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통일과 구원: 한반도 통일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1
강웅산(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7/05/03 [08:4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     ©리폼드뉴스

이 글은 강웅산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고찰을 한다. 통일과 구속사적 관점에서 역사적 고찰과 종말론적 관점의 통일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속사 속에서의 통일 방안에 대해 제시한다.

문제 제기

분단 70년 이래 과거 어느 때보다도 통일이란 단어가 우리 귀에 자주 들리는 키워드가 되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북한의 참담한 실정과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헤아린다면 통일은 하루라도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2014년 1월 신년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을 언급한 이래 통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진 것 같다. 그러나 그 관심은 사람마다 다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각 방면에서 통일이 어떤 의미를 가져올 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해석과 기대가 다양하다. 통일이 된다면 분명히 우리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일단북한과의 경제적 격차가 분명히 남한 사람들이 나눠져야 할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기본적인 통념, 습관, 언어, 등의 차이를 좁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과거사를 정리할 것인지도 결코 쉽지 않은 문제로 남을 것이다.

통일은 염원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아무리 체제의 통일이 된다 하여도 모든 사람이 삶 속에서 풀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북쪽의 땅문서를 들고 자기 땅을 되찾을 날만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피난 내려와서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 나가야 할 정치, 경제, 질서, 교육, 등의 문제도 있지만, 민간 차원에서 발생하는 이런 사례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것이다. 통일은 염원만큼이나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이다. 통일이 어느 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풀어나가고 만들어가야 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그러나 그 말이 통일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해도 통일은 온다는 뜻은 아니다. 숙명론적 사고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통일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면 무책임하게 결과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삶이다. 하나님이 통일을 허락하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느 날 통일이 우리에게 숙명적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역할과 풀어야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데서부터 통일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본다. 과연 통일이 하나님의 뜻일까? 한반도에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는 일이냐는 질문이다. 단순 논리로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서적으로 불편한 말이겠지만, 만약 분단의 현실이 주님 오실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를 묻는 질문이다.

즉 통일이 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통일은 돼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통일이 돼야 하나? 무엇을 위해 통일이 돼야 하나? 우리의 염원과 하나님의 주권이 충돌함을 보게 된다. 논리적 비약처럼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 점을 겸허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좀 전에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숙명론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주권적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답을 알기 때문에 그 길을 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하는 믿음의 반응을 포함한다(고후 5:7). 통일에 대한 염원이 지나쳐 하나님의 뜻을 꿰맞추는 식이 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역사에 있어 하나님이 펼치시는 가장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통일도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는 그 연장선상에서 존재 이유와 목적을 찾아야 할 것이다.

통일의 문제가 너무도 시급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통일을 논하는 것이 자칫 정서에 의해 주도될 수 있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통일 자체가 자기목적이고 궁극적 선이 될 수 있다. 왜 통일이 궁극의 것이고 목적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것은 차차 살펴 볼 것이다.) 어떤 동기와 목적에서든지 통일이 궁극의 것이 될 때, 통일이 이데올로기(Ideology)로 이용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신학도 통일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통일에 신학적 명분과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만약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론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답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못하다. 오로지 하나님이 지금 주관하시는 역사 속에서 통일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묻는 것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런 우려와 반성의 자세에서 본 논문은 시작하려 한다. 현상에 맞춘 논의보다는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에 집중하려 한다. 그런 취지에서 본 논문은 현재 대두되고 있는 통일 문제에 대해 성경적신학적으로 접근해야 할 근거를 제시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 구체적으로, 통일은 구원(redemption)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 이 논문의 논지이다. 이것을 입증하기에 앞서 이제까지의 통일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어디까지 왔는지 간략하나마 드러내며 논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보완적 의미에서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통일을 고찰해야 할 모델을 제시하고, 그 역사관에 따라 통일을 구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실천적 적용을 위해서 약간의 제언을 하고 마치려 한다.

통일신학에 대한 역사적 고찰

한국교회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한 신학적 접근도 크게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다. 통일신학을 선점한 것은 보수 기독교 보다는 진보적 성향의 교단과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충분히 만끽하기도 전에 또 다른 국제 열강들에 의해 한반도는 신탁통치라는 명목으로 분할 점령당했다. 이미 일제치하에서부터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은 있었지만 이제는 갈등이 분단이라는 현실이 되었고 한국전쟁은 분단을 장기화시켜 버렸다. 휴전 이후 아직 분단의 현실이 안겨준 충격과 갈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60년대 이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또 다른 차원의 분열이 되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은, 특히 통일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5.18 광주사건을 비롯한 급격한 민주화운동에 편승하여 진보 기독교는 통일을 화두로 삼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1982년 2월 협의회 안에 특별위원회 성격으로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정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활동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그러나 1985년 3월 제34차 총회에서 채택한 한국교회 평화 통일 선언을 시작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통일운동이 본격화 되었고 드디어 1988년 2월 2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제37차 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채택 발표하게 된다. 흔히 “KNCC 88 통일선언”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기독교가 통일에 대하여 최초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진보 진영의 통일 운동은 학자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군사독재 하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던 학자들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제는 화두를 통일로 돌리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한국신학대학 안병무는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관계를 한반도 상황에 대입시키며 북쪽 지방에 근거를 둔 예수의 민중 운동이 분단을 가져온 왕권주의에 저항했다고 주장하였다.

