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 분열사 9]기장측의 분열에 대한 역사적 배경(2)

1953년 6월 10일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별도의 제38회 기장총회가 소집

소재열 | 기사입력 2015/03/31 [22:52]

[한국장로교회 분열사 9]기장측의 분열에 대한 역사적 배경(2)

1953년 6월 10일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별도의 제38회 기장총회가 소집

소재열 | 입력 : 2015/03/31 [22:52]

1953년 기장측과 분열의 역사적 배경은 신학교 문제였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그리고 총회신학교와의 관계속에서 기장측과 분열의 배경을 살펴야 한다. 현 총신대학교는 당시 장로회직영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를 학교의 연혁에서 삭제하고 있다.

<조선신학교의 개혁안>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는 즈음에 조선신학교는 신학적으로 좌경(左傾)화가 되었음으로 기대할 수 없고 부산의 고신은 전국교회를 포용할 능력이 없으므로 총회적인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신학교가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평양신학교를 계승할 신학교를 중건해야 한다는 일념을 갖고 실행에 옮겼다.

제34회 총회가 소집되기 한 달 전인 1948년 3월 15일에 대전제일교회에서는 신학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전국규모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신학교 문제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동 위원회는 제1차적으로 현재까지는 총회 직영으로 되어 있는 조선신학교의 개혁안을 작성하여 오는 4월에 회집되는 총회에 제출하고 이 개혁안이 통과되지 못할 때에는 별도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의논했다.

제34회 총회(1948년 4월 20일)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였을 때 자유주의적 신학적 노선을 걷고 있는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통과시키려다 투표에서 부결되자 절충안으로 김재준 교수를 퇴진시키고 미국으로 1년 유학하게 하고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보수신학자들을 교수로 보강하자는 안이 통과되었다.

이에 조선신학교와 김재준 교수는 총회의 결의에 불응하였다. 김재준 교수는 조선신학보에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자신을 변호하고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김재준 교수는 「조선신학교 대책위원회」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교수들은 총회의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을 때 인정을 받은 사람들을 퇴진시키는 일은 부당하다고 강변했다.

<조선신학교의 개혁안 부결과 장로회신학교 설립과 인준>

제34회 총회(1948년 4월 20일)는 “신학교 문제 대책위원회”가 주도한 조선신학교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신학교 대책위원회는 1948년 5월 20일 창동교회에 모여 장로회신학교 설립을 가결하고 이사장에 이정로 목사, 교장에 박형룡 박사를 결의하였다. 조선신학교에서 총회진정서를 제출한 “51인 신앙동지회”가 주축이 되어 1948년 6월 남산공원에 있던 조선신궁의 터전 성도교회당을 임시교사로 정하고 개교를 하게 되었으며, 제35회 총회(1949년 4월 19일)에서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을 받았다. 결국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총회직영신학교가 됐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합동 실패>

새로운 보수신학교로 장로회신학교를 출범시킨 총회는 우선 급한 문제부터 처리해야만 했다. 재정적으로 연약한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동시에 직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소위 두 신학교의 합동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한인 원로 목사와 원로 선교사들로 구성된 합동위원회는 “양 신학교는 무조건 합동하고 주요 과목은 주로 선교사가 맡고 나머지는 한인 교수가 맡을 것”, “양 신학교는 기존 교수진은 백지로 돌아가고 합동된 신학교의 교장과 교수는 양교 합동 이사회에서 선택할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합동 안이 좌절되자 총회는 어느 한쪽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총회 직영 취소와 총회신학교 설립>

제36회 총회(1950년 4월 21일)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신학교 문제였다. 신학교 문제는 총회의 신학적 입장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연계되어 있었다.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립으로 인한 신학교 문제는 결코 정치적인 교권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경계하며 보수신학을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제36회 총회가 신학교 문제가 가장 큰 이슈로 등장하면서 양 신학교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의 연속이었다. 임원 개선도 하지 못한 총회는 비상정회를 하고 말았다. 속회 총회는 1950년 9월 1일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정한 날자에 속회하지 못하고 다음해인 1951년 5월 25일에 제36회 총회가 부산중앙교회에서 모였다. 특별위원회는 6.25동란의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신학교 문제가 지난번 총회 결의대로 실행할 수 없었음을 보고하고 각 노회의 수의는 거치지 말고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신설하자는 안을 총회에 제출하여 가결하였다.

제36회 총회 파회 직후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에 직영 취소를 통고하였다. 장로회신학교는 총회의 통고에 즉시 폐교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명령에 불복하고 1951년 4년제 신학대학으로 문교부로부터 인간을 받아 개편하여 한국대학이란 이름으로 이어갔다.

제37회 총회(1952) 이후 그들은 1952년 4월 26일 조선신학교 창립 12주년 기념식을 기회로 그들은 “작년 총회 제36회(계속총회)의 신학교에 대한 결정은 문자 그대로 총회의 법과 헌장을 무시한 불법적인 결의인 것을 재론시켜 한국교회 사상에 찍혀진 오점을 씻을 수 있는 총회가 되게 할 것”을 주장했다.
 
제38회 총회(1953)가 파회된 2개월 후인 1953년 6월 10일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별도의 제38회 기장총회가 소집되어 장로회 제2차 분열이 있었다. 신학교 문제는 기장측과의 분열에 대한 원인과 그 배경을 논할 때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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