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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논설
호남의 정통신학,정치역량 계승되고 있나?
해방이후 1969년까지 교단신학의 정체성을 지킨 호남과 황해인들의 분투
기사입력: 2013/05/26 [13:5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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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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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룡 박사는 일제가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를 탄압할 때 일본을 거쳐 만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체류하는 동안 일본신학교에서 청강도 하면서「표준성경주석」집필에 몰두하였다. 19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간 박형룡 박사는 약 4년 후 1941년 만주 봉천으로 가서 봉천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윤선 박사 역시 봉천신학교에서 1941년 4월부터 신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봉천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참여한 신학교였다. 교장 정산인은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는 신사참배 예식에 참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도 되게 당국과 사전에 묵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형룡 박사는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서 생활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박윤선 역시 한 때 여러 가지 문제로 봉천신학교 재직 시 불면증으로 거의 강의를 할 수 없었다.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학교를 떠날 것을 고민하였으나 그들이 없이는 학교가 지속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민하다 박윤선 박사는 1943년 7월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다가 1945년 8월에 국내로 돌아와 고향에서 머물다 1946년 4월에 서울에서 한상동을 만나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는다.

박형룡 박사 역시 한국에서 초청을 받아 신학교 사임을 준비하였다. 그때 박형룡 박사는 부산 고려신학교로부터 파견된 송상석 목사의 간원과 조선신학생 51명의 간곡한 서한을 받고 귀국하게 됐다. 이 귀국 결심에 대한 배경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고려신학교의 초청에 응함으로 자신은 비록 신사참배에 가담은 하지 않았으나 봉천동북신학교가 신사참배에 가담하고 있었으므로 그 신학교에서 가르친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 받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정통보수신학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51인 신앙동지회’의 간곡한 청은 당시 자신이 처한 어색한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귀국하여 서울에 와 보니 자신을 반기는 보수신학의 추종자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또 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려신학교의 초청을 이제 와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했다가는 더 큰 양심의 가책에 시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력한 교역자들로부터 구 평양신학교의 복구재건의 제안을 받고 그 제안에 응할 의사가 십분 있었으나 고려신학교측의 성의를 묵살할 수는 없었다. 정규오 박사 이 부분을 회고할 때 말한 것처럼 박형룡 박사는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1972년 총신대학교 교수를 은퇴할 때까지 정치적 후원자인 신앙동지회(회장 정규오 목사)와 함께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교단 신학교는 정치적인 문제로 휘말릴 개연성이 많은 곳이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위대한 교수일지라도 정치적 후원자의 도움이 없이는 인정사정없이 몰아치는 교단의 정치적인 폭풍으로부터 견뎌 낼 수가 없다. 박형룡 박사는 51인 신앙동지회를 통해서 교단 내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1972년 박형룡 박사 은퇴 후 예장 합동 교단의 정치권력의 구도가 서서히 재편되기 시작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박형룡 박사의 총신 교수 은퇴 전까지 자신의 든든한 정치 후원자이며 교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신앙동지회 회장인 정규오 목사를 비롯한 호남과 황해 세력이 영남과 평안세력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이때로부터 교단의 실력자인 영남의 이영수의 독주가 시작되었는데, 이후 이영수는 15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 기반이 단단히 다져짐으로 누구도 이에 대항하여 무너뜨리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돌아오는 총회의 임원 선거는 언제나 이영수 사단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때로부터 권력의 소수파로 전락된 정규오 목사 사단은 구세력으로 명명되면서 교단의 정치권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김요나와 김남식은「믿음의 사람, 효암 백남조」라는 책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 “1972년 박형룡 박사의 은퇴 이후 김희보 교수를 학장으로 내세운 신세력에 대해 교단 권좌에서 밀려난 구세력들은 그 후 7년 동안 갖가지 정치적 비리와 불법을 들추어 내면서 종래 총신의 보수신학이 변질되어 자유화되었다며 물고 늘어졌다.”