1980년대 초 한국신학대학 주재용이 주창했던 통일신학은, 비록 그는 샬롬, 일치, 만남으로 구분하지만, 크게 샬롬으로 포괄될 수 있다. 숭실대학 이삼열은 1990년대 들어와서 역시 평화를 통일신학의 중심 주제로 내세웠고, 한국신학대학 박종화 역시 평화적인 통일을 주장했고, 성공회대학 손규태도 통일신학의 핵심으로 평화를 강조하였다. 진보 학자들의 통일신학의 공통된 특징은 평화를 강조한 점이다. 성경적 평화라기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 자유, 정의를 통한 평화를 말한다.

진보 진영의 통일신학은 한계가 있었다. 이상규는 진보 학자들은 성경에 근거한 신학을 하기 보다는 주로 통일신학의 형성 및 이론적 발전에 집중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신옥수는 “통일신학의 초기 형성 단계에서 신학적 주제로서 성서에서 직접적인 근거를 도출해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깊은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며 주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역사로부터 도출된 통일신학의 내용, 즉 분단의 원인, 분단 극복의 방법 및 목적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이것은 성경을 상황에 끼워 맞추는 유비적 해석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보수 기독교가 통일신학을 논하게 된 것은 주로 1990년 이후이다. 보수 진영은 그것도 신학적 체계화 보다는 북한 선교 및 복음화의 방향이나 방법에 치중하였고 신학화 작업도 진보 진영에 비할 때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80년대 말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한반도에도 통일에 대한 기대가 급상승하게 되었다. 원래 보수 기독교는 선(先)통일 후(後)선교의 입장이었다.

통일이 되어야 선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구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한국 기독교는 통일이 앞당겨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북한선교를 강조하게 되었다. 90년대 들어와 복음주의 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1996년 “한국교회의 통일정책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통일 관련 보수 진영 최초의 것이라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보수 기독교는 300만 이상의 사람들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북한재건을 위해 힘을 모았다. 북한 지원 운동의 일환으로 진보진영과 연대하여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나눔운동”을 만들기도 하였다. 보수진영의 대북 사업은 대체로 북한선교라는 명분이 컸던 특징이 있다.

신학적으로 보수진영의 통일신학은 하나님의 주권, 십자가, 성육신, 복음전파, 회개, 용서, 화해, 등 하나로 압축되기 보다는 비교적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김영한은 “십자가적 정치신학”을, 황현조는 “화해”와 “성육신”을, 김상복은 “하나님 통치신학”을, 정일웅은 “섬김 신학”을 통일신학의 주제로 내세웠다. 보수진영의 통일신학은 성경의 주요 주제들을 아우르고는 있지만 이론적 체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 점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연구와 발전이 필요하다.

보수 및 진보 통일신학 공히 신학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는 통일 자체가 목적이나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족적 정서(이산가족 문제)나 상황적 긴박성(북한의 인권 및 기아 문제) 때문에 통일이 궁극의 명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신학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북한 정권은 물론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 모두가 악으로 규정지어질 수 있다. 하나님도 통일을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한 신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통일을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북한의 정치와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국가경쟁력의 기회가 되기 때문에 등등 통일을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고 신학은 역시 그것을 위해 시녀 노릇을 한다. 만약,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통일되지 않고도 북한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복음화가 이루어진다면? 통일 없이도 북한의 인권 문제가 개선되고 경제가 회복되어 더 이상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면? 그런 식으로 통일을 지지했던 신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셋째는 성경을 상황에 끼워 맞추는 유비적 해석을 피해야 한다. 구약의 역사를 한반도에 빗대어 해석 적용하는 식은 성경해석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된다. 상황이 유사하기 때문에 대입하는 식의 모범론적 또는 도덕론적 적용은 바른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
 
넷째는 성경의 주요 주제라도 통일에 적용하는 데 있어 신중해야 한다. 성육신, 십자가, 화해, 섬김, 나눔, 교제, 등의 주제는 통일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하고 유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특수 상황에 접목시키기 위해서 성경의 주제가 무리하게 대입돼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성경관과 구속사관에 충실하면서 또한 통일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우리의 사명을 찾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 모두 통일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성경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통일신학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은 하나님이 하시고 계신 구원의 일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에 충실한 통일신학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구원역사를 살필 필요가 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배너
배너
배너
최근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