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2)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반드시 복음의 진리를 먼저 아는 것이 선행돼야

박혜근 | 기사입력 2011/09/09 [20:56]

구원의 확신(2)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반드시 복음의 진리를 먼저 아는 것이 선행돼야

박혜근 | 입력 : 2011/09/09 [20:56]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양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주의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오늘 이 시간도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배움의 장으로 이끌어 주시니 주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소원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우리 신앙의 책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죄를 경계하며,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하시고, 죄와 싸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나의 신앙과 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훌륭히 쓰임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자리에 있는 주의 종들이 한국 교회의 미래가 되게 하시고, 한국교회의 부흥을 일으키는 역군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형제들의 각 가정마다 평안을 주시고, 그들의 몸에 건강을 주시고, 그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학문하는 주의 종들에게 함께 하시고 학자의 영을 더하시고, 지성을 조명해 주시고 그것을 능숙하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1. 칼빈의 믿음 이해

지난주에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개괄을 하였다. 오늘은 칼빈의 믿음에 대한 이해를 하겠다. 지난주에 확신에 대한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첫째는 칼빈과 칼빈의 후예들, 말하자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확신에 관한 한 통일성과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확신의 문제를 다룰 때 대표적인 인물, 칼빈이 믿음에 대해 가르치고 난 뒤 세상을 떠났는데 능동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을 강조한 그것,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믿음의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능동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는 과연 어떤 것인지, 조금 있다가 소개하는데 칼빈이 믿음의 정의를 할 때 수동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 가면 칼빈주의자들이 이것을 조금 더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것으로 가르치게 되는데 이런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에서의 믿음의 이해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믿음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냐, 아니면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냐를 두고 신학적인 입장이 갈렸다는 것이 지난주에 설명한 핵심이다. 그래서 이것을 단지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이런 믿음에 대한 수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다가 그것이 나중에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흘러가는 것은 결국 칼빈의 전통적인 신앙에서부터 벗어난 탈선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찰스 하지, 커닝햄, 로버트 댐리와 같은 사람들은 이것이 강조점이 차이라고 본다. 그런데 리젤이나 캔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차이는 실제로는 칼빈신학에서부터 이탈한, 말하자면 신학적인 변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사실 칼빈의 신학을 대변하기보다는 칼빈의 신학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드러낸다고 봐야 한다.
 
이런 흐름 본질적인 차이를 대변한다고 보는 입장이 최근 학계에 일반적인 흐름이다. 다수이다.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는 것은 고전적이고 보면 된다. 자,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럼 칼빈이 믿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관건이다. 칼빈의 믿음의 이해를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1. 믿음의 세 가지 속성

칼빈은 원칙적으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루터나 쯔빙글리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칼빈, 루터, 쯔빙글리 이 세 사람은 믿음을 정의할 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Assensus(동의)이다. 그러니까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이 무엇이라고 하냐면 믿음의 본질은 동의라고 보는 것이다. 구원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동의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조금 있다가 설명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칼빈이나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의 본질을 동의라고 받아들이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에 두 가지를 더 강조하였다. 무엇이냐면, Cognitio(지식, 앎)을 강조하고, 또 Fiducia(신뢰)를 더 강조하였다. 이것이 지금 칼빈이 루터나 쯔빙글리와 믿음에 대해서 어떤 점에서 입장을 같이 하고 어떤 점에서는 입장을 달리했다고 할 때 달리한 점의 핵심은 지식과 신뢰를 믿음의 본질로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믿음을 강조할 때 이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지식, 동의, 신뢰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믿음을 세 가지 속성으로 강조한 것은 전적으로 칼빈주의적 전통 안에서만 발견된다. 루터주의에서는 한마디로 믿음을 동의라고 본다.

자, 여기에서 그러면 동의가 무엇이냐, 동의라고 하는 것은 구약적 의미에서는 ‘아멘’에 해당한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진심에서 우러난 찬동을 말한다. 따라서 동의란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동의로서 개인적인 확신을 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칼빈이 동의를 다룰 때 확신이라는 요소가 있다.

벌코프는 동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참조할 필요가 있다. 동의를 매우 정서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지적인 요소가 아니고 정서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는 단순하게 감정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직관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단순하게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한 동의라기보다는 정말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끌림을 내포하는 요소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벌코프는 동의란 진리와 자신이 믿는 대상이 자신의 삶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것과 그것에 관한 깊은 관심과 더불어 흥미에 이끌리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서적인 요소도 설명했는데 동의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것과 그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대한 관심, 흥미에 자신이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다.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고 할 때 필요는 무엇이냐, 인간의 가장 큰 필요는 구원이다.
 
