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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교회와 신앙고백서 2
김길성(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7/08/30 [10:43]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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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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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길성 박사     © 리폼드뉴스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김길성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의 채택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신앙고백서, 기타 장로교단들의 신앙고백서를 연구하여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제언을 한다.

III. 기타 장로교회들(고신, 기장, 통합)의 신앙고백서

1. 고신의 신앙고백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의 신앙고백서는 12신조 및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고 있다. 특히, 고신은 합동과 달리 미합중국장로교회에서 1903년에 개정한 이래로 첨부된 신앙고백서 제34장 「성령」이라는 장과 제35장 「복음」이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있다.

해방(1945년)이 되었을 때, 한국 장로교에는 두 개의 신학교가 있었다. 이북에 있었던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서울에서 김재준 목사가 주도하는 조선신학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원래 한국의 장로교를 대표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때를 맞추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갔다. 반면에 서울의 조선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와 상관없이 그 기간 동안에 세워졌으며(1940) 친일파적인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인사들이 운영권을 쥐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선신학교는 해방 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신사참배로 인하여 옥고를 치르던 성도들이 출옥 후에 당시의 신학교 상황을 볼 때 조선신학교에서 목사후보생을 양성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 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신학교를 새로 세워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1946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1952년 10월에 이르러 결국 고려신학교를 중심 한 고신 총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고신교단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배태되었다. 고려신학교는 해방 이후 교회쇄신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는 신학적 동기에서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는 자유주의 신학을 3가지 점에서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첫째로 현실 타협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조류나 대중 이데올로기에 영합한다고 보았다. 둘째로는 신앙고백적 투쟁력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즉 일제하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자유주의신학은 이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거나 투쟁력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셋째로는 불신앙의 신학이라고 보았다. 이 점은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때한 학생이 신학교 개교일에 낭독한 입학식사(入學式辭)에서 분명히 밝혀져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이러한 인식 때문에 한국교회를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1946년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는 가운데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역사인식으로 고려신학교는 이념적으로 옛 평양신학교를 계승한다고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고신은 1969년 제 19회 총회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채택한(1969년) 것은 17세기 당시에 작성한 신앙고백을 비교적 그대로 받아들였으나, 그 뒤 1975년 9월 제25차 총회에서 합동과 달리 34장, 35장을 원래의 신앙고백서에 첨가시켰다. 오병세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 신앙 고백이 개혁주의 신학의 성숙한 표현이지만, 18, 19세기의 선교운동과 아울러 새로운 강조점이 신앙고백에 삽입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미국판에 있는 제34장 「성령에 관하여」라는 장과 제 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 되었다.”라고 그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이후 2011년 고신총회는 제34장 “성령”으로, 제35장 “복음”으로 제목을 수정하였다.

고신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를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있다. 다만 고신은 합동과 달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4장 「성령」이라는 장과 제 35장 「복음」이라는 장이 첨가되어 총 35장이 되었다. 두 장이 첨가된 것을 제외하면 두 교단의 신앙고백서는 각 교단의 해석자에 따라 단어의 배열의 차이가 나며 그 뜻은 거의 동일하다.

문제는 제34장과 35장의 내용이다. 1975년 총회와 2011년 총회에서 수정하여 채택한 제34장과 제35장의 제목만 바뀌고 그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제34장은 전부 4항으로 되어 있고, 신앙고백서 제1장부터 제33장까지의 성령에 대한 언급을 모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제35장도 전부 4항으로 되어 있고, 제35장 1항에 “버림받은 온 인류에게 충분하고 다 적용되는 생명과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다고 기술한다. 제35장 2항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자기의 사랑과 만인이 구원받기를 열망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한다고 기술한다.

제35장 3절에서는 “회개하지 않고 불신앙 가운데 머무는 자는 허물을 더 악화시키고 스스로의 과오 때문에 멸망한다.”고 진술한다. 이 경우, 고신의 신앙고백서는 제35장의 내용에서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신앙고백서의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에서 살펴보듯이 보편구원론적인 입장과 이중예정에 대한 부정의 입장이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고신과 합동교단의 헌법책의 배열상 위치가 다르게 실려져 있다. 고신은 신앙고백서가 제일 앞에 12신조가 제일 뒤에 편재되어 있는 반면에, 합동교단은 12신조가 제일 앞에 있고, 신앙고백서가 제일 뒷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기장의 신앙고백서

기장은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지금까지 채택해온 신앙고백서인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버리고, 1972년 김재준씨를 신조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 한 신조연구위원회가 제의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대국민적인 또는 대사회적인 신학선언서(Theological Statement)의 형식을 띄고 있는 1983년에 채택된 신앙고백서 선언서, 1987년에 채택된 신앙선언, 1991년 발표된 창조 질서 보전에 관한 우리의 결의, 2013년에 발표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새역사 60주년 선언서등이 있다.

