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근 교수, 구원의 확신(5)

콤리의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

리폼드뉴스 | 기사입력 2012/03/18 [10:05]

박혜근 교수, 구원의 확신(5)

콤리의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

리폼드뉴스 | 입력 : 2012/03/18 [10:05]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살아계셔서 믿는 자들 가운데 함께 하시고 주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자비를 받게 하시며 이 땅에서 믿음의 길을 걷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시간 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종들에게 동행하시고 듣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확신 가운데 설 수 있도록 붙잡아 주소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되 늘 죄와 싸우기를 힘쓰는 자들 되게 하시고 날마다 죽고 거듭나며 그리스도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 시간에도 주님 함께 하시길 간절히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주에 알렉산더 콤리에 대해 설명하다가 말았다. 화란에서 제2 종교개혁이 있었는데 그 주역 중의 한 사람이 알렉산더 콤리라고 하였다. 알렉산더 콤리는 주로 믿음과 칭의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하였고, 특별히 확신과 관련해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는데 지금 현재 콤리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그의 생각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공부했던 내용을 상기하라.

당시의 개혁파 칼빈주의 정통 안에는 확신의 문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한쪽 진영에는 Brakel, Lamped 같은 사람이 있었고, 또 한 쪽에는 Groe, Thuynen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였다.

브라켈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과 목마름을 도피성을 찾는 믿음이라고 부르고, 이들은 확신을 믿음의 열매라고 하였다. 믿음의 열매라고 할 때는 믿음의 본질이 확신이라고 했던 칼빈의 가르침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들은 확신하는 믿음과 도피성을 찾는 믿음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믿음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칼빈은 단순한 믿음을 주장했다. 구원하는 믿음 그리고 거짓 믿음 두 가지로만 나누었다. 그러나 브라켈 같은 경우에는 도피성을 찾고자 하는 믿음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믿음이라고 두 가지로 나누었다. 두 종류라기 보다는 믿음의 두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확신은 믿음의 열매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브라켈의 주장이다.

여기에 맞서서 Groe, Thuynen 같은 사람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던 칼빈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강변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믿음과 확신을 분리하게 되면 도리어 목회적으로 위험해진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확신하는 믿음이 없으면서도 단지 그리스도를 향한 갈급함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에 섣불리 자신들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오판을 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이들은 믿음과 확신을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주저했고 대신에 그것을 동시적인 것으로 또 필연적인 관계를 가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런 두 진영의 논쟁이 계속 되고 있는 중에 콤리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그의 저술에서 나타난 믿음에 관한, 믿음과 확신에 관한 가르침을 재정립을 해 나가게 되는데 단순하게 반복한 것이 아니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그것을 좀더 분석적이고 좀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구조 안에서 재정립을 했던 사람이다.

자, 오늘 어떻게 했는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콤리는 제일 먼저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동을 둘로 구분했다. 그래서 라틴어로 하면 habitus and Actus of faith. habitus는 원리 혹은 본질 그런 뜻이다. Actus는 영어로 action인데 믿음의 표출, 겉으로 드러난 가시적인 결과, 행동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말로 믿음의 원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 믿음의 원리, 믿음의 행위 이렇게 둘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콤리의 주장이다.
 
이렇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칼빈의 믿음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이미 암시된 바 있다. 칼빈이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과 확신은 언제나 같이 있다”고 한편 다른 곳에서는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런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듯 한 두 가지 주장은 믿음에 대한 그의 이해 안에서 설명된다고 네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런 가르침을 콤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좀 더 자신의 시대에 논쟁과 관련된 흐름 안에서 믿음을 이렇게 두 가지 측면에서, 두 가지 관점에서 나눠봐야 된다고 말한 것이다. 아까 브라켈 같은 경우에는 믿음의 두 가지 스텝을 말했다.
 
