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복음전파의 책임

김근수 | 기사입력 2008/11/13 [16:38]

<로마서 강해> 복음전파의 책임

김근수 | 입력 : 2008/11/13 [16:38]
본 글은 김근수 교수의 로마서 강해 내용을 녹취한 글입니다.
 
 
본문 / 롬 1:14-17

로마서1:14-17절 말씀 전과 같이 교독 하고 공부하겠습니다.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 로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복음 전파에 책임에 관한 교훈과 복음에 능력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이 복음을 자랑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바울 사도께서 특별히 늘 기도하면서 그 중심에 열망하는 로마로 가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모습을 우리가 상고한 바 있습니다.

그가 로마에 가고 자한 것은 그 당시의 세계의 수도요, 모든 문화와 정치와 세계를 다스리는 모든 군왕들이 그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11절 말씀에 나타난 바대로 신령한 은사를 로마 교회 성도들과도 나누어 가지려고 함이 그의 뜨거운 중심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빚진자

오늘 이 14-17절까지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가 왜이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 자 하느냐 하는 동기를 이 14절에서 밝히는 말씀입니다. 그 동기가 어디 있습니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고 자하는 그 뜨거운 중심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14절 말씀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자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하는 이 말은 헬라인은 그 당시에 로마도 헬라 문화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이 헬라인이라는 이 말은 그 당시에 문화적인 혹은 지성적인 생활을 하는 엘리트 계층, 상류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여기 야만이라는 이 말은 원래 이 말은 다바리안이라고 해서 그 당시에 아주 문명과 상관이 없는 그런 베 사람들, 혹은 노예 계층의 하류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그런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류 사회에 있는 사람이나 혹은 하류 사회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빚졌다'는 이 말은 경제적인 빚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빚진 자라는 뜻으로서 우리가 이해하게 됩니다. 야만인들에게 무슨 빚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부채 의식은 내가 빌려 써서 빚을 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도 살리시고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해 주시고 나 같은 죄인에게도 복음 주시고 복음의 사역자 삼아주시는 것이 감격스러워서 그리스도에게 갚고 자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이 사랑을 베풀고 자하는 그런 심정에서 빚진 자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를 들면, 생활을 할 때에 과거에 어떤 은인이 있었는데 그 은인은 연로해서 죽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그 자식들에게는 나는 빚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들을 대할 때도 어떻습니까?

그 사람에게도 나는 빚진 자라 그래서 할 수 만 있으면 그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은혜를 생각해서 갚고 자하는 마음에서 그 자식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와 같은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보면 다윗이 왕궁에 있을 때에 사울 왕에게 몇 번씩이나 죽임을 당하려고 할 때에 그 사울 왕의 아들에게서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럴 때에 그 뜨거운 마음을 나중에 사울 왕의 손자 되는 그 므비보셋에게 갚고 자하는 그런 마음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런 뜻에서 바울 사도는 상류 계층이나 하류 계층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사랑의 빚진 것을 갚고자 하는 그런 의도로써 내가 로마에 가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어리석은 자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하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번 더 쓴 병행구절이라고 이해하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헬라인을 가리키는 것이라 어리석은 자은 야만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셈족 언어의 특징 중에 소위 유대인들이 문학적인 의식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중요한 것은 두 번 세 번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단히 그곳이 중요하다는 강조점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그저 하나님의 백성아. 이렇게 불러도 될 텐데 그렇게 부르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 그 다음에는 야곱의 자손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세 번씩이나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반복하는 것은 중요한 강조점이 있다하는 뜻이지 거기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부채 의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건강, 나의 믿음, 오늘 나의 삶, 오늘 나의 가정, 오늘 나의 모든 삶의 여건, 나의 인생의 소망,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이러한 부채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갚으려고 할 때에 교회를 봐도 빚진 자요. 성도들을 봐도 빚진 자요. 그저 모든 것에 대하여 부채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봐도 그저 내가 빚진 것이 뭐가 있어? 내가 이 교회에서 빚진 거 뭐가 있어? 내가 저 사람에게 빚진 거 뭐가 있어? 그래서 서로 고맙게 생각되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마음이라면 오늘 집사님 기도하셨지만 그 사람은 이미 신앙이 죽은 사람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뜨거운 사명과 복음증거의 열정
 
