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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1
정원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04/12 [09:34]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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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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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래 박사
이 글은 정원래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탄생 배경, 믿음의 주요 조항들, 교회 안의 오용들, 고백서의 영향과 의의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I. 들어가며

기독교에 있어서 신앙 고백은 그 원리와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초대교회에서 형성된 사도신경, 니케아 신앙고백,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은 현재에도 기독교 신앙 고백의 정수를 지키고 있다. 초대 이후의 대부분의 신앙 고백들 역시 이들 세 신앙 고백의 재확인과 전통을 수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의 전통이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나 개신교의 원리와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신앙 고백은 이후 교회와 신학의 역사에 이정표가 되어 왔다. 종교개혁 초기의 1530년 독일에서의 4개 도시(Strassburg, Memmingen, Lindau, Konstanz)의 신조, 1534년의 ‘바젤 신조’(Confessio Basiliensis prior), 1536년 ‘1차 스위스 신조’(Confessio Helvetica prior/ Basiliensis posterior), 1549년 ‘스위스 일치신조’(Zurich Consensus), 1559년 ‘갈리아 신조’(Confessio Galicana), 1561년 ‘벨기에 신조’(Confessio Belgica), 1560년 ‘스코틀랜드 신조’(Confessio Scotica), 1561년 ‘제 2차 스위스 신조’(Confessio Helveticaposterior), 1562년 ‘헝가리 신조’(Confessio Hungarica), 1563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er Katechismus), 1619년 ‘도르트레히트 신조’(Dordrechter Canones), 1648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등등.

이러한 신앙 고백의 배경이나 성격 또한 다양하다. 예를 들면 1536년의 ‘1차 스위스 신조’(Confessio Helvetica prior)는 스위스의 도시들인 취리히, 베른, 바젤이 바울 3세 교황이 소집한 1537년의 만투아 공의회를 위하여 개혁파 공통의 신조 근간을 마련하려고 편집되었다.

1549년의 ‘스위스 일치신조’(Zurich Consensus)는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의 성만찬론 공통분모를 따라서 작성되었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의 개혁교회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이는 ‘제 2차 스위스 신조’(1566) 역시 동일한 목적 하에서였다. ‘스위스 신조’들, ‘스코틀랜드 신조’, ‘헝가리 신조’, 그리고 ‘갈리아 신조’ 등은 강력한 칼빈주의 성향을 지닌다. 반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은 멜란히톤과 칼빈주의 경향을 모두 담고 있다.

1580년대에 출판된 루터교의 신앙을 드러내는 일치서』(Konkordienbuch)는 고대 교회의 세 신앙 고백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1530), 그 『변증서』(Apologia, 1531) 그리고 ‘슈말칼덴 조항’(Schmalkaldischen Artikel, 1537) 그리고 루터의 두 편의 ‘요리문답’ (Kleinen Katechismus und Großen Katechismus, 1529) 그리고 『일치신조』(Konkordienformel, 1577)로 구성된다. 즉 종교개혁의 정신과 루터교 신앙의 정체성 역시 여기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신앙고백의 틀에 기틀을 놓은 것이 멜란히톤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라고 판단된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종교개혁의 역사에 “중요한 전기”를 낳았다고 평가된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교 제후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고백이다. 이 고백서는 1530년 6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황제 카알 5세(Karl V)에게 루터교 개혁파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 고백서는 종교적 대화, 슈말칼덴(Schmalkanden) 동맹의 기초,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적 평화를 위한 관용의 기초가 되는 근본이며, 오늘날까지도 루터교회를 통합하는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본 논고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지닌 의의와 함께 그 내용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째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탄생 배경과 역사를 살펴보고, 이어서 그 내용은 둘로 나누어 살핀다. 왜냐하면, 전체 28조항 중 1-21조항은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교리가 성경과 전통과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22-28조항은 가톨릭 진영에 있는 오남용들을 제시하고 제거되어야 함을 제시하려 한다. 앞부분에서는 교리적 부분이 주이며, 둘째 부분에서는 주로 예식과 제도에 관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을 구별해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검토함으로 마무리한다.

