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연재> 구원의 확신(3)

칼빈의 모순되는 듯한 주장과 관련한 해명들

박혜근 | 기사입력 2011/09/26 [22:19]

<조직신학 연재> 구원의 확신(3)

칼빈의 모순되는 듯한 주장과 관련한 해명들

박혜근 | 입력 : 2011/09/26 [22:19]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 칼빈대학교는 개혁신학의 최후 보류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학문에 매진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전능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주의 종들 가운데 주의 성령으로 함께 내주하시고, 우리 속에 주시는 구원의 소망을 따라 하나님의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도록 이끌어 주시고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조명하시고 기도하는 중에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리를 이끄신 것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을 조명하시고 이 말씀에 담겨진 계시의 뜻을 분별하여 알게하사 어린아이 같은 우리로 장성한 자의 분량에 이르게 하시고 복음을 가르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우리 어깨에 달려 있사오니 주여, 주의 종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고 주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주님, 사도들이 걸어갔던 그 믿음의 길, 헌신의 길을 우리도 뒤따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소망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정진하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가정마다 또 우리 마음에 품고 있는 소원에 따라 간구하는 기도의 소원이 있사오니, 기도하는 중에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기도하고 부르짖게 하시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됨을 믿고 확신 가운데 거하도록 기도의 문을 열어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시간도 주께서 함께 하시고, 이 말씀을 배우는 모든 종들에게 복을 주시며 구원의 확신을 얻을 뿐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은혜의 수단을 동원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권념하는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지난주에 믿음과 확신에 대해서 설명했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믿음의 본질적인 요소로, 믿음의 본질로서의 구원의 확신을 가르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참되다면 그 믿음 안에는 확신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칼빈은 뭐라고 했냐면, 확신은 믿음의 본질로서 수반된다고 했지만 동시에 무엇을 말했냐면 믿음과 확신은 실제로 언제나 같이 가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실제로는.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 안에서는 믿음과 확신은 언제나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나란히 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참된 믿음이 있을지라도 확신이 없을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빈의 어떻게 보면 확신에 대한 가르침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칼빈의 가르침에 나오는 특징이다.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음의 정의를 할 때, 믿음은 이러한 것이라고 지난주에 소개했다. 믿음의 정의를 다룰 때 그 믿음은 반드시 확신을 수반한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 믿음이 크든 작든, 예를 들어 주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했지만 그 작은 믿음이라도 참된 것이라면 그 안에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인간적인 협력을 요청하지 않는다. 믿음의 정의에 있어서는. 그래서 믿음의 정의를 내리게 되면, 정의를 할 때는 반드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같이 간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정의가 아니고 이제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경험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믿음이 참될 지라도 반드시 확신이 수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참됨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있어야 할 확신이 그리고 확신을 가졌다가도 두려움이나 의심이나 혹은 삶의 어려움이 닥쳐오게 되면 확신이 흔들려서 애초에 확신이라는 것을 갖지 않은 것처럼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을 서로 나누고 그 둘의 상이한 관계를 동시에 말하고 있으므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주석을 뒤져보면 이런 서로 모순되는 듯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믿음을 정의할 때는 확신을 얻기 위한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도 필요가 없다. 그냥 믿기만 하면 확신은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의 영역에서는 믿어도 확신이 없을 수도 없고, 또 뭐라고 하냐면 나중에 넘어가면,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주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돕는 2차적인 은혜의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1차적인 것은 본질 안에 있는 것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경험에서는 확신이 믿음이 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 어떻게 하냐고 물으면 확신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신을 갖도록 돕기 위한 2차적인 은혜의 수단을 동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런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서 확신을 갖도록 권면해야 한다고 이렇게 가르친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확신이란 굉장히 인위적이고 작위적이고 노력했다는 결과물인 것처럼 말한다. 한편에는 본질적인 것이라고 해놓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인간의 노력여부에 달린 것처럼 말하고. 이렇게 됨으로써 이 둘 사이에 뭐가 있는 것처럼 보이냐, Contradicting(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이것 때문에 첫 시간에 소개했던 소위 말하면 칼빈에 대한 해석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생각나는가? 그것 잘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칼빈 후예들 간에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믿음의 본질 안에 확신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이 칼빈이 주장하려했던 원래의 입장이라는 입장이 있고, 어떤 쪽에서는 어떤 사람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 혹은 다른 은혜의 수단을 동원해서 확신을 얻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인간 협력적 요소가 있다. 인간이 노력을 함으로써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때는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협력적인 요소가 사실은 후대에 칼빈주의자들, 혹은 칼빈의 계승자들이 칼빈의 신학의 의도와는 다르게 발전시킨 형태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결국 이런 칼빈의 신학 안에 있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주장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런 논쟁이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일단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난주 여기까지 강의하였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모순에 대한 칼빈의 인식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칼빈 자신은 모순되어가는 듯한 두 주장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혹은 좀 다르게 칼빈 자신은 이것을 모순이라고 인식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일단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칼빈은 한번이라도 이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이런 질문을 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랬다면 논쟁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될 만한 칼빈의 신학적 특징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칼빈이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대답을 시도한 적이 없으나 이 둘 사이의 긴장과 모순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신학적인 구조가 있다. 그 구조가 네 가지쯤 된다. 그러니까 칼빈의 신학 안에 있는 특징들 네 가지는 우리들이 이런 문제를 해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특징들이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칼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한 아무런 긴장이나 모순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신학적 체계 안에서는 해명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논리적 사고에 탁월했던 위대한 신학자 칼빈이 이런 두 가지 주장을 거침없이 펼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신학적인 사고를 되짚어 가면서 모순이 되어 보이는 듯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믿음에는 필연적으로 확신이 따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칼빈의 모순되는 듯한 칼빈의 주장과 관련한 칼빈의 해명은 네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1.1. 칼빈의 모순되는 듯한 주장과 관련한 해명들

