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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 2
정원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7/04/19 [10:1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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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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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원래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탄생 배경, 믿음의 주요 조항들, 교회 안의 오용들, 고백서의 영향과 의의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2.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구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교리적 내용에 있어서는 루터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 형식이나 순서 혹은 부드럽고 온화한 정신 또한 온건한 목소리 등은 전적으로 멜란히톤에 의존한다. 필립 샤프는 이 고백서의 “내용에서 원 저자는 루터로, 이차 저자는 멜란히톤이지만, 이 고백서의 문체나 분위기의 유일한 저자는 멜란히톤”이라 평가한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나타나는 종교개혁자들의 목표는 새로운 교회를 창설하거나 새로운 교리를 도입하고 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1)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자신들의 교리가 초대 세계의 보편적 교회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2)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여 도입된 교리와 의식의 악습들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 1-21조항은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신앙과 교리가 성경과 전통과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제 22-28조항은 가톨릭 진영에 있는 오해들을 제시하고 제거되어야 함을 제시하려 한다. 이는 앞부분에서는 교리적 부분이 주이며, 둘째 부분에서는 주로 예식과 제도에 관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필사본들과 초기의 인쇄본들에서는 조항들에 숫자만 매겨졌으며, 표제가 붙은 것은 후대의 작업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교리적 체계의 개요의 완성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매우 의도적으로 작성되었다. 필립 샤프는 첫 부분을 크게 넷으로 구분하는데, 로마교회와 일치하는 부분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들, 로마와 반대되는 부분들, 그리고 츠빙글리나 재세례파와 구분되는 부분들로 나누고 있다. 반면 클로체는 이렇게 평가 한다:

“모든 교리의 중심은 제 4조, 즉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에 있다. 앞의 3개조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신론적(I. 하나님에 대한) 전제, 인간론적(II. 죄에 대한) 전제, 기독론적, 그리고 구원론적(III. 하나님의 성자에 대한) 전제를 담고 있다. 교리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악습들과도 관련된 나머지 조항들은(XXIIXXVIII)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중요하고 근본적인 조항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교리의 조명을 받고 있다.”

클로체의 평가에 따르면 ‘이신칭의’의 교리가 전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핵심이며, 이에 비추어 다른 조항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와 조금 달리 필립 샤프는 각 “조항들은 교황파로 하여금 적대적 의지를 버리게 할 목적으로 신중하고도 주의 깊게 작성되었다. 루터가 교회의 일어섬과 넘어짐의 관련된 조항으로 단언한 이신칭의 의 교리(제 4조)조차 간단 명료하고 온건하게 진술했다. 루터가 그토록 강하게 주장하고 가톨릭 진영이 그토록 반대한 ‘솔라’[sola]라는 단어도 넣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결국 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신앙에 대한 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화를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적 구분과 더불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상당한 분량의 서문(praefatio)과 결언(epilogus)을 담고 있다.

III.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 믿음의 주요 조항들

수신자로서 황제(Karl V)와 제국의회를 거론한 뒤에 시편 119편 46절로 그 의지를 표명한다: “또 왕들 앞에서 주의 교훈들을 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사오며”. 이어 상당한 분량의 서문이 등장한다. 이는 법률가인 대법관 브뤽에 의해 작성한 것으로 장황한 외교적 수사와 더불어 당시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 우리의 거룩한 종교와 기독교 신앙의 문제에 불일치 때문에, 다양한 그룹의 의견들과 판단에 따른 신앙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이 서로의 참석 가운데 들려지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사랑과 온유함과 부드러움 가운데 서로서로 이해되고 비교 검토 되어야 합니다. 양 진영의 글에서 잘못 다루어지거나 이해된 것들은 배제되거나 수정되어야 하며, 이러한 일들은 하나의 온전한 진리와 기독교의 일치에 따라 조화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하나의 거짓 없는 참된 종교가 우리에 의해 예배되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국 폐하의 뜻에 경의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신앙의 문제에 우리 설교자들과 우리의 자신의 신앙 고백과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근거한 교리를 제시합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 우리의 땅과, 공작령과, 영지들과 및 도시에 명시되었고,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쳐졌습니다. ...