구원, 죄사함, 구속이다. 욥이 고난 받을 때 가장 간절히 바란 것은 나의 구속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의 구원의 필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채어질 것이라는 그것, 아 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강력한 확신, 또 그것에 자신이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동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주관적이다. 이 동의는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정말 구원이 필요하구나, 나에게는 양심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구원에 대한 필요를 먼저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을 채울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거기에 끌려 들어가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동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의는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관적인 반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약을 보약이라고 소개받아도 약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과 효능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약을 손에 쥐고 있어도 이 약을 먹어서 효과를 볼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이 없으면 그 약은 별로 유발하지 못한다. 그런데 동의는 어떤 것이냐면, 그 약의 효능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 약이 내가 당면하고 있는 건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확신하고 그 약을 내 손에 넣고자 하는 강력한 동인이 발생해야 한다. 그 약에 대한 객관적인 인증서보다 인증서와는 매우 다른 주관적인 문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관적인 이끌림, 주관적인 확신의 상태, 그런 것을 동의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을 이해할 때 이런 동의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는 사실을 그 마음으로 주관적인 실존적인 상황 안에서 수용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믿음이란 단순하게 그런 동의만이 아니라 지식과 신뢰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동의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21문을 참조하라. 잘 설명하고 있다. “믿음이란 성령이 내 마음 속에서 믿음으로 역사하신 까닭에 주어진 죄 용서, 영원한 의로움 그리고 구원이 그리스도 공로 덕택에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확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동의를 말할 때 언제나 나의 필요와 마땅한 관계가 있다.
 
내게 주어질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있는데, 거기에도 무엇이라고 하냐면 개인적인 필요를 전제하고 있는 속성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동의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된다. 칼빈은 믿음을 설명하면서 믿음의 속성을 세분화하였고 세분화하면서도 강조점을 달리 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칼빈신학에서는 매우 연속적인 성격에 따른 결과이다.

그 다음에 지식과 신뢰를 말하였는데, 우리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지식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신뢰는 무엇이냐, 신뢰는 지식과는 조금 다르게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자기 확신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는 제임스 보이스 같은 경우에 무엇이라고 설명했냐면, 이것을 제자도와 관련지었다. 일반적으로 신뢰는 어떤 개념이냐면, 향유이다. 실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 은택을 실제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구원론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게 비유니까 비유의 한계가 있다. 그대로 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된다. 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리가 몹시 아픈데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이것이 지식이다.
 
그 다음에 그 의자가 내가 앉았을 때에 튼튼하고 나의 피곤한 몸을 얼마든지 떠받들어 주면서 안락함을 줄 것이라는 의자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심각한 오물이 있으면 앉을 수 없다. 그러면 못쓰게 된다. 어쨌든 그 의자가 내가 앉기에 딱 맞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신뢰는 무엇이냐면, 실제로 거기에 주저앉는 것이다. 앉아가지고 그 의자의 유익을 누리는 것이다. 향유이다.

그러니까 칼빈은 근본적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누가 구원자인지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구원을 받을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다. “전하는 자가 없는데 누가 들으리요 듣지 못하는데 어찌 구원받으리요”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지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마당에는 구원의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이다. 전도가 없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강단에 서서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는 시간부터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고, 그가 말씀을 마치고 강단을 내려올 동안에는 구원의 역사가 휴지, 정지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씀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다시 구원의 역사가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구원의 역사를 열고 닫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천국열쇠를 주노니 네가 열면 열 것이고 닫으면 닫혀서 누구라도 다시 열지 못한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사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면, 증거하는 그곳에 구원의 문이 열리고, 그들이 말씀의 문을 닫고 떠나면 구원은 그 문을 영원히 닫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식은 무엇이냐면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이다. 가르치는 자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기를 의도하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증거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물으면 원칙적으로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보편적인 방법은 언제나 말씀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그가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느냐?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정하신 일반적이고 그가 기뻐하시는 보편적인 원리는 말씀을 가르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지식이다. 둘째는 아까 소개했던 것처럼 동의이다. 그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 말씀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사실 복음을 증거할 때, 신약성경에서 이 복음이라고 나오면, 복음, 은혜,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적으로 동의어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복음이나 은혜나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적으로 같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가 살아계시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라고 하는데 살아 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살아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경에 보면 ‘예’와 ‘아멘’이 된다고 하였다.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약속은 그 안에서 다 성취된다. 그를 떠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없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이 복음의 전체이자 그 복음은 본질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복음을 듣는 죄인들이 복음을 듣는 순간에 성령의 내적인 사역으로 인해서 무엇을 듣느냐면 부르심을 듣는다. Calling. 부르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 복음 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지 알고-이것이 동의이다. 아! 정말 저 복음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준비하신 은혜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을 힘껏 붙잡는다. 붙잡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그래서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고 복음이 증거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열매 맺는 것은 아니다. 복음이 증거되면 반드시 복음과 함께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역사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은 예배할 때 설교자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으로는 듣는 이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한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들을 때 성령이 그 여인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이 증거될 때 누구에게 집중적으로 역사하느냐면 듣는 사람에게 역사하고 부르심을 주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 복음을 증거하는 일, 설교하는 일을 구약적인 선지자가 엑시터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경험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설교는 무엇이 핵심이냐면 설교는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는 성령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령의 부르심이 말씀을 증거되는 곳에 함께 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그리고는 그 말씀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도한 열매를 맺는다. 복음의 수용이 일어난다. 중생하고 그리고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의롭게 된다. 한 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의 열매를 받아 누리는 것이다. 신뢰.

