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개혁신학
[논문]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역사적 평가 2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3/07 [09:32]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순정
배너
이 글은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를 통해 과연 그가 선교사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들과 그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인 결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II. 토마스 선교사의 중국 입국과 1, 2차 내한 선교 문제

토마스의 생애와 선교사역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구태여 반복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간단하게 중국입국과 1차, 2차 내한 선교의 핵심 문제를 짚어 보려고 한다.

1. 토마스 중국 입국

토마스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Rhyader, Radnoshire)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5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B.A.)과 신학과정을 마친 토마스는 선교사에게 요구되는 “훌륭한 교육,” “강직한 성품,” “외국어 습득 능력” “자기희생의 정신”을 자신이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기도 가운데 선교사가 되길 갈망했다. 그는 그해 6월 4일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런던선교회 소속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받았다.

7월 21일 중국을 향하는 폴메이스(Polmaise)호에 승선한 토마스가 아내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것은 한창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863년 12월이었다.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를 거점으로 막 선교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때, 불행하게도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가 낯선 타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64년 4월 5일자 런던선교회에 보낸 그의 첫 편지는 선교 보고서가 아닌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토마스는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으로 안정을 찾지 못한데다 현지 런던선교회 총무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와도 의견이 맞지 않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에 가서 1864년 12월 8일 청국의 황립해상세관(皇立海上稅關)에서 통역으로 취직했다. 1985년 1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 약 8개월을 세관에서 봉직한 토마스가 다시 선교열을 재충전하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윌리엄슨과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피신해온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면서였다.

토마스는 지푸에서 세관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선교사의 충고와 격려로 다시 선교에 대한 비전을 충전할 수 있었다. 세관에 봉직하는 동안도 그는 중국인 주일예배를 윌리엄슨과 함께 교대로 인도하는 등 선교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에 온 두 명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실정을 전해 듣고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오문환이 자신의 저서 〈토마스 목사 전〉에서 토마스의 내한을 1차와 2차로 나눈 이후 토마스의 한국선교 활동을 1865년 1차와 1866년 2차로 대별하여 기술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 전통을 따라 고무송도 1차와 2차로 대별하여 기술하고 있다.

2. 토마스의 1차 내한과 선교 문제

토마스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조선으로 향하는 “中國木船”이 있어서 1865년 9월 4일 두 명의 한국천주교인을 동반하고 윌리엄슨이 전해 준 상당량의 한문 성경들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소속 권서인으로 서해안으로 떠났다.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전〉에서 이 때 길안내를 맡아준 사람이 중국인 수부 유웬타이(Yu Wen Tai)라고 밝혔다. 1865년 9월 13일 창린도(昌麟島)로 알려진 황해도 연안의 한 섬에 도착한 토마스는 12월 초까지 약 두 달 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가지고 온 성경을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1866년 1월 12일 그가 티드맨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난다.

토마스는 심한 광풍으로 인한 생명의 위기 속에서 가까스로 생명을 건지고 우장(牛莊)과 산해관(山海關)을 경유하여 북경으로 간신히 돌아왔다. 두 달반의 시간은 단순한 체류가 아니라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기간이었고, 그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1866년 1월 12일자 토마스의 편지에서 몇 가지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에 입국해서 2개월 반 동안 한국어를 배웠으며 비록 많은 결실은 없었지만 선교사역도 병행했다. 둘째, 몇몇 한국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가 전해준 성경을 받았는데 토마스가 볼 때 이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기를 간절히 열망했다는 증거였다. 셋째, 토마스는 한국선교를 앞으로 지속하겠다는 암시를 편지에서 밝혔다. 그것은 위 편지 내용 중에 “수도에서 통용되는 상당한 어휘들과 언어들(dialogues)을 습득했는데 이것은 그 사람들과 향후 교섭 할 때 유용하게 사용될 것” 이라는 토마스의 고백 속에 잘 담겨져 있다. 토마스가 한국선교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한 조선에 입국해서 애써서 한국어를 공부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토마스는 1차 선교를 하고 돌아와서 주변의 사람들을 방문하고 기도회를 계속 인도하며 선교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쇄국정책에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한국에 입국해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성경을 전해주고 다시 한국인들에게 선교할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은 한국에 대한 선교열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이후 한 동안 위기를 만난 것이 사실이지만 이 때쯤에는 이미 토마스는 선교열을 충분히 재충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오문환은 토마스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틴(W. A. P. Martin)의 부탁으로 그가 운영하던 북경에 있는 “중서학원”(Chinese Government Anglo-Chinese Shool) 교장 대리를 맡았다고 말한다. 토마스는 북경에 온 조선의 동지사 일행을 만났다. 1866년 4월 4일자 편지에서 토마스가 밝힌 것처럼 그즈음 한국선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토마스에게 격려가 되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북경에 온 동지사 일행 중 한 사람이 토마스 목사의 포켓에 한문으로 된 쪽지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거기에는 “어느 외국인이 서해안에서 배포한 것과 같은 마태복음 책 하나를 구득(購得)해 달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런 일련의 긍정적인 상황은 토마스를 더욱 고무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1866년 토마스는 제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북경에 돌아온 후 런던선교회로부터 다시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아내를 잃은 후 계속해서 새로운 선교지를 찾고 있던 토마스는 조선이 새로운 선교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 1차 내한 과정과 이후의 토마스의 행적을 살펴볼 때 그의 조선 입국은 선교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 입국했고 성경을 반포했다. 필자가 볼 때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토마스의 2차 내한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3. 토마스의 2차 내한과 선교 문제