15절 말씀을 보십시다. 나는 빚을 갚고 자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이 논리적인 비결은 바로 빚 갚고 자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전하기를 원하노라. 할 수 있는 대로라고 하니까 어떤 개연성이나 가능성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처럼 되어있으나, 원래 이 말은 당연히 마땅히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원래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헬라어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지면 하고 기회가 안주어지면 안 할 수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 말은 내가 마땅히 할 수 있기에 로마에 가서 내가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이 신령한 은혜를 나누어주기를 원한다. 내가 받은 바울의 복음, 내가 체험한 다메섹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생명력이 넘치는 잔정을 너희에게 들려주어야 되겠다. 하는 이 뜨거운 마음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단 성경에서 여러 번 고백하기를 나의 사명 복음전하는 이 사명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는 내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땅히 할 일임이라 내가 이것을 마땅히 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도다. 나는 상급을 바래서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전하지 아니하면 내가 화가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노라. 심지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세계에서 잘림을 받아서 마치 바쳐진 제물과 같이 제물은 받쳐지면 반드시 죽여야 됩니다.

제물을 바쳤는데 죽이지 아니하면 그 제사장을 죽인다 하지 않았습니까? 바쳐진 제물을 저주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는 아나스마라는 말인데 내가 저주를 받을지언정, 이 말은 내가 바쳐진 제물로서 하나님의 번제 단위에 놓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고 고백하신 바울의 이러한 뜨거운 결정을 우리가 배경에서 바라본다면 할 수 있으면 너희에게 전한다는 뜻이 아니고 너희에게 마땅히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뜨거운 심정을 우리가 여기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전도하고 할 수 없으면 전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믿는 자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해서 나 같은 죄인도 은혜와 성령을 받았다는 이 뜨거운 심정이 있는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봐도 그가 어려울 때 우리가 경제적인 면에서도 보여주고 영적인 면에서도 도와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도움을 받고 그 부채 의식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정작 갚지를 못한다 할지라도 그 마음 쓰는 것이나 그 말하는 것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중심을 바라볼 때에 정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게 되면 어려운 순간에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어주어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악문하는, 악문한다는 말이 사투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것을 오히려 잊어버리고 오히려 선을 악으로 갚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은 두 종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받았다. 감사한다. 하면서도 그것이 별로 뜨겁지 아니해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주머니에 무엇이 좀 들어 있을 때 은혜를 표현할 수 있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순간에는 그저 돌아서버리고 마는 은혜 갚을 만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옛날에 자기가 사랑받은 것을 잊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더 사랑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복음전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건강, 재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들은 이것은 전부 다 근본적으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얼마 전 주일날 특별히 솔로몬의 그 생애를 통해서 그가 어찌해서 성공했고, 어찌해서 실패했는가를 강론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 솔로몬이 망하게 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이 넘치게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쓰지 아니하고 자기를 위해서 썼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일용한 양식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일용한 양식 외에는 여분입니다. 축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축적하게 되면, 재물을 두게 생긴 사람은 되면 그 사람의 인생은 목적이 바뀝니다. 집이 그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집을 위해서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축적은 자기를 망하게 하는 정확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축적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활용해서 잘 쓰도록 그 소유권을 하나님이 가지시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권한만 우리에게 주신 청지기로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