그래서 칼빈은 동의만이 아니고 제일 먼저 지식을 강조하였고, 그리고는 신뢰도 믿음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단순한 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지식과 신뢰를 강조하였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칼빈에게 지식이란 언제나 믿음의 기초이다. 지식은 언제나 믿음의 기초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믿음이 절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은 무엇이라고 예를 들었냐면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뿌리를 내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부드러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돌 위에 떨어진 반반한 것, 바위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칼빈은 뭐라고 설명했나면 무지 위에서는 절대로 뿌리 내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씨와 같다고 하였다. 무지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믿음은 말씀의 지식을 통해 주어지고 그 지식 위에 세워진다’고 하였다. 칼빈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칼빈이 신학만 한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제네바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자신이 교인들을 양육하고 상담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목회자였다. 자신의 경험도 반영된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해 본 것이다. 교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 점점 성장하는 전체 과정은 결국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비례한다는 경험하였다. 저 역시도 경험했다.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육이다. 프로그램이 아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목회에 대한 관념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무슨 프로그램이면 되는 줄 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칼빈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개혁주의자라면 그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믿음은 말씀의 지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교인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목사님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 외에 다른 프로그램이 말씀의 가르침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여기에 확고부동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이다.
 
성령충만이 뭐냐, 바른 방향이다. 성령충만이 컵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있는 상태가 성령충만이다.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가야 배가 빨리 가는 것이다. 바람의 방향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목회에도 바른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 방향만 옳으면 실천이 서툴러서 당장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혹은 결과를 보는 일이 조금 늦어도 방향이 옳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본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결국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바른 방향이 무엇이냐, 목사의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라는 확고부동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젊은 신학도들이 말씀을 강조하면 언제나 의구심을 품고 내 말을 듣는다. 그것만 가지고 될 것인가 의구심이 있다.
 
그러나 된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부흥도 있고 성장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안 해보면 확신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어렵고 수고로운 것이다. 미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다. 앞으로 목회를 잘하려거든 절대로 딴 데 한 눈 팔 것 없다. 평생 연구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에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나의 일생을 온전히 바치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은 바른 방향이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강론할 때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먼저이다. 전제 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먼저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 그들에게 상 주신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참된 믿음이란 무엇이냐, 참된 믿음은 실존적 결단이 아니다. 실존적 결단은 자신의 신념, 혹은 덕목으로서의 믿음이다. 우리가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믿음을 말할 때 대개 이쪽에 가깝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하는 믿음,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개인의 신념이 아니다. 키에르케골은 ‘믿음의 도약’에 대해 말했다. 믿음의 도약은 지식이나 어떤 사실에 대한 확신 혹은 증거 없는 믿음을 말한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믿음을 말한다. 개인의 신념일 뿐이다. 그것이 실존적인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반드시 복음의 진리를 먼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고전 15:3-6에서 바울은 이 점을 반드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와 전도의 핵심이 뭐냐, 복음의 교육이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할 때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복음의 교육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결국에는 믿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병원 짓고 빵 나눠주고 치료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선교의 마지막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무슨 선교인가, NGO이지. 요즈음 영화나 TV에서 많이 나오지 않는가.
 
