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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연재2] 존 칼빈, 그는 어떤 행복을 가졌을까?

주님 앞에 사명은 희생을 동반하며, 그것이 곧 행복이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15/06/06 [10:11]

[행복연재2] 존 칼빈, 그는 어떤 행복을 가졌을까?

주님 앞에 사명은 희생을 동반하며, 그것이 곧 행복이다

소재열 | 입력 : 2015/06/06 [10:11]
▲존 칼빈     ©리폼드뉴스

칼빈의 나이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웃 사람들은 칼빈에게 늘 어머니에 대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
 
“너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좋은 분이셨다.”
 
늘 주위 사람들은 칼빈에게 침이 마르도록 어머니를 칭찬했다. 칼빈의 아버지는 교회 행정관이었던 아버지 제랄 꼬뱅은 항상 아들의 출세를 위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출세의 야망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는 칼빈이 경우 12살 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미래에 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고향인 노용 성당의 보조 성직인 소년 사제가 되게 했다.
 
칼빈은 대학생활을 통하여 라틴어, 그리스어, 법학 등을 공부했다. 아버지는 제랄 꼬뱅은 마음을 바꾸어 칼빈에게 법학을 공부하라고 했다. 사제가 아니라 법률가가 더 많은 기회와 돈을 갖게 해 줄 것으로 믿고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칼빈은 아무런 불평 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고향 노용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으며, 결국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이후 칼빈은 심경의 변화가 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1년 만에 다시 고향 노용을 방문했다. 이 방문의 목적은 자신이 12살 때 받았던 성직을 반납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교회는 칼빈에게 앞으로 사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로마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 때의 칼빈의 나이는 사제로 안수를 받을 수 있는 25살이었다. 이때 로마교회 사제들은 칼빈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다.
“배신자, 우리 교회의 파괴자여, 사라져라.”
 
고향 노용의 주민들은 칼빈을 ‘이단자’로 결정했다. 칼빈은 체포되었고 교회에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노용의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고 풀려났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를 떠나 당시 독일령이었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름길은 전쟁 때문에 막혀 한 여관에 머물렀을 때 제네바에서 활동한 윌리암 화렐(William Farel)를 만났다.

 

▲현재 스위스 제네바 - 스위스 정부 관광청 제공     © 리폼드뉴스


화렐은 칼빈에게 제네바는 칼빈을 필요로 한다며 모셔가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은 자신은 학자이며, 책을 쓰는 사람일 뿐이라고 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화렐은 칼빈에게 말한다.
 
“존 칼빈, 자네는 지금 자네 공부만 중요하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데, 만일 이 일 돕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신에 자네 자신의 생각만을 쫓는다고 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을 하건데, 자네에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이네.”
 
칼빈은 훗날 이렇게 이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의 손을 내 위에 강하게 펼치시고 나를 붙잡으시는 것 같았다.”
 
칼빈은 결국 제네바에서 3년 동안 사역하다 그곳에서 추방당해(1538. 4. 23) 스트라스부르그로 갔다. 그곳에서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를 만나 그곳에서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로 초청을 받았다(1538. 8.1).
 
어느날 마틴 부처는 칼빈의 인생에 중요한 이야기를 꺼낸다.
“칼빈, 자네 이제 아내를 맞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칼빈은 부처에게 자신이 찾고 있는 여인상에 대해서 편지를 보낸다.
“나는 아내가 될 사람을 항상 마음에 두고 찾고 있습니다. 나는 겉모습에 치우친 나머지 첫 눈에 사랑에 빠져들고 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아름다움이란 오직 덕스럽고, 온화하고, 책임감이 있고, 알뜰하고, 참을성이 있고, 친절하게 나의 건강을 돌보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칼빈은 한 명문가의 젊은 여인을 소개 받았다. 그러나 그 여인이 과연 가난한 자신과 결혼할 수 있겠냐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또한 휼륭한 성품을 가진 여자를 소개를 받았지만 그 여인이 칼빈을 좋아하지 않아 성사되지 못했다.
 
칼빈은 프랑스 피난민 교회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델렛 드 뷰르(Idelette de Bure)는 정말로 믿을만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가진 여자였다. 또 아름답기도 했다. 이 여인은 미망인이었으며, 자크와 유딧이라는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결국은 칼빈은 31살인 1540년 8월에 화렐의 주례하에 결혼식을 갖게 되었다. 칼빈은 약간 강하고 개성이 있었던 아내를 가리켜 자기 생애 최고의 동반자로 말했다. 두 사람은 매우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늘 병든 몸 때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혼한지 1년 째 되던 해인 1541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는 치명적인 페스트가 돌았다. 칼빈은 아내를 안전하게 처남 집으로 가게 했다. 아내와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 때 상황을 칼빈은 화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에 전염병이 돌자, 두려움이 떨던 사람들은 서둘러서 위험 지역을 떠나갔다. 그러나 한참 병이 돌고 있는 지역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곳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구원의 희망에 깨어진 채, 어두운 절만이 감돌았다. 페스트가 번지고 있는 도시의 관리들은 병이 번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들을 서둘러 찾아냈다. 페스트에 희생된 사람이 있는 집마다 출입금지령이 내려지고,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은 다 격리되도록 명령을 받았다. 오직 특별히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음식이나 다른 필요한 것들을 집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밤이 되면 창문으로 운반되어 나온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성문 밖 공동묘지로 실어 나르는 수레소리로 길거리가 요란 그러웠다. 페스트가 돌던 도시가 정상을 되찾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프랑스, 스위스 독일 주변 지도     © 리폼드뉴스


제네바는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칼빈을 다시 초청하자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오게 되었다(1541. 9. 13). 제네바로 돌아온 지 1년 후, 결혼한지 2년만인 1542년 여름,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 아이는 5일 만에 죽고 말았다. 칼빈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대학 동창생인 친구에게 자신의 심경을 밝힌다.
 
“주님께서는 우리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혹독하고도 쓰라린 상처를 입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무엇이 자기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 후에는 칼빈과 이델렛에게 자녀가 없었다. 아내 이델렛은 늘 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토요일 저녁, 55세의 일기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
 
칼빈은 16세기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이다. 칼빈은 교회나 기독교 교리의 개혁에서 뿐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분야에서 너무나도 큰 영향을 남겼다. 칼빈은 영어식 발음이며, 칼빈의 모국인 프랑스어로 ‘장 깔뱅’이라고 부른다. 영어식인 존 칼빈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다.
 
장로교회에서는 칼빈이 남긴 업적에 대해 대단한 평가를 내린다. 장로교의 교리적인 체계와 정치적인 운영의 체계인 교회법을 통해 개혁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행복은 일생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벗어난 성경적인 참된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갖고 싸웠던 사람이다.
 
칼빈이 결혼한 이델렛과는 겨우 9년 동안의 결혼생활이 전부였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15년 동안 혼자 살면서 개혁교회의 초석을 위해 설교와 주석집필 등을 위해 고통과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의 삶을 불행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라고 믿었다.
 
과연 칼빈, '그는 어떤 행복을 가졌을까'하는 질문을 해 본다면 '그래도 그는 행복했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소재열 목사(리폼드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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