폐하, 여기 가장 영명한 우리의 주의 면전에, 우리는 영주들과 친구들이 지명 하에 공손하게 가능한 방법과 길로 관점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하였습니다. 그것이 명예롭게 되는 한 우리는 동의할 것이며, 양 진영 사이의 문제들이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평화롭게 토론되고,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그 불일치들이 제거되고 하나의 참된 일치된 신앙으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들은 가장 열렬한 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이 인정하시기를 간청하는 그 하나님의 진리로 인도되어져야 합니다.”

서문에서 드러나는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종교개혁 진영과 가톨릭의 신앙적 불일치의 상황에서 그 문제들이 상호간의 사랑과 온유함 가운데 비교 검토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서로 간에 오해나 잘못 다루어진 것들이 있다면 수정되거나 배제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하나의 온전한 진리가 회복되고 거짓 없는 참된 종교가 예배되고 유지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양 진영 사이의 문제들이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평화롭게 토론되고,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그 불일치들이 제거되고 하나의 참된 일치된 신앙으로 회복되기를 갈망한다. 둘째는 이 신앙의 문제들에 의해 종교개혁 진영의 설교자들과 참석자들의 신앙고백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자신들의 교리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조 제 1조에서 ‘하나님에 관한’(De Deo) 이해에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나 『변증서』는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나오는 것과 같이 고대 교회의 교리들을 되풀이함으로 시작한다.

“우리 가운데 공통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교회는 신적 본성의 단일성과 삼위일체에 관한 니케아 공회의 신조들이 진리이며 의심 없이 믿는다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이라 불리시고 하나님이신 하나의 신적 본질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육체가 없으시고, 분리되지 않으시고[부분으로 나뉘지 않으시고], 권능과 지혜와 인자가 무한하시며, 모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주시오 보존자이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과 능력이 동등하시며 동일하게 영원하신,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계신다. ...”(Confessio Augustana=CA. I).

즉 신적 본질과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에서는 가톨릭 진영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경과 전통에 따라 진리이며 틀림없다고 고백한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교리를 반대하는 모든 이단들 발렌티누스파, 아리우스파, 유노미우스파, 이슬람교 등을 정죄한다.

신조 제 2조는 ‘원죄에 관해서’(De peccato originis)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아담의 불순종 이후로 모든 인간은 자연적인 상태에서 죄 가운데 잉태되고 출생하였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참 경외함과 참 믿음이 없이 악한 정욕과 경향성을 지닌다. 이 질병, 즉 본성적인 원죄는 실제로 죄이며, 이로 인해 모든 인간은 세례와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정죄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교회들은 이 원죄가 실제로 죄 됨을 부정하는 펠라기우스파와 그 밖의 집단들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의 영광을 축소하기 위해, 인간이 자신의 이성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정죄한다.” (CA. II).

제 2조에서의 중요한 연결은, 첫째는 “모든 인간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출생하는 한 죄를 지닌다.” 둘째는 “인간은 자신의 힘과 이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셋째는 이와 같이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신론에 이어 원죄의 교리가 두 번째로 거론되어 있다. 이는 “원죄의 교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개신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조 제 3조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De filio Dei) 다루고 있다.

“교회는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므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을 지닌다고 가르친다. 이 두 본성은 위격의 통일성 안에 분리할 수 없게 서로 결합되어 있다.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신 한 분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실제로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는데, 이는 그로써 성부를 우리와 화해케 하심이요, 인간의 원죄뿐 아니라 모든 자범죄까지도 속죄하기 위한 제물이 되시려 하심이었다. ... 동일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대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다.”(CA. III).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사도 신경과 칼케돈 신조에 대한 완전한 동의를 표현하고 있다. ‘죄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라는 2조의 주장에, 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와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모든 자들을 위한 대속의 희생이 되신 것이다. 즉 유일한 중재자이시다.

