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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와 설교 1
이상웅(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기사입력: 2018/02/14 [13:36]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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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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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상웅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계시록 21:9-22:5를 중심으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정체성과 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설교에 대한 예시를 보여준다.

1. 들어가는 말

20세기를 뒤돌아 보면 신학적으로 세대주의와 신사도운동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고, 전지구적으로 보급된 시대라고 판단된다. 이러한 영향력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종말론에 한정하여 볼 때에 세대주의는 존 넬슨 다비나 스코필드가 주창한 고전적인 세대주의(Classic Dispensationalism)에서 존 월부드, 찰스 라이리 등을 대변자로 하는 수정된 세대주의(Revised Dispensationalism)를 거쳐 제3세대 세대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점진적 세대주의(Progressive Dispensationalism)로 발전했으나, 여전히 전통적인 세대주의가 혼재하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점진적 세대주의의 경우 조지 엘든 래드의 종말론과 많이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개혁주의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아직도 충분히 성경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욱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 세대주의에 기초한 온갖 시한부 종말론이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코드를 666이라고 한참 주장하던 이들이 이제는 베리칩을 666 짐승의 수라고 주장하고 있고, 선교의 완성이라는 시대의 표지를 들어 2030년경이면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시한부종말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면 임박할수록 이런 종말론적 미혹은 더욱 더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종말론의 확립과 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평소에 우리 설교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충만하게 가지고, 성경 66권에 대한 전반적인 강해와 교육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해 왔다. 그리고 최소한 우선적으로 기원에 대한 책인 창세기, 구원의 길을 정리한 로마서 그리고 종말에 대한 기록인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고 바르게 강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이는 필자의 실제적인 목회현장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기도 하다.

필자는 성경본문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성경신학 전문가도 아니며, 개혁주의 설교학의 전문가도 아니지만, 성경적인 기초위에서 연속강해설교(lectio continua) 원리를 목회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분투노력했었고, 그러한 말씀사역 가운데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연구와 강해를 빠트릴 수 없다. 본고를 통해서 필자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에 계시된 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어지는 본론 2절에서 논자는 우선 새 예루살렘, 도성인가 교회인가? 라는 주제의 신학적 숙고 작업을 한 후에, 3절에서는 전거 구절이 되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에 대한 논자의 강해를 요약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본문을 어떻게 설교해야 한다는 설교학자의 당위성을 제시하기 보다는 필자가 해당 본문들을 어떻게 설교했었는가 하는 것을 이미 출간되어 있는 강해서를 근거로 하여 제시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2. 새 예루살렘- 도성인가 아니면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인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말하는 계시록 21장 1절 이하를 보면 곧장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고 그리고 21장 9절 이하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새 예루살렘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새 예루살렘을 구속받은 백성들이 영원히 거주하게 될 실제적인 도성 혹은 도시로 보는 입장과 구속받은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라고 하는 입장이다.

2.1. 도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을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아니하고 실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거주민이 되어 살 도성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새 예루살렘이 “비록 비유적으로 어린 양의 신부라고 불린다고 할지라도(계 21:2, 9), 교회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히브리서 12장 22-23절을 논거로 제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하나님 자신이 지은 도성이고(히 11:10),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데, 왜냐하면 그가 이 성의 건축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그곳에 거하기 때문이다(계 21:3). 그곳에서 천사들은 위대한 왕의 종들이며 수행원들이고(히 12:22), 복받은 자들은 그 나라의 시민들이다(계 21:27, 22:3-4).

물론 바빙크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계시록 21-22장의 묘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단서를 단다. 그에 의하면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의 의식에 투사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들을 이미지들로 해석하여 보여 준”것이고, 또는 “내세의 실재들을 현세의 것들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빙크에 의하면 첫 창조 가운데 있는 모든 아름답고 선한 것들은 “하나님의 미래의 도성에 함께 집결되어, 갱신되고, 재창조되어 그 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려”질 것이지만,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지상의 예루살렘이나 낙원 보다 더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20세기 미국 복음주의를 주도한 세대주의에 맞서서 역사적 전천년설을 강력하게 대변했던 조지 엘든 래드(George Eldon Ladd)의 경우도 새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과 일치’시키는 해석에 의구심을 표현하고, 오히려 ‘구속받은 땅에서의 구속받은 사람들의 주요 거주지와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무천년설자인 필립 휴스(Philip E. Hughes)도 새 예루살렘을 새 하늘과 새 땅에 속한 도성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도 대체로 새 예루살렘을 성도들을 위한 영원한 거처라고 문자적으로 이해해왔다. 1967년에 간행된 NSRB은 새 예루살렘이란 “the dwelling place throughout eternity for the saints of all ages and fulfills the hope of Abraham for the heavenly city (Heb. 11:10-16; cp. Heb. 12:22-24)”라고 말한다. 존 맥아더는 새 예루살렘이 ‘실제적인 도시’(an actual city)라고 하는 점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세대주의에 근거하여 시한부종말론으로 한국사회를 혼란케 만들었던 이장림 역시 새 예루살렘을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처소”라고 보면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다.