외국에 선교사로 가서 희생했던 사람들을 보여주고 눈물 질질 짜는 것,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잘 보아야 한다. 복음을 가르치는 행위가 아니고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선교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사람들을 폄하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은 반드시 복음을 가르치는 목표의식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선교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믿음을 말할 때 반드시 Cognitio(지식, 앎)을 말해야 한다.

자,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와 분가분리의 관계를 가진다. 이제부터는 잘 들어야 한다. 칼빈의 논리이다.

자, 믿음은 언제나 지식 위에 세워진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믿음과 지식은 언제나 불가분리의 관계 안에 있다. 그렇죠? 지식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며. 그러면 믿음과 지식은 분가분리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 저기에 있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지금 칼빈의 신학의 논리이다.
 
어떤 논리인가 하면 왜 사람이 바로 믿기만 하면, 바로 믿음만 가지면 필연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칼빈의 논리가 믿음의 교리 안에 나타난다. 칼빈은 이렇게 가르쳤다. 칼빈은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보면서 확신을 구원의 필연적인 귀결로 본다. 믿음의 속성은 세 가지라고 하였다. 지식, 동의, 신뢰.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낳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인 결과가 무엇이냐, 바로 확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이 믿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확신에 이르냐고 할 때 칼빈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 주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금 생각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논리에 약하다. 우리 민족은 선천적으로 직관적인 기질, 도가 통하면 되는 민족이다. 그래서 한 단계씩 생각하는 것이 잘 안 된다. 조금 낯설지 모른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1.1.1. 믿음과 지식은 언제나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다.

지식 없는 믿음 없고,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은 분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 말씀의 전체이자 본질은 살아계시는 말씀인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은 그 다음에 언제나 그리스도와 관계하고 그를 붙잡는 것이다.

1.1.2.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과 관계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약속이 ‘예’와 ‘아멘’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믿음이 지식과 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믿음은 곧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러므로 성경 66권 전체를 하나로 압축하면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결국 믿음과 지식의 분가분리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은 곧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잡는 것이다. 결국 복음의 진리를 통해 사람들이 어디로 가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복음으로 옷입은 그리스도를 맞는 것이다.

1.1.3. 따라서 믿음은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믿음은 언제나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것 매우 중요하다. 현대신학 공부할 때 현대신학자들이 믿음을 재해석한다. 그것을 비판할 때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개혁파 신학에서는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믿음 없다. 믿음이란 막연한 어떤 것에 대한 확신, 신념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닌 이유는 무엇이냐,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는지, 기독론적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 관계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음이란 개인의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하는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 개인의 덕일 뿐이다.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무엇을 위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신 은혜로운 선물이 무엇이냐? 구원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하는 믿음을 받았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단순한 신념도 아니고, 긍정적인 사고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없다. 여기까지 이해되는가? 꼭 이것 세 가지를 이해해야 된다.

그리스도를 기반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믿음,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원하는 믿음, 이 말 이해되는가? 칼빈은 이 말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구원하는 믿음 그것은 전체 기독교 신앙이 세워지는 근본적 토대라고 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이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전체 개혁주의 신학의 일종의 기초, 믿음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아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유일한 통로는 믿음이다.
 
그런데 그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일뿐이다. 구원이라고 하면 무엇을 포함하는가? 하나님의 예정, 부르심,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성화, 영화, 양자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 전부 다 구원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원하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 전체가 다 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을 때로는 복음의 진리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 이 믿음이 구원을 말하기도 한다. ‘저가 믿음의 도를 저버렸도다’라고 말하면 구원을 저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복음의 진리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저 믿음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어떤 기독교 신앙이라도 있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란 오로지 믿음 위에 서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서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권위에 서는 것도 아니다. 이것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를 반대하고 나온 것이다.

자, 그러므로 확신을 포함해서 구원의 서정에 속하는 그 무엇이든지 믿음 없이 혹은 믿음의 적극적인 사용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믿음의 은혜를 받는다. 굉장히 역설적이다. 믿음의 시동도 성령이고, 믿음을 통한 정말 큰 믿음의 수용도 성령의 은혜이다. 그래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
 
로마서 10:10을 이것을 간단하게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입으로 시인하여 부르심 받고 회개하고 의롭게 되고 성화되고 확신에 이르게 되고 영화되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하는 것임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변하는 보증을 확보하게 되고, 그 결과 믿음은 필연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칼빈의 논리이다.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설명하자.