클로체는 이 3조를 설명할 때, 멜란히톤의 『변증서』를 연결시켜 이러한 성격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성인들에 의해서나, 미사 의식의 희생에 의해서나(CA. Apol. XXIV),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서 보충될 수 없다.” 오로지 죄 용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신조 제 4조는 종교개혁의 핵심인 “칭의에 관한”(De Justificatione) 교리를 다루고 있다. 클로체는 “모든 교리의 중심은 제 4조, 즉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에 있다. 앞의 3개조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신론적(I. 하나님에 대한) 전제, 인간론적(II. 죄에 대한) 전제, 기독론적, 그리고 구원론적(III. 하나님의 성자에 대한) 전제를 담고 있다. 교리와 관련될 뿐만 아니라 악습들과도 관련된 나머지 조항들은(XXIIXXVIII)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중요하고 근본적인 조항들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교리의 조명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츠어 뮐렌 역시 13조를 제 4조의 ‘칭의’를 다루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이해한다.

“또 교회들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공로 혹은 행위로 하나님 앞(coram Deo)에서의 의롭다 함(사죄의 의)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죄의 용서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롭다 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도달하는 것이다. 칭의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에 대한 믿음이며, 이로서 영원한 생명이 선물된다.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앞에 의로 간주한다.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잘 드러난다.”(CA. IV).

인간이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propter Christum per fidem) 의롭게 된다는 표현은 종교개혁 신앙의 가장 빛나는 요소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로 인해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삶, 수난과 죽으심의 공로를 통해서만 칭의가 가능하다.

그리스도는 칭의의 가능성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의의 영원한 근거가 된다. 또한 츠어 뮐렌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를 ‘인간 앞에서’(coram hominibus)에 대비시키는 루터의 사고와 연결시킨다. 즉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로만 의롭다 여김을 받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신의 힘으로 선행이나 행위로” 자기를 의롭게 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따라서 칭의를 획득하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믿음뿐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은 믿음 그 자체가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인해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조항으로 이해되고 설명됨에도 불구하고 제 4조는 매우 간략하다. 이러한 이유로 츠어 뮐렌은 “멜란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제4조에서 하나님 칭의를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propter Christum per fidem) 된 칭의라고 비교적 단순하게 표현을 제한 것은 대화의 가능성을 막아버리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한다.

신조 제 5조는 교회의 직분에 관한(De Ministerio Ecclesiastico) 이해를 보인다. 하나님은 복음을 증거하고 성례를 집행하기 위하여 사제의 직분을 제정하셨다. 이 사제의 직분을 통해 신조 제 4조에서 설명한 의롭게 하는 믿음이 전달된다.

“이러한 믿음을 얻게 하려고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를 집행하는 직분이 제정되었다. 도구처럼 말씀과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믿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이 주어진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안으로 받아드려짐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의 수단 없이 성령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재세례파와 그 밖의 사람들을 정죄한다.”(CA. V).

선포되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한다. 말씀과 말씀 안에서 제정된 성례전은 은총의 도구이다. 또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곳, 원하시는 때에 성령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제 5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신자에게 성령으로 역사함에 초점이 있지는 않다. 오히려 말씀 없이도 성령이 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이 신앙고백은 “말씀과 성례에 의하여”(per verbum et Sacramenta)를 믿음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제시함에 있다. 또한 『변증서』에 첨언하기를 “단지 외적인 행위로 집행만 하여도 성례가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신학의 ‘ex opere operato’(사효성) 교리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신조 제 6조에서는 새로운 순종(De Nova bedientia)을 말한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의롭다 칭하는 받는 신앙을 마치 행위 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율법폐기론자로 비쳐지는 오해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다.