그 다음에 16절 말씀을 보십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이 말은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는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적극적인 표현보다 소극적인 표현이 더 강도가 있는 강조법입니다. 여기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서술 문장으로 내러티브는 가장 약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소위 레가티브 문장인데 부정 문장은 첫 번째보다 약간 더 강조합니다. 세 번째로 가장 강조적인 것은 의문 문장으로 내가 뭐뭐하지 않겠느뇨? 이것이 가장 강한 것을 드러낼 때, 그 사람들이 그것을 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게 되면, 그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 라는 적극적인 뜨거운 의지가 이 속에 숨어있다는 말입니다. 왜 복음을 그가 자랑하느냐? 그의 학벌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그의 경력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런 것은 죄와 오물로 여기고 그가 자랑한 것은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두나미스나라는 말입니다. 이 두나미스나라는 말에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은 폭약, 여러분 얼마 전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 기억하십니까? 얼마나 무섭습니까? 땅이 그저 3미터 이상이 푹 파여지고 호수처럼 10미터가 푹 내려앉습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그 해 가을 우리 동네 돌산이 있었습니다. 그 돌산을 깨뜨리는데 거기서 다이너마이트를 100개 주워냈습니다. 애들이. 그래 가지고 떡하고 다이너마이트 안에 넣는, 터지는 구리에 다가 이렇게 넣어서 만든 폭약 덩어리가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찹쌀떡 같은 것입니다. 폭약을 만들 때 거기에다 문종이를 똘똘 말아가지고, 심지 만들어 가지고, 불 붙여 가지고, 불이 붙은 것을 보고, 그 다음에는 거의 타 내려갈 때 쯤 되어가지고 개울가에 돌 위에 다가 딱 얹어놓고 도망가서 다 숨어있으면, 거기에 불이 들어가서 뻥하고 터집니다. 그러면 그 부근에 있는 고기들이 놀래가지고 다 둥둥 뜹니다. 그러면 얼른 가서 주워냅니다. 조금 있으면 정신 차려 가지고 다시 도망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그런데 잘 안 갔는데 한 번은 아이들하고 가서 물론 더 큰 아이들이 하고 우리는 똘마니 노릇을 합니다. 고기가 떠오르면 건져내는데, 저도 그거 했는데 그 불붙이고 우리는 저만큼 30미터쯤 뒤에 있는데 펑하는데 나중에 다른 애들 얼굴을 보니까. 모래가 날아와 가지고 구멍이라는 구멍에 모래가 다 들어 가있습디다. 눈도 못 뜨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조그마한 게 손가락 두 마디만 합니다. 그런데 떡 하나 꽂아가지고 하는 데도 그랬는데 엄청난 폭약이 터졌으니, 예? 이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 복음은 폭약입니다. 복음은 말입니다. 조그마해도 인간의 못된 죄악의 심성 구조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받게 되면 결심해도 안 되고 그저 놀음하던 사람 손가락을 끊고 발가락을 끊어도 안 되던 그런 사람들이 복음을 참으로 받으면 척 그걸 고쳐냅니다.

가정도 깨뜨리고 어떤 타성과 관습이라 할지라도 이 복음은 다 그걸 깨뜨려서 구원받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폭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의 7가지 내용
 
복음의 내용은 일곱 가지라고 지난 시간에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한 번 정리해 보십시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차연적인 출생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수태된 초자연적인 출생입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 그 다음에는 부활 승천. 그 다음에는 재림. 그 다음에는 심판. 그 다음에는 영생. 이 일곱 가지 사실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복음하게 되면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의 나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과 재림하심과 그 다음에는 영생을 주시는 이 일곱 가지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주게 되면, 이 복음을 참으로 받은 사람들은 옛날 옛사람이 다 이 폭약 터지는 데 깨어져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복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요.

이 복음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개조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복음을 주려고 이 폭탄을 던지기 위하여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가기를 원한다하는 고백의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로다."

여기 유대인은 그 당시에 복음을 먼저 받은 사람이고 여기 헬라인은 14절에 말한 헬라인으로써의 뜻으로 쓰여 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아직 받지 못한 사람, 여기에서는 이방인으로 생각하면 좋아요 이방인들까지라도 전부다 이 복음을 받아서 정말로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면 나는 목숨을 잃는 다할지라도 이것을 하겠노라하는 뜨거운 사도의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17절 말씀입니다. 이 17절은 여러분들이 1장에 요절이요, 로마서 전체 주제를 표현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이 17절은 외웠으면 좋겠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의

이 17절을 읽어볼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제 하나하나 합시다. 이 말씀에 복음에는 무엇이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이 로마서에서 앞으로 우리가 의 문제를 많이 다루게 됩니다.

여기에 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이라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에 의는 정의나 공의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여기의 의는 인격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이 로마서를 조금 더 나가게 되면, 3장 10절 이하에 보게 되면 의는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기에 말할 때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척도 하나님의 재놓은 하나님의 규범으로 이렇게 재 봐가지고 옳다 인정함을 받은 인생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 치우쳐 죄악의 사람이 되었다"하는 것이 성경이 바라보는 인간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의한 사랑으로써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만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불의한 인생을 어떻게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하나님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를 구상해 내신 것입니다. 즉 말하면 불의한 죄인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 죄의 값을 물어야 하나님의 공의가 성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과 동시에 이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이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에 대한 아버지의 불쾌감이 완전히 해소시키는 공의를 하나님께서 실현하셨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우리인생을 구원으로 이끌어주시는 척도의 미치지 못하는 인간을 그 척도에 충분히 넉넉하게 이르는 이런 사랑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나의 죄를 지고 죄의 값인 사망을 받아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순간에 나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이러한 믿음을 허락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을 믿는 사람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고 다시 부활한 것이 내 것이 되어 집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옛사람 죄악 된 불의한 사람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되어져서 하나님이 이제는 볼 때 옛 사람의 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해준 것을 보아서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에 하나님이 법정에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하실 때입니다.

