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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연합을 위해 교리적 무관심은 금물
총회 100주년 기념, “총회는 신학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가”
기사입력: 2012/02/29 [23:2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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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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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100주년 기념에 즈음하여 “총회는 신학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있는가? 총회 100주년 기념중에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거룩한 열정이 있는가" 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이는 이 시대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정신이요, 사명이다.

 
서북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평양신학교와 함께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일정한 교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권은 서북지역의 교세와 관계가 있다. 1907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통계를 보더라고 확언하게 드러난다. 당시 한국 전체 장로교 교회 수는 785개 지교회 중에 348개 지교회가 서북지역(평남북, 황해도)에 있었고 전체 세례교인 수가 18,061명 중에 서북지역의 세례교인 수만 해도 무려 12,383명이나 될 정도였다. 이 같은 현상은 마펫 선교사가 선교부를 평양에 개설한 후부터 서북지역은 선교사들의 열정적인 복음전도로 한국 기독교 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전도와 교육 발전에 주도적인 거점지역이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보수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이 있었지만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입장으로 자리를 잡으며 해방직전까지 한국장로교회를 이끌어 왔다. 1938년도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총회는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부분 보수주의 선교사들은 1940년을 전후하여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총회 내 한국인 보수주의 지도자들은 망명과 투옥으로 활동의 제한을 받았으며, 또한 설교를 할 수 없도록 함구령이 내려져 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한국장로교 내 보수주의 신학자들,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틈을 이용하여 그동안 교계를 장악하고 있던 보수주의 인사들인 서북계 지도자들에 비해 소외를 당하고 있었던 자유주의자들인 비서북계 지도자들이 일본 사람과 손을 잡고 일을 하게 되었으며, 그 대가로 그들은 교회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비서북계인 함경도 출신의 지도자들과 그 지역 출신의 김재준 중심의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간하배 박사는 이 부분에서 이런 논평을 내놓았다 :
 
1945년도에도 교회의 주도권은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있었다. 이러한 변동에 대한 가장 뚜렷한 상징은 아마 1945년에 전국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교가 단 하나 밖에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칼빈주의의 黃金時代를 상징하던 평양신학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에 칼 바르트의 영향 팽창을 상징하는 조선신학교였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놓는다.

“늘 서북계의 교세에 위축을 당하여 오던 호남지방의 경우, 대거 새로 출범하는 교단에 가담하여 교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전북에서는 김세열 목사, 전남에서는 이남규 목사와 같은 지도자들의 개혁정신의 영향이 컸고 또한 보수신앙을 고수한다는 일부 월남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서북계의 교세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데 반발이 있었다. 사실 당시 호남지방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평양신학교가 폐쇄될 때 서울에서 개강하게 된 조선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던 사람이 많았기에 자연히 김재준 목사의 신학노선을 따르게 되었고, 이북에서는 평양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게 되자 그 지역에서는 비록 선교사는 철수해 버렸지만 보수신앙을 고수한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또 해방 후 많은 목회자들이 월남하면서 계속 서북계의 교권을 유지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결론적으로 신학적 개혁이 직접 교회개혁의 방향과 합류되었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편찬위원회,「한국기독교100년사」(서울: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2), 404.>

보수신학을 고수한 서북계에 반발한 비서북계 세력들이 서울에 개강한 조선신학원에서 김재준과 합세하여 보수신학을 개혁하여 그들 중심의 바르트신학, 자유주의 신학으로 대치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여기에 반기를 든 조선신학원(교) 내 정통보수신학을 따르는 학생들은 김재준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따를 수 없었다.

이 학생들은 호남 19명, 영남 2명, 서울(경기 강원포함)3명, 이북 27명이었다. 호남과 주로 이북에서 보수신학을 공부하다가 월남한 이북 출신자들로 구성되었다. 조선신학교 내 자유주의 세력들은 한국장로교 내 보수주의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의 공격은 주로 성경의 권위와 무오사상에 대한 공격이었다.

모든 신학의 영역에서 성경의 권위와 성경무오사상은 그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성경무오성이 무너지면 곧 모든 신학이 무너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조선신학교 내 정통을 사랑하는 신앙동지회는 성경의 권위와 성경무오성에 대한 도전 앞에 전투적으로 투쟁했고 변호했다.
 