당위와 현실 사실의 대립과 긴장. 현실과 당위 사이에 긴장과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1.1.1.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현실 사이의 괴리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실제 믿음의 경험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나중에 좀 더 설명하면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일단 그 점을 이해해야 한다.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것은 긴장과 대립을 설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처럼 던져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것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경험 안에서 일정한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완전한 구원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약속이 아직까지 그림자, 혹은 상징, 혹은 소망의 형태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믿음이 필연적으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적인 상태이고, 실제로는 믿음을 행사하는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만큼 믿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있으리라고 했던 그 확신을 우리의 경험 안에서는 일정하게 보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리이다. 따라서 바로 이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현실 사이에 이런 괴리가 생기게 되고, 그 괴리가 결국에는 이와 같은 긴장이 있는 것처럼, 대립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말을 한다. “신자의 경험은 상당히 다르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들은 종종 그들에게 닥치는 불안과 심각한 두려움으로 흔들리곤 한다. 그들의 마음에 혼란을 일으키는 시험이 너무나 광포해서 믿음의 확신을 거의 잃어버린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확실하고 분명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의심에 물들지 않거나 곤경을 당하지 않는 확신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이 말에서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냐면 믿음을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믿음은 성령의 역사, 성령의 씨라고 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성령을 씨뿌리는 자로 설명하였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이 믿음을 농부가 마치 씨를 뿌리듯이 뿌린 것이다. 그런데 그 성령이 주신 그 믿음은 에베소서 2장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은 크든 작든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선하고 완전하다.
 
믿음 자체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 믿음을 행사할 사람은 누구냐면 나 자신이다. 나는 그 믿음의 완전함에 이르지 못할 만큼 나 자신은 언제나 불신과 곤경에 허덕이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믿음을 가진 나는, 그 완전한 믿음을 하나님이 기대하는 수준만큼 행사하지 못하는 연약함 속에 있기 때문에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주신 믿음은 완전하고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을 행사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믿음은 나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 밖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안에서 조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의 인간적인 본성과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결과 내 안에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을 행사해야 될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런데 나는 두려움과 근심과 생활의 곤란함과 여러 가지 시험을 받아 늘 흔들리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하나님이 기대하는 수준만큼은 그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한 믿음을 하나님의 기대만큼 행사하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꾸지람이 있는 것이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는 말은 믿음이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이 말이 아니라 그 믿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꾸지람이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사실 작은 믿음이 있고, 큰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행하기를 기대하는 만큼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을 주님이 작은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사실 믿음이 작은 것이 아니고, 그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그 사람의 한계가 작은 믿음이라는 질책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바로 그 차이, 믿음의 정의와 믿음의 경험 사이에 괴리가 있고, 그 괴리 때문에 필연적인 구원의 확신이 때로는 우리의 역사적인 경험 안에서는 우연적인 것으로 가변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1.1.2. 성령과 육신 사이의 대립

첫 번째 설명은 뭐냐 하면 믿음의 정의와 경험 사이의 괴리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을 하였고, 두 번째 설명은 육신과 성령의 대립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면 여기 믿음의 경험은 사실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 세상의 근심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에 언제나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 세상의 근심 등등의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믿음의 정의의 영역, 당위의 영역은 전적으로 성령의 영역이다. 따라서 저렇게 육체와 성령의 대립으로 인해서 무엇이 생기냐면 긴장과 괴리가 생긴다고 설명할 수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예를 들면 로마서 8:2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 보면 해방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미 종결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해방은 이미 선언되었고 종결된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앞 장인 7:14-15에 보면 무슨 말씀이 있느냐면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을 받는 신자들이 승리와 안전의 경험과는 다른, 패배와 고투의 경험을 거의 불가피하게 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8장에서는 성령의 법이 너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켰다고 종결된 행위로서 말씀했다. 그런데 7장에서는 뭐라고 하면 여전히 우리 신자의 경험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좌절과 고투,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이런 상황이 예외 없이 불가피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모순이다. 방금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면서.
 