II. Confessio Augustana의 탄생과 배경

1.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작성 배경

종교개혁의 발발 이후 루터교 진영은 처음으로 멜란히톤에 의해 자신들의 신앙 고백적 진술을 하게 된다. 멜란히톤은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루터교 신앙 교리의 초석을 놓았고, 1531년 『변증서』(Apologia)를 통해 그 의의를 설명하였다. 실상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교 내부의 필요성에 의해서라기보다는, 1530년 독일을 방문한 황제 카알 5세가 개최한 제국의회에 제시한 루터 진영의 가르침의 요약이다. 1529년에 개최된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구교의 귀족들이 보름스 칙령의 실행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이에 저항하는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카알 5세는 이러한 갈등을 신속하게 중재하고 조정할 필요성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동쪽에서의 터키 군대의 위협이었다. 터키군은 1529년 9월 오스트리아의 빈을 위협하였다. 이를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황제는 독일 제국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했다. 이에 황제는 1530년 1월 21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하였는데, 그 목적은 터키군의 위협에 대한 대처와 분열된 독일의 신앙적 상황에 대한 중재였다.

아우구스부르크에서의 제국의회로의 초청은 화해의 제스처로 이해되었고, 루터진영은 긍정적인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1529년 3월 스페이어(Speyer)에 있었던 지난 제국의회에서는 보름스 칙령(Wormer Edikt)이 확증되었고, 이로서 개혁파는 법적으로 불안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회의에서는 황제와 교황이 다음 해에 열기로 적극 약속한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종교개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공포하면서 명령을 어기는 자는 황제의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슈파이어 회의에 참석한 루터교 대표단은 이대로 진행될 경우 종교개혁 진영 전체가 고사될 위기에 이른다고 판단하고, 1529년 4월 25일 자신들과 자신들의 백성들, 그리고 현재와 장래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또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법적 호소문 형식을 갖춘 유명한 ‘항의서’(Protestanten)를 발표하였다. 슈파이어에서 항의 이후에 개신교 영주들은 정치적 동맹을 원했다.

우선적 종교개혁 찬성 진영은 지역 간에 존재하는 상이한 교리적 이해 (특히 성찬이해)가 존재했고, 그 차이점이 조정된 일치된 신앙고백문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529년 슈바바흐에서 모인 종교개혁진영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성경과 전통에 근거해 있음을 제시하며 신앙고백을 작성했다. 이것이 ‘슈바바흐 조항’(Schwabacher Artikel)이다. 슈바바흐 조항은 모두 17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슈바바흐 조항’은 스위스 개혁파 진영과의 마르부르그 회담(Marburger Religionsgespraech)에서도 중요한 근간으로 사용되었다. 헤센의 영주 필립은 10월 14일까지 마르부르그에서 회의를 통해 스위스의 개혁파 진영과 연대를 꾀했다. 하지만 루터와 멜란히톤은 성찬 문제에 관해 츠빙글리 진영과 동맹을 맺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동시에 1529년 10월 16일 슈바바흐에서 만난 영주들은 ‘슈바바흐 조항’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결국 개신교 진영의 확장을 실패했고, 약해진 상태에서 가톨릭 진영을 상대해야 했다.

한편으로 종교개혁 진영 영주들의 ‘항의’는 황제에게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황제의 통치력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터키군의 위협에 대한 협조 역시 필요성을 배가시켰다. 따라서 황제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회의를 소집하자, 작센의 선제후 요한(Johann der Bestaendiger)은 루터, 멜란히톤, 부겐하겐(Bugenhagen), 그리고 요나스(Jonas)에게 만일 회의에서 요청이 있으면 제출할 수 있는 개신교 신앙의 요약을 준비하기 위해 토르가우(Torgau)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 루터와 멜란히톤(Melanchthon)에게 토르가우(Torgau)에서 만나 종교개혁의 변증서(Apologie)의 작성을 요청했다. 나아가 선제후는 그들에게 종교개혁은 오직 오용되는 교회관습의 제거일 뿐이라는 점을 저술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때 작성된 개신교 신앙의 요약이 ‘토르가우 신조’(Torgauer Artikel)로 칭해진다. 이 모두 1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토루가우 신조’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조 2228조항의 기초를 구성하게 된다.

아우구스부르크 회의는 원래 개최 예정인 4월 8일을 넘겨 6월 20일에 개최되었다. 황제는 먼저 터키족의 침공을 막기 위한 지원을 얻어내려 했으나, 개신교 진영은 교회 문제를 먼저 다룰 것을 요구했다. 황제는 “하나의 기독교 진리를 되찾고, 불화를 제거하여 우리 모두가 한 분 그리스도 아래 서서 싸우고 또한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교회에서 살도록 사랑과 선의로 논의해야 한다.”며 양 진영에 독일어 그리고 라틴어로 입장 표명을 요청했다.