1차 내한 후에 토마스는 다시 한국을 방문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1차 내한 후에 그가 보여주었던 일련의 행적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토마스는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열어 놓고 길을 찾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한국에 입국하기를 갈망했다. 심지어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리델 신부로부터 세 명의 불란서 신부의 처형 소식을 전해 듣고 한국정부를 문책할 목적으로 불란서 함대를 출동시켜 한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안내자 겸 통역으로 동승해 줄 것을 제안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갑자기 인도차이나 폭동이 발생해 로즈 제독이 그곳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한국정벌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토마스는 미국인 프레스톤의 소유인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가 조선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1866년 7월 “한국에서 반포하기 위해 몇 권의 중국어 성경을 가지고” 통역 겸 안내자로 승선했다. 우리는 토마스의 2차 한국방문과 관련하여 3가지 사실을 먼저 풀어야 할 것이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가 어떤 형태의 배였는가. 둘째, 제너럴 셔먼호의 내한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셋째, 토마스가 이 배에 승선한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1) 제너럴 셔먼호는 어떤 형태의 배였는가?

비록 상선이기는 하지만 그 배는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순양함”이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류가 금지된 조선인들에게는 순수 무역선으로 보이지 않았다. 제너럴 셔먼호가 상선으로 무기를 싣고 간 것과 본래 전투함으로 건조된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오문환은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외국선박에 대해 개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무기를 싣고 출항한 것이라고 말한다.

“쇄국주의를 고집하여 외국인이게 적개심을 품고 잇섯슴으로 처음 사업차로 오는 제네랄셔만호는 무기를 싯게 되엿고 그로인하야 도마스 목사의 심중에도 얼마콤 염려되는 점도 업지 안엇을 것이며 그의 친우들도 그것을 염려하엿슬것이나 그것은 다만 만일을 위함이엿고 기목적으로는 단순한 상업이라 하엿스니 동선의 목적에 대하야도 별로히 꺼릴바가 업섯슬 것이다.

제너럴 셔먼호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임시로 무기를 싣고 떠난 것이라는 오문환의 주장은 비약이다. 제너럴 셔먼호는 처음부터 전쟁을 위해 전선으로 건조된 범선, “순양함”으로 미해군 전함(the US navy gunship Princess Royal)으로 사용되다 민간에게 매각되어 선주 미국 상인 프레스톤(W. B. Preston)이 천진에 있는 영국 메도우 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국에 파송한 것이다.