2.2. 구속된 공동체로서 새 예루살렘

그러면 이제 새 예루살렘을 ‘교회 혹은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로 보는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온 신약학자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 1900-1982)은 새 예루살렘을 “현재의 이상적인 교회에 의해 예표된 미래의 이상적 교회”라고 단적으로 해설했다.

헨드릭슨이나 그와 동일한 견해를 취하는 학자들, 예컨대 그레고리 빌(Gregory Beale)이나 이필찬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전거구절은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δεῦρο, δείξω σοι τὴν νύμφην τὴν γυναῖκα τοῦ ἀρνίου)고 하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이다. 이러한 말씀 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전경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비록 도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도 실제적인 도성이라기 보다는 어린 양의 아내인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로버트 건드리는 1987년에 쓴 한 논문 가운데서 새 예루살렘을 ‘매우 거대한 상징’(a very large symbol)이라고 부르면서, 새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은 성도들이라고 하는 견해는 ‘전혀 새로운 것’(nothing new)이 아니라고 말한다. “The New Jerusalem: People as Place, not Place for People”라고 하는 그의 논문 제목이 잘 보여주듯이, 건드리는 새 예루살렘은 새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거주지’가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거처’(God’s dwelling pace in the saints)라고 해석한다.

최근 20여년 동안 이와 동일한 입장을 강변하고 있는 두 학자를 더 소개해 보려고 한다. 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인 그레고리 빌(Gregory Beale)과 이필찬이다. 두 사람 다 영국에서 요한계시록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출간한 전문가들이다. 빌은 1999년에 출간한 『요한계시록주석』에서도, 2014년에 간행한 주석 축약본에서도 새 예루살렘을 “새 창조와 영광 속에 들어간 완성된 교회”라고 일관되게 해석했다. 21:1-22:5에 대한 전체 단락 제목을 “The new creation and the church perfected in glory: in the new world to come, the community of the redeemed will be completed, perfected, inviolable, and glorious because God’s consummated, glorious presence will reside among them forever, whereas the unfaithful will be excluded from such blessing”이라고 붙였다.

이필찬은 1998년 리처드 보쿰의 지도하에 완성한 박사논문 4장에서 구조적 분석, 문맥적 분석, 주해적 분석, 주제적 분석 등에 근거하여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을 학술적으로 논증하였다. 또한 2006년에 간행한 방대한 요한계시록 주석 속에서 대중적인 필치로 자신의 해석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필찬은 새 하늘과 새 땅 혹은 새 창조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주인공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소개하기 때문에(21:2, 9-10), 그리스도의 신부로 소개되는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또한 계시록 21장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에스겔 40-48장에 예언된 ‘종말론적 새 성전에 대한 약속의 성취’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 성의 장광고가 각기 12,000 스다디온이라는 것은 지성소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고, 사용된 보석의 의미는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함’을 나타낸다고 해설해 준다. 그리고 성내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이 교회공동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 준다. 그리고 나아가서 22장 1-5절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에서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렇게 새 예루살렘을 교회 내지 공동체(Gemeinde)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다양한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추가적으로 우리는 칼 바르트를 언급할 수 있겠고, R. H. 마운스와 그가 소개하는 헌터, 키들 등의 학자들을 추가할 수가 있겠다.

2.3. 정리

우리는 이상에서 요한계시록 21-22장에 등장하는 새 예루살렘이 구속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살 실제적인 도성이나 도시인지 아니면 새 하늘과 새 땅에 거주하게 될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를 가르키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양자가 다 해석학적인 근거위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번 포이쓰레스는 “이미지의 유동적인 성격 때문에 도시의 거주자(성도)들과 도시 자체(영화롭게 된 창조와 함께 성도들)를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언명했고, 리차드 보쿰의 경우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삼중성을 ‘백성으로서 새 예루살렘,’ ‘장소로서 새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요한계시록은 상징주의(sybolism)로 가득한 책이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이 상징인지, 아니면 문자적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경우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들 가운데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 예컨대 성의 장광고가 다 12,000스다디온이나 된다고 하는 21장 16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문자적으로 계산할 때에 현 미국 땅의 1/2정도의 사이즈가 되는데 그 성과 신천신지의 문자적인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등의 난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따라서 구속받은 신자들을 위하여 신천신지라고 하는 궁극적인 거처가 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은 구속받은 교회 공동체의 영광과 교회가 누리게 될 신천신지에서의 복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3. 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설교(논자의 사례)

그러면 이제 새 예루살렘(계 21:9-22:5)에 대한 실제로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자가 강해서를 통해서 이미 공표한 예를 요약적으로 제시해 보려고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논자는 이 본문에 대한 심도있는 설교학적인 논의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럴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신학 작업을 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케리그마를 선포해야 하는 개혁교회 목사의 소명을 따라 논자가 준비하고 전달했던 새 하늘과 새 땅(계 21:1-22:5)에 관한 설교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함으로 하나의 예시를 하려고 하는 것 뿐이다.