기독교 신앙 전체는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된다. 믿음 위에 신앙이 선다. 믿음 없이 어떠한 구원도 없다. 반드시 구원에 이르려면 언제나 믿음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아까 무엇이라고 했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멘 아까 무엇이라고 했는가? 동의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에 대해 아멘이라고 하는 것임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 말씀이 결국 확실하지 않는가. 여러분, 아멘은 무엇인가? 참되다. 예,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고 참되고 또 그 말씀을 내가 의심 없이 아멘이라고 하기 때문에 확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으면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칼빈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내려가고 있다는 흐름을 정리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 신앙과 구원은 언제나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또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는 것을 성령이 내 마음에서 확정해 주신다. 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확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논리이다. 상당히 분석적이다. 루터의 신학에는 이런 특징이 없다. 칼빈은 아주 정말 세분해서 분석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칼빈은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확신이 믿음의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확신을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믿음과 확신을 한 짝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는 확신을 얻게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확신에 이르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어떠한 공로이든지간에 그것 위에 자신의 약속을 두기를 원치 않으셨다. 인간의 공로 위에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세우고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로는 불완전하고 그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무익함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조건으로 삼거나 기반으로 삼아 약속하지 않으신다. 사 57:12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에게도 무익하고 구원을 이루지도 못할 만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아 인간에게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다. 결코 인간의 공로가 구원이 될 수 없는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 안에서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믿음과 확신을 결부시키셨다고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약속을 예를 들면 인간의 공로 위에 약속을 두게 되면 그 공로가 언제나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 이런 면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옳다. 인간의 공로는 언제나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난주에 말했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확신의 교리를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확신을 인간의 공로 위에다가 결부시키고 있다. 그 말은 맞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우리의 공로와 결부시켰다면 우리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로가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칼빈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왜 구원의 확신이 구원받는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공로 위에다가 구원의 약속을 두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로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은혜 안에 두셔야 한다. 이 공로를 지우고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가 약속을 두기를 원하셨다. 왜냐면 인간의 공로가 무익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약속을 두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은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먼저 하실 일이 있다. 은혜 위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두셨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더 하셔야 한다. 우리에게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주셔야 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주셔야 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주시게 되면 그 믿음이 이 은혜와 관계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마침내 그 약속이 내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은혜로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고 그를 붙들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은혜 위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위에 자신의 구원을 두셨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 되냐면 결국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확신을 갖게 하셨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더욱이 확신하는 믿음, 확신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주신 성령이 그들 안에서 사역하신 결과이다. 그러니까 확신이 믿음의 귀결인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자기의 은혜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믿기만 하면 확신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설명이다. 두 번째 설명은 하나님께서 더 나아가서 믿기만 하면 그 결과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까닭에 사람이 믿기 때문이라고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성령께서 복음을 들을 때 아까 설명했듯이 그들을 부르신다. 그런데 부르심의 기원은 아버지에게 있다.
 
에베소서 1:4-5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예정하셨다는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우리가 부름 받을 때는 그 부르심의 기원은 아버지에게 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만을 개별적으로 성령이 부르신다. 개별적으로 하나 하나 부른다. 부르실 때 그 성령이 부르심을 받는 그 사람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그 복음을 자기를 위한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신다. 그 결과 그들 속에 믿음이 들어오게 된다. 성령께서 말씀을 들을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복음을 아는 지식 위에 믿음이 생기고 그러면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확신을 낳는다. 따라서 모든 확신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하는 믿음과 확신은 필연적인 귀결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시기 위한 은혜로운 조치이고 성령의 사역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

이와 같이 칼빈은 확신하는 믿음을 무엇과 관련시키냐면 구원의 지식, 성령,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약속, 성령의 사역, 하나님의 선택 이런 것들과 연관 지어 놓았다. 한마디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택한 자들의 확신이 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확신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결과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계시하시고 보증하신바 된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공로 없이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 위에 근거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지식을 믿음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올바른 정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이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것은 그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를 깨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칼빈 자신의 신학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많은 논쟁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정교하게 말을 하려고 보니까 말이 길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익숙해져야 한다.

성령이 보증하신 바 된 바로 그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복음을 듣게 하고 복음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확신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모든 약속이 다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공로 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로 그것,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그 결과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공로 없이 거저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분명하고 확고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믿음의 어떤 속성을 강조하냐면 지식을 강조한다. 들어야 한다. 들을 때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나에게 자비로운 분이시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이런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라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두 가지를 구분한다. 객관적인 확신과 주관적인 확신으로 나눈다.