그러면 더 이상 신자들의 영적인 고투는 없어야 한다. 죄에서부터 해방되었는데 뭐 더 이상 죄 때문에 고민해야 되겠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 신자의 경험에 정말 죄로부터 완전한 경험이 있느냐, 우리 경험에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자신을 잘 보라. 여러분,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가 더 날카롭게 인식된다. 그래야 정상이다. 자신의 부패성이 더 심각하게 인식되어야 그게 정상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점진적인 성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자신의 죄성과 부패성은 더 깊이, 더 날카롭게 인식을 해야만 정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이전보다 더 크게 깨달을 수 있어야 정상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갈수록 점점 더 멀어져야 한다. 나는 무가치하고 부패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그 전보다 더 크게 느껴져서 하나님의 은혜와 오늘 나의 나됨 사이의 감격이 어느 때보다 정말 철저하게 벌어지는 상태, 그게 무엇이냐면 점진적 성화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외적 증거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20-30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회개할 기도가 없다고 말하면 지금 신앙생활이 정상적으로 되고 있지 않다는 신호이다. 여러분, 기도의 내용도 신앙의 성숙도와 함께 가는 것이다. 기도의 깊이와 폭도 신앙의 성장과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의 폭이 갈수록 좁아지는 사람이 있다. 젊은 날 한때는 선교를 위해 기도하다가 나이가 들면 이제 결국 기도의 바운드는 가기 가족이다. 나중에는 자신 한 몸이다. 그렇게 되면 그거 문제있는 것이다. 사실은 기도의 깊이와 폭이 신앙의 연륜과 함께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야 정상이다.
 
좀 더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기도제목이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구하는 기도로 바꿔져야 하고, 진취적인 승리를 위한 기도바다는 자신의 내면을 조명하고,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뿌리깊은 죄성 때문에 진짜 몸부림칠 줄 알아야 그게 신앙성장이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깊은 좌절감이 없으면 그거 신앙생활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이 50-60이 되어서 사업 성공만 부르짖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표기도할 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기도는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 느헤미야처럼 해야 한다. 대표기도는 공적인 기도이다. 그러니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전체 교우들을 위해서 우리의 눈을, 세상에 붙어있는 시각을 떼어서 해 너머의 세상으로 우리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제대로 구해야 한다.

그런데 신자의 삶의 경험에 무엇이 있느냐면 죄로 인한 깊은 좌절과 고토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 여러분, 죄가 정말 지긋지긋하게 사람에게 달라붙는다. 그리고 이 죄가 어제보다 더 집요하고 끈질기다. 나이가 들수록 죄의 강이 조용히 흐른다. 깊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자신은 안다. 자신 속에 죄의 강이 깊게 흐른다는 것을 안다. 그것 때문에 참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기 홀로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인 것처럼 느낀다고 하였다. 남들은 그런 고민이 없는 것 같고, 자기만 이렇게 죄문제로 고민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한다. 그게 잔 오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랬다. 그리고 우리 앞에 산 신자들이 그랬고, 지금 우리도 그렇다. 이게 정상적인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가진 공통된 경험이다. 장담하는데 나이 들수록 죄문제로 깊이 고민한다.
 
그래야 정상이다. 그게 내가 그 전보다 더 많이 타락해가고 있구나, 실제로 더 타락할 수도 있다. 정말 비통스러운 일이지만 실제로 정말 그 정도와 강도에 있어서 그전보다 죄를 대담하게 짓는 행위가 자행될 수가 있다. 그런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죄에 대해서 깊이 날카롭게 느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정상이다.

