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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죽산 박형룡과 구례인의 천년기론에 대한 연구 2
이상웅(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7/07/19 [09:30]  최종편집: 2017/07/21 [20:59]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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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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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인은 이눌서선교사에 이어서 1937-1938년 어간에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강의를 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이며, 해방 이후 다시 귀환하여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도 했기 때문에 총신의 종말론적 전통을 논의할 때에 논급되어져야 할 인물 중 하나이다.    © 리폼드뉴스


이 글은 개혁신학회에서 이상웅 박사가 발표한 논문으로 저자는 죽산 박형룡 박사와 구례인 선교사의 천년기론에 대하여 연구했다.

3 구례인(具禮仁, John Curtis Crane, 1888-1964)의 무천년

구례인은 이눌서선교사에 이어서 1937-1938년 어간에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강의를 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이며, 해방 이후 다시 귀환하여 장로회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도 했기 때문에 총신의 종말론적 전통을 논의할 때에 논급되어져야 할 인물 중 하나이다.

3.1 역사적 배경

제임스 B. 로이드의 『1817-1967어간의 미시시피 저자들의 삶』이라는 인명사전에 의하면 구례인(존 커티스 크레인)은 1888년 2월 25일 미시시피 주 야주(Yazzo)시에서 출생했으며, 콜로라도 대학(1909)과 버지니아 리치먼드 소재 유니온신학교를 졸업(B.D. 1913, D.D. 1927)하고 나서 바로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 한국 선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전남 순천에서 매산학교 교장으로(1914-1916, 1921)로 사역했고, 이어서 순회 전도자로 사역하고(1916-1937), 그간에 평양신학교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1923-1940).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구례인은 미시시피 주 파스카굴라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6년에 다시금 한국 땅으로 돌아와 선교사역을 속개했으며, 1954-1956년 어간에는 장로회신학교(총신의 이전 이름)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구례인의 『조직신학』은 1954-1955년에 한역본으로 출간되었지만, 번역 작업은 1952년 미국에서 완성되어졌으며, 영어 원서도 1953년에 미시시피 주에서 사적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저술은 평신과 총신의 역사 가운데 조직신학교수가 저술한 최초의 조직신학 교본이라고 하는데 의의가 깊다.

1952년 2월에 쓴 『조직신학(상)』서문을 보면 본서의 출간 배경, 역자들, 활용 자료에 대한 언명이 담겨져 있다. 우선 저작 배경으로는 1937년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을 때에 당시 교장이던 라부열선교사가 “그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할 내용 충실한 조직신학”을 간행하자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선 말한 대로 신사참배 반대로 평신이 문을 닫고, 구례인은 본토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구례인은 미국에서 목회하는 동안에도 조직신학 교과서 집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여러 신학교에서 현대 신학을 배우고 익히는가 하면, 자신이 속한 남장로교의 로버트 댑니, 웹, 윌리엄 쉐드, 구 프린스턴의 두 거장 찰스 핫지와 워필드, 루이스 벌코프의 저술들을 토대로 교과서를 편찬하는 일을 계속했다. 1946년에 다시 내한한 후에도 이 작업은 계속되었고,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박사도 이 책의 출간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3.2 구례인의 천년기론

3.2.1 천년기론

구례인의 『조직신학』은 총 6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말세론은 교회론과 더불어 제6편에 들어있다. 제6편의 제2부 말세론은 또한 ‘사후영혼의 상태’ (1장), ‘그리스도의 재림’ (2장), ‘일반 부활’ (3장), 그리고 ‘일반심판과 장래생활’ (4장) 등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례인의 천년왕국 논의가 나타나는 곳은 이 가운데 2장 ‘그리스도의 재림’ 중 ‘七. 천년왕국’ 에서이다. 사실 그의 교본의 방대한 분량에 비해서 천년왕국에 대한 논의는 분량이 적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대로 천년기에 대한 구례인의 입장은 ‘무천년파’ 혹은 ‘무천년설’ 이었다.