심판하실 때에는 우리의 죄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가려주시고 무죄하면서도 피를 흘려주신 그리스도의 의를 봐서 우리를 죄 없다고 판단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입증시켜준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는 헬라 말로써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말할 때는 체데크 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의를 말할 때는 디카이오수네 라는 말을 씁니다.

이 디카오수네 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본질적으로 의롭지 않고 법적으로, 법으로만 의롭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말로는 칭의라 일컬어서 의롭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의는 하나님의 의라는 이 말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그 다음에는 죄에 대한 승리하신 부활이 이 속에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기초적인 개념만 이해하고 2:3절에서 집중적으로 이 문제를 공부할 테니까 이 정도 이야기하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는데 즉 복음을 믿으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삶을 믿으면 나중에는 마지막에는 영생까지 내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여기에 믿음은 처음에 나온 믿음은 저급한 믿음입니다. 나중에 나온 믿음은 고등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해도 저급한 믿음에서 고상한 믿음으로 자라가는 과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주로 감정에 의지 하고 있습니다. 느낌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로 교회에 오시는 처음 오시는 분들의 심성구조를 바라보면 감정적인 것이 중심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적을 구하고 표적을 구하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출발의 동기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기한 체험이 온다던가. 자기의 어떤 병이 갑자기 낫는 다든가 어려운 문제가 해결 된다든가 이런 감정적인 어떤 느낌과 감정적인 어떤 흐름에 신앙을 호소하고 여기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 중심으로 하는 이 신앙은 가장 저급한 신앙입니다. 기적을 구하는 신앙은 사실은 저차원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조금 거기서 성장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감정적인 신앙에서 지식적인 신앙으로 발전합니다.

감정, 자기의 느낌이나 어떤 생각이나 자기의 어떤 감정의 신앙에 중심이 아니라 이제는 감정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지식이 자기의 신앙에 규범을 이루고 자기의 신앙에 바탕을 이루게 된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감정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던 사람이 이제 감정을 억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했는가 말씀의 척도와 말씀의 규범을 교훈을 따라서 순종하는 차원이 그 다음 단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무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감정적인 중심의 신앙은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초급한 신앙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가 이제 불과 몇 달만 있으면 13년이 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도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무엇을 할 때 왁자지껄하게 하고 부흥회는 맨 날 해야 되고 이상하게 소리 나 지르고 씩씩하고 이런 것 중심으로 하지만 그것은 건건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아주 저급한 것입니다. 미천 한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가 어떤 면에서는 처음 오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 깊이 있는 내막을 잘 알아보지 못한 그런 분들 중에는 교회가 좀 뜨겁지 못한 것 같다고 하는 것을 듣습니다만 그 뜨겁다는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주여! 한 다음, 교회 문 앞에 나가면서 바로 싸움질 벌이고 거짓말하고 말입니다. 조용히 묵상하면서 말없이 기도해도 그 실천적인 면에서 정말 이를 깨물고 사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느 기도가 진실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 감정중심보다는 말씀중심의 지식적인 이런 신앙을 키워야합니다.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믿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의지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자기가 느끼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하나하나 실천하는 신앙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성경공부를 많이 해도 그것을 자기의 삶에 연결시킬 수 못한다면 그 지식이 무슨 가치가 있고 그의 감정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듣는 것도 좋고 배우는 것도 좋고 가장 중요한 그런 것도 좋지만 지키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수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떠들고 야단하고 보따리 싸가지고 산으로 헤매고 들로 헤매고 들로 헤매고 며칠 금식했네, 철야 했네 소문이 왁자지껄해도 봉사(교회의 작은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형편없는 사람이요. 그건 수준이 아주 저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나지 아니하고 차분하고 별로 그렇게 이상한 짓도 아니 하지만 그의 삶이 확고한 기독교적인 사상과 생활로 받쳐져서 가정에서 늘 예배 짧은 시간이지만 가정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향해서 언제나 참 그렇게 마음을 갑자기 누구처럼 몇 천만 원씩 이렇게 하지 않아도 적은 돈이지만 꾸준하게 하나님 앞에 정해 친 것을 바치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급기적인 생활은 그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페이스, 자기의 흐름을 지키면서 잘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나왔다하면 집안이 깨지든 말든 그저 집안에서 믿는 사람 박해 일어나든 말든 야단치기 이거 옳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날 밤에 하고 그저께 저녁에 어떤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용인 즉 ‘이거 청년들인데 스무 살 먹은 애송이가 여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가기만 나가면 교회 간다고 일주일에도 다섯 번씩이나 그런다고 합니다.’ 나가기만 나가면 늦게 까지 들어오고 안 들어오는데 목사가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저는 정규적인 예배와 조용한 기도시간 외에 교회 와서 설치는 그런 사람들치고 제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 못 봤습니다. 이제 그 사람들은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하게 되면 틀림없이 사회에 열등석이 되니까 교회를 남지를 못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우리는 한 토막만 주안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고 인생 전체를 바쳐야한다는 말입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 좀 열심히 해야지 그래야 대학도 들어가고 취직도 해 가지고 건전한 생활 할 것 아닙니까? 공부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공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대학에 못 들어가고 취직도 못해... 물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그게 몇 번 나가느냐 일 년도 못되어가지고 나중에는 빌빌하다가 그저 아무직장이나 들어가면 그저 목줄에 메여가지고 주일도 못 지키고 말이지. 신앙생활 결국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같이 신앙 생활하던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잘 되고 자기는 안 되면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이런 사람들도 거의 문젯거리가 되고 맙니다. 골칫거리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교육자 일을 할 때마다 너무 뜨겁고 야단적인 그런 신앙을 키우면 안 됩니다.