여러분, 롬 7:14-15이 8장보다는 앞에 있지만 앞에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젊었을 때 7장, 늙었을 때 8장, 이러면 오해이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 생애 말년에 쓴 것이다. 그런데 생애 말년에 쓴 로마서의 내용을 보면, 7장은 사도 바울이 순교를 얼마 앞두고 있지 않는 그때도 죄로 인한 갈등과 고투가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사도의 내면세계의 경험이 무엇이었느냐면 죄문제였다. 7장에 나오지 않는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것보다 더 큰 모순이 없다. 이거야말로 정말 극단적인 모순이고 대립이다. 내 마음의 소원은 율법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몇 번 죽었다가 깨어나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원은 실현되지 않고 내가 미워하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일상생활 중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순 속에 있는 고독한 인간이 느꼈던 영적인 고투와 괴로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 이런 사실에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기 몸에 칼을 대고 거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런다고 유혹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유혹은 고도의 영적인 것이다. 그 정도 팔 하나 자른다고, 눈 하나 판다고 그런 경험이 없는가? 아니다. 이 경험은 오래 전에 아다나시우스의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안토니우스가 한 말이다. 그는 광야에서 들어가 오랫동안 기도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죽은 줄 알았다. 광야에서 소식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무엇을 했냐면 기도하면서 세상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돌아온 그가 한 말이 있다. "내가 광야에 갔더니 세상이 나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 이거 심오한 말이다. 눈을 감는다고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귀머거리가 된다고 유혹이 없는 것 아니다. 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생애 말년까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멈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8장에서 뭐라고 하냐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방금 7장 읽었거든. 8장에 가면 이렇게 말한다. 아멘이 잘 나오지 않는다. 7장의 잔상이 나와서 8장을 읽어도 아멘이 잘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먼 이야기이다. 8장 이 말씀은 아멘하기 벅차다. 생각 없이 하면 할 수 없다. 정말로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롬 8:2을 읽을 때 이거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혼란을 느낀다. 그게 정상이다. 무덤덤하면 아직까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니까 옳겠지 생각한다. 한 번 고민해 봐라.

바로 이것이다. 여기 지금 뭐가 있냐면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 사이에 대립과 투쟁이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성령의 영역이었던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은 성령의 영역이다. 마치 이것은 롬 8:2처럼 읽어야 한다. 그런데 경험의 영역, 7장은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성령의 내주를 받은 신자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 안에는 무엇이 있냐면 해방과 승리와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좌절과 투쟁이 연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과 육체 사이의 대립으로 이해한다면 믿음과 확신 사이의 관계에 있는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칼빈의 주장은 잘 설명이 된다. 그런 도식 안에서 잘 봐라.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다. 로이드 존스 목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아내에게 물었다. 남편인 로이드 존스의 생전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아내가 한 말이 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침상에서 자다 보면 베개를 끌어 앉고 노인이 소리 없이 울더라는 것이다. 비통하게 우는데 잠이 깬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단다.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들어보았더니 자기의 죄때문에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건져주옵소서.
 
그러면서 비통하게 울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을 때, 목사님 부인도 그날 밤 한숨도 잠을 못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때 생각했던 것이 '아, 내가 위대한 성자와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자의 길은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있다. 누가 성자냐고 물으면, 사실 죄의 고통과 깊이를 아는 자이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깊은 죄인 없다. 남을 뜯어 고치려고 덤비지 마라, 사실은 자기가 문제이다. 죄인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기 잘못을 못보는 데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남에 대해서는 눈이 밝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뭐라고 하냐면 죄인이라고 한다. 성자는 누구냐, 자기 자신의 죄를 깊이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성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롬 8:2과 같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기 때문에 이런 투쟁과 좌절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성령과 육체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라는 특징을 띠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성령이 신자들에게 임하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모순되어 보이는 듯한 상황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들이란 누구든지 육체의 법,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자연인들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자연인의 마음에는 이런 영적인 고투가 없었다. 평화로웠다. 왜냐하면 세상의 질서를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어떤 내적인 긴장도 충돌도 없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만약에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면 지금 사도 바울이 말하는 롬 7:14-15의 경험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들 속에서 내주하시는 그 순간부터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이 서로 충돌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의 새로운 법을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성령이 우리 안에 믿음을 씨처럼 뿌렸다. 성령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냐면 정말 아름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그 인간의 이상에 대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것이다. 거룩함을 알게 하고, 선한 것을 깨닫게 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게 한다. 그때부터 눈이 밝아진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그 이전의 편안했던 모든 것들이 마침내 다 실상이 드러나게 되고 그때부터는 그 죄를 벗어버리려는 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내적인 긴장과 충돌이 반복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성령의 내주가 무엇이냐? 한 인간의 혁명의 내적 시발점이다. 새로움에 대한 비전, 새창조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면 옛 질서에 대한 아무런 반감도 없다. 그냥 그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에 대한 하나님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나타나는 것이다. 새로움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 질서의 비참한 상태, 저주스러움을 마침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새로움이 심각한 상태, 저주스러움을 마침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소위 말하면 부정(negation)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완전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본 것은 절대로 부인(deny) 못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보고 약속으로 받은 그것을 좇아가려고 하는 이 강력한 운동은, 한편은 자신의 현 질서를 부정하려는 부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런 충돌이 생기느냐? 성령의 내주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씨를 받은 신자는 성령의 뜻에 따라 그 마음의 소원이 정위(正位)하게 된다. 오리엔틱. 하나님의 뜻에 이제부터는 맞추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질서의 혼란이 온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영광에 들어가기까지는 옛 사람은 죽었지만 육체의 법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인 거다. 이게 핵심이다. 내가 이건 성화론 할 때 말씀 드렸는데, 옛 사람은 죽고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는 예수님 홀로 고독하게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택정한 그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서 다시 못 박혀 돌아가셨단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죽으실 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단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누구냐? 우리의 옛 사람이다. 그런데 옛 사람은 죽었어. 여기서 옛 사람은 죽었지만 뭐가 남았느냐?