구례인은 천년왕국 논의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절대적이고도 최후의 권위적인 것으로 믿으며 또한 우리의 믿음과 행실의 유일한 표준으로 믿는데 일치하는 열성있는 기독교인이 가석하게도 분립되어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생길 사건들에 대해 논쟁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했으며 또 그로 인해 누구든지 독단적으로 진술할 수 없는 매우 표징적으로 된 말을 상상적으로 고정된 역사문헌 같이 대조하는 것으로써 신앙을 혼란하게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구례인은 ‘무천년파’ 와 ‘후천년파’ 의 공통점을 지적하기에 이른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교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믿는 점에서 두 파는 일치하며,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은 ‘비상한 복락이 일천년간 지속되는 특수한 기간’ 을 가리킨다고 보느냐(후천년파) 아니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사용한 말인 줄“로 믿느냐(무천년파)에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구례인은 무천년설, 후천년설, 그리고 전천년설 순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우선 무천년설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탄의 매임(계 20:2)의 의미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사탄의 매임이란 “복음이 인생을 죄의 사슬과 거기 종 된 데서 해방하며 또한 사망의 공포와 그들의 생활을 주장하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해방할 때 그리스도의 손 아래 사탄을 제어하게 함”을 지시한다고 본다. 그는 여러 관련 구절들(계 12:10, 11; 눅 10:13, 11:20; 유 6)을 들어 해명하고 나서, 현실적으로 ‘악이 창궐한 것’ 을 근거로 반론을 제기하는 전천년설에 대하여 사탄의 결박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한 ‘사탄의 영향을 매는 것이며 제한하는 것’ 이라고 응수한다. 또한 구례인은 계시록의 구조가 ‘순환적 패노라마(= 파노라마) 성질’ 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윌리엄 헨드릭슨을 비롯한 여러 무천년설자들이 말하는 ‘점진적 병행법’ (progressive parallelism)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구례인은 이어서 후천년설을 소개한다. 이 입장은 ‘천년 평화설이나 두 계단으로서의 부활’ 을 거부하며, “나라들이 주에게로 돌아올 때 성령의 능력으로 크게 부어줄 때가 있을 것이니 그런 때는 그의 유형적 재림전에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한다. 혹은 “재림 직전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향유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영의 생활의 상태와 동시적인 것”(계 6:9)이라고 해설하기도 한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구례인은 신약의 어떤 곳에서도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천년왕국이 ‘지상에 실현됨을 단언’ 하는 것은 ‘독단적’ 이고 ‘무리한 일’ 이라고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구례인은 전천년설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우선 전천년설의 전제들을 소개하고, 이어서 답을 하는 형식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그에 의하면 천년기에 대한 기록은 ‘표상적’ 인데 전천년설은 문자적 천년기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평화와 의’ (사 66:25) 시대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때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공중에서 자기 교회를 맞이하기 위해’ 재림하신 후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구례인은 이러한 전제들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확증할 수 없는 것’ 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한 반박 속에 그의 무천년설 입장이 거듭 드러난다. 재림은 최후심판과 관련되며, 성도들의 축복은 언제나 신천신지에 있다고 하며 그곳은 의인이 심판 후에 살게 될 곳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고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읽어야 하며 20장 4-6절과 같은 ‘상징적 성구들은 다른 성구와 전후문맥이 일치하게 해석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천년설에 대한 그의 논의를 유심히 살펴보면 ‘역사적 전천년설’ 에 대한 비평보다 ‘세대주의 전천년설’ 에 대한 비평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예컨대 공중에서 그의 교회를 마중하기 위해서 재림한다거나, 주의 재림의 날을 알수 있다고 하거나, 재림의 절박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그런 대목들에서 전자 보다는 후자에 대해서 그가 비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구례인은 천년기에 대한 논의를 세 입장으로 나누어 소개하면서 자신의 입장인 무천년설을 드러내었다. 그는 각 입장의 주요 특징을 소개하는 일에 치중할 뿐 주요 대변인들이 누구인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특히 계시록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반대하고, 상징적 해석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리고 주의 재림을 사모해야 하지만, 재림 일시를 알 수 있다거나 예고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3.2.2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대한 비평

앞서도 본대로 구례인은 ‘세대주의 전천년설’ 과 ‘역사적 전천년설’ 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전천년설의 범주 하에 다루었다. 우리가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대한 그의 비판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곳이 제4편 기독론 중 ‘11장 왕이신 그리스도’ 부분에서 이다. 이 부분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왕국관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이곳에서 그가 사용한 표현 중 ‘건전한 전천년론자’ 의 경우는 역사적 전천년설자를 가리킨다고 볼수 있고, 전천년론자들 중 ‘극단적 주창자들’ , ‘세대를 구분하는 전천년론’ , ‘시대구분론자들’ 등의 표현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례인은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자들로 C. I. 스코필드, W. G. 무어헤드, 그렉, 반하우스, 캠벨 몰간 등을 언급한다.