1948년 제 34차 총회에서 당시의 총회 직영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 흐름에 대하여 제동을 걸었다. 즉 보수주의 학자들을 증원하여 자유주의 교수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감독하기 위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안은 조선신학교 측의 맹렬한 반대로 말미암아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정통 보수신학을 지지하던 교단지도자들은 1948년에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교육에 대한 포괄적인 대응책으로 창동 장로교회에 모여 서울에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 때 설립된 신학교가 바로 장로회신학교이다.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세운 장로회 신학교는 제35차 총회에서 별 어려움 없이 인준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1946년에 설립된 고려신학교와 더불어 세 개의 신학교가 장로교 안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총회는 세 개의 신학교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 세 개의 신학교를 중심으로 장로교가 세 개로 분열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씨앗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고신과의 분열(1952년)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로교회는 또 하나의 분열의 진통을 겪게 되었다. 기장 측의 분열(1953년)이 그것이었다. 고신과의 분열이 신학적인 문제와 행정적 및 정치적인 이유가 뒤얽힌 복잡한 것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기독교장로회와의 분열은 단순하고도 명백한 신학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기독교장로회의 신조는 역사적 산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장로회의 신조를 만들었던 역사를 살펴보면 신조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먼저 기독교장로회의 헌법 개정 약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헌법 개정 약사 중에서 신조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67년 9월 신조연구위원회 조직 (위원장 김재준, 연구위원 김정준, 서남동, 전경연, 조향록, 이장식, 박봉랑). 신조, 요리문답,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한데 묶어 한국기독교장로회 헌법을 출간함.

1972년(제57회총회) 신조연구위원회(위원장 김재준)가 제의한 신앙고백서(안)을 받아,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서로 채택 공포키로 기립 박수 가결함.

1977년(제62회 총회) 제57회 총회에서 가결된 신앙고백선언서를 교회 헌법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고, 제38회 호헌총회 선언서를 헌법에 삽입키로 가결하여 노회에 수의한바 전노회 찬성으로 다음 제63회 총회에서 가결 선포함(표결 : 전 노회 가결, 투표수: 가 616, 부 66, 기권1).

1980년(제65회 총회) 신앙요리문답, 권징조례, 예배모범 개정안이 노회 수의결과, 전 노회 찬성 가결 선포됨. 이 개정안의 내용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내용개요

1) 예배모범

(1) 웨스트민스터 체제의 기본정신은 그대로 계승하되 그 구조와 사상은 현대 상황에 맞게 재편함.
(2) 세계개혁교회의 여러 예배모범과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참조, 포함시킴.
(3) 헌금에 대한 모범을 추가시킴.

2) 신앙요리문답

(1)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등을 해설한다.
(2) 칼빈의 장로교적 전통을 살린다.
(3) 현대적 감각에 호소력 있는 질문으로 바꾸어 해설한다.
(4) 주기도문, 십계명은 거의 그대로 하고 사도신경은 현대적으로 표현을 바꾼다.
(5) 우리 총회 신앙고백서에 모순되지 않도록 한다.

