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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통일과 구원: 한반도 통일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2
강웅산(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7/05/10 [09:1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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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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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웅산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고찰을 한다. 통일과 구속사적 관점에서 역사적 고찰과 종말론적 관점의 통일론을 제시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속사 속에서의 통일 방안에 대해 제시한다.

두 종류의 구원사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역사관이다. 혹자는 역사는 어떤 특정한 방향도 끝도 없이 스스로 방향을 찾아 진행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성경적 역사관은 분명히 정해진 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시간의 끝이 맞추어 있고, 구원을 완성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역사 자체가 무한하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통일 논의를 위해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지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그 목적을 위해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를 선정한다. 그들의 역사관이 각기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살펴보자.

일찍이 역사의 방향과 목적에 대해 말한 대표적인 인물이 어거스틴이다. 그의 역사철학은 흔히 『신의 도성』 또는 『신국론』으로 불리는 그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한 마디로 그의 역사관은 이분법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그의 『신의 도성』에서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을 대비시킨다. 이 두 도성은 역사에 존재하는 두 개의 사회에 대한 비유적 이름으로 천상의 도성은 하나님이 영원히 지배하시는 도시로, 지상의 도성은 마귀와 함께 영원히 벌을 받을 도시로 예정되었다고 한다. 그는 두 도성의 대비를 성경에서부터 찾았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을 각각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기원으로 보았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두 도성은 적대적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는 어거스틴은 구약의 역사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이 대비를 이루며 진행하는지 설명한다. 그는 노아에서 그리스도까지 이르는 구속의 역사를 예언과 성취의 역사로 보며 기독론적 관점에서 두 도성의 갈등의 역사를 해석하였다.

반면 지상의 도성을 대표하는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긍정적이지 않다. 410년 로마의 함락에 대해 이교도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신을 버리고 기독교의 신을 믿었기 때문이라며 구실을 찾고 있을 때에, 어거스틴은 비록 지상의 나라는 패망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며 기독교인들을 위로하였다. 새 예루살렘은 이 땅에 속하는 정치적 나라가 아닌 하늘에 속한 영적 나라인 반면, 지상의 도성은 인간의 죄성이 지배하는 곳이며 사탄 마귀의 도성으로 규명하였다.

어거스틴에게 있어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을 구분하는 중요한 지표로 사랑이 있다. 어거스틴은 사랑을 “자기 사랑”(amor sui)과 “하나님 사랑”(amor Dei)으로 구분하며 전자는 지상의 도성을 후자는 천상의 도성을 건설한다고 말한다. 지상의 도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은 무시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이다. 반면 하나님 사랑으로 사는 자들은 이웃에게까지 그 사랑이 연장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그것이 천상의 도시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은 비록 현재 지상의 도성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도성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로 지상의 도성이 추구하는 삶을 거부하며 구별되는 삶을 사는 순례자라고 말한다.

이제까지의 간략한 특징들을 통해서 볼 수 있었듯이 어거스틴의 역사관은 천상지상으로 집약되는 이분법적 구조를 갖고 있다. 본 논문은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을 지배하는 이분법적 구조가 어디에서 왔느냐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단 그 이분법적 도식이 통일을 내다보는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하려 한다.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이 기독교 역사관 형성에 끼친 기여는 절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지상의 도성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도성을 바라보고 사는 의식은 종말론적 삶에까지 연장이 된다. 그러나 이분법적 도식이 주는 부정적 영향도 분명히 있다. 특히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 속에서 어거스틴의 역사관은 자칫 남한은 천상의 도성 북한은 지상의 도성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이 없는 지상의 도성이고, 하나님을 잘 믿고 사랑하는 남한은 천상의 도성이 된다.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대체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기독교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분단 이후 보수 기독교는 반공사상을 중시 여겨 왔다. 반공을 넘어 때로는 멸공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정서에서 볼 때 북한은 악(惡)이며 반드시 쳐부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는 북한은 악이다. 하나님 예배를 금하고 김일성 숭배를 강요하는 북한은 결코 변명할 여지없이 지상의 도성에 속한다. 보수 기독교는 하나님께 대해 적대적인 북한을 지상의 도성으로 규정지어 왔으며 결국 멸망하고 없어져야 할 자들로 여겨 온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보수 기독교인의 입에서 발설되는 “흡수 통일”은 분명히 북한을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누구의 힘을 빌리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빨리 북한은 망해서 없어져야 통일이 온다고 생각하며 그것 자체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연합보다는 분리가 더 강조되는 구조이다. 분단의 아픔과 원망으로 점철된 세대가 통일을 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천상과 지상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도식만으로는 한반도의 문제를 풀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에드워즈의 역사관을 소개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을 대표하는 설교자 신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 있다. 그가 남긴 저서 가운데 『구속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를 주목하려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역사관은 세속의 역사도 결국 거룩한 역사를 위해 존재한다는 통합적 관점에 그 특징이 있다. 에드워즈는 성경에 나타나는 구속의 역사와 그 이후의 교회사 또는 세속 역사가 결국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타락 직후부터 시작된 하나님이 하시는 구속의 일을 세상 끝날 즉 최후의 심판까지 계속되는 활동으로 보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는 역사를 1) 타락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까지, 2)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부활까지, 3) 부활에서 재림까지 이렇게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첫째 기간은 구원의 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고, 둘째 기간은 구속을 완성 또는 사시는(purchase) 기간이고, 셋째 기간은 완성된 구원의 효과를 적용하는 시기이다.
 