2) 제너럴 셔먼호의 내한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제너럴 셔먼호에는 배 소유주 미국인 프레스톤(W. B. Preston)이 천진에 있는 영국의 메도우(Meadows) 상사와 함께 조선과의 통상의 길을 트기 위해 1866년 7월 하순 천진에 도착했다. 선적한 면포(cloth), 유리그릇(glass), 철판(tin plate), 자명종 등 많은 상품과 선장 미국인 페이지(Page), 화물 감독 영국인 선원 호가쓰(George Hogarth), 항해사 미국인 윌슨(Chief Mate Wilson), 그리고 로버트 토마스 등 5명의 서양인과 19명의 청나라와 말레이시아인이 승선하고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고종실록〉의 기록을 보니 자신들이 가지고 온 양포(洋布), 기명(器皿)등 이들 물품들을 한국의 “종이, 쌀, 금(金), 삼(蔘), 초피(貂皮) 등의 물품들과” 교환하기를 원했다. 오문환은 제너럴 셔먼호에 실은 물품 가운데 바늘도 있었는데 제너럴 셔먼호가 불탄 후 평양 대동강에는 몇해 동안 목욕을 하지 못할 만큼 바늘이 많았다고 말한다. 고무송도 사료를 통해 이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리피스는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왕릉 도굴과 관련 있다고 강하게 의심했지만 천진에 있는 메도우 회사가 1866년 10월 27일 벌링게임(Burlingame)에게 보낸 편지는 제너럴 셔먼호의 한국입국 목적은 상업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한국통사〉에서 한우근도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까지 올라와 요구한 것이 통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의 조선 입국 목적이 무역 거래가 목적이라는 사실은 8월 21일 신장포구에서 문정관에게 “서양 사람으로서 자기들은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밝힌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과의 무역거래를 틀 목적으로 제너럴 셔먼호가 내한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 탑승이 조선선교를 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주저하지 않고 승선한 것이다.

그러나 반 외국인 정서가 극에 달하고, 외국과 문호 개방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도 천주교와 불란서에 대한 반대 정서가 극심한 가운데, 중무장을 한 순양함을 타고 조선에 입국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건강을 위해 승선했다고는 하지만 선주가 배에 승선했다는 사실은 제너럴 셔먼호가 안전보다는 상업적 목적을 앞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견해 준다.

3) 토마스가 이 배에 승선한 목적이 무엇인가.

토마스의 2차 내한과 관련하여 확인해야 할 또 하나는 토마스가 제너럴 셔먼호에 어떤 자격으로 승선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셔먼호에 승선한 목적이 통역이라고 당시 토마스 관련 편지 문헌들에 등장하고 대부분의 2차 자료들이 이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한규무는 토마스가 통역이었다고 단정하지만 고종실록은 “최난헌이라는 사람은 중국말을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어서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이팔행이라는 사람한테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 대리점인 메도스 회사가 1866년 10월 27일 북경주재미국공사 버닝게임에게 보낸 보고서에 “선객”이라고 명시되었고, 박규수 문집과 기타 자료에도 그렇게 명시되었다. 오문환은 “도마스 목사가 통역이엿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 명확하다”고 주장한다. 오문환은 또한 토마스가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한 것이 항해사나 한국어 습득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선교사역을 위해서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는 항해사로 입국한 것도 한국어를 배우려고 입국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이 나라에 개신교 선교회를 세위기 위해 완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메도우 회사가 공식적으로 벌링게임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그리피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토마스가 한국어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필자가 볼 때 이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토마스의 셔먼호 탑승이 만약 단순히 한국어 습득을 목적으로 했다면 지푸에 있을 때 그곳으로 피신해온 조선 천주교인들을 통해 얼마든지 한국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무역 거래를 위해 단기간 입국하면서 얼마나 한국어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의문인데다 토마스가 1866년 1월 12일자 편지에서 1865년 9월 한국을 방문해 2개월 반 동안 머무는 동안 복음전도에 필요한 한국어를 충분히 습득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승선 목적이 통역과 안내자이지만 그를 다른 서양승무원들과 달리 선교사라고 보고되었고, 그의 1차 내한이나 활동 그리고 사고가 나기 전에 그가 남긴 여러 기록들을 종합할 때 그가 셔먼호에 승선한 것은 선교 목적이 주였다고 보아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면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1)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반포할 목적으로 여러 권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입국했다. (2) 문정관에서 야소교 전파에 대한 것을 무역과 함께 조선 입국 목적으로 밝히고 있다. (3) 1차 내한 때도 그랬지만 그는 2차 내한 때도 여러 권의 성경을 가지고 입국해서 성경을 반포했다. (4) 셔먼호 일반 승무원 19명 가운데는 중국인권서인도 포함되었다. (5) 그의 조선 선교활동을 뒷받침하는 사료들과 증언자들이 있다.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의 조선 입국 소식을 들었을 때 이것이야말로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토마스의 방문과 활동 그리고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않는 이들은 토마스와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목적과 행동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한데 토마스의 제너럴 셔먼호 승선 동기와 목적을 제너럴 셔먼호의 한국 방문 목적이나 동기와 동일시 할 수 없다. 또한 그가 쇄국정책 하에 이런 범선을 타고 조선에 입국한 것이 사려 깊지 못하고, 위험하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탑승 자체를 가지고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열정 자체를 폄하하거나 제국주의 침략에 편승하거나 수종든 침략자로 치부하는 듯한 평가는 비약이다. 기독교 역사는 복음의 열정에 불타는 사람들 가운데 종종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복음전파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전파가 금지된 쇄국통치 하에서 정부의 허락을 받고 합법적인 신분을 가지고 입국해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토마스가 합법적인 선교사 신분으로 선교사 전용 선박을 타고 합법적인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선교를 했어야 한다면, 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을 제기 한다면, 정부의 허락없이 불법으로 입국해 프랑스 군대가 침입해서라도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했던 프랑스 신부들, 프랑스 침략선의 노골적인 안내원을 자청했던 신부들이나 여기에 동조한 조선인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황사영의 백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또 프랑스 선교사들과 사제들이 실천에 옮겼던 것처럼 노골적인 침략적 제국주의적 패권주의가 19세기 천주교의 조선선교 과정에서 만연했기 때문이다. 1866년 7월 13일 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 대사 M. de Bellonet는 황태자 쿵(Prince Kung)에게 조선정부가 천주교 신부들과 신자들을 처형한 것을 묵과하지 말고 응징하라며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신부들과 지도자들의 제국주의적 사고는 한국의 주교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그리피스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과 그 밖의 아시아에서의 로마 가톨릭의 전도방식의 윤리적 약점이 드러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 회심자들은 교황의 교회 절대권만 아니라 하늘 대리자(the Vicar of Heaven)로서의 세상의 일시적 권세에 대한 교황의 주장의 정당성을 믿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신약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들과 의심할 바 없이 예수님의 말씀 곧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어지지 않게 하였으리라”는 사실에 무지했다. 한국인들은 교황제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후에 부르봉 통치 하에 강력한 유럽의 국가들에 의해 옹호되는 교황의 정치적 권세를 목도하면서 한국의 천주교인들은 자신들의 선생들의 윤리를 답습해 자신들의 조국에 배반자로 활약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정부 관리들을 속이고 자신들의 조국의 법률을 범했으며, 황사영의 백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천주교의 포교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군대가 무력으로 침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로마 가톨릭은 애국주의적 사고에 있어서 반역행위나 강도행위와 관련이 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프랑스 군대와 침략자의 선봉으로, 프랑스 사제들이 포함(gunboat)의 안내자 역할을 한 것은 단순히 상상이 아니라 차후의 설명이 보여주듯 엄격한 논리며 실제적 사실이다. 주교가 프랑스 전함에서 스파이와 안내자로 활동했고 신부들이 약탈을 위한 안내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들의 진술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들의 진술이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교황의 기독교[로마 가톨릭]의 이야기는 불가피하게 ’프랑스 원정‘이었다.