“교회는 [앞의] 믿음은 선한 열매를 낳아야 하며, 사람은 하나님이 명하신 선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한 공로를 자신해서는 안 된다. 사죄와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 이러한 교훈은 초대 교회의 저자들도 가르친 것이다. 암브로시우스(Ambrosius)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기를,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값없이 죄의 사함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요.”(CA. VI).

행위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곳으로, 선행을 통한 의의 공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믿음이 선행을 가져오는 것이다.

멜란히톤은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한다. 반면에 루터에게 선행이란 살아 있는 신앙의 뒤를 저절로 따르는 ‘신앙의 산물’로 이해된다. 믿음이 없이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없는 까닭에, 신자들이 믿음의 열매로서의 선행을 하는 것을 멜란히톤은 ‘새로운 순종’으로 표현하였다.

신조 제 7조에서는 교회론(De Ecclesia)을 다룬다.

“또한 교회들은 하나의 거룩한 교회가 영원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congregatio Sanctorum)으로서, 복음이 합당하게(recte) 그리고 성례가 정당하게(recte) 행해지는 곳이다. 그리고 교회가 참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복음의 교훈과 성례 집행에 관하여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satis). ...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제정된 전통, 의식, 예식 등은 모든 곳에서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CA. VII).

멜란히톤은 우선적으로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을 통해 일어난 거룩한 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한다. 때문에 교회가 계획하고 명하는 모든 행위들이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과 율법에 따라서 명령하신 행위들만이 선한 행위들에 해당한다. 또한 멜란히톤은 인간 전통과 의식의 영역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반면에, 교회 일치 문제는 복음이 선포되고 성례전의 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후자의 통일성에 관심이 큰 로마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신조 제 8조에서는 ‘교회의 본질’(Quid sit Ecclesia)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고 있다.

“비록 교회가 성도와 참된 신자의 모임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에는 많은 위선자나 악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 악인들에 의해 거행된 성례도 정당하다. 왜냐하면 성례와 말씀은 그리스도의 제정과 명령을 근거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교회들은 교회에서 악인들의 봉사를 사용하는 것이 정당함을 부정하고, 악인들의 봉사는 유용하지 않으며, 효과도 없다고 주장하는 도나투스파(Donatists)와 또한 이와 같은 부류를 정죄한다.”(CA. VIII).

멜란히톤에게 교회란 ‘거룩한 성도와 참된 신자들의 모임’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의 현실은 이와 다르다. 그 안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공존한다. 악한 자들에 의한 성례의 집례라도 유효한 것은 성례의 효과가 그리스도의 제정의 말씀과 명령에 따라 효력을 발하며, 믿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따라, 교회를 눈에 보이는 성결에 제한하는 도나투스주의의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제 9조부터 13조까지는 가톨릭교회의 성례와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세례, 성찬, 죄의 자백과 회개 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조 제 9조는 ‘세례에 관하여’(De Baptismo)는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전통에 일치된 입장을 보인다.

“교회들은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제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아세례 역시 행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유아들 역시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 봉헌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아세례를 거부하며, 유아들은 세례 없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를 역시 정죄한다.”(CA. IX).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따라서 유아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례를 통해 유아들도 하나님께 인도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참여자들이 되는 것이 합당하다. 이에 멜란히톤은 재세례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반대를 명백히 하고 있다.

신조 제 10조에서는 주의 만찬에 대하여(De Coena Domini)다룬다. “주의 만찬에 관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에 참으로 현존하며(adsint),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진다(distribuantur)고 가르친다. 교회는 이와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인정하지 않는다.”(CA. X).

멜란히톤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적인 임재’(Realpräsenz Christi)를 말하며, 단순히 영적인 해석을 거절한다. 후일 이 조항은 화체설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현존하며’(vere adsint)라는 표현은 10년 후 멜란히톤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 개정판』(Confessio Augustana Variata)에서 삭제하였고, 오직 실재 임재(Realpraesenz) 한가지로 표현한다.

