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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역사적 평가 1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2/28 [10:2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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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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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를 통해 과연 그가 선교사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들과 그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인 결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들어가면서

1866년 8월, 영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를 타고 대동강을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가 평양 양각도에서 그해 9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 젊은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崔蘭軒)선교사다. 오문환은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을 전해주다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고, 〈고종실록〉은 토마스가 조능봉과 함께 배어서 나와 결박된채 민관에 의해 맞아 죽었다고 기록했다. 해밀턴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는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였다.

2016년 9월 5일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그의 순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한국선교, 특히 평양지역 선교의 개척자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은 1909년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 때 한국의 “복음전도사역”이라는 자신의 논고 맨 서두에서 “한국에 들어온 첫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가 “죽을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을 반포”했으며 “그에게서 성경책을 받은 얼마의 사람들을 만났다”고 증언했다. 한국선교 25주년의 선교사역을 정리하는 순간, 복음의 주역으로 쓰임받은 마펫은 주저하지 않고 토마스의 죽음에서 한국선교의 기원을 찾았다.
 
토마스의 거룩한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개척선교사는 사무엘 마펫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한국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장로교 개척선교사 언더우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 1884년 여름 영국 런던선교회를 방문해 그곳에서 런던선교회 소속 토마스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했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릴리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런던선교회에서 들은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되풀이 하곤 했다. 그만큼 그가 토마스의 죽음을 인지하고 의미 있게 받아들인 것이다.

토마스의 순교를 높이 평가한 것은 장로교 선교사들만이 아니었다.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한국에 입국한지 채 2년도 되지 않던 1887년 1월 29일 미국 슈펠트 제독(Admiral Shufelt)가 자신이 직접 관여한 한국의 개항관련의 증언을 담은 “한국의 개항: 슈펠트 제독의 개항설명”을 전해받았다. 이 원고는 아펜젤러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너럴 셔먼호를 포함한 상세한 한미관계와 개항과정을 담고 있다.
 
아펜젤러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죽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이 원고를 5년이 지난 1892년 The Korea Repository에 기고했다. 한국에 파송된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입국하기 전 윌리엄 엘리어트 그리피스, 로스의 저술을 통해 제너럴 셔먼호의 사건을 통해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차에 슈펠트가 고종의 초청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자 그에게 부탁해 한미관계와 조선의 개항 소식을 직접 전해듣기를 원했다. 아펜젤러의 글은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1915년 미 감리교 개척 선교사 존스는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온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최초의 복음주의 선교사가 그 땅에서 순교자의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교회가 토마스의 순교를 본격적으로 기념하기 전 1925년 강규찬, 김선두, 변인서가 편찬 저술한 〈평양노회지경각교회사기〉에도 “주후 1867[1866]에 영국 선교사 도마스가 스카뎐 성서공회로브터 미국풍선을 승하고 평양에 래하엿다가 감사의 습격을 당하야 대동강에서 슌교하니 차가 야소교 신도의 혈이 아국강산에 시적한 일이려라”며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단정하여 기술하였다.

이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생각한 것은 후대의 일이 아니라 초기 증언자들, 특히 그에게서 성경을 전해 받고 예수를 믿고 자신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는 당대의 살아 있는 증언자들로부터 생생한 스토리를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소수의 학자들이 마치 토마스가 어느 날 갑자기 순교자로 둔갑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주관적 평가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선교적 공헌을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그들이 먼저 1910년대부터 그에 대한 연구와 평가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다 1920년대부터 토마스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 1926년 오문환의 소책자, 〈평양양란〉이 간행되었고, 1926년 11월 14일 제 14회 총회 때 토마스 선교사 순교 60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1927년 5월 7일에는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전도회(회장 마펫)가 창립되었다.
 
그해 해밀턴이 〈코리아미션필드〉에 “한국의 첫 개신교 순교자”를 발표하고 그 이듬해 1928년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이 출간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32년 토마스기념교회가 토마스의 무덤이 있는 조왕리에 건축되었고,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는 해에 출간된 해리 로즈 편집,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1권 1884-1934〉에서 상당한 분량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조명에 할애했다. 1936년에는 서해안 지역 도서 전도를 위해 토마스 호가 건조되었고, 해방 후 1947년 8월 12일 토마스 목사 순교기념 전도회가 발족되었으며 1966년 9월 광주에서 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 51회 총회는 토마스 선교사 순교 100주년을 맞아 기념예배를 거행했다. 명신홍 목사는 “토마스(R. Thomas) 목사의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라는 글에서 토마스 목사는 “우리 땅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를 흘린 “한국교회 순교자 중에 선구자적인 순교자였다”고 평가했다. 한국교회는 ‘순교는 교회의 씨’라는 터툴리안의 증언을 가장 잘 증명해 준 인물이 바로 토마스라고 믿었다.

