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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선교사, 역사적 평가 3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3/14 [11:01]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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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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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용규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연구 동향과 사료문제를 통해 과연 그가 선교사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의 죽음에 대한 해석들과 그의 순교가 가져다 준 첫 영적인 결실들을 제시하고 있다. 

 III. 제너럴 셔먼호 입국과정과 관련 고종실록과 기타

국내 사료 문제

필자가 볼 때 토마스의 제 2차 내한 선교문제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제너럴 셔먼호의 입국과정에 대한 세밀한 일정 검토, 선교 관련기록, 그리고 사료의 객관적 검토이다. 그것은 입국 동기는 물론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고종실록〉에 있는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은 보고 형식이기 때문에 보고서가 그렇듯이 사건 발생 장소와 날자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었다. 〈고종실록〉에 있는 제너널 셔먼호 사건 기록에 담겨진 셔먼호 입국 과정을 먼저 면밀하게 검토한 후 선교관련기록과 〈고종실록〉의 사료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1. 고종실록의 제너럴 셔먼호 입국과정 문제

1866년 7월 29일 제너럴 셔먼호가 천진을 출발할 때 그 배에는 토마스, 프레스턴, 윌슨, 페이지 등 4명의 외국인들만 승선했다. 그러다 지푸에 도착하였을 때 영국인 호가스(Hogarth)를 화물관리인으로 그리고 메도우 회사 소속 한 관동사람 금전교환인(a Cantonese schroff)을 승선시켰다. 이 배에는 북경의 중국기독청년 조능봉도 승선했다. 1866년 8월 9일[음력 7월 1일] 지푸를 떠날 때 제너럴 셔먼호에는 5명의 외국인들과 중국인[청나라]과 말레이시아인 19명등 총 24명이 승선했다. 1866년 8월 9일[음 7월1일]부터 8월 16[음 7월 7일]일까지의 1주일 간의 일정을 재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이 기간 제너럴 셔먼호는 백령도, 초도곶, 석도를 거쳐 대동강을 향해 항해를 계속했다. 민경배는 8월 16일[음 7.7] 셔먼호가 평남 용강현 다미면 영주포에 도착했다고 기록하나 고종실록에는 이 부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1)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8일[8월 17일] -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고종실록〉 3권 음력 1866년 음력 7월 15일[양력 8월 24일]에 황주목사 정대식이 올린 보고에 의하면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음력 7월 8일[8월 17]일에 대동강 어귀의 황해도 황주목(黃州牧) 삼전방(三田坊) 송산리(松山里)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제너럴 셔먼호가 관리들에 의해 처음으로 목격된 것이 바로 이날이었다.

인시는 새벽 3시 30분에서 5시 30분까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음력 7월 8일 [8월 17일] 이른 새벽 이양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나자 황주목사 정대식이 그곳으로 황급히 달려가 승선해 글로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를 물었다. 이 때 제너럴 셔먼호는 백령도, 초도곶, 석도를 거쳐 송산리 앞바다까지 항해했다는 사실과 배와 승객들이 어느 국가 출신인지를 밝혔다. “우리들은 서양의 세 나라 사람들입니다. 윗자리에 앉은 토마스 [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와 호가스[何噶特]는 다 같이 영국 사람이며, 프레스톤[普來屯]은 미국 사람이며, 뻬지[巴使]는 덴마크 사람입니다.” 〈고종실록〉에는 이들 4명이 셔먼호에 혹 기대어 앉거나 혹은 배의 고물에 앉은 후에 문정관들에게 함께 앉자고 제안하였다고 한다. 셔먼호에는 다섯 명의 외국인이 탔는데 4명만 기록하고 있다. 윌슨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문정관이 배에 오른 것을 보면 셔먼호가 정박했고, 한국인들과의 첫 만남을 갖는 공식적인 자리라 다 모였을 텐데 왜 1명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또 하나 〈고종실록〉의 기록에서 의문이 가는 것은 서면으로 문정을 했다고 하는데 “뻬지”를 덴마크 사람이라고 기록한 부분이다. 분명 프레스톤과 페이지, 그리고 윌슨은 미국 사람이고 토마스와 호가스는 영국 사람이다. 덴마크 사람은 외국인 다섯 명 가운데 1명도 없다. 그런데 〈고종실록〉에는 페이지가 미국 사람이 아닌 덴마크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고, 덴마크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고 답한 기록도 등장한다. 국가간의 만남에서 국적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고종실록〉은 가장 기본적인 국적 기록조차 정확하지 않다. 공식적인 만남 첫날 문정기록부터 〈고종실록〉의 기록상의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고종실록〉은 이들 서양인의 생김새를 기록하면서도 4명만 언급하고 있다. 토마스 그리고 동행한 인물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거의 모두가 움푹 들어간 눈, 높이 솟은 콧마루, 파란 눈, 노란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어, 확실히 서양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라는 사람은 중국말을 잘 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도 조금 알고 있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어서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이 팔행(李八行)이라는 사람한테 맡겼는데, 배 안의 일에 대해서는 그가 모두 주관하였습니다. 이른바 이팔행(李八行)과 조반량(趙半良)은 중국인들로서 영국인이 데려다가 자기 막료로 삼은 사람들이었으며 그 나머지 24명(名)은 혹 태국인이거나 광동(廣東) 상해현(上海縣) 사람들로서 길안내를 하거나 품팔이를 하거나 뱃사람 일을 하거나 하였는데, 모두가 종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물으려고 하니『우리 배 안의 일과 관계되는 것이지 당신들과는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