그리피스는 수많은 사료들을 동원하며 이 사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논증해 나갔다. 필자는 호교론적 시각을 가지고 천주교의 한국선교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객관적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최근 일부 진보주의 역사관을 가진 비평 학자들이 토마스에게 적용하는 동일한 평가 기준을 천주교 신부들과 조선 천주교인들의 죽음에는 달리 적용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토마스의 제 2차 조선입국과 관련하여 더 큰 문제는 지나칠 정도로 토마스가 한국선교를 낙관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순교하기 전 조선을 향해 떠나면서 런던 선교회에 보낸 1866년 8월 1일 지푸에서 보낸 마지막 편지에 짙게 담겨져 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을 하니 얼굴이 달아올라 희망에 부풉니다.” 토마스는 조선인들이 자신의 한국방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도 1차 방문 때 조선인들이 보여주었던 복음에 대한 반응과 환대 그리고 그가 얻은 여러 정보들을 통해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의 한국선교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첫째, 주지하듯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반 외국인 정서(anti-foreign feeling)가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둘째, 당시 조선에는 불란서 함대가 조선을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팽만했고, 조선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면 모두 불란서인으로 인식할 정도로 반불란서 정서가 충천했다. 셋째, 비록 상선이라고 하지만 중무장을 한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다.

토마스가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런던 선교회 총무 멀린스(J. Mullens)가 “무장한 선박을 타고 조선에 나간다니 이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요, 더욱이 당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곧 북경에 돌아와서 당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십시오”라고 경고성 편지를 서둘러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편지가 도착하기 전 토마스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을 향해 떠났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