I. 토마스 선교사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

해밀턴(F. E. Hamilton)이 1927년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을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했다. 이 글은 매우 평범한 연구처럼 보이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물론 토마스 목사의 내한과 순교과정을 매우 탁월하게 역사적으로 그려냈다. 해밀턴의 논고는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보다 앞서 발표된 논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사료적 가치가 있다. 해밀턴은 지금까지의 선행 연구 즉 게일과 케이블의 글, 그리고 기타 문헌들을 참고하여 제너널 셔먼호 사건의 전후관계를 고려하면서 토마스의 선교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적으로 기술하였다. 해밀톤은 토마스의 복음전도와 순교가 얼마나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잘 밝혀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해밀톤의 논고 역시 토마스 연구의 또 하나의 소중한 연구 사료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이듬해 오문환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기술한 〈토마스 목사전, 1928〉은 오랫동안 토마스의 연구의 길잡이로 평가 받아온 연구서였다. 그는 이 책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토마스 기념사업회를 이끌며 토마스기념교회까지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전〉을 기술하면서 3천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고, 수많은 국내외 자료를 모으고, 후손들과도 접촉하며 토마스 연구에 천착했다. 오문환은 “The Two Visits of Rev. R. J. Thomas to Korea”라는 영어 논고를 자신의 책에 삽입시켰다. 사실, 이 영어 논고는 새로운 연구라기보다는 자신의 한글판 〈도마스 목사전〉에 담겨진 내용의 핵심을 영어로 정리한 것이다.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이 출간된 이 후 이 책은 토마스 선교사 연구에 관한 한 가장 권위 있는 저술로 받아들여졌고, 토마스 선교사 연구자들은 그의 연구에 상당히 의존했다.

10년 후 1938년 케이블(E. M. Cable) 선교사가 영어로 토마스 관련 연구 논고를 발표했다. 케이블 선교사가 기록한 “한미관계 1866-1871”는 토마스 연구의 독보적인 논고였다. 국내외 관련 자료를 섭렵하여 1938년 발표한 케이블의 “The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는 토마스 연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넓혀주었다. 케이블의 논고는 한미관계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논고이지만 토마스와 관련된 국내외 1차 문헌들을 상당히 섭렵한 가운데 발표한 논문이기 때문에 오문환의 〈도마스 목사전〉에 견줄 수 있는 무게감을 갖고 있다. 이 논고는 영어로 기술했지만 〈고종실록〉을 비롯한 국내 기록들을 영역하여 소개하는 한편 제너럴 셔먼호 사건 관련 편지들과 문헌들을 상당히 발굴하여 1차 문헌들을 그대로 논고에 삽입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논고는 오문환의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토마스 연구의 객관성을 위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 연구의 객관성과 풍요로움을 더해주었다. 객관성에 있어서는 오문환의 책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논고는 토마스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주었다. 오문환의 책이 한글로 된 문헌이고 케이블의 글은 영어로 된 논고였기 때문에 토마스의 연구의 모든 기록이 오문환의 기록에 의존해서 기록된 것이 사실이다.

이능화, 유홍렬, 김양선, 일본의 재일 학자 오윤태, 민경배는 영국에서 토마스 관련 1차 문헌들을 모아 토마스 연구에 대한 중요한 논고를 남겼다. 유홍렬은 자신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고종실록〉을 중심으로 기술하면서 천주교 신자들과 신부들을 순교자로 지나칠 정도로 미화시킨 것과 달리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의 죽음을 “피살”로 기록, 호교론적인 시각이 그의 작품에 강하게 나타난다. 민경배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토마스의 편지들과 관련 개인적 기록들을 참고하여 그의 선교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잘 기술하였다.
 
그러다 영국 버밍험대학에서 토마스를 가지고 박사논문을 쓴 고무송이 자신의 논문을 번역하여 출간한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이 출간하면서 토마스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는 방대한 사료를 수집하고 개관적이고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으로 토마스의 생애, 사역, 죽음, 그리고 그 이후 한국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일련의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하여 토마스 연구의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그 외에도 근래 스토리 형식으로 토마스의 생애와 사역을 이해하기 쉽게 엮은 유해석의 〈도마스 목사전〉도 토마스 연구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었다.