객관적인 확신은 무엇이냐면 객관적은 확신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Certainty).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이 객관적인 확신이다. 주관적인 확신은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두개로 나누었다.

자, 칼빈의 믿음의 정의에 따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거 중요한 말이다.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 된다. 그런데 확신이 없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라면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말한다. “구원의 확신을 붙들음으로써 사탄과 죽음에 대해서 대담하게 승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 사람이 신자가 아니라고 본다.”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확신이라는 열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확신이 없으면 무엇이 없느냐면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선하신 분이다, 내게 대해서 은혜로운 분이라는 것을 결코 알 수 없게 된다. 주관적인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빈은 확신을 가지지 않으면 저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런 칼빈의 주장이 논쟁의 빌미가 된다. 왜냐하면 칼빈은 믿음은 언제나 확신을 수반한다고 했지만 동시에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다. 같은 방향으로만 말했다면 논쟁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말은 이것이다. 믿는다면 확신이 있어야 하고, 확신은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잘 믿는 사람이라도 확신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요 20:3 주석에 있다. 예수님의 부활 아침에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다. 여러분 20:3을 실제로 본다면 그들이 믿음이 있었는가? 없었다. 그냥 간 것이다.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자들과 여인들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극히 미미하거나 혹은 믿음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이렇게 말하다.
 
“그러므로 믿음의 씨가 그들의 마음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동안 소멸되었고 그런 까닭에 그들 자신은 믿음이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확신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은 때로 신자들 속에서 비밀스럽게 일하신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인지할 수 있게 되는 약간의 숨겨진 씨가 있었다고 믿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제자들이 무덤으로 갈 때는 자신들 속에 믿음이 있긴 있었다는 것이다. 있긴 있었는데 그 믿음은 마치 화초가 관리를 못해서 죽었다. 남은 것이 뿌리만 남았다. 그런데 뿌리만 있으면 산다. 지금 칼빈이 그 말을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믿음은 마치 뿌리만 남아 있는 것과 같아서 본인들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그런 정도의 믿음이라도 없었다면 그들은 절대로 무덤으로 달려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의 결과로 숨겨진 믿음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라고 하냐면 거기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확신이라는 것은 자신이 믿음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믿음과 확신은 같이 간다고 해 놓고 요 20:3 주석을 보면 무엇이라고 하냐면 확신이 수반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칼빈의 신학에서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다룰 때 겪는 어려움이다. 도대체 어쩌라고. 모순되는 듯한 주장을 하느냐는 것이다.

칼빈은 모순되는 듯한 두 주장을 어쨌든 간에 믿음의 교리에서 다루고 있다. 어떻게 이 모순인 듯이 보이는 두 주장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은 믿음의 성장, 혹은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칼빈에게는 믿음의 성장, 단계라는 개념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칼빈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유아적 믿음, 믿음의 초보, 약한 믿음을 종종 언급한다. 왜냐하면 칼빈은 실제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그 믿음을 시험하는 도전과 불안과 의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시험을 받아 때로는 그루터기만 남고 위의 모든 나무와 가지가 다 잘라진 듯 보이는 상태가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자신은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확신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까 뭐라고 했냐면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에는 이 두 주장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발전 단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확신이란 믿음과 정확하게 비례관계에 있으므로 믿음의 발전과 성숙의 정도에 따라 지배를 받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믿음이 시험을 받아 뒷걸음질 치게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이 없어지게 되냐면 확신이 소멸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보면 된다. 확신은 믿음이라는 화초에 열매 맺는 잎으로 본다.
 
만약에 믿음이라는 나무가 병들게 되면 제일 먼저 위에 있는 잎이나 열매가 떨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뿌리가 있어서 살아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칼빈이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확신이란 사실은 잠정적인 믿음, 뿌리만 남기고 지금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쇠약해진 믿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계속 수업하면서 말할 것이다.

일단 오늘 칼빈이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또 칼빈에게는 확신이 결국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전체적인 흐림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조직신학 책에서 “믿음”에 대해서 읽어보라. 안토니 후크마, 루이스 벌코프, 바빙크의 책을 읽든지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반드시 정리하고 오라.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로 그와 같이 인식하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붙들게 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함으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크고 놀라운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망각하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오늘도 이 수업에 참석한 주의 종들을 기억하시고 이 구원의 진리를 분명히 깨닫고 잘 정리해서 가르침에 있어 아무런 막힘이 없도록 주님 이들을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준비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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