그러면 구례인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를 하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의 비판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 나라’ 와 ‘하늘나라’ (즉, 천국)을 구분하고, 후자를 지상 예루살렘에서 세워져야 하는 다윗 왕국으로 보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셔서 왕국 복음을 전했으나 유대인들이 거절함에 따라 왕국을 연기했다는 것, 교회는 하나님의 의중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 등에 대해서 칼빈주의 관점에서 비판을 했다. 구례인은 자신의 무천년기적 입장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임했다고 반박한다. 또한 세대주의 전천년설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하게 위하여 ‘글자적 해석주의’ (이는 현대어로 말하자면 문자주의 [literalism]를 말한다)를 집요하게 견지하다가 ‘불합리’ 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합리주의자들과 다를 바없이 ‘극단적 상징적 해석’ 을 하는 데로 봉착하게 된다고 예리하게 비평을 가한다.

이처럼 구례인선교사는 무천년설의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했으며, 세대주의에 대해 세밀하게 비평을 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구례인 선교사에 대한 박아론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합당하다고 사료된다.

이눌서 박사의 뒤를 이은 구례인(J. C. Crane)박사는 무천년기 재림론을 교수하되, 세대주의 천년기전 재림론은 과격하여 성경의 무리한 해석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배격하고, 비교적 온건하고 단순한 역사적 천년기전 재림론을 ‘성경의 정상적인 해석에 의지하고 개혁주의 신학에 용납될 수 있는 재림관’ 으로 간주했다.

4 나가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해방 이후 총신에서의 종말론 교육을 첫 조직신학 교수이자 지로적인 신학자로 인정되어온 죽산 박형룡의 역사적 전천년설과 구례인선교사의 무천년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죽산은 총신 역사의 초기 24년간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수 많은 목회자들을 길러내었으며, 『교의신학』전집을 통해 예장합동의 신학적 표준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가 천년기론을 어떻게 전개했는지를 살피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사료 된다. 그가 이전에 몸담았던 평신에서의 종말론 입장이 세대주의가 아니었가라고 하는 비판을 분명하게 피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죽산은 역사적 전천년설을 예장합동의 종말론 전통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죽산은 다른 천년기론에 대해서 전면 부정이나 배척의 입장을 표명하지 아니하고, 양심적으로 취사선택할 문제라고 하면서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다른 천년기론에 대해서 공정하게 해설을 하려고 했고, 신학적인 지위도 최대한 공정하게 밝히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입장에 근거하여 다른 천년기론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죽산은 특히 세대주의 전천년설(시대론적 전천년설)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비판을 하였다는 점도 확인했다. 죽산이 역사적 천년기론을 초기부터 취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또한 그의 천년기론은 적지 않은 시간의 모색과 연구의 과정을 거쳐서 확정되고 확립된 것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조지 엘든 래드와의 서신교환이나 저술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도 분명하다.

우리가 이어서 살펴본 구례인선교사의 무천년기론은 죽산의 역사적 전천년설에 비해서 총신과 예장합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설이 강하게 가르쳐지고 있던 총신에서 명시적으로 무천년기론을 가르치고, 평양신학교와 총신교수들 가운데 가장 처음으로 조직신학 교본을 출간하여 무천년기론을 설파했다고 하는 점 때문에 구례인선교사의 견해를 살피는 것도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례인선교사는 무천년기론의 관점에서 다른 천년기론을 다루되, 특히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서 강한 경계심을 표현한 것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1948년에서 1972년 어간까지의 총신에서의 종말론 교육은 역사적 전천년설이 강조되고, 무천년기론 역시도 일정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정리를 해볼수 있을 것이다. 죽산이 은퇴한 후부터 현재까지의 총신에서의 종말론 교육을 살펴볼 때에 죽산과 구례인의 천년기론의 차이는 지나치게 강조된 때도 있지만, 현재로선 극단적인 대립이 아니라 양립가능한 입장들로 서로 존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결국 죽산이 명시적으로 취했던 유화적인 자세에 힘입은 면이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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