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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새 사람”(2)

김순정 | 기사입력 2023/11/18 [18:12]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새 사람”(2)

김순정 | 입력 : 2023/11/18 [18:12]

  © 리폼드뉴스

 

아담의 자유에는 단 한 가지 제한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한 나무를 가리키시며 그 나무의 실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작은 제한이 있을까? 아담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모든 나무가 다 그의 것이었고, 모든 동물들이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은 그의 아버지시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순종에서 시험을 받고 있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그의 모든 자손들의 운명을 쥐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그의 형상대로 태어날 모든 자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그로부터 나올 모든 인류를 대표했다. 사탄의 시험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을 택함으로써 선과 악을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로서 확정되고, 영원히 자유롭게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낙원에서 혼자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와 함께 살 여자, 곧 그의 생의 반려자요 돕는 배필이 될 하와를 만드셨다. 이렇게 하여 피조물의 머리로서의 아담의 역할에 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그 여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여자의 머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역할이 첨가된다. 그들은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들의 소유인 땅에 충만할 수 있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기사 이전에 이미, 창세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하실 역할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인류 역사 여명기에 아담의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다루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담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오셨다(5:12-21, 고전 15:2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때늦은 방편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하여 창세 전부터 택하심을 받은 분으로서 오셨다.

 

3장의 구속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의 아담의 모습이 1, 2장에 나타나 있다. 그는 하와가 그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은 인류 역사의 시작뿐 아니라 그 정점에 대하여도 의미를 갖는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그림자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담의 대체자가 아니다. 즉 말하자면 아담이 실패한 것을 대신할 사람 그 이상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메가요 인류 역사의 목표이며, 피조된 인간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알파요, 참 아담이요, 새롭고 참된 인간의 머리이시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다(1:15). 그분은 모든 창조물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그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한히 초월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하신 아들로서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피조물인 아담의 아들 직분은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영원한 아들 직분을 반영할 수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아들 직분이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아들 직분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8:14-17).

 

그러한 이유로 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들을 만드는 것을 금하셨다(4:15-2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신들의 형상인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이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기억하고 참된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시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어떤 표현물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예배할 목적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 자신의 형상까지도 예배할 목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막의 제도에서, 언약궤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나타냈다. 이 궤의 황금 뚜껑이 시은좌,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곳이었다. 날개를 펼치고 있는 그룹들이 그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시중들었다. 그러나 그 보좌 위에는 아무 형상도 없었다. 오직 영광의 광채만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있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시나, 사람은 그러한 형상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언약궤 위에 아무 형상도 없다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시라는 것을 배워야 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기계시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원하거나 상상한 대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실 것이다. 언약궤 위의 빈 자리는 장차 오실 분을 위하여 예비되었다.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8-10).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얼마 전 마리아가 자기에게 향유를 붓고 경배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12:1-8).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이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고전 1:2). 그들은, 인간의 육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계시며, 따라서 발 아래 엎드려 경배해야 할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2:9, 1:17). 아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공경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요일 5:20-21)

 

아담의 모습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고 있다. 신약성경 또한 하와의 창조 기사 속에 들어 있는 비유적인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기 위하여 창조 기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담은 하와가 자기의 몸에서 취함을 입었기 때문에 하와를 자기 몸처럼 보살펴야만 한다. 아름다운 창조 기사는,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하나로 연합되는 것일 뿐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들은 서로 속하여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것을 언급할 때 단순히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어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에베소서 5:28-33)

 

바울은 결혼에 관한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남편과 아내의 올바른 관계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적용하고 있다. 바울은 창세기의 결혼 제정에 대한 기사를 인위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억지로 관련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깊은 관련이 있는가? 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한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그림자로 보여 주는 하나의 모형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창세기 2:20-25에 선언된 결혼에 관한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결혼 관계 안에서 창조된 친밀한 연합과 유대는 다른 어떤 인간 관계보다 앞선다. 남자는 그 아내와 연합하기 위하여 그 부모를 떠나야만 한다.

 

창세기에서 이 명령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아담의 말 다음에 나온다. 하나님의 명령은 자신의 창조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들을 결합시키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질투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사랑으로서 간음에 의하여 깨진다. 이 원리는 후에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자기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법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20:14)는 계명은 단지 이스라엘 사회에 안정된 가정 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는 특별하고 강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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