논자는 예루살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1장 9절-22장 5절에 대해서 총 4회에 걸쳐서 강론하였다:35 (1) 새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21:9-21), (2) 새 예루살렘의 영광(21:22-27), (3)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22:1-2), (4)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22:3-5). 이제 각 설교 별로 본문을 어떻게 설교 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개관해 보도록 하겠다.

3.1. 새 예루살렘- 어린양의 신부(21:9-21)

세 번째 설교는 새 예루살렘(21:9-21)에 대한 첫 번째 설교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새 예루살렘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은 크게 보자면 신자들이 영원히 살게 될 도시 혹은 성으로 보는 입장과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교회 공동체로 보려고 하는 입장으로 대별된다. 논자는 후자의 입장을 주로 취하고, 가끔 전자도 유보적으로 언급하는 형식으로 설교를 진행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사물애호증(objectum sexuality)에 사로잡혀 베를린 장벽과 결혼했다고 공언했던 에이자 리타(Eija-Ritta)라는 여자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21장 9절에서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라고 소개된 바가 10절하 반절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동일시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양의 아내 혹은 신부라는 것이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는 물질적인 성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혹은 교회라고 하는 점을 애써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1) 새 예루살렘의 정체

설교의 첫 번째 부분에서 ‘새 예루살렘의 정체’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유보적으로 말해서 “어떤 면에서는 … 구속받은 백성들의 처소를 상징”한다고 하는 점을 먼저 말했다(히 12:22-24). 하지만 아름다운 교회당 건물을 교회라 말하지 않듯이, 물질적인 성을 ‘어린양의 신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어린양의 신부로서 새 예루살렘이 가리키는 바는 ‘교회 공동체’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총수’를 가리킨다고 강론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디르사나 예루살렘과 같은 성에 빗대어 말한 아가서 6장 4절이나 성도들을 건물에 비유한 사도들의 말씀들(엡 2:20-22; 벧전 2:5-6) 등을 인용 설명하면서 “따라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새 예루살렘으로 형상화한다고 해서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새 예루살렘으로 비유한 것은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보다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강조점이 있음”을 부언했다.

(2) 새 예루살렘 성의 문과 기초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 성문과 기초석을 설명해주는 21장 12-14절 말씀을 강론하는데로 나아갔다. 열두 문 위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기초석에는 어린양의 12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가 구약과 신약의 백성들로 구성되어져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기초석에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교회가 사도적인 가르침에 기초하여 세워졌음을 의미한다고 부연 설명했고,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의 문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교회는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보편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3) 성의 규모

설교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규모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21장 15-17절의 말씀을 강론했다. 본문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 성은 길이, 넓이, 그리고 높이가 동일하게 12,000스다디온(환산하면 2,200km)이나 되는 정입방체, 즉 큐브 모양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의 단면적은 현재 미국 땅 크기의 절반에 해당한다는 점을 말해 줌으로 문자적으로 성의 규모가 어떠한지를 짐직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논자의 강조점은 실제적인 성이나 도시로 새 예루살렘을 이해하지 아니하고 교회공동체로 설명하는데 있기에, 이러한 규모에 대한 말씀도 상징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을 경주했다. 일단 12,000 스다디온이라는 숫자에 담겨있는 의미는 레온 모리스(Leon Morris)의 다음과 같은 해설에 동의하며 인용했다. “10의 세제곱에 12을 곱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총계가 된다.” 그리고 구약의 지성소가 정입방체였던 것을 따라 새 예루살렘 성도 정입방체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공동체임을 상징”하는 것을 설명했다.

(4) 성의 건축재료

마지막 네 번째 부분에서는 ‘성의 건축재료’(21:18-20)에 대해서 강론했다. 19-20절상 반절에 의하면 12개의 기초석은 고귀한 보석들 12개로 놓여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21절에서는 성문이 통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선 12개의 기초석을 이루고 있는 보석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최대한 보석에 대한 설명을 해보았고, 이렇게 귀한 보석으로 되어있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강론해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보석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를 못합니다. 다만 완성되고 영화롭게 된 교회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미국 개혁신학자였던 H. 훅스마가 말하는대로,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된 교회의 ‘영광, 순수성, 아름다움, 그리고 가치’(the glory, the purity, the beauty, and the preciousness of this great and holy city)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열두 대문이 진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대형진주 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과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 진주가 만들어지듯이 우리가 그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의 대속의 고난의 결과이자, 우리를 전도하기 위해 수고한 이들의 고난이 있었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의 길이 ‘맑은 유리같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신령한 교제에는 감추어지거나 외식하거나 위선한 면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의 속을 드러내고 살 것”을 의미한다고 해설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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