그러나 콤리는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두 가지 스텝을 나누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믿음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얼핏 매우 비슷한 접근 같은데 그 안에 차이가 있다. 믿음의 원리는 한 사람이 중생할 때 새로운 본성과 함께 주어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수여하시는 감화, 감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믿음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정말 감동이 일으키게 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학개서에도 나오지만, 에스라에도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인이었던 다리오의 마음을 감화하사(우르),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해서(우르) 그로 하여금 유대인들로 하여금 고토로 돌아가게 했다. 감동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우르는 일깨운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이었던 고레스의 마음을 감화하실 때 고레스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그는 아마 그 당시는 감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정치적인 이해관계 안에서 유대인을 돌려보내는 것이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레스라는 사람의 의식 세계 안에 작용했던 표면적인 이유 말고, 그 모든 이유보다 더 깊은 심연의 자리에는 모든 사고를 지배했던 하나님의 우르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감동이 본인이 감지하지 못하는 매우 신비로운 방식으로 한 사람의 지적이고 의지적인 결정을 이끌어내는, 아리스토텔레스 용어를 빌리면 제1원인으로 자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이사야에서 예고되었다. ‘내가 장차 한 사람 고레스를 세우고 그를 감동하여’라고 할 때도 우리를 사용한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에서 총독에서 업무를 볼 때 이런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감동하시매” 감동하다는 말이 우르이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감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줄로 알고 그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능력은 고레스가 받았던 그런 식의 그런 감동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작용이라는 면에서는 고레스에게 있었던 그 감동이나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있는 의미를 깨닫는 것이나, 둘 다 저자는 성령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지만 그 특징은 다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나를 위한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성령의 감동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의 마음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 때 그 믿음을 콤리는 믿음의 원리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변모되어가는, 소위 말하는 중생적 변화의 시작, 그 첫 번째 나타나는 변화가 믿음이다. 믿음이 먼저 들어와야 한다. 믿음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넣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믿음이다. 그래서 은혜로운 선물이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나의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은혜 위에 또 은혜이다. 언제나 은혜가 또 다른 은혜를 부른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은혜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더 큰 은혜를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모든 은혜는 밖에서부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그 믿음, 하나님의 더 큰 약속의 은혜를 불러들이는 그 첫번째 은혜가 믿음이다. 바로 그 믿음을 콤리는 믿음의 원리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언제 주어지냐면 사람이 중생할 때 주어진다.

그런데 이 믿음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향해서 가졌던 순종하는 믿음, 완전한 믿음.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모든 권능과 영광을 우리의 것으로 같이 받아 누리는 것이다. 어쨌든 중생할 때 주어지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는 본질적인 원리로서 믿음을 그는, 믿음의 원리하고 하였다.

자, 이렇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분리할 수는 없다. 분리할 수는 없는데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분리해서 이렇게 다루게 될 때의 유익은 믿음의 행위가 신자의 공로로 간주될 수 있는 가능성, 혹은 여지를 차단할 수 있다는 효과가 있다. 결국 믿음의 행위는 어디서부터 오냐면 믿음의 원리로부터 오는 것이다. 믿음의 원리가 없다면 믿음의 행위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믿음의 원리는 본질이고 Actus는 그 본질에 따르는 가시적인 결과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믿음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도 결국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원리로부터 비롯되는 가시적인 결과임으로 사람이 자신의 공덕으로, 혹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믿음의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도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원리에 따르는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말하게 되면 인간의 공로주의가 개입될 수 여지는 차단될 수 있다. 콤리는 그런 점 때문에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화란개혁파 가운데에서 당시에 번지고 있었던 믿음과 확신에 대한 논쟁은 중생할 때 주어지는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다양한 행위로서 믿음의 Actus(표출)를 구분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중생할 때 주어지는 믿음의 원리가 있고, 그 믿음의 원리 때문에 나오는 다양한 믿음의 행위들이 있다. 믿음의 행위 그것들이 믿음의 Actus(표출)이라고 보는데 이 둘, 원리와 행위를 구분하지 못해서 당시 화란 개혁파 안에서 번지고 있었던 논쟁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믿음의 원리를 말하면서 중생할 때 하나님에 의해서 신자의 마음에 주입되는 새로운, 전혀 새로운 것, 그 전에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으로 감지하거나 확인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원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뭐라고 하냐면 존재론적인 자질인데, 우리 안에 존재론적 자질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믿음의 원리라고 설명했다.

