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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역대 총장 회수 진실한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후대의 총신대학교가 역사의 진실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것은 역사에 부끄러운 일이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23/11/19 [20:23]

총신대, 역대 총장 회수 진실한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후대의 총신대학교가 역사의 진실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것은 역사에 부끄러운 일이다.

소재열 | 입력 : 2023/11/19 [20:23]

 

 평양장로회신학교 전면모습 © 리폼드뉴스

평양장로회신학교 뒷모습  © 리폼드뉴스


1900
년 장로교회 선교부 평양공의회는 피선교지 교회 지도자들을 안수받은 목회자로 양성하고자 이들에게 신학교육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목사후보생이 될 자격자는 장로와 조사였다이 결의에 따라 1901년 가을(917)에 선교사 마포삼열(Samuel A. Moffen)이 장대현교회 시무장로 김종섭()과 방기창()에게 신학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신학교가 2명의 학생으로 개교되었다.

 

1901년 가을 장로회공의회는 신학교육위원회(Committee on Theological Education)를 선정했다. 그 이듬해(1902)에 위원회는 신학교육을 위한 5개년 교과과정을 제안했고, 이 제안이 1년 동안 임시로 받아들여졌다. 이 임시 교과과정을 갖고서 평양공의회는 6명의 학생들을 3개월 동안(1년 과정으로) 가르쳤다. 

 

▲ 마포삼열 사택(대동문 밖 술막골) 이 집에서 1901년 2명의 학생(김종섭 장로, 방기창 장로)으로 신학교육이 시작되었다.  © 리폼드뉴스


이때 가르친 선생은 마포삼열, 배위량(W. M. Baird), 소안론(S. L. Swallen), 이길함(G. Lee), 편하설(C. F. Bernheisel)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03년 가을 신학교육위원회가 3개년 예비과정 및 5개년 본과과정으로 교과과정을 정리하여 장로회공의회에 보고하여 채택되었다.

 

학생들은 매년 3개월 동안 교실에서 수업받고 나머지 9개월은 현장사역과 교회목회 그리고 사경회 인도를 해야 했다. 9개월 동안 학생들은 자습으로 신학을 배우고 독서과제를 읽었고, 여기에 대한 시험을 치렀다.

 

신학교육이 전국 차원으로 확산되던 1904년 선교사 원두우(H. G. Underwood, 미국 북장로회), 전위럼(W. M. Junkin, 미국 남장로회), 그리고 왕길지(G. Engel, 호주 장로회)가 교수로 임명되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초대 교장은 마포삼열 선교사이다. 재임기간은 1901. 5. 1.-1925. 10. 29.까지였다. 제2대 교장은 라부열 선교사이며 재임기간은 1925. 10. 30.-1940. 4. 10.까지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 9. 9)를 7개월 앞둔 1938. 2.에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은 격분했다. 학교 교정에 있는 평북노회 노회장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렸고 학생들은 집단행동으로 산사참배 반대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경찰은 2월 13일 이른 아침에 신학교 교정에 들어와 교직원과 학생 10여 명을 검거했다. 그리고 형사들이 신학교에 상주하여 감시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휴교령 : 신학교 소식- 이미 알려드린 본교 가을학기에 관하여는 각 재학생들에게 다름과 같이 통지문을 발송하였는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평안하심을 기원하나이다. 새로운 형편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알려드린 8월 31일에는 개학하지 못하고 당분간 연기하게 되었습니다. 차후 학교의 통지를 기다리시고, 위하여 기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 리폼드뉴스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문제가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예정된 가을학기인 8월 31일 개학 여부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1938. 9. 9. 오후 8시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다. 결국 이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었고 평양장로회신학교 가을 학기를 개학하지 못하고 무기한 연기되었고 교문은 굳게 닫혔다. 그리고 휴교 상태에서 통신으로 수업을 진해했다.

 

이듬해인 1939. 4. 13. 오전 10시 학교 강단에서 제34회 졸업식이 교장 라부열 박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설교는 남궁혁 박사의 "진(眞) 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날 졸업식에서 54명이 졸업 했다. 이후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다시 문을 열지 않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학교를 열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평양신학교 유지재단은 열지 않았다. 그러자 총회는 1940. 2. 9.에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4월 11일에 개교하였다. 이 신학교를 (후)평양신학교라고 한다. 이 신학교는 평양 신사에서 참배를 하고 동방요배를 해야 했다. 

 

후평양신학교 교장은 채필근 박사였다. 그의 교장 재임기간은 1940. 4. 11.-1945. 9. 30.까지였다. 채필근 교장에 이어 김인준 목사가 교장이 되었으며, 그 교장 임기는 1945. 10. 1.-1947. 1. 19.이었다. 김인준 목사에 이어 교장에 임명된 자는 이성휘 목사(1947. 1. 20.-1949. 4. 22)였다.

 

통합 측 장로회신학대학교는 후평양신학교 교장을 역대 교장에 포함시켜 제1대 마포삼열 제2대 라부열 제3대 채필근 제4대 김인준 제5대 이성휘로 역사를 기록한다. 제6대는 박형룡 박사(1949. 4. 23.- 1951. 5. 29), 제7대 교장은 감부열(1951. 5. 30.-1953. 8. 5), 제8대 교장에 박형룡(1953. 5. 30.-1959. 9. 24) 박사로 기록한다(아래 사진 참조). 

 

  © 리폼드뉴스


그러나 합동 측 총신대학교에서는 후평양신학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교장도 장로회신학대학교 처럼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다.

 

  © 리폼드뉴스


제1대 마포삼열 박사, 제2대 교장 라부열 박사, 제3대 교장 박형룡 박사, 제4대 교장 감부열 박사, 제5대 교장 박형룡 박사, 제6대 교장 박형룡 박사로 역사를 기록한다. 

 

제2대 교장 라부열 박사는 1925. 10. 30.-1940. 4. 10.까지 재임했다. 그런데 총신대학교는 라부열 박사는 1925. 10. 30.-1946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라부열 박사의 제2대 교장은 이미 후평양신학교 개교(1941. 4. 11) 이전에 종결되었다.

 

따라서 1941년 4월 11일 이후에는 라부열 박사가 아닌 후평양신학교 채필근 박사가 교장이 되었다. 후평양신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직영신학교로 출발했으니 역사의 기록에서 제3대 채필근 박사를 교장에서 삭제한 것은 역사에 정직하지 않다.

 

총신대학교가 총회가 결의하여 직영신학교로 운영한 후평양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총신대학교의 역사에 하자가 발생한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후대의 총신대학교가 역사의 진실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것은 역사에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남산장로회신학교 졸업생을 총신의 역대 졸업 회수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무엇이 진실된 역사의 기록인지 고민하게 된다. 총신대 왜 이렇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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