위에서 제시한 것처럼 기장의 ‘1972년 신앙고백서’ 작성의 주도자는 김재준씨였다. 따라서 기독교장로회의 신앙고백서에는 각주 2에서 제시된 김재준씨의 성경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성경관의 문제였다. 이와 같이 성경관의 문제는 기장 분리와 ‘신앙고백서’ 작성의 분명한 이유였다. 이제부터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사 편찬위원회가 밝히고 있는 ‘신앙고백서’ 제정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2년에는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하였다. 기장이 하나의 본토민교회로서 자주적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요망에 응한 것이다. 개혁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 이를테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배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고백을 이 시점에서 시도하기 위하여 1967년에 위원회가 조직되어 다년간 연구하였던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개혁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므로 캘빈신학의 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 성서, 창조, 인간의 본질과 죄,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교회, 종말 등이 고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위의 내용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이유가 자주성을 밝히기 위함이라고 선언한다. 이에 관해서 김재준과 박봉랑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우리 장로교회는 최초의 미국 선교사들이 전해 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조로 삼아 왔다. 그것은 주는 대로 받는 것뿐이요 우리로서의 연구도 비판도 있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개혁교회의 절대적인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수가 없다…역사적으로 피선교지역인 우리 장로교회가 미국의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서 교회를 세울 때에 그들을 통해서 그들의 모교회인 미국 장로교회의 표준신앙고백(약간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우리의 표준 신앙고백으로 받기로 동의하고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위의 입장은 기독교장로회가 가지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이다.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접근하면서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가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배제한 것이 아니고’란 말은 기독교장로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떠났음을 은밀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아래의 글에 중첩되어 밝혀지고 있다.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한 이후 1972년 새로운 신앙고백서가 공포되기까지 20년 가까이, 기장은 한국장로교회의 옛 신조를 사용해왔다. 그러나 기장은 항상 성서에 비추어 새롭게 신앙고백을 형성해 나가야 하는 개혁교회의 정신에 비추어 새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한 것이다. 기독교장로회는 본토민교회로서 자주적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요망에 부응하였다. 기장의 역사적 신앙고백은 개혁교회의, 이를테면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를 배제한 것이 아니고 새롭게 출범한 기독교장로회의 고백을 역사적 시점에서 새롭게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장로회는 신조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장로교의 기본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연구작업과 비판작업을 시작했다. 이전 것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져야 새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글은 ‘신앙고백서’를 만들기 위해서 선임된 사람들과 그들이 사전 연구했던 내용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미합중국연합장로교회가 새 신앙고백서를 채택한 1967년에 기독교장로회 총회는 교단의 신앙고백을 검토하기 위해서 ‘신조연구위원회’를 조직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원장 김재준, 연구위원 김정준, 서남동, 전경연, 조향록, 이장식, 박봉랑. 그 후 5년 만인 1972년 총회에서 신앙고백서가 받아들여짐으로써 한국교회의 선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한국교인의 손으로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신앙고백서 작성경위는 1967년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신조개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위원회는 1968년 〈신조에 관한 연구논문〉이라는 책자를 총회에 제출했다. 그 주요내용은 〈신앙고백의 절박〉(박봉랑), <웨스터민스터신조〉의 역사적(이장식), 신학적(박봉랑) 연구비판 그리고 〈한국선교의 정황과 신앙고백의 요구〉(전경연)였다. 이런 연구에 더해 기독교장로회는 20세기에 작성된 신조들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1969년 총회에는 〈현대저명 신조해설〉이라는 소책자가 출간되어 최근 제정된 세계 여러 교회의 신조들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모범적인 것들을 연구하였다. 그 연구대상이 된 신조들은 〈베델신앙고백서〉번역(전경연), 〈바르멘선언〉연구(박봉랑), 〈1967년의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신앙고백 해설〉(박봉랑), 〈오토 베버의 신앙고백〉요약(전경연) 등이다. 1969년 동 연구위원회가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은, 신앙고백은 시대성, 지역성, 시간성 등의 여러 제한성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300년 동안 장로교, 개혁교회들의 표준신조로 사용해 온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오늘 한국에서 계속 사용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의 대역사적 문서를 함부로 변경하거나 그 구조나 사상을 수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장로회는 오늘 우리시대의 신앙고백을 새롭게 작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1970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제1신앙고백서의 방향설정’이라는 신앙고백서 개요가 제출되었다. 그 내용 목차는 1)취지 2) 서론 3) 하나님 신앙 4) 창조와 세계 5) 인간의 죄 6) 그리스도와 속량 7) 성령과 삶 8) 교회와 선교 9) 역사와 종말 등이다.

1971년 총회에 이상의 목차에 따라 〈신앙고백서안〉이 제출되었고, 이것을 기독교장로교회의 공동고백으로서의 성격을 구현시키기 위해서 일 년간의 검토와 성안된 것을 중심으로 각 지방노회에 출장하여 지역적인 독회를 열고 교회지도자들의 의견을 넓게 수렴하였다. 그 후 그 의견들을 반영 최종안을 작성, 1972년 제 57회 총회에 제출하였고, 그 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동 교단의 신앙선언으로 공포하게 되었다.