반면에 믿음의 행위는 믿음을 실천적인 실체로 만드는 능동적 행위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원리는 중생할 때 주어지는 신자의, 택자의 존재론적인 새로운 자질이 하나 생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존재론적인 자질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가 무엇이냐면 믿음의 행위이다. 이 믿음의 행위는 믿음의 원리를 실천적인 실체로,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어떤 실체로서 믿음의 원리를 말했던 것이다.

자, 그는 이렇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나누게 될 때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유익을 나열했다. 언급해 볼 테니 잘 듣고 잘 정리하기 바란다.

1.1. 콤리의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나누게 될 때의 유익함들

첫 번째, 믿음의 원리를 강조하게 되면 믿음의 특정한 행위가 신자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하는 힘을 지닌 것처럼 만들 만큼 그것을 높이는 행위를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믿음을 원리를 강조하게 되면 믿음의 원리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다양한 믿음의 행위들을 신자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처럼 믿게 만들만큼 그런 행위들을 높이는 신학적 과오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믿음의 원리를, 믿음의 행위와 나누게 되면 믿음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과오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원리를 분리하게 되면 믿음의 원리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다양한 믿음의 행위가 사람들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만들만큼 힘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높이는 신학적 과오를 막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든지, 선행을 하게 된다든지, 혹은 기도를 한다든지 이런 믿음의 특정한 행위는 바로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두 개를 이렇게 분리하지 않으면 ,예를 들면 믿음의 원리로부터 믿음의 행위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사람들은 믿음의 행위만을 강조하게 된다.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면 나중에 이런 식의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확신이란 믿음의 행위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율법주의에 떨어질 공산이 크다. 하나님의 은혜는 온데간데없고 인간 행동주의만 남는다. 결국에는 우리 한국교회 그렇게 하지 않는가. 확신이 없으면 기도하고 말씀보라고 한다.
 
그런데 확신과 행위 사이의 관계가 확신이 믿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확신의 근거는 어디냐면 칼빈은 믿음 위에 확신이 선다고 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믿음이 크든 작든 간에 확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인이 감지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자신이 구원을 가지고 있는데도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좌절할 수 있다.

그래서 매튜 리더라는 청교도 신학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까이 떨어진 것처럼 괴로워하는데 그는 결국 신자로 드러나고, 어떤 사람은 천국에 다 간 것처럼 생각했지만 나중에 지옥에 가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왜 생기냐면, 확신이 때로는 구원하는 믿음과 함께 완전히 소멸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본인이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지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이란 그 믿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는 그가 결국에는 믿는 자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위선자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는 천국에 가까이 간 것처럼 확신하고 살았는데 그 사람의 최선은 결국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런 일이 왜 생기냐면, 확신이 가진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살아있을 동안에 목회자들이 신앙적으로 잘 가이드 해야 한다. 가르치고 교육을 해야 한다. 또 확신을 얻게 하는데 필요한 수단이 있다. 그 수단은 선행이다. 선행이 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소위 말하면 확신을 갖게 해 줄 수는 없다. 없는 확신을 기도나 선행을 통해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렇게 만들어 내면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구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확신이 없는 경우에는 선행은 확신을 인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하는 믿음을 먼저 갖도록 하는 것이 확신에 이르는 유일하고 최선을 길이다.
 
그러나 확신을 갖는다는 말은 매우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확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확신과 구분되는 것이다. 확신은 저기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이 내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른 채 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확신이 있고,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실체와 주관적인 경험 사이의 괴리를 매우는 작업을 목회자들이 도와줘야 하고 메우는 수단 중의 하나가 선행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이 남북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해방이 되었지만 그 사람들이 실제로 자유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 주관적 확신은 노예 해방선언이 이루어지고 난 20-30년대까지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자유 시민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과 그들의 신분이 법적으로 자유 시민이 된 것하고는 무관하다. 아무 관계없다. 단지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기회를 향유하지 못한 것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들이 자유 시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 관점에서 확신을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지,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음 질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두 가지 habitus하고 actus를 구분할 때 생기는 유익이 무엇이냐, 결국 중생할 때는 habitus가 들어온다. habitus가 들어오면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부터 actus가 비롯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게 되면 나중에 actus를 강조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행위가 사람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는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신학적 과오는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콤리의 생각이다.