때로는 브레이크를 많이 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얄궂게 손잡고 뜨겁게 이런 것들 저는 모르겠습니다. 구식이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것 섭리에 안 맞습니다. 그냥 기도하면 안 되가지고 여자들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손을 들었다 놨다 요즘 기도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별로 그거 바람직한 거 아닙니다. 그저 언제나 늘 하는 방법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늘 하는 그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극기적인 신앙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자기페이스를 지키면서 꾸준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우리 학생들이 토요 집회하는 것을 허락지 않고, 주일만 충실하게 하라하는 것은 그 속에는 가정생활과 학교생활에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처럼 이 수요일 날 올라와서 우리 청년들과 학생들이 말씀에 열중하니 참 고맙습니다. 이 시간 말고는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어제 오늘 제가 교회 식당문제 때문에 교회에 하루 종일 있었는데 이거 필요 없이 그저 정말 땀 흘리고 수고한 우리 청년들 감사합니다. 그런 분들 말고 필요 없이 학생들 와가지고 어떤 중학생들 여기가 놀이터인줄 왔다 갔다 하더니 나중에는 화장실 들어가서 목욕하고 들어 나오고 이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그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니까 앞으로 정상적인 신앙을 가질 수가 없게 되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감정중심으로 그저 좀 은혜 받고 수양회 갔다왔다하면 그저 시간을 몇 시간씩을 교회서 보내고 그거하지 말고 그거 가기전이나 후나 페이스 여전해 가지고 꾸준하고 은은한 데가 있어서 해요 양철냄비처럼 화끈 달았다 화끈 식었다 이러지 말고 그저 두꺼운 가마솥처럼 은근히 달아도 오래 가는 그런 신앙으로 키워야 합니다.

이와 같이 저급한 신앙에서 고등한 신앙으로 발전케 해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이 이와 같이 자라게 되어 지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오직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은 오직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이 말씀은 구약 성경 하박국서 2:4절의 인용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거기하고는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에서 믿음 앞에서 정관사 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라는 것은 사실상 우리말에는 정관사로 되어있지만 히브리말에는 그의 남성 단수 소유격입니다.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 그래서 문자적으로 말하면 하박국서에 있는 말은 오직 의는 그의 믿음은 누구의 믿음이냐 하면,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되어져 있습니다. 하박국에는 즉 말하면 하박국서에 나와 있는 믿음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믿기시다는 말입니다. 믿을 만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경과 역경에 처해도 하나님이 날 버렸다 배신했다 변질했다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해서 고난을 참으라. 악인이 잘되고 장성해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의인이 고난을 당해도 조금도 서글프게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변질하는 분이 아니다. 그런 근거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 바울 사도가 기록할 때에는 그 말씀을 쓸 때에 그의 하나님의 의라는 그 의라는 말을 생략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와 있는 오직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할 때에 이 믿음은 누구에 대한 믿음입니까?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믿음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이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불신자도 엄격히 말하면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버스 탈 때 이 버스가 사고 나리라 하면 누가 타겠습니까? 안 나리라고 믿고 타는 것입니다. 또 비행기를 탈 때에 이 비행기가 추락하리라 하는 것을 알면 누가 타겠습니까?