한국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들은 물론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토마스를 순교자로 이해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여기에 대한 도전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첫 포문을 연 사람은 이만열인 것 같다. 그는 1988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술 〈한국기독교회 100년사〉에서 토마스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했다.

토마스 목사가 비참하게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단지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위대한 선교사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가 타고 왔던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는 선교용 선박이 아니라 상선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대포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그 선박은 입항을 불허하는 한국 정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불법적으로 항해하였으며, 따라서 한국의 내륙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항해 목적이나 과정을 살펴볼 때 그 배를 아름답다거나 거룩하다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토마스 목사는 그 배의 통역사이자 항해사로서 승선하고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 목사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그가 죽임을 당했던 대동강 굽이마다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교회들이 토마스 목사의 죽음의 결과와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를 너무도 안이하게 해석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이만열은 위 글에서 토마스가 선교사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이 순교가 아니라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포로 중무장을 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불법으로 입국해서 정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내륙으로 들어온 토마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고 해서 “위대한 선교사”로 추앙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게다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대동강 굽이마다 교회들이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이는 바른 역사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이만열의 논고의 핵심은 토마스를 정상적인 선교사로 인정할 수도, 더 더욱 그를 순교자로, 그의 죽음을 한국교회 영적 초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이만열은 1985년 〈한국기독교사특강〉에서 여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평가하는 것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엄연히 주권 국가인 조선 정부의 허가도 없이 들어온 불법적인 이 배에 대해 평양 감사 박규수는 입국의 까닭을 묻고 또 제지하려 했지만 무장한 그 배는 이러한 한국 측의 경고에도 개의치 않고 방약 무인하게 행동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좌초된 상태에서 며칠이 지나자 식량과 물이 떨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배에서 총과 대포를 쏘며 노략질까지 하며 심지어는 교섭에 나선 한국관리를 납치까지 하려다가 결국 조선군의 화공을 받아 결국 불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배에 탔던 사람들이 뭍으로 오르자 혹은 도끼에 혹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1907년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한창 일어날 때 어느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와서 선교사에게 주며 ‘이것이 우리 할아버지께서 옛날 토마스 목사가 죽을 때 얻은 성경이다’하면서 내어 놓은 적이 있다고 하나 우리가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튼 토마스 목사가 상당히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만 가지고 역사에서 그가 위대하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다. 또 제너널 셔먼호 사건 자체도 그 배의 입국 목적이나 불법적으로 입국한 경위로 보아 성스럽다거나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또 토마스 목사도 그 배의 인도자로 왔으니 그 다지 높이 평가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단지 그의 피가 흘렸던 대동강 굽이굽이에 뒷날 많은 교회가 섰다는 것은 인정해야 될 것이지만, 이것을 그의 죽음과 관련시킨다는 것은 너무 안이하게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순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도 한국교회는 이제 정리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만열의 입장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평양대부흥운동도 “민족적 울분을 종교적으로 카타르시스”한 현상이고,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도 동일한 맥락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1995년 한규무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토마스(R. J. Thomas) 목사의 ‘순교’ 과정에 대한 사료 검토”를 발표했다. 토마스에 대한 귀중한 서지학적 정보를 제공한 것과 많은 자료를 분석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규무는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을 1차 사료는 물론 여러 학자들의 저술이나 논고를 참고해 도표를 만들어 토마스의 “순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1995년 발표 때 “그의 죽음을 과연 ‘순교’로 볼 것인가 아닌가 하는 평가의 문제를 후일로 미루었다가 2005년 그동안의 연구를 정리하여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순교가 아니라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조선 후기 이 땅에 들어왔던 천주교 신부들이 처형된 이유는 확실히 그들의 선교활동 때문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분명한 순교이다. 만약 토마스도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는 이유 때문에 죽었다면 그 역시 분명한 순교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주권을 무시하고 저지른 침략적 행위 때문에 죽은 것이다. 설령 토마스의 장엄한 최후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같은 필자의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그가 죽은 순간에 형리에게 성경을 주었다 해서 그의 이전 실책이 씻겨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사료상으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책임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마스이며, 그는 성경 반포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어떤 이는 결국 토마스가 그토록 무리하면서까지 평양에 가려 한 이유가 바로 복음 전파를 위해서였으므로, 넓게 보면 그 역시 선교활동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일면 타당해 보인다. 결국 ‘순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따라 사람마다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 어느 지점으로 가는데 난폭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선교사가 있다면 그 죽음을 ‘순교’로 볼 수는 없다. ‘순교’는 그 직접적 사인이 선교활동 때문일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본다. 그런 이유에서 필자는 선교를 위해 남부지방으로 가던 도중 병으로 죽은 데이비스(J. H. Davis, 1858~1890)의 경우도, 목포에서 열리는 회의에 가려다 군산 앞바다에서 빠져 죽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의 경우도, 모두 값지고 안타까운 죽음임에 틀림없지만 순교로는 보지 않는다.