그는 행위로서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말할 때, 행위로서의 믿음이 신자의 공로로 인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행위로서의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한다고 이렇게 말하면 결국에는 행위로서의 믿음이 그 행위의 주체인 나의 공로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위험은 가능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제인 하지(Zane Hodge)는 견인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견인하지 않아도 한번 딱 고백만 하면 그 한 번의 고백이 그 사람의 고백을 확정짓는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 따라서 신앙을 고백한 그 이후에 믿음을 설령 잃어버리는 지경까지 떨어진다고 해도 그 사람의 구원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것이 제인 하지이다. 우리는 그들을 비전통적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무상 은혜의 교리를 주장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무상은혜의 교리와 맞선 사람이 누구냐면, 주권 구원(Lordshipsalvation)-교리의 핵심은 믿음과 제자도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주권 구원이다. 그러니까 결국 주권 구원에서는 구원과 제자도는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주권 구원의 대표적인 사람은 잔 맥아더이다. 그가 주권 구원을 부르짖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주권 구원의 교리적인 핵심은 구원과 제자도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면 그 사람은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곧 제자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청년집회 가면 이런 소리 많이 한다. 제자 됩시다! 제자 되는 것 좋다. 다 제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뭐냐면 제자도라는 삶의 순종, 그것과 구원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실천적인 순종, actus가 없으면, 제자도하고 구원이 동일하다는 말은 제자도가 신분으로서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으로서, 행동으로서의 actus를 말하는 것이다. 역동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실천적인 삶의 순종과 구원은 동일한데 만약 그런 순종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제자도의 삶을 삽시다. 그게 주장이다. 그 순간은 두 발로 천국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지? 다 자빠져 있다. 끝까지 못 간다.

이 주권 구원의 결론이 은혜의 재발견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아! 은혜가 없이는 주님의 나라에 못 간다는 이 사실을, 처음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의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요, 믿음의 완성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은혜의 재발견을 못하면 잔 번연의 은혜의 세계로 귀착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실패자로 끝난다. 느브갓네살로 끝나고, 고레스로 끝난다. 그런데 이 주권 구원은 actus를 강조한다.

잔 맥아더의 주권 구원을 반박하려고 제인 하지가 「완전 공짜」라는 책을 썼다. 1989년에 나왔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단 한 번의 수납으로 인해서 신자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기적적인 내적 변화를 겪게 된다”라고 한다.

4영리를 처음 제안한 사람이 빌 브라이트인데, 그것을 처음에는 “나는 이 시간부터 주님 앞에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끊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죄에 대한 인식과 회개를 먼저 삽입을 하였다. 그런데 기도해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생략했다. 그래서 4영리에 그것이 빠졌다. 치명적인 것이다. 죄에 대한 고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토록 죄에 대해 싸우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는 회개에 대한 요청이 없다. 그런 식으로 예를 들면 내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것, 아주 기계적인 것이다. 기계적인 그것, 아멘 오케이 하면 끝나는 것이다. 마술 같은 몇 개의 문장만 나열하면, 그리고 그 문장에 동의만 하면 신자가 되는 것으로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찰스 피니가 이렇게 하였다. 정말 그러하냐는 신학적 반성을 했어야 하는데 그런 반성이 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다 그렇다. 이것을 안일한 믿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 믿음을 계속 존속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런 점을 주장하다가 자칫하다가는 믿음을 한 번 수반 수납하는 것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놓치게 된다라는 말이 그 책에 나온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면 믿음의 존속보다는 믿음의 고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의 존속을 신학적인 용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견인은 있어야 하는데 누가 그 견인을 부정하느냐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한 번의 신앙적 고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계속 책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 “물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믿음이 계속 되어야 하고, 또 필연적으로 그러하다는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견인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의 행위에 따를 뿐 믿음의 지속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도 믿음의 행위라는 말이 나온다. 믿음의 행위를 지금 제인 하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무엇이냐면 신앙
 
고백, 결심, 그리스도를 가까이하고 싶은 열망 그런 것들이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그 사람이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사실은, 제인 하지하고 잔 맥아더하고 논쟁을 했는데 그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무엇을 강조하냐면 둘 다 actus를 강조한다.