에드워즈의 역사 구분에서 독특한 것은 타락 이후의 모든 시간대를 구원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구원사가, 흔히 기대하는 것처럼, 신약과 함께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계속된다. 그렇기에 구원의 역사가 멈추고 세속의 역사가 시작된다거나 세속 역사와 구원 역사가 이분법적으로 궤를 달리하며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역사도 구원의 일을 위해 존재하는 통합적 시각을 이룬다. “이 일[구속사역]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에서부터 (세상 끝날까지) 수행하시는 일이라고 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 일 자체에 속하는 지금의 일들은 전체 일의 부분들로서, 모두가 그 전체를 완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 우주 속에 하나님이 하시는 다양한 일들은 모두 하나의 일에 속하고, 하나의 계획에 속하며, 모두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 일에 속한 다양한 부분으로 인식되어야 하는데, 마치 한 기계의 다양한 연속적 동작들이 결과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일을 이루어 내는 것과 같다.”

에드워즈의 통합적 시각은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관심을 모으게 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살고 있는 북미 신대륙에서 진행되고 있는 작금의 부흥의 일들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커다란 구원의 일에 속한다는 역사적 의식이 있었다. 이처럼 통합적 시각은 각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사명감을 고취시킨다. 특히 그 사명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구원의 일에 대한 의식에서 기인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에드워즈의 통합적 역사관은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역사관과 대조가 된다. 초대교회 시절이나 일제 강점기 같이 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절에는 이원론적 역사관이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는 위로가 되기도 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현실을 거부하고 견디는 것이 때론 최선의 길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평시에는 이원론적 역사관의 한계가 드러난다. 외면과 부정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통합적 사고는 현실을 정죄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의미있는 역사를 이룰지를 생각하게 한다.
 
세속의 역사, 악의 역사에 대해 어쩔 수 없이 피동적으로 기다려야만 하는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속의 역사도 구원의 일을 도모하는데 사용된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 시각이 가능하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이원론 시각은 마치 하나님과 사탄이 대립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지만, 통합적 시각은 사탄은 하나님과 경쟁 구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 일뿐이다.

어거스틴의 이분법적 역사관과 에드워즈의 통합적 역사관은 각기 한반도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대조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이분법적 역사관은 남한과 북한을 각기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으로 구분하는 도식이 될 수 있다. 두 도성이 서로에 대해 적대적 관계에 있으며 승리와 멸망이라는 섞일 수 없는 종말을 맞게 되어 있듯이, 남한과 북한은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남한은 승리하고 북한은 멸망하는 위험한 논리가 될 수 있다. 이분법적 역사관은 남과 북을 하나로 묶기 보다는 분리시키는 명분이 더 크다. 통일의 문제(세속사)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소극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대체로 보수 기독교와 정체성을 같이 해온 반공교육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대북관련 NGO 활동도 그 성격에 따라 이분법적 역사관과 통합적 역사관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탈북자의 북한 탈출을 돕거나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한 NGO는 다분히 북한을 지상의 도성으로 보는 역사관에 가깝고, 북한에 식량지원이나 생필품 공장 설립을 돕는 일,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을 돕는 일, 등은 통합적 역사관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속사와 세속사를 하나로 보는 통합적 역사관이 실천적 측면에서도 통일 문제에 다가가는 데에 훨씬 유연한 적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판단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통합적 역사관을 취한다. 통합적 역사관을 취할 때의 유익은 실천적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구원의 관점에서 통일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기정사실로 정해놓고 신학을 끼워 맞춰 가는 방식이나 선교와 복음화를 위해 통일을 수단화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 통일이 섭리가운데 있느냐 없느냐에 논의를 맞추는 것은 숙명론적 방법일 뿐이다. 통일이 온다면, 통합적 역사관처럼, 궁극적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 존재할 것이므로 구원의 관점에서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바른 믿음의 실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을 어떻게 구원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지 근거가 필요하다.

통일의 신학화 통일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적어도 두 개의 지침을 세울 수 있었다.

첫째는 성경을 목적과 상황에 맞추기 위해 유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충실한 통일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신학화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성경의 특성으로, 첫째, 성경은 구속계시이다. 계시는 초월의 영역 즉 신적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피조계의 방법(예, 유비적 해석)이 아닌 초월의 영역에 속한다. 즉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구속계시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점진적 성취는 곧 종말론적 해석을 말한다. 종합하면, 통일신학이 성경에 충실한 신학이 되기 위해서 구속계시의 종말론적 해석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둘째 지침으로 우리는 통일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의 역사는 구원 역사에 종속되어야 하기에 통일도 결국 구원 역사에 종속되어야 한다. 통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존재한다면 이는 통일이 구원의 역사를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통일의 동력이 구원에서 나와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한반도의 통일은 결국 한반도에서의 구원과 땅 끝까지 나아가는 구원의 일을 위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신학화 작업은 성경에 충실하기 위해 구속계시의 종말론적 해석의 지배를 받으면서 동시에 통일이 구원 역사를 돕는 관계에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두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먼저 우리는 성경 속에서 통일의 개념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추적하는 작업을 먼저 할 것이다.

그리고 통일이 구원 역사를 이룬다는 의미에서 실천적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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