우리의 육체의 소욕은 그대로 죽지 않고 남아 있다. 이 육체의 소욕은 언제 죽느냐면 우리의 육체의 죽음을 죽을 때 마침내 육체의 소욕도 멸하기 된다. 육체가 살아 있는 한 육체의 소욕은 있잖은가? 인간의 욕심, 정욕, 악한 부패한 성향 이런 것들은 여전히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세워질 때 우리 옛 사람은 죽지만,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옛 사람이 죽었다고 이렇게 말한다.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자.” 이렇게 말할 때도 부정과거형으로 말한다. 이미 끝난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 'Lust' 이것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영역 안에서 육체의 법과 성령의 법이 충돌하면서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는 것이다.

로마서 6:6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여기 보면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 못박혔다고 그랬지 않은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옛 사람이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옛 사람이 누구냐? ‘παλαιός’, 이 옛 사람은 ‘새 사람’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대척점이 있는 것이다. 새 사람이 있고 옛 사람이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바울 서신에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로마서 6장에서 이 옛 사람은 중생하기 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전에, 자연인이자 동시에 아담 언약 안에 있던 죄인으로서의 우리 자신들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법적인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법인’이라는 말 아는가? ‘법인’이란 실제적인 인격체가 아니지만 인격체와 동등한 법적인 대표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 법적인 자아가 죽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 옛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 것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죽음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할 때 그렇게 하면 다 틀린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설교하면 틀렸다. “우리 자신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시다!” 죽이긴 뭘 죽이는가? 이미 다 죽었는데?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그 주체는 옛 사람, 법적인 자아이다. 여러분 ‘신분세탁 한다’는 말 들어보았는가? 일종에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미국 시민권도 가지고 있고 한국 시민권도 갖고 있어서 이중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이 국적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버린다.
 
하나를 버릴 때, 한국 시민권 또는 미국 시민권을 버리게 된다. 미국 시민권을 만약 버린다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겠다는 포기 서약서를 대사관에 내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미국 시민권을 파기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미국 시민권으로서 나는 죽는 것이다. 미국 시민권이 죽고 난 다음에 미국에 들어갈 때에는 평범한 외국인, 관광객으로 비자를 받아 가야 된다. 바로 그런 개념으로 옛 사람이란 말이다.

우리는 사실 어디에 속했었냐 하면 법적으로는 아담 언약 안에 있었다. 아담 언약 안에서 아담의 죄를 물려받고 아담의 문명 안에서 우린 죽을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이다. 바로 그 법적인 ‘나’,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내가 죽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으로 이제 마침내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란 그렇게 아담 언약 안에 속해 있는 나 자신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난 그것이 중생이다, 법적인 의미에서.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옛 사람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옛 사람이 죽은 사건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일어난 사건! 우리의 경외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우리의 구속은 그때 성취된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 어떻게 되느냐? 그 구속의 효과가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주체로 거듭나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십자가의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옛 사람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단번에 일어난 사건이다.

한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출애굽기 14:13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간 종살이를 마치고 갈라진 홍해의 마른 바닥을 건너서 애굽을 탈출했을 때 모세가 한 말씀이 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 14:13).
 
애굽 사람들을 다시 못 본다는 말은 애굽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고 주인으로서의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위해서 군림하고 매를 때리고 노동을 시키고 자유를 억압한 그런 독한 주인으로서의 애굽인은 다시, 이제는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끝났다!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를 건너는 그 날부터이다.
 
애굽인들은 절대로 그들의 주인으로서 못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면 이 이스라엘의 남 유다가 탈락해 가지고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애굽 사람들을 그들의 주인으로 다시 불러 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의 이 모세의 말씀대로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갈대아 사람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다시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 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면 가나안 시대에 태어난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에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자신들이 말이지, 노예였던 유대인으로서의 자아는 언제 죽었느냐? 그 홍해를 건넜을 때 이미 다 죽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옛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게 옛 사람은 죽었지만 뭐가 남았느냐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다. 이것을 뭐라고 하냐면, 사도 바울이 ‘육체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의 법’이라고 해서 우리의 육체의 죄의 덩어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돼! 육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이다. 육체는 특별하게 인간의 도덕적인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단지 이 육체가? 사람을 죄로 끌어 들이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유혹이 이 육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을 통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죄를 짓는 것이 반드시 사탄의 유혹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 안에서도 죄를 짓게 하는 힘이 있다. 강력한 힘이 남아 있다.