우리가 확신과 선행, 확신과 순종을 다룰 때 설명하겠는데, 여러분 선행 좋은 것이다. 마땅한 것이다. 에베소서 1:4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시는 실천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기 위함이다. 성화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선을 행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예정의 실천적인 목적은 우리의 선행이고 성화이다. 그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기의 영광이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토록 세세토록 찬송을 우리들로부터 받으시려고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예정도 믿는 사람이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선행없는 예정론을 함부로 떠벌리면 안 된다. 예정론을 가르칠 때 반드시 그 예정론을 가르칠 만큼 자신의 삶이 선한 의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어젯밤에 진탕 마시고 인생 즐기면서 그 다음날 예정론 가르친다면 사탄의 열린 입이다. 그러니까 선행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칼빈도 말하기를 예정론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인 하지나 존 맥아더 둘 다 믿음의 행위를 구원의 토대로 삼고 있다. 이런 오늘날의 경향이 지금 화란의 제2 종교개혁 당시에 칼빈주의자들 당시에 있었던 문제였다. 이 말을 그냥 간단하게 표현하면 이런 위험은 교회 안에 언제나 상존하는 위험이다. 믿음의 행위 좋다. 믿음의 행위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의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콤리는 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믿음의 행위를 견제하고, 그 믿음의 행위를 강조할 때 생기는 신학적인 위험에 대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할 지 고민하다가 믿음의 habitus, actus 두 개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믿음의 행위가 없는 사람이라도 믿음의 본질만 있으면 그 사람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어느 정도 이론적인 주장이지만, 믿음의 원리가 없는 것, 중생할 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선물로서의 믿음이 없다고 할 경우에, 아무리 믿음의 행위가 있어본들 그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안내해지지 못한다. 이렇게 두 개를 구분하였다.

그래서 제인 하지는 믿음을 인간 행위로 돌렸고, 믿음의 행위를 구원의 기초로 삼았다. 하지의 경우에서도 이미 살펴보았지만 믿음의 행위가 구원의 근거로 오인될 위험은 화란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그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 하지는 habiuts와 actus를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람을 실제로 의롭게 하는 것은 행위로서의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믿음의 원리이다. 꼭 기억해야 한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냐면, 본질적인 믿음에서부터 온다. 이것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오늘날 바울 연구에 있어서 새 관점학파는 여기에 관계된다. 믿음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시도이다. 쉽게 말하면 믿음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믿음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못 한다. 그래서 원리로서의 믿음, 그것을 믿음의 행위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자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어떤 식으로든 브라켈이 주장하는 것처럼 믿음의 행위를 강조하는 시도는 위험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두 번째, 믿음의 원리를 믿음의 행위보다 더 높임으로써 콤리는 믿음의 유일한 원인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신자들의 관심과 주의를 모아보고자 했다.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아까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이라고? 예수 그리스도. 이 믿음은 예수님 자신의 믿음이 있고, 우리들에게 나눠주시기 위한 믿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 자신의 믿음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던 그 믿음이 우리가 선물로 받은 믿음이다.
 
만물을, 눈에 보이는 만물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정말 두려워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게 했던 부활의 영, 성령이 역사했던 예수님의 그 믿음이 우리가 가진 그 믿음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다른 믿음이 아니다.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의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사람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둘을 구분하면서.

에베소서 2:1에 보면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들이다.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인정하기 싫어도 사실이다. 내가 팔팔하게 살았는데 죽었다니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성경에 보면 영적으로 죽었다고 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고, 구원을 사모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도 옹호하고 격려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는 바로 그 상태가 죽은 상태이다.
 