제 11조에서는 ‘죄의 고백에 관하여(De Confessione) 거론한다.

“고백에 관하여, 교회들은 비록 모든 죄를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개별적인 사면(absolutio privata)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 죄를 다 열거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CA. XI)

실제로 모든 죄를 세는 일 자체는 불가능하다. 나아가 모든 죄목을 고백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총의 기다리는 것이 먼저다. 이러한 죄를 나열함에 급급해,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 먼저임을 잊어버릴 염려도 있다.

신조 제 12조에서 ‘회개에 대하여’(De Poenitentia) 말한다. “교회들은 세례 받은 이후에 범죄 한 자도 그가 회개한다면 언제라도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교회는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사해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사면은 교회에서 회개하는 자들에게 거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한 참 회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죄에 대한 뉘우침(contritio) 혹은 죄를 깨닮으로 인한 양심 두려움으로 정의될 수 있다. 둘째는 복음과 사죄의 약속에 힘입어 품는 믿음이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함을 받으며, 양심이 위로받으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된다. 이어서 회개의 열매인 선한 행실이 따르게 된다.

교회들은 일단 의롭게 된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며 또한 의롭게 된 자들은 죄를 지을 수 없기[다시 타락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완전함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또한 세례 받은 이후에 타락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는 노바티안파(Novatians)도 정죄한다. 이는 그들이 죄의 용서가 믿음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보속을 바쳐 은혜를 얻을 공로를 쌓으라고 명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CA. XII).

제 12조 회개에 관한 원리에 따르면, 첫째는 세례 받은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 타락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므로, 교회도 그들의 사면을 허락해야 한다. 둘째는 회개는 두 부분으로, 즉 죄에 대한 슬픔 또는 두려움과 복음에서 나오는 믿음 또는 사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은혜를 얻는다는 믿음이다. 셋째는 회개의 열매는 선한 행실과 삶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

신조 제 13조에서는 ‘성례의 사용에 대하여’(De Usu Sacramentorum) 말한다. “교회는 성례가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외적인 표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고 강화하는 신적 의지의 효과적인 표시이자 증거라고 가르친다. 때문에 성례는 성례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선포된 약속을 믿는 믿음과 결합되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례가 ‘거행된 그 자체에 의해’(ex opere eperato) 합법화 된다고 하거나, 성례를 받음에 죄 용서함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한다.”(CA. XIII).

제 13조는 앞서의 제 8조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멜란히톤은 성례에서 세 가지의 유익을 제시한다. 첫째는 성례를 단지 신앙고백의 표시이다-츠빙글리의 견해. 둘째,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신적 의지의 표시이기도 하다. 셋째는 신자들은 성례를 통해 한 믿음의 공동체로 연합한다.

신조 제 14조는 ‘교회의 직분에 관하여’(De Ordine Ecclesiastico) 거론한다. “교회의 직분들에 관하여, 교회는 합당하게 임명되지 않고,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성례를 집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CA. XIV).

이 14조는 앞서의 5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교회의 직분은 믿음을 얻게 하고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를 집행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따라서 교회만이 이러한 사역을 수행할 사람들을 임명한다. 때문에 정식으로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성례를 집행해서는 안된다.

이는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을 부인하려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된 작센 선제후령의 개신교회에 대한 합법성을 강조하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조 제 15조는 ‘교회의 의식들에 대하여’(De Ritbus Ecclesiasticis) 가르친다. “인간에 의해 정해진 의식은, 그것이 죄를 조장하지 않고 지킬 수 있으며, 어떤 절기(holidays), 축제(feasts) 또는 그와 같은 것들이 교회의 평화와 선한 질서에 유익한 경우에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처럼 양심에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 또한 인간에 기원은 둔 모든 제도나 전통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은혜를 얻기 위한 공로를 쌓으려고 한다면 이는 복음과 믿음의 교리에 반대된다. 따라서 수도원 서약이나 음식이나 날에 대한 전승 등은, 인간이 이를 통해 은혜를 얻으려고 한다면, 이는 무익할 뿐 만 아니라, 복음에 반대된다.”(CA.XV).