갈라디아서에 가면 사악한 욕심을 육체의 소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육체의 소욕이나 육체의 법은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갈 5:17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여기에서 보면 이 성령의 내주하고 있는 사람이 승리를 선포했지만 실제로 그 경험에서는 승리를 경험하지 못하고 고투를 계속해야 되는, 싸움을 계속 투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육체의 소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법을 대항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험의 영역 안에서는 성령의 내주가 무엇으로 경험되는가? 우리의 경험의 영역 안에서는 성령의 내주가 언제나 죄와의 싸움으로 경험된다. 죄와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죄와의 싸움이 멈추는 사람, 저 사람은 성령의 내주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다. 칼빈도 그 말을 한다. 죄의 고민이 없는 사람, 신자가 아닐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의 내주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죄와의 격한 투쟁이 전개되는 것이 당연하다. 어디에서? 경험의 영역에서.
 
그러나 하나님께로 우리가 눈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는 우리를 뭘 노래하게 되느냐? 로마서 8:2을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시지.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보게 되면 뭐가 있느냐? 곧 투쟁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괴리가 있다.

믿음과 확신을 이런 관점에 잘 보란 말이다. 성령의 사역, 성령의 내적인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과 확신은 언제나 있다. 복음을 들을 때는 반드시 믿음 안에 확신이 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때는 우리 안에 확신이 있다. 그런데 우리 현 경험을 들여다보면, 나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불안이 있는 것이다. 의심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어떤 면에서 확신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반드시 그와 같은 패턴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신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면, 다른 말로 하면 확신이 구원의 서정의 하나라고 하면, 다른 말로 이 확신이 성령의 적용의 결과라면, 확신 역시 바로 이와 같은 로마서 8:2, 로마서 7:14,15이 있다. 그런 구절 사이에 있는 괴리와 긴장처럼 확신도 그와 같은 패턴을 따라갈 것이라는 것이다.

육체의 법에 대한 성령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성령이 반드시 육체의 법을 꺾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육체의 법에 대한 성령의 투쟁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고 그 성령은 언제 나타나냐면 종말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이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육체의 법에 대한 성령의 승리는 필연적이고 종말론적이다. 육체에 대한 성령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말론적인 소망이고, 그런데 이생의 경험에서는 마지막 종말론적인 상태가 이를 때까지는 투쟁이 반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내주와 그것으로 인한 신자의 경험의 모순, 로마서 8:2, 로마서 7:15, 16. 그 경험의 모순은 바로 현재적인 경험과 종말론적인 약속 사이의 대립이라고 보면 된다. 현대적인 경험은 불완전하고 종말론적인 약속을 완전하다. 그 종말론적인 약속을 생각하면 우리 안에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험을 생각하면 투쟁이 없다. 그런데 그 투쟁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승리로, 성령의 승리로 끝낼 투쟁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낙관할 수 있지만 그러나 투쟁 자체를 보면 너무나 힘겨운 까닭에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다.

자, 이 원리,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 사이의 대립이라고 이 원리를 어디에 적용해야 하느냐?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이 ‘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 ‘믿음의 경험으로의 확신’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그대로 잘 적용해야 한다. 칼빈이 이렇게 설명한 것은 아니다. 아닌데 칼빈의 이 성령의 법과 육체의 법에 대한 그의 논리적인 사고를 따라가면, 이 확신의 문제도 설명이 잘 된다는 소리이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왜냐하면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확신도 성령의 씨라고 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단정적이다. 그냥 주신다. 그러나 육체로부터는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과 혼란이 초래된다.
 
성령으로부터는 믿음과 확신과 기쁨이 온다. 그러나 두려움으로부터는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이 온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이 믿음의 경험 안에서는 무엇이 있느냐? 두려움과 의심이 있을 수밖에 없고, 때로는 확신이라는 것이 우리 의식 속에 포착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것은 믿음과 확신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 성령의 사역에 우리가 거기에 우리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역사하는지 이 복음을 통해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린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게 될 때는 뭐가 오냐면 마음의 확신이 확!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는 것 같이 들어오는 것이다. 빵빵하게 들어온다. 그런데 즉시로 이게 마치 바늘에 찔린 풍성처럼 쏵! 꺼진다. 언제? 그 말씀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말씀에 우리의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가 그 다음에 먹고 사는 것 생각하고 이런 세상을 고심하다보면 확신은 정말 하루아침에 바람 빠진 고무처럼 쑥 빠지는 것이다. 그럴 때 낙심하는 것이다. ‘아 내가 구원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천국 가는구나’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러니까 시각에 따라서 우리 마음의 의식이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향하고 복음의 소리를 들으면 믿음으로 충만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되고 현실로 돌아와서 현실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좌절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이 두 원리, 예를 들면 성령의 분명한 위로, 그것과 함께 육체의 불완전함이 두 원리로 공존한다. 그런데 이 두 원리가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공존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불안과 의심은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불안과 의심은 육체로부터 오는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믿음과 확신이다. 이 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있지만은 혼합되거나 종합되지 않는다. 섞이지도 않는다. 이 둘은 같이 있기도 하지만 둘은 절대로 섞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둘의 출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래로부터 온 것이고 하나는 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섞이지 않는다.