그의 심장은 뛰고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심판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은 정죄 받았다. 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그의 머리 위에 있다. 그것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하고 결정적인 일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바로 그런 상태, 그것이 자연인의 상태이다.

전적 부패의 교리를 이렇게 설명하면 된다.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죽어있어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절실히 필요하고 결정적인 일을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아무것도 못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또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도 행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이 전적 부패의 상태이다. 이성도 살아있고 도덕적 양심도 다소간 살아 있다.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고 결정적인 것을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의 원리를 심어주는 자는 누구냐면 성령이다. 성령의 권능이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환영하도록, 말씀 안에 약속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힘껏 붙들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이라고 기쁜 마음으로 화답할 수 있도록, 강하게 믿음을 원리를 심어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다.

이렇게 믿음의 원리가 심어질 때 신자는 일방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객체에 불과하다. 그냥 수동적인 객체이다. 수동적인 객체를 설명하기 좋은 것은 허수아비이다. 넘어지면 일어설 수 없는 수동적인 객체, 그들에게 믿음을 넣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의 원리를 심어짐으로써 택자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고, 접붙임을 받아 들어가고, 그러니까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접붙임 받아 들어가게 되고 그와 연합하게 된다.

자,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순간, 믿음의 이식이 완성된다. 그때부터 그는 믿음의 행위를 하게 된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접붙힘 받는 순간, 그 나무에 모든 진기가, 영양분이 가지에 들어가게 된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마침내 열매를 맺고 살아있는 증거를 보인다. 그러니까 Actus, 믿음의 행위는 전적으로 믿음의 원리가 심어지는 사건의 결과이다. 결국 믿음의 원리가 심어지는 사건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지금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못 믿을 것이 없고 보지 못할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일이 없다.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것만큼 그들도 살아 있다. 그리스도가 과거에 보셨던 것을 우리가 다 볼 수 있다. 말씀을 통해 다 본다. 더 이상 더 나은 계시도 필요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접붙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라는 눈을 통해서 아들이 보셨던 천국의 영광과 아버지의 얼굴도 다 볼 수 있다.

세 번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믿음의 원리를 우선적인 것으로, 믿음의 행위를 차선적인 것으로 구분하게 된다.

그러니까 연합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와서 믿음의 원리를 설명하게 되면, 믿음의 원리는 우선적인 것이 되고, 믿음의 행위는 차선적인 것이 된다. 방금 전에 설명했다. 자, 그의 설명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믿음이란 없다.

예를 들면 믿음을 마치 그리스도의 주머니에 있는 어떤 물건처럼 분여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이란 그렇게 분여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참여하도록 초청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에 우리도 같이 함께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가 언약적으로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믿음에 합하게 되고, 그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택을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 향유하게 된다. 잘 기억해야 한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물건을 나눠주듯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믿음 안으로 연합을 통해 불러들이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이 연합의 사건이 믿음의 원리로서의 habitus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건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은택을 선물로 받아 누리게 된다.

시혜자인 그리스도가 그의 선물보다 더 중요하다. 선물을 주시는 자가 선물보다 중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는 그가 베푸시는 모든 선물보다 위대하고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선물이 참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그 사건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 말 꼭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약속, 그리스도의 선물이 참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확신하게 될 때는 언제냐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은혜를 베푸시는 자고 은혜를 베푸시는 자와 하나가 되는 순간에 그의 모든 선물이 마침내 내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콤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의 원리가 택자에게 수여되는 사건으로 본다. 무엇보다 이 대목이 콤리의 신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잘한 점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 사건이 믿음의 원리가 수여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콤리가 그 때 주어지는 믿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조금 잘못이다. 섭섭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믿음의 원리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새로운 믿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우리가 받은 바 그 구원하는 참된 믿음은 왜 참되느냐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참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면 구원의 확신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에 죽은 자 가운데 살림 받았다. 우리가 부활에 참여할 약속을 가지게 될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내가 가진 믿음이 그리스도의 믿음이기 때문에 나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림을 받을 것으로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스스로 난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연합이다. 그래서 콤리는 뭐라고 했냐면, 그리스도와의 믿음의 연합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그리스도의 믿음과의 연합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면 무엇을 구분하게 되냐면 habitus와 actus를 구분하게 되고, 그 habitus가 훨씬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나눈 것은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박수를 보내 주어야 한다. 신학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네 번째, 믿음의 원리를 강조함으로써 믿음의 행위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성을 강조하는데 유리하다고 보았다.