이처럼 한규무는 토마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헨리 데이비스와 H. G. 아펜젤러도 병이나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한규무는 토마스에 대한 오문환의 글의 내용이 설령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를 순교자로 평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대포를 장착하고 중무장을 한 선박을 타고 와서 성경을 나누어주었다고 그것을 선교로 볼 수 있으며, 게다가 불법으로 입국해서 전투를 벌이다 죽은 사람을 순교자로 둔갑시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의 논지다. 2016년 6월 한규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라는 동일한 성격의 글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표했다. 이 논문은 앞서 큰 맥락에서 볼 때 앞서 발표한 같은 논제의 반복으로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볼 수 없다는 논지의 반복이다.

최근 “토마스 목사의 죽음은 순교인가”라는 논고에서 옥성득은 1차 사료들과 시각적인 도표까지 만들어 토마스를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의 논고를 발표하였다. 그의 논지와 주장은 앞서 의견을 개진한 이만열 교수나 한규무와 큰 차이가 없다. 옥성득은 초기 문헌들 모두가 토마스를 순교로 보지 않았으며, “1905년 이전 한국이나 중국에서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본 선교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초기 문헌들에서는 전혀 토마스를 순교로 보지 않았으며, 순교로 미화시키기 시작한 것은 1909년에 접어들어서이며, 특별히 1915년 존스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라고 처음 언급하면서부터라고 주장했다. 그 글의 전반적인 논지는 중무장을 하고 제국주의 사고를 가지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민관들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한 전혀 순교와 무관한 토마스가 어느 날 갑자기 순교자로 둔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 같은 비평적 재평가가 최근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토마스의 입국과 죽음에 대한 오문환, 케이블, 민경배, 고무송의 연구에 다른 시각을 제시함으로 토마스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최근 일각에서 제기한 토마스의 재평가가 자칫 객관적인 연구를 넘어 이데올로기적 접근이라는 비판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만열, 한규무, 옥성득의 접근방법은 방법론적으로 각기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중무장을 한 제너럴 셔먼호라를 타고 불법으로 입국해 활동한 토마스를 과연 선교사로 볼 수 있으며, 전투를 벌이다 죽은 그를 순교자로 미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상호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않는 이들은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고종실록〉을 비롯한 국내 기록들을 논지의 근거로 삼았다. 〈고종실록〉의 기록을 권위 있는 글로 수용하면서도 오문환의 기록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한 이상 앞으로 사료 선택의 문제가 토마스 선교사 연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이슈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토마스와 관련된 초기 관련 자료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대원군 치하에서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기록한 주요 국내 1차, 2차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高宗實錄〉, 〈매천야록〉, 〈大韓季年史〉, 〈浿江錄〉, 〈日省錄〉, 〈同文彙考〉, 〈龍浩閒錄〉, 〈瓛濟集〉, 〈籌辯夷務始末〉, 〈청계중일관계사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평양감영등록〉(平壤監營啓錄), 〈순무영등록〉(巡撫營謄錄), 전남 담양 장흥 고씨(長興高氏) 소장문서 〈조지난편〉(朝紙爛片), 〈기백장계〉(箕伯 狀啓), 〈용호간록〉(龍湖間錄), 〈평안장계〉, 〈평안감영장계〉, 〈동산일기〉(東山日記), 〈정치일기〉(政治日記), 〈어양수록〉(禦洋隨錄). 이중에서 아마도 제너럴 셔먼호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거론되고 인용되고 있는 자료는 〈일성록〉과 함께 〈고종실록〉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지하듯이〈고종실록〉은 제너럴 셔먼호와 관련된 일종의 보고서로 토마스 연구에 중요한 1차 자료이다. 〈고종실록〉은 보고서 형태를 취하고 있어 보고자의 주관과 생각 그리고 시각이 강하게 담겨 있다.

최근 토마스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단순히 순교여부 문제를 넘어 토마스의 신분과 입국 동기 문제까지 도전하고 있어 토마스의 내한을 선교 활동과 관련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국내외 문헌에 기초하여 토마스의 1차 내한과 2차 내한과정과 그의 순교과정을 가능한 객관적이고 비평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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