따라서 신자는 이 두 원리 안에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위로 받을 때는 확신이 들어오고 때로는 육체로부터 의심과 두려움이 시달리기도 하고, 이게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이 있다. 반드시 성령의 위로가 두려움과 의심을 몰아내고 우리가 확신하는 바 그 영광에 서게 될 것을 어디서 가르치고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도와 성찬이라는 은혜의 수단으로 신자는 믿음의 정신의 힘을 얻고 싸우며 더 분투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위로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을 주셨는데 그것이 기도와 성찬(성례전)이다. 그래서 성찬을 받을 때, 기도할 때 사실 우리의 정신이 이 성령의 위로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기도의 목표는 은혜이다. 그러나 진리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바로 말씀으로부터 온다. 말씀이 먼저요 언제나 그 다음에 기도이다.

1.1.3. 믿음의 본질과 믿음의 현실 사이의 차이

조금 강조점이 다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성령의 씨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믿음과 확신은 불안이나 의심과 섞이거나 혼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선물이요 씨이기 때문이다. 절대 불안이나 의심과 섞이지 않는다. 공존할 수는 있어도 섞이지 않는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신자들이 구원에 대한 확실성은 말할 수 없고 개연성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이를 거야’라고 이정도만 말할 수 있지 ‘나는 구원에 이른다’는 확신에 이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속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믿음은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은 성령이 심으신 것이므로 그 안에는 언제나 반드시 확신과 확실성이 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한 가지는 분명이 가르쳐야 한다.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만 하면은 그 믿음 안에는 나의 의식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확실성과 확신이 있다.
 
따라서 확신은 참된 믿음의 본질이, 확신은 믿음의 크기와 상관없고 오직 믿음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록 신자가 믿음을 의식하는데 있어서 연약하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믿음의 본질로서 확신은 소멸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신자가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확신은 없어진 게 아니고 단지 확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확신이 없는 신자가 그건 확신을 새롭게 받아드릴 문제가 아니고 믿음 안에 있는 본질로서의 확신을 자기의식 세계 안에서 다시 되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확신을 달라고 할 것이 아니고 확신을 새롭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확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부르짖어야 한다. 왜냐면 이미 믿음이 들어올 때 확신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거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비상금을 어디다 깊이 넣어놨다가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 뒀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된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뜻밖에 내가 먼저 발견하게 되면 기쁘다. 그런데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도 그러나 그때도 그건 거기에 있었다. 다만 내가 몰랐을 뿐이다. 확신이란 바로 그렇다.

확신이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있는데 육체로부터 의심과 두려움과 공포가 찾아오기 때문에 그 확신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엇을 구해야 하느냐? 그 확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제 2의 은혜의 수단을 구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없다고 꾸짖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미 있고 믿음이 있다면 확신이 있기 때문에 뭘 해야 하느냐? 믿음과 확신은 유기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므로 확신이 없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서 확신은 갖도록 노력하기를 촉구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은혜의 수단은 무엇이냐? 기도와 성례전이다. 그 외에도 칼빈은 은혜의 수단을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칼빈 신학, 개혁주의 신학에 속해 있는 특징이다.

하나님의 1차적인 이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약속 외에도 우리의 속에 있는 믿음과 함께 확신을 되살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성령이 동원하시는 수단이 있다는 것이다. 선행의 열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교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 그런 것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확신을 되살리는 것은 대단히 목회적인 것이다. 신학적인 것이 아니고.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확신을 더 갖게 하는 것은 신학적인 일이라기보다는 목회적인 것이고 그것은 기독론적이라기보다는 성령론적이다. 한마디로 목회자가 열심히 교인들에게 확신을 갖도록 힘을 보태주고 독려하는 일이다.

1.1.4. 구속경륜(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는 관점

다른 말로 하면 구속경륜이라는 관점에서 믿음과 확신 사이에 있는 긴장과 대립의 문제를 설명해 낼 수 있다. 자, 구속경륜의 핵심은 무엇이냐? 아버지는 선택하시고 아들은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구속을 성취하시고, 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는 십자가에 죽으심.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실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적극적인 순종의 정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부터에서 그가 이 땅에 떠나실 때까지 모든 생애가 구속 사역이었다. 그런데 그 구속 사역을 마지막 종결하는 정점은 무엇이냐?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그 때 우리의 육체의 사람이 함께 죽었다. 우리의 구속의 성취는 그때 이루어졌다. 구속은 이미 성취되었다.
 