성령에 의해서 신자의 마음에 믿음의 원리가 심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행위가-잘 기억해야 한다- 항상 동일하게 강력하게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믿음의 원리가 성령에 의해서 심어지기는 했지만, 믿음의 행위가 언제나 강력하게 선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단 말이다. 그렇게 되지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믿음 그 자체로부터 그리고 그 자체로, 스스로 행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의 원리를 받았다고 해서 믿음의 행동을 이루는 능력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거 인정해야 한다. 믿음의 원리가 심어졌다고 해서 믿음의 행동을 이룰 수 있다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원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심어지듯이 믿음의 행동 역시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믿음의 행위 또한 믿음의 원리만큼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아, 정말 시원하다. 진리를 드러내주니 시원하다. 믿음의 행위도 믿음의 원리만큼이나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를 수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았다. 여러분 이 점은 나중에 목회자로서 교인들을 관리할 때, 특별히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자 할 때 이 말 꼭 기억해야 한다. 믿음의 원리가, habitus가 심어지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부터 온다.
 
말씀을 들음으로부터 믿음이 나온다. 그 때 믿음이 나온다고 할 때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도 포함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그 때 그 믿음은 믿음의 원리도 말하고, 믿음의 행위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결국에는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과 믿음의 원리와 믿음의 행위는 늘 같이 가는 것이다. 만약 확신을 얻고자 한다면, 믿음의 행위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결심 백 번 할 것 아니다. 차라리 말씀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 믿음의 행위는 가능해진다. 말씀을 듣지 않는데 무슨 믿음의 행위가 나오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은 긴밀한 관계 안에 있다. 믿음의 원리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Spirits com verbo.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이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원리를 심어주실 때는 이 말씀을 통해, 말씀을 들을 때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셨다. 루디아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계시 보고, 환상 보고 믿은 것이 아니다.
 
고넬료가 믿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말씀을 전해준 자가 없어서 그가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사도 베드로를 보내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갔을 때, 거기서 백부장 만나서 백부장이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듣고 그가 성령을 받았다. 말씀을 증거해야 한다. 말씀을 들어야 마침내 성령이 임하고 그 안에 무엇이 임하느냐면 habitus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방식으로 믿음의 행위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주의 성령이 믿음의 행위를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나의 자의적 결정이나 결심이 부족해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늘 이 시간부터 그거 버려야 한다. 결심 문제 아니다. 결심 백번 해도 안 된다. 성령 충만해야 한다. 말씀 듣고 성령 충만해야 한다. 말씀과 함께 하는 성령이 내 안에서 강력히 역사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의 행위가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행위가 계속 나오기 위해서 부단한 말씀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도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기 힘들다. 우리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

믿음의 행위가 종종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을 걷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말씀의 결과라고 믿어야 한다. 이렇게 됨으로서 믿음의 행위라는 것도 신자 개개인의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보게 되어 은혜의 의존성을 더 키우게 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믿음 행위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은혜의 의존성을 더 강화할 수 있다는 말은 옳다.

보통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으로만 이렇게 가르쳤는데, 이것은 믿음이 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암시하고 있지 않다. 믿음으로만 이 말이,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의로움을 얻게 해주는 원인이라고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믿음으로만’이라고 할 때는 믿음이 무엇을 가르치냐면,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뿐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오냐면,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부터 온다. 단지 그 은혜를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 무엇이냐면 믿음이다. 은혜를 우리 안에 불러들이는 은혜,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만 은혜를 받는다, 바로 그 뜻이다.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믿음으로만 믿을 수 있는 원리를 받고, 믿음으로만 믿을 수 있는 행위를 받는 것이다.

