

 

또한 메시야적 희망을 점점 더 완전히 포로기 이후로 돌려 버리려는 메시야적 기대의 발전에 대한 구자유주의의 비평적 결과들은 여지없이 깨져 버린다고 하면서 이 희망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것이고, 모든 세대에 걸쳐서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으로 형성된 것이다고 단언한다. 이런 신적인 메시야에 대한 희망은 구약 곳곳에 있어서 구약이 약속하는 메시야가 그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서 구약을 읽을수 없을 정도라고 워필드는 강하게 말한다.

 

구약과 신약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다음 같은 비유적 표현으로 워필드는 표현한다. “그가 구약시대에는 겨자씨를 보존하셨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씨가 땅에 심겨졌고그의 사역으로 온 땅에 그 그늘을 드리울 큰 나무로 성장해 가는것이다.

 

이와 같이 워필드는 일관성 있게 성경 계시의 점진성을 유념하면서 신학적 논의를 하는 것이다. 구약이 그 자체로 분명한 삼위일체론을 아주 자명하게(unmistakably)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고 해도, 구약은 계속적으로 그런 방향을 지향하고 있어서(does tend and hint toward it) 신약의 빛에 그에 비춰지기만 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삼위일체적 결론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도적 축도(고후 13:14) 가운데서 최고의 구속적 복들 세 가지가 함께 언급되고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각각과 연관되어 언급되었다.” 또한 바울은 습관적으로 삼중의 방식으로 구속적 축복의 신적 기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은혜는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베드로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함을(벧전 1:1-2) 주목하면서 이와 같은 구절들에 근거해서 워필드는 신약의 저자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단순히” (unstudied naturalness and simplicity)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말하고 이런 전제가 그들의 모든 사유 배후에 있다고 논의한다.

 

워필드는 대위임령에서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공식적 선언에 가장 가까운 접근을 발견한다. 특히 세례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삼위가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이름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또 각각의 이름이 있는 듯이도 표현하지 않으시고 그 셋을 동일한 이름 안에 연결시키심으로 삼위의 통일성을 아주 인상 깊게 주장하시고, ‘아버지의, 아들의,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하여 각각을 또 도입하여 각각의 구별성을 강조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IV. 논의 점들과 문제점들

 

뛰어난 워필드이지만 그도 무오하지 않으니 워필드의 논의 가운데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점들로는 다음 같은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그냥 간단히 언급하면서 신명(神名)의 복수 형태나 복수 대명사의 사명, 복수 동사를 언급한 것 등과 관련해서도 삼위일체적 해석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좀 더 심각히 고려해야 할 점이라고 여겨진다.

 

둘째로, 후천년설적인 시사점을 보여주는 상당히 모호한 그의 천년왕국관은 좀 더 깊이 논의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셋째로, 그 당시의 진화론 주장이 자신의 성경관을 전혀 무너뜨리지 않음을 자신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일종의 유신 진화론을 제시한 것은 특히 오늘날 관점에서는 좀 더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로, 워필드의 변증과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 작업을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이 두 사람의 신학의 근본적인 차이로 보기 보다는 이 두 신학자가 처한 상황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놀라운 변증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지 불과 3년 후에 어번 선언(the Auburn Affirmation)1,200명 이상의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서 서명되고, 그의 사후 8년 만에 프린스톤 신학교의 이사회가 그가 평생 대립해 온 신학적 입장에 의해 재편된 이런 역사적 과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은 워필드가 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 시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워필드의 신학적 작업을 생각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관심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이런 노력이 얼마 후에 과연 어떤 결과를 나타낼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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