그 다음에 성령은 성취하신 구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심으로서 그들의 주관적 경험 안에서 구원을 수여 하셨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사람을 선택하고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구속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위하여 성령의 개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시고 주관적인 경험 안에서 그들의 것이 되도록 하게 하신다.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언제나 우리 구원을 위해서 협력하신다. 언제나 같이 일한다. 아들이 일할 때 아버지와 성령이 함께 일하고 성령이 내주하시고 역사하실 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역사하신다.

자,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함으로써 신자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게 하고 의심과 불안을 극복하게 하신다. 확신은 사실 성령론적인 사역이다. 칼빈은 모든 구원의 경험 즉 부르심, 칭의, 성화, 영화, 확신, 견인 이 모든 것을 다룰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보다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더 많이 다루고 있다.
 
이런 구원의 적용은 성령의 전적인 사역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 또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냐? 믿음도 주시고 의심과 불안을 물리칠 수 있도록 확신도 성령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시고자 할 때 동원하시는 수단 중에 하나가 아버지의 선택과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아 내가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에 이르게 되겠구나’ 확신을 갖게 하시고자 할 때는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선택을 신자들에게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점이 칼빈 신학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예정론을 지금 어디에 적용하고 있느냐면 신자의 삶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확신의 의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확신을 강화한다고 가르친다. 이 점이 특징이다. 이해하는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예정론을 가르치면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확신을 갖게 되기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목사님들을 만나서 가르치다보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예정론 가르치게 되면 전도 안 되고 예정론을 가르치게 되면 확신도 흔들린다고 한다. 왜 흔들리냐고 물으면 그 논리가 지극히 단순 논리이다. 무슨 말이냐면 선택됐는지 안됐는지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그러나 칼빈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이 점은 칼빈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 역시 신학은 사람의 아이큐만 가지고 지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신학이 고도화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면,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것도 몹시 사랑해야 한다. 정말 칼빈이 자기의 모토처럼 내걸었던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즉시로 전적으로 바칩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정말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한 없이 존경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정말 하나님께서 높이신 만큼 높이는 사람이라야 개혁주의의 신앙정신을 도움 받을 수 있다. 정말 사랑해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가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는지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으면 이렇게 못한다. 선택을 통해서 구원의 확신을 강화한다는 이런 식의 사고는 나올 수 없다. 가만 보니까.
 
왜냐하면 칼빈은 이 선택을 잘 가르치게 되면 한마디로 말하면 “예정론을 정당하게 사유하게 되면 매일 확신 가운데 살도록 부름 받은 신자들의 믿음을 확정짓는데 매우 유익하다.”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이냐면 예정론을 늘 가르치게 되면 그래서 매일 확신 가운데서 살도록 부름 받은 신자들 믿음은 확정짓는데 예정론이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자기의 경험이다.
 
칼빈은 자신의 확신을 어디서 얻었느냐? 예정론을 통해서 확신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선택에 근거를 둔 확신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결합되어 있다.” 이 칼빈의 머리 속에 있는, 이 확신과 하나님이 선택이라는 이 두 주제를 그가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 그 논리를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자, 한번 논리를 살펴보자.

(1)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그의 논리적 사고에서 첫 번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무엇인가? 실제로, 정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구원받으면 좋고 불순종해서 구원을 못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아니고 반드시 저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로 하시는 신적 결정이 선택이다. 그러니까 칼빈의 선택을 통해서 확신의 힘을 얻는다는 그의 신학적 사고 논리 안에 첫 번째 스텝이 있는데, 그 첫 번째 스텝이 바로 이것인데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 필요로 한다. 잘 기억하라.

(2) 선택은 선택된 그들 자신의 됨됨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서 1:5절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선택의 근거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근거가 아니다. 그러니까 ‘not in themselves’가 아니고 ‘only in him(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반드시 실제적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 그러니까 두 번째는 그 선택은 선택된 그들 자신의 됨됨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 택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으므로 확신은 결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그들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아버지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 확신은.

(4) 따라서 확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확신의 기반이 된다.

칼빈의 신학이 이렇게 아주 논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확신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연합은 누가 하는가? 성령이 하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중생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확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확신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 무엇이 없냐? 육체로부터 두려움과 의심과 공포 때문에 이 확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확신이 소멸 되었다. 확신이 우리 의식 세계에서 소멸되어 버렸다. 거기 어디 있긴 있는데 확신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깜깜한 밤중에, 어두움 가운데서 뜸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확신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때 칼빈은 어떻게 했느냐? 다시 어디로 돌아갔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논리를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확신은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우리들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택자를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그 선택은 실제적인 구원을 목표로 한다. 나는 데까지 올라가게 되면 ‘아, 내가 구원에 이르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이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무엇을 하시느냐? 아버지의 선택, 그리스도 안에 잇는 아버지의 선택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회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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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근 교수가 들려준 신학과 신앙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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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근 교수 소개>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현,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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