기독교장로회가 연구한 20세기의 신앙고백들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작성된 것으로 고백이라기보다는 선언서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것이다. 기독교장로회가 이런 신앙고백들을 연구하고 이런 고백들을 모범적이라고 한 이유는 ‘그러므로 300년 동안 장로교, 개혁교회들의 표준신조로 사용해 온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오늘 한국에서 계속 사용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라는 논리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전경연은 웨스트민스터 신조 뿐 아니라 12신조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시 웨스트민스터 신조나 예수교 장로회 신조를 빌어다 읽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으로, 기독교장로회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았다. 경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장로회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자 한 이유이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의 바른 신앙을 고백하기 위함이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옛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자신들의 신학에 맞는 새로운 고백을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장의 신앙고백서는 위에서 살펴본 1972년에 채택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선언서 외에도, 1983년에 채택된 신앙고백서 선언서, 1987년에 채택된 신앙선언, 1991년 발표된 창조 질서 보전에 관한 우리의 결의, 2013년에 발표된 한국기독교장로회 새역사 60주년 선언서 등이 있으나, 앞서 지적한대로 이들 선언서들은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라기보다는 대국민적인, 또는 대사회적인 신학선언서(Theological Statement)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지적일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본 논문에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후일의 연구로 남겨두려고 한다.

3. 통합의 신앙고백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전체 6부로 되어 있고, 사도신경, 12신조, 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86년 신앙고백서, 21세기 신앙고백서 등, 6개를 채택하고 있다. 위의 6개 중에서 통합이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을 따라 선언문과 34장(성령에 관하여)과 35장(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을 추가하여 채택하고 있으며,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03년 개정판의 제35장 바로 뒤에 위치한 선언문(Declaratory Statement)이 통합의 신앙고백서에도 제35장 뒤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다. 또한 1986년에 채택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는 서문 외에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추종하고, 미합중국장로교회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여 작성한 것으로, 통합은 한국의 장로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해오고 있는 12신조 및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버리지는 않았으나, 1903년 개정판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1986년 신앙고백서의 관점에서 과거의 신앙고백서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특히, 통합의 신앙고백서에는 대요리문답이 빠져 있다. 이밖에 21세기 신앙고백서는 신학선언서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할 것이다.

통합의 분리는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W.C.C.에 대한 신학적, 교리적 입장의 차이였다. 한국교회와 W.C.C.(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관계는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열린 제1차 창립총회로부터 시작한다. 창립총회에 당시 한국기독교회협의회(N.C.C.K.)가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 목사, 감리교 대표로 변홍규 목사를 옵서버로 참석케 하였고, 김관식목사의 귀국보고를 받고 장로교는 W.C.C.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4년 미국일리노이 주 에반스톤에서 열린 제2차 총회에는 한국의 장로교 대표로 명신홍 박사와 김현정 목사를 참석케 하였다.

1959년 통합총회가 분리된 후, 196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총회에는 기장측은 강원용 목사가 대표로 참석하고, 기장측이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은 제3차(1961년), 제4차 총회(1968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총회에는 한국대표로 김활란(이대 총장), 강원용(경동교회 목사), 길진경(N.C.C. 총무), 김길창(N.C.C. 회장), 박상증, 오재식(청년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한국성공회 등 4개 교단이 W.C.C.에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W.C.C.의 산하단체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구세군대한본영, 성공회, 정교회한국대교구 등 8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한편,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2회 총회록에 따르면,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위원장 한경직 목사, 서기 정규오 목사)의 보고서에 위원회의 입장을 말하되, “친선과 협조를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에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계속 참가하기로 하며,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서는 반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듬 해인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3회 총회는 “국제적인 교제와 사업에 관하여 우리 교회와 신앙 처지에 손상이 없도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1959년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인하여 총회장이 정회를 선언한 후(9월 28일), 연동측이 총회정회 후 속회(11월 23일)를 기다리지 못하고 이탈(9월29일 속회)하는 아픔이 있었고, 합동측은 정해진 날자에 총회를 속회(11월 23일)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소위 W.C.C.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박형룡 박사의 W.C.C.에 대한 입장은 통합측이 분리되기 1년 전 1958년 「신학지남」에 발표된다. 박 박사의 견해 표명과 더불어 장로교회는 W.C.C.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그룹이 극명하게 나뉘게 되었고, 견해를 달리하는 두 그룹은 이후 서로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문제를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결국 1959년 9월 28일 대전에서 열린 제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W.C.C. 문제로 양분된 두 파의 세력 간의 치열한 다툼으로 이어졌고, 마침 경기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격돌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총회장이었던 노진현 목사는 증경총회장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숙의해 줄 것을 제의하고, 증경총회장들의 제의에 따라 11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속회하기로 하고 정회하였다.