경험적 현상에 비추어 가시적 교회는 은혜의 방편인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집례 및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인간적인 의식들을 필요로 한다. 멜란히톤은 이러한 의식들이 복음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받아야 하며,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복종을 요구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혹 이러한 전승이나 제도, 전통으로 하나님께 공로를 쌓으려는 의도를 지닌다면 이는 복음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로마 가톨릭의 전통과 의식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복음에 위반되는 전통에 대한 폐지로 읽혀질 수 있다.

신조 제 16조에서는 ‘세속 정부에 관하여’(Res Civilibus) 다룬다.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합법적으로 세워진 공적인 통치는 하나님의 선한 질서에 속한 것으로, 그리스도인 역시 합법적인 공직, 군인이나 판사와 같은 직을 수행할 수 있다. 제국의 유효한 법에 따라 권리를 말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소위 ‘의로운 전쟁’(jure bellare)에 종사하며, 군 복무를 할 수 있고, 범죄의 대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정당하며, 그리스도인이 재산을 소유하는 것, 결혼을 하는 것, 법정에서 권리를 다투는 것, 행정관의 요청이 있을 때 맹세를 하는 것,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것 등등이 허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재세례파를 정죄하는데, 이는 그들이 시민적 의무를 반대하는 까닭이다. 나아가 복음의 완전함을 하나님 경외와 믿음에 두지 않고, 세속 관직의 포기로 완전에 이를 수 있다거나, 위에서의 행위를 비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정죄한다. ...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정부나 법이 어떤 죄를 명하지 않는 경우에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따라야하기 때문이다[행 v. 29]”(CA. XVI).

이 16조에서는 루터 신학의 두 왕국론이 논해진다. 국가는 전권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와 국가는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복음을 가르치고 성례를 행하는 것이 고유의 의무라면, 국가는 질서와 평화의 유지와 세속적인 일에 관여한다. 멜란히톤은 신자들이 관원들과 국가의 법률에 대한 순종할 것을 신앙적 의무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적법한 국가의 규례들은 하나님의 선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공적인 직무에 종사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죄를 짓도록 명령하는 경우에는 불복종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 복종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신앙과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 세속권력자들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이 둘을 구분한다. 동시에 세상 권력자들을 새로운 교회의 공적인 대표자들로 인정하는 주장이다. 비록 세속 권력자들이 말씀과 믿음의 대표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이 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인정되는 루터교의 독특성이 드러난다.

신조 제 17조는 ‘그리스도의 심판의 재림에 관하여’(De Christi Reditu ad Judicium) 고백하고 있다. “교회들은 세상의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심판하기 위해 나타나실 것이며, 모든 죽은 자를 일으켜, 경건하고 택함 받은 자들에게는 영생과 영원한 기쁨으로 인도하시고, 불경한 자들과 악한 영들은 영벌로 심판하신다. 교회들은 정죄 받은 사람들과 악한 영들의 고통이 끝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재세례파를 정죄한다. 교회들은 오늘날 흩어진 유대인들의 견해, 즉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전에 거룩한 자들이 세상 나라를 차지할 것이고, 악인들은 그들에게 탄압을 받을 것이라는 [오직 성도들 곧 거룩한 자들이 세상 나라를 차지하여 모든 거룩하지 않는 자들을 뿌리 뽑을 것이라는] 견해를 퍼뜨리는 자도 정죄한다.”(CA. XVII)

신조 제 18조에서는 ‘자유의지에 관하여’(De libero Arbitrio) 논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시민적 의를 행함에 어떤 자유를 지니며 또한 이성이 미칠 수 있는 그러한 일들을 선택함에 자유를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하나님의 의, 곧 영적인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왜냐하면 자연적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속한 일들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전 2:14]. 그러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을 때 마음에 그러한 의지와 능력이 생긴다....[이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저서 히포그노스티콘(Hypognosticon, III)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이성의 판단을 지닌 자유의지가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에 관계된 일들을 시작하거나 완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선하든 악하든 현세에 속한 일들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따라서 교회들은 하나님의 영의 도움 없이 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우리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그 같은 자들을 정죄한다. 왜냐하면 본성이 어떤 종류의 외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 하나님에 대한 신뢰, 사랑 인내 등과 같은 내적인 움직임을 낳을 수 없다.”(CA. XVIII).