1.2.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

콤리는 또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믿음을 나눌 때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로 다시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된다고 했다. 아까는 믿음의 원리, 믿음의 행위 이렇게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된다고 하였다. 또한 콤리는 믿음의 직접적 행위, 믿음의 사색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Directus / Reflectus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로 두 가지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왜 이렇게 나누었냐면, 이렇게 나누게 된 이유는, 어떻게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점진적으로 확보해 나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답할 때,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확보해 나가게 되냔 말이다. 아까 믿음의 행위로서의 확신은, 주관적 의식으로서의 확신은 즉각적이거나 때로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말씀을 통해 그것이 점점 분명해지기는 하는데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바로 어떻게 라는 말은 그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냔 말이다. 주관적인 체험으로서의 확신,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도달하게 되냐고 물었을 때, 두 가지 관점에서 믿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생각 많이 한 것이다.

그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2항을 근거로 들어 설명하였다. “이 확실성은 허황된 소망에 근거한, 단순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 그럴듯한 확신이 아니라, 신앙에서 무오는 무오한 확신이다. 이 믿음의 절대적 확신은 구원의 약속들의 신적 진리와, 이 같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 이 영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이 영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날까지 우리가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니까 믿음의 절대적인 확신은 거룩한 진리 위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의 내적 증거는, 내 마음에 찾아오는 주관적인 확신은 어디에 근거하냐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입증하시는 양자의 영의 증거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렇게 나눈 것이다. 아까 말했던, 칼빈이 말했던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반드시 사실로서 존재하는 확신, 그것은 어디에 있느냐면, 말씀을 들을 때 이미 온다는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원리가 오고, 믿음의 원리가 우리 안에 심어질 때 이미 그 믿음의 원리와 함께 벌써 절대적인 확신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내적인 증거로서의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내증이 있어야 한다. 그것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 성령은 우리가 받을 기업의 보증이신데 그분에 의하여 우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여기에서 구원의 약속들에 대한 거룩한 진리들에 대한 확신, 절대적인 확신을 콤리는 무엇이라고 분류했냐면, 믿음의 직접적 행위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을 콤리가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는 믿음의 절대적인 확신, 그것은 믿음의 직접적 행위라고 설명하였다. 그 다음에 성령의 내증에 의해서 영과 더불어 나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해주시는 그것, 지금 우리가 말하는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확신을 무엇이라고 분류했냐면 믿음의 사색적 행위라고 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설명을 시도하였다.
 
이런 시도는 사실 칼빈의 믿음의 속성 안에 있던 것을 훨씬 더 체계적으로 더 분석적으로 잘 다루어 놓은 것이다. 역시 신학은 발전하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조금 더 낫다. 찰스 하지도 그랬다. “내가 소원하는 것은 내 사후에 나의 제자들이 나의 신학을 더 확장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시간에는 믿음의 직접적, 사색적 행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하여금 창세전에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 받을 자로 선택하사 오늘도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아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로 부르며 신앙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의 믿음에 참여하게 하사 그리스도가 보셨던 것, 들으셨던 것, 마음으로 소망했던 모든 것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믿음, 귀한 줄 알게 하시고, 늘 감사하는 저희가 되게 하시며 그리스도가 걸어가셨던 믿음의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박혜근 교수가 들려준 신학과 신앙이야기

더보기

연재이미지2
<박혜근 교수 소개> 영남대학교 전자공학과(B.E.)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Th.M.)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현,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PHOTO News
메인사진
대구서현교회 담임목사를 협박 및 명예훼손한 여인 1심서 벌금형
메인사진
항존직(목사 장로 집사)의 필독서, 교단헌법 해설집(예장합동)
메인사진
총회재판, 객관적 증거 입증 책임은 고소자의 몫
메인사진
[신간] 예장합동 헌법, 권징조례 해설집 출간
메인사진
제104회 총회 임원후보 정견발표 관전평
메인사진
예장합동, 항존직 만70세 유권해석 혼란 없어야
메인사진
제104회 총회 이슈, 70세 정년제 연장 헌의
메인사진
[복음성가] 김문기 장로, '신기루 인생'
많이 본 뉴스
박혜근 교수가 들려준 신학과 신앙이야기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