이 투쟁은 20세기 초반기의 미국 교회에서 일어났던 투쟁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것은 근본주의자 대 현대주의자의 논쟁과 같았다. 이 같은 논쟁과 투쟁의 결과로 분열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순전히 신학적인 문제 때문이다. 박형룡은 논쟁하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배경과 투쟁의 대상이 누구였고 어떤 신학사상 때문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장로교회는 초기 50년 동안 정통신학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하는 자유신학운동에 발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회 안에 생겼던 것이다. 그들은 외국에 유학하면서 자유신학을 배워가지고 본국 교회의 정통신학 보수에 대한 불평을 품고 돌아온 인사들이었다.”
<박형룡, “한국교회에 있어서 자유주의”,「신학지남」(1964. 9), 8.>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불평은 지금도 계속되며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해방 후 박형룡과 신앙동지회의 투쟁이 왜 많은 교리와 신조 중에 성경무오성으로 한정했는가? 혹은 교권 장악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는가? 미국 정통주의 신학을 절대화 시킨 것은 아닌가? 그 외에 다른 신학적 해석의 가능성을 부인한 것은 문제가 아닌가?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에 노예, 보수정통을 수호하려다가 학자들의 설을 되풀이하는 테이프 레코드와 같은 것은 아닌가? 심지어 정통보수신학을 부르짖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 안에서도 이런 비판을 아무런 역사적 신학적 전통을 살피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타교단과 연합을 위한 명분 때문에 비판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된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인 박용규는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된 것은 W.C.C.와 에큐메니칼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였다고 하면서 이들과의 연합은 신학의 순결성을 위한 일치가 아니라 종교연합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무분별한 연합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W.C.C.와 에큐메니칼 외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그것도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 서술은 결코 자기 교단이나 자기가 서 있는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재구성한 역사서술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일차적인 문제와 부차적인 문제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주된 문제와 부차적인 문제가 앞뒤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더 더욱 역사가 결코 설정된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일치는 정통에 선행되었다는 논리 역시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 진정한 신앙의 일치에 토대를 두지 않은 교회의 연합은 교회의 연합이 아니라 종교연합에 불과하다."
<박용규, “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신학지남」(2003. 여름호), 161-162.>

김의환 박사는 1974년에「신학지남」을 통하여 발표한 “오늘의 교회 연합운동”이라는 글에서 “연합을 위한 교리적 무관심은 교회의 본질을 변질시킬 우려가 있고, 교회의 순수성을 위한 교회 연합의 무관심은 분리주의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것”(김의환, “오늘의 교회 연합운동”,「신학지남」41.2(1974), 26.)이라고 한다. 흔히 보수주의자들은 교회의 분열을 일삼는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여기에 박형룡은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 사상이 교회에 침입하여 교회 본래의 신앙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그 신앙을 보호하려고 보수주의자들의 항의가 생기고 분열이 초래되니 분열의 책임이 어느편에 있는가? 전 교회를 자유주의자에게 온순히 내어주고 침묵했다면 형식상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일인가? 참 복음을 수호하고 이 복음을 배척한 것은 사도들의 방침이었고 역사적 교회의 방침이었으니 우리도 그 본을 받아 이 사상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평화가 귀하나 복음진리를 희생시켜서 평화를 도모할 필요는 없다.”
<박용규, “장로교 합동과 통합 분열의 역사적 배경”,「신학지남」(2003. 여름호), 161-162.>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교회의 연합이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 신학과 복음이 일치하지 않는데 연합은 복음의 변질을 의미하고 타협을 의미한다. 총회 내에서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에 의한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총회의 신학으로 대치하려고 할 때 보수와 자유가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1949년 제35회 총회에서 “초교파적인 색채를 가진 교역자는 일체 교단에 세우지 않기로 가결”(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제35회 총회회의록」(1949), 60.)함으로 비 진리와의 연합보다 진리의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 있었다. 당시 이 투쟁의 한 중앙에 박형룡과 그를 따르는 ‘51인 신앙동지회’가 있었고 오늘날 이러한 정신은 새롭게 되살아나 교회와 교단 총회의 신학적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소재열 지음, 「한국교회사 1」-한국장로교 신학적 전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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