이후 총회의 결정에 불만을 품은 회원들이 총회가 정회된 이튿날인 9월 29일 아침 대전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서울의 연동교회에서 전필순목사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이 모임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제44회총회 결의대로 11월 23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속회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예정대로 정회된 총회가 11월 23일 승동교회에서 속회되었을 때 연동측 총대들은 참석하지 않고 소위 합동측 총대들만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9월 29일 단독으로 속회했던 연동측 총대들은 이날 새문안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열었다. 이리하여 고신(1952년)과 기장(1953년)의 분열 후에, 다시 통합(1959년)이 분열하는 역사적인 아픔을 갖게 되었다. 1959년 총회 분열의 중심에 W.C.C. 문제가 있다는 것은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있다.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전체 6부로 나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부 사도신경”이다. 1부에는 사도신경이 실려 있으나 새 번역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고백해온 사도신경과는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2부 신조”로 되어 있다. 2부에는 12 신조가 수록되어 있다.

“3부 요리문답”이다. 3부에는 소요리문답 107문이 실려 있다.

“4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다. 4부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3장외에 제34장과 제35장과 선언문을 추가로 수록하고 있다.

“5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통합에서 1986년에 제정한 신앙고백서를 담고 있으며, 서문 외에 전체 10장을 수록하고 있다.

“6부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2002년에 제정하여 공포되었으며, 두 가지 형태로 되어 있다.

“I.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예배용)”은 6개항의 짧은 고백서를 담고 있고, “II.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는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뒤에 “우리의 사명” 4개를 수록하고 있다. “III.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381)”는 381년 범교회적 공의회 제2차 회의에서 제정한 신조를 수록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1986년에 발표된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서문 외에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고백서의 공식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이다. 서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한국에 전해진 지 백년이 되었다”라고 언급하면서, 지난 100년의 시간 동안 한국 교회가 경험하였던 국권침해, 일제의 군국정치, 광복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등을 짤막하게 언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 속에서 한국 교회는 “초대 교회 때부터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조와 종교개혁의 근본 신앙을 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와 12신조 등을 채택하여 신앙의 표준으로 삼아왔다”라고 지난 시간들을 회고한다.

1986년 신앙고백서의 서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금의 한국 사회가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는, 그러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을 보다 명백하게 정리하고 이를 정착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문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서의 취지를 드러내는 중심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서문]

… 이와 같은 사정에서 우리 교회가 100주년을 맞는 이 역사적인 시점에 그간 우리 교회가 지켜온 신조들과 총회가 채택한 신앙지침서 등을 골격으로 한 우리의 신앙내용을 우리 교회의 말로 정리하여, 보다 조직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신앙과 신학을 통일하고, 보다 조화된 신앙 공동체로서 계속적인 전진을 촉진하고자 한다.

그리고 1986년 신앙고백서는 서문과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의 제목은 “제1장 성경, 제2장 하나님, 제3장 예수 그리스도, 제4장 성령, 제5장 인간, 제6장 구원, 제7장 교회, 제8장 국가, 제9장 선교, 제10장 종말”이다.

1986년 통합의 신앙고백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외적 특징은 그 내용의 전개 순서이다. 이 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이 “성경, 하나님,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순서대로 언급되지 않고, “성경,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인간”의 순서로 그 내용을 전개시키고 있다. “성령”이라는 하나의 항목이 따로 있는 것도 이러한 전개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다룰 내용인데, 통합의 신앙고백서는 그 논리 전개가 성경이 말하는 “창조-타락-구속”의 순서를 따르고 있지 않다.

물론, 신앙고백서라는 것은 언제나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신앙고백서는 그 이전의 모든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포함해야 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성경의 분량만큼이나 많아지거나, 그 이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통합의 1986년 신앙고백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그 이전의 신앙고백서보다 더 자세하거나, 모든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한계성을 수긍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 신앙고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전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과 다른 부분들이 발견되게 된다. 이 차이점은 단순히 단어의 차이나, 표현의 다름으로서의 차이가 아니다. 이 차이는 그 배경에 깔려 있는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인해서 드러나는 ‘다름’이다. 이제, 특별히 “성경관”과 “구원론”에 그 초점을 맞추어서 내용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겠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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