박형룡 박사가 소천(1978. 10. 25 오전 7시)한 이후 1979년 1월 구세력인 정규오 목사는 보수신학의 전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방배동에다 총회신학교(개혁측)란 학교를 세우고 교장에 박형룡의 영식 박아론 박사를 추대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다 2005년 9월 제90회 총회에서 다시 합병하게 되었는데, 1979년 분열된 이후 26년만의 일이었다.

제90회 총회(2005년 9월 27일-9월 30일, 대전중앙교회당)에서 합동되었다. <합동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분열과 나눔이라는 아픔”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힘입어 1979년의 분열을 극복하고 지난날의 실수를 뉘우치면서 한국교회 앞에 하나되는 교회의 참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더짐하기를 “우리는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우리의 신학적 바탕으로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신앙의 토대를 굳건히 한다.”라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원리에 의한 장로교회의 정치 체제와 그 역사를 계승”하고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사역을 극대화함으로 이 땅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최선”을 다하며, “바른 신학과 신앙으로 이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한다”고 다짐했다.

합동선언문은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가 되는 새 역사”를 이루었으며, “이제 분리보다 일치를, 정죄보다 용서를, 분산보다 협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선포하며, 개혁주의 신학의 아름다운 정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간구한다.”고 선언했다.

박형룡 박사가 만주 봉천신학교 조직신학교수로 학생들을 가칠 때에 조국의 교회가 일제에 의해 무침히 무너질 뿐만 아니라 1942년을 끝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일제에 의해 폐쇄되는 아픔의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1945년 해방이후 일제에 의해 폐쇄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다시 복구됐다.

해방 이후 자유주의 신학에 침식당한 총회는 서서히 보수주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대한 저항세력들로 결집되었다. 그 중심에는 호남과 황해지역의 목회자들이 박형룡 박사와 함께 교단의 정체성과 신학을 지키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박형룡 박사가 총신의 교수직에서 은퇴한 1972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박형룡 박사와 그와 함께한 정규오 목사 중심의 신앙동지회, 호남세력과 황해세력이 교단의 정체성과 보수신학을 지켜왔다. 호남지역의 교회는 미국남장로회의 선교지역이었기 호남지역 교회는 철저한 보수신학, 개혁신학을 기반으로 한 교회였기에 그 정신이 살아있다.

그 정신은 황해세력들과 함께 박형룡 박사의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매김하며 교단을 지켜냈다. 현재 예장합동 교단의 무지역 노회인 황해노회에 호남지역 시찰이 아직도 존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수장인 박형룡 박사가 총신의 교장직과 교수직에서 물러나는 기점으로부터 교단의 정치적인 세력균형은 호남과 황해세력에서 이영수 목사 중심의 영남과 평안도 세력이 교단 정치 최일선의 무대에 서게 된다.

1967년 영남의 이영수 목사는 대회제 시행을 교권획득의 기회로 이용하면서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를 제52회 총회장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교권획득에 성공한 이영수 사단은 1972년 제57회 총회에서 대회제를 폐지하게 된다.

영남 이영수 사단은 교권을 획득한 후 1971년부터 총회회관을 건립하면서 결국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호남의 정규오 목사의 세력과 분열하게 된다. 분열이 있는 직후 1980년 제65회 총회장에 이영수 목사가 결국 총회장에 등극한다.

그러나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분열된 호남권인 정규오 목사측과 다시 합동하였다. 그 합동이 이루어지기 직전 정규오 목사는 필자에게 직접 해 준 이야기는 결코 잊지 못한다(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참조).

해방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박형룡 박사와 함께 교단신학의 보수신학과 개혁신학을 지켜온 호남의 정치적 역량, 신학의 정체성 보수를 위해 헌신해 온 선배들의 뜻을 계승하려는 호남인사들은 과연 누구인가?

현재 예장합동교단에서 호남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교단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는 역량이 호남인들에게 있는가? 사분오열된 호남의 정치적인 역량과 개혁신학, 보수신학을 지켜내는 역동성과 능력이 있는가? 있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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