자유의지에 관한 교리에서 멜란히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에 충실하다. 앞서의 제 4조항에서 인간의 본성으로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설명했다. 이 18조는 행위의 문제를 넘어선 본성적인 의지의 문제를 거론한다. 즉 타락한 인간은 외적인, 일시적인, 일반적인 일들에서 선과 악을 택하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만, 영원한, 내적인, 영적일 일들에 관해서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며,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멜란히톤의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는 제 16조의 ‘세속 정부에 관한 일’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멜란히톤이 ‘자유의지가 낳는 내적인 움직임, 하나님에 대한 경외, 신뢰, 사랑 그리고 인내’ 등은 전적인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멜란히톤의 결론은 ‘본성적 인간은 외적이고 세상적인 일들에 관해 자유의지를 지니지만, 하나님의 의나 영적인 의를 행할 자유의지는 없다’이다.

신조 제 19조에서는 ‘죄의 원인에 관하여’(De causa peccati) 다룬다. “교회들은 비록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지만, 죄의 원인은 악한 자의 의지(voluntas malorum), 즉 사탄과 불경한 자들의 의지에 있다고 가르친다. 이들의 의지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으로 돌이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이 거짓을 말할 때 그는 자신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요 8:44]”(CA. XIX).

이 조항은 가톨릭 신학자 에크(Eck)의 비판에 대한 대답의 형식이다. 에크는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님을 악의 원인으로 설명한다고 비판하며,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죄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앞서의 조항에서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할 때, 가톨릭주의자들은 그러면 하나님의 죄의 원인으로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대해 멜란히톤은, 죄의 원인은 ‘악한자의 의지’(voluntas malorum)이지 하나님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신조 제 20조는 ‘선행에 관하여’(De Bonis Operibus)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20조는 1부(121조항)의 내용에서 약 1/3의 분량을 차지하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언급한다.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자들이 선행을 금한다는 잘못된 비난을 받고 있다고 시작한다.

“우리의 신학자들은 선행을 금지한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왔다. 그 [공격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신학자들은 십계명이나 그와 같은 종류의 명령들을 가르쳐 왔음을 증거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설교자들은 그러한 일들에 관해서 거의 아니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다. 오직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어떤 유치하고 불필요한 행위를 주장한다 예를 들면 절기를 지키는 것, 금식, 형제단, 성지 순례, 성인 숭배, 묵주 사용, 수도원 규칙 등등. 우리의 반대자들이 뒤늦게 경고를 받았는지, 이러한 일들을 그들은 가르치지 않으며, 이런 무익한 행위에 관하여 설교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껏 오랫동안 침묵했던 믿음에 관하여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가 행위만에 의해서는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며, ‘우리는 믿음과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보다 참아줄 만한 것은 그들의 옛 교리보다 조금 위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in Ecclesia praecipuam) 믿음의 교리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필요가 있는 그것은 그들의 설교에서 믿음에 의한 의는 오랫동안 침묵 가운데 있었고, 행위에 관한 교리만 성행했다. 이에 우리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가르친다. 첫째로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거나, 하나님의 손에서 사죄와 은혜의 칭의를 받게 할 수 없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는 그것,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받아들여짐을 믿을 때, 그분만이 아버지와 화해케 하는 중보자(Mediator)이자 화해자(Propitiatory)인 그리스도이심을 믿음 때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에 의해 은혜를 얻는다고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멸시하는 자이며, 그리스도 없이 자신의 힘에 의해서 아버지께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멜란히톤은 이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하여 바울 서신을 비롯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의 글을 통해 길게 설명한다.]