루터는 제국의회로부터 법의 보호를 박탈당한 상황이었기에, 멜란히톤이 아우크스부르크로 여행하면서, 토르가우 신조와 1529년 슈바바흐 신조(the Schwabach Articles), 그리고 마부르그 신조(Marburg Articles)에 기초하여 변론한 준비를 하였다. 첫째 1-21조항은 소위 중요한 신앙 조항인데 무엇보다도 슈바바흐 조항을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둘째 22-28조항은 불화하는 조항으로 토르가우 조항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정병식은 여기에 두 문서를 더하여 멜란히톤이 최소 5개의 문헌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르부르크 합의, 루터의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하여』(Vom Abendmal Christi, 1528), 그리고 1528년에 나온 『작센 선제후령의 목사들에 대한 시찰 요강』(Unterricht der Visitatoren and die Pfarrherren im Kurfuerstentum zu Sachsen) 등을 제시한다.

시간이 흐른 후, 멜란히톤이 작성한 이 문서는『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으로 개정되었다. 또한 이 문서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코부르크에 남아있던 루터의 찬성을 얻었다. 루터는 멜란히톤이 작성한 신조가 너무 평화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수용하였다: “나는 교사 필립의 변증서를 읽었습니다 이것은 무척 내 마음에 듭니다, 나는 이것을 더 잘하거나 개정할 만한 어떤 것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부드럽거나 온화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기도하는 것처럼 크고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우리의 주 그리스도께서 도움을 주소서. 아멘.”

루터는 코부르크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멜란히톤에게 조언하기도 하고, 유약하고 의지가 약한 동료 멜란히톤을 격려하였다. 신앙고백서가 제출된 후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던 멜란히톤에게 루터가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너는 그리스도를 고백했다, 너는 평화를 제시했다, 너는 황제에게 복종했다. 너는 불의를 인내했다. 너는 그들의 모욕에 흠뻑 졌었다. 너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다. 너는 성자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훌륭하게 해냈다.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 의로운 자여. 너는 세상에서 충분히 애통하였다. 너의 머리를 들고 보라, 너의 구원이 가까웠음이라. 내가 너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지체로 인정하리니, 네가 이보다 더 큰 어떠한 영광을 바라겠는가! 작은 일에서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게 섬겼으니, 네가 그리스도께 가치 있는 지체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멜란히톤은 아우구스부르크 회의 직전에 참석한 영주들의 의도에 따라 그 서문을 수정해야 했다. 결국 최종적인 서문은 작센 궁정의 브뤽(Brueck)이 편집하였다. 멜란히톤은 마지막 순간까지 라틴어본을 다듬었으며, 헤세의 필립이 서명하도록 성찬에 관한 신조를 추가하였다.

6월 25일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주교 관저의 작은 예배실에서 모인 회의에서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 독일어로 낭독되었다. 황제의 양보는 터키(Turks)와의 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협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낭독이 끝난 다음, 이 문서의 독일어 사본과 라틴어 사본이 황제에게 건네졌는데, 황제는 독일어 사본은 마얀스(Mayance)의 선제후에게 주고 자신은 라틴어 사본을 받았다. 아쉽게도 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출판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라틴어 본에 서명한 독일의 귀족들은 작센의 선제후 요한(Johann, Herzog zu Sachsen, Kurfürst)을 비롯하여 7명과 2인의 도시 대표자들이며, 제국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바이센부르크(Weißenburg), 하일브론(Heilbronn), 켐텐(Kempten) 그리고 빈스하임(Windsheim) 등의 도시들이 이 고백에 동의하였다.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것을 멜란히톤이 제후들에게 경고하자, 작센의 선제후 요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옳은 것을 할 것입니다. 나의 선제후의 권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나의 주를 고백할 것이며, 그분의 십자가를 지상의 모든 권력보다도 더 경배할 것입니다.”

낭독이 끝났을 때, 가톨릭 진영에서 찬사가 나왔다. 특히 바이에른의 공작 윌리엄(Duke William of Bavaria)는 에크가 루터주의자들의 견해를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이어서 그는 “이제 나는 루터주의자들이 성경 안에 있고, 우리가 밖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말하기도 하였다.

두 판본은 모두 상실되었다. 신앙고백의 원문에 대하여 우리는 1531년 멜란히톤 자신이 출판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초판(editio princeps)을 통해서 처음 접한다. 제국의회에는 에크(Eck), 파베르(Faber)를 비롯한 25명의 가톨릭 신학자들이 있었고, 즉석에서 반박서(Confutatio)를 준비하였다. 이는 황제와 다수의 의견을 표현하였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반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논박이 멜란히톤으로 하여금『변증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제국의회는 『변증서』를 받기를 거부하고 이듬해 4월 15일까지 가톨릭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을 경우 개신교에 대한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의하였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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