불신자가, 오늘 안 믿는 분이 여기 한 분 계시는 모양입니다. 이 지붕이 안내려 앉으리라 하니까 여기에 앉아있지 내려앉으리라하면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믿음으로 되어있습니다. 믿음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급하고 자연적인 믿음이 아니라 여기에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과 심판과 영생 이것은 다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이것을 믿는 그런 믿음으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살겠다. 하는 선언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조금 어려운 말로써 뭐라고 표현하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이신득의 말고, 또 한 가지는 이신칭의,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은 믿음으로써 의를 얻게 된다하는 뜻입니다. 한자까지 기억할 것은 없습니다. 좌우간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라틴말로는 솔라 피데라고 합니다.

솔라 피데라는 말이 종교개혁 당시 루트의 종교개혁의 표어였습니다. 쏠루군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그러면서 전진했습니다. 루터가 이 말을 하게 된 것은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성지 순례를 하면서 고행을 합니다.

그런데 성지 순례하는 중에 로마에 가게 되면 사닥다리 올라가는 롬비드라는 곳이 있습니다. 전부 다 무릎으로 기어 올라갑니다. 그러면 무릎이 까져서 피도 흘리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것을 수십 번씩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으로써 자기가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운 것이고, 저런 것은 아니라는 그런 것을 볼 때, 이 루터가 깨달았습니다. 당시 그는 신부였습니다. 루터는 깨닫고는 야!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이 의로워지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음이 주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솔라피데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자기의 노력이나 고행이나 자기의 선으로써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 가장 중요한 로마서에 중심으로 깨우치고 종교개혁 한 것이 바로 신교 우리 소위 개신교를 그 부패한 종교에서 개혁하도록 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공로의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이신득의의 신앙으로 의로워지는, 내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의로워지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하신 아버지여. 우리는 때로 기도 생활도 하고 헌신 봉사 생활 할 때에는 구원의 기쁨도 있고 신령한 즐거움을 가지는 감정 중심이요 내 자신의 공로나 노력이 된 신앙생활을 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순간보다 고민과 좌절과 구원을 잃어버릴까하는 두려움 속에서 행위를 중심한 이러한 잘못되어진 신앙에 빠져서 근심하고 영적인 시일을 잊어버린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의 옛사람은 깨어지고 새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영원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복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뜨거운 복을 받았은즉 이제 우리는 빚진 자들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생애는 이 사랑의 생명의 빚을 갚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신령한 백성들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리폼드뉴스 제공 :  http://www.reformed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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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교수의 신약신학의 세계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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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수 목사 : 신약신학 교수이시면서도 목회자로서 서울 한가람교회에서 15년간 담임목사로 섬기시는 동안 세계 선교에 이바지하는 명성있는 교회로 부흥 성장되었으며 총신대 및 신학대학원, 한국 성서대학교, 칼빈대학교에서 25년여간 교수하시면서 20여권의 저서와 역서를 출판하여 한국 신학계에 기여하고 있다. 그의 책들과 설교 녹음 테이프는 전국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92년에 2차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셔서 세계 선교에 뜻있는 몇 분들과 기도하시던 중 한울교회를 개척하여 현재까지 섬기고 있다. '한국기독교21세기운동본부' 신학위원회가 주관하여 한국의 유수한 신학대학 및 신학대학원 재학생 1천여명을 선정, 투표하여 뽑은 한국의 이상적인 신학자와 목회자 30명중의 한분이시다. 역서가 저서 다수가 있다. 약력 : • 한국 성서대학교 졸업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 美 칼빈 신학대학원 신학석사(Calvin Theological Seminary, Th. M.) • 美 남가주 성서 신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Southern California Bible Seminary, Ph. D.) • 英 웨일즈 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Univ. of Wales Graduate School, Ph.D .) • 美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박사과정 수료(Boston Univ. Graduate School of Theology) • 美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환교수(Yale Univ. Divinity School, Research Fellow) • 서울 한가람 교회 담임목사 역임 (15년) • 총신대학교 및 신학대학원 강사 (10년) • 한국 성서대학교 부교수 및 신학대학원장 역임 • 현, 칼빈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겸 부총장) • 현, 분당 한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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