비록 이 교리가 서툴다(ab imperitis)고 비난을 받지만, 경외심이 있는 양심들(piae ac pavidae conscientiae)은 이것이 커다란 위안을 가져옴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양심은 어떤 행위에 의해서도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와 화목하셨음을 굳게 믿을 때에만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양심이 위로를 찾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오히려 은혜와 사죄의 칭의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의 교리를 새롭게 가르칠 필요가 매우 커졌다.

[둘째로는] 또한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란 단어가 역사 지식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지식이라면 악인들과 마귀도 가질 수 있다, 역사뿐 아니라 역사의 결과와 영향,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의와 사죄를 받았다는 사죄의 조항까지도 믿는 믿음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신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의지한다. ... 이러한 방식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이 단어는 성경에서 취한 것으로서, 악인들에게 있는 것과 같은 지식을 뜻하지 않고, 위로를 주고 불안한 마음을 고양하는 신뢰이다.

[셋째로] 나아가 우리는 가르치기를 선한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선행으로 은혜 받을 공로를 쌓기 위함이 아니라, 선행에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사죄와 은혜 받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서를 입기 때문에, 선행 행위를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암브로시우스는 “믿음은 선한 의지와 선한 행실을 낳는 산실”이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전하는 교리가 선행을 금지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어떤 생활을 힘써야 하는지 잘 제시해 주기 때문에 비난 받아야 할 교리가 아님이 만천 하에 드러난다. 믿음 없이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십계명의 첫째 돌판과 둘째 돌판의 요구를 이를 수 없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부를 수도 없고,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도 없고, 십자가를 질 수도 없다. 다만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고 인간의 도움에 기댈 뿐이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온갖 정욕과 인간의 지혜가 마음을 주관하게 된다. ...”(CA.XX).

이 20조는 개혁자들의 ‘이신칭의’의 교리가 선한 행위를 파괴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비난을 잘 방어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행위 이 둘을 통해서 칭의를 얻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는 이미 제 4조항에서 주장한 내용을 좀 더 증거를 더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조항에서 멜란히톤은 다섯 번 성경 본문을 직접 인용하고(딤전 2:5, 요14:6, 엡 2:89, 롬 5:1, 요 15: 5, 간접적으로 약2:9, 히 11:1 등), 아우구스티누스와 암브로시우스를 각 2회씩 인용하며, ‘이신 칭의’의 믿음이 성경과 전통에 합치함을 증거 한다.

둘째로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치는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라고 하는 주장에 반대한다. 이 믿음은 단순히 악인들이나 마귀에게 있는 것과 같은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로, 그 결과 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행 행동을 낳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의해 성령을 받고 새롭게 되며, 새로운 정서를 지녔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개혁자들이야말로 선행을 금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고 힘써야 하는지를 잘 가르치고 있다.

제 21조는 ‘성인 숭배에 관하여’(De Cultu Sanctorum) 가르친다. “성인들의 숭배에 관하여, 교회는 성인들을 기념하는 것이 우리 앞에 제시될 때, 우리의 소명 안에서 그들의 믿음과 선행을 따를 수 있다. 이는 황제가 이 나라에서 터키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함에 다윗의 예를 따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 둘은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인들께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한 중보자이자, 화해케하는 자, 대제사장, 한 중재자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에게 기도하고,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전심으로 그에게 기도하는 것을 특별히 최고의 예배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1 2:1).”(CA. XXI).

성인들을 기념하는 것은 스스로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더하여 기도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는 것은 성경에 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십자를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의 행위에 약화시키고,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연된 로마 가톨릭의 성인 숭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약화키며, 우리의 유일한 대언자인 오직 그리스도께만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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