“최난헌은 나이가 36살, 키는 7척(尺) 5촌(寸), 얼굴빛은 검붉고, 머리칼은 노란 곱슬머리이고, 수염은 검다. 옷차림은 회색 모자를 썼고, 검은 색과 흰 색의 언급되고 있다. 반점이 있는 융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었으며, 검은 색 목화(木靴)를 신었습니다. 허리 에 혁대와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문직(文職)의 4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습니다. 호가스는 나이가 37살, 키는 7척, 얼굴빛은 검붉으며, 머리칼은 노랗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났습니다. 옷차림은 흰 서양 천으로 감싼 모자를 썼으며, 누런색의 견사(繭絲)로 만든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으며, 맨발에 등(藤) 줄기로 만든 신을 신었습니다. 혁대에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서 영국인이었다.

프레스톤은 나이가 48살, 키는 7척 5촌, 얼굴빛은 검붉으며, 머리칼은 노란곱슬머리였으며, 흰 수염이 길게 났습니다. 옷차림은 검은색의 모자를 썼고, 흰빛의 서양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를 입었으며, 누런색의 견사로 만든 홑바지를 입고, 색실로 섞어 짜서 만든 신을 신었습니다. 혁대에는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무직(武職)의 1품 관리로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뻬지는 나이가 45살, 키는 7척 5촌, 얼굴빛은 붉고, 수염과 머리칼은 노란 곱슬이었습니다. 옷차림은 검은색 비단으로 감싼 모자를 쓰고, 자주색 융으로 만든 저고리와 흰 무명으로 만든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검은색 가죽신을 신고, 혁대에는 자그마한 서양식 총과 환도를 찼습니다. 그는 덴마크 사람이었습니다. 이파행(李八行)의 나이는 30살이었고, 조반량(趙半良)의 나이는 28살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키가 7척이었고, 얼굴빛은 검붉고, 머리는 땋아 올렸고, 수염은 없었습니다. 옷차림은 흰 무명으로 만든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고, 검푸른 색의 삼승포(三升布)로 만든 신을 신었는데, 그들은 다 같이 청나라 사람이었습니다. 24명의 이름과 나이에 대하여 물어보니 토마스가 하인으로 범칭하면서 자세히 묻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와 옷차림, 머리칼과 수염은 모두 청나라 사람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록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첫째, 최난헌이 중국어에 대해서는 잘 구사를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말도 조금 알고 있는 정도여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도 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있어서 충분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팔행이 “전적으로” 의사소통의 책임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최난헌이 토마스와 동일 인물이라면 그가 통역의 자격으로 제너널 셔먼호에 승선해 입국하고 활동했다는 한규무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종실록〉에서는 이팔행을 두 번이나 중국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앞으로 학자들이 이팔행이 누군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첫문정을 기록한 〈고종실록〉에는 청국인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나 후에 중국예부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 내막을 알리면서는 11월 5일자 〈고종실록〉은 그를 덴마크 인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청국인과 서양 덴마크 인은 모습부터 다르다. 어떻게 한 곳에서는 청국인으로 다른 곳에서는 덴마크 인으로 기록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둘째, 배에 승선한 사람들이 몇 명이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는 4명이고, 막료로 삼은 이팔행과 조반량 그리고 그 외 길 안내, 품팔이, 뱃사람 일을 위해 승선한 “종복” 24명으로 그들은 모두 태국인이거나 광동 상해현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했다. 〈고종실록〉에는 이날 제너럴 셔먼호 탑승자들은 입국 목적이 무엇인지를 문정관에게 선명하게 밝혔다.

『세 나라 사람들은 다 같이 장사를 하고 있으며, 이번 7월 1일 산동(山東)에서 출발하여 백령도(白翎島), 초도곶(椒島串), 석도(席島)를 거쳐 방향을 바꾸어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 배가 모양은 전선(戰船) 같지만 실은 통상(通商)을 하려고 한다. 귀국(歸國)의 종이, 쌀, 금(金), 삼(蔘), 초피(貂皮) 등의 물품을 우리들이 가지고 온 양포(洋布), 기명(器皿)들과 바꾸면 서로 해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을 것이다. 물품 교환이 일찍 끝나면 곧 평양에서부터 뱃머리를 돌리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비록 서울로 가더라도 통상한 뒤에야 돌아가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묻기를, 『이미 평양에 가서 통상을 하겠다고 하였는데 거기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그에 호응하여 교역을 하는 자가 있는가?』라고 하니,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위 기록은 제너럴 셔먼호에 대해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제너럴 셔먼호가 음력 7월 1일[8월 10일] 산동성을 출발해서 백령도 초도곶 석도를 거쳐 음 7월 8일[8월 17일] 송산리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제너널 셔먼호가 보통 상선과 달리 “모양은 전선과 같지만” 상선이며 이들의 입국 목적이 통상이며, 목적지가 평양이라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가 침략을 목적으로 입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실제로 제너럴 셔먼호 탑승 승무원들도 군인들도 아니고 침략을 목적으로 해서 모집한 이들도 아니었다. 셋째, 물물교환이 끝나면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평양에서 통상을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서울로 가서라도 통상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입국의 목적이 통상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먼 바다에 와서 정박한다면 혹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당신들은 남의 나라 앞바다에까지 넘어들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본래부터 국법(國法)으로 금지되어 있는 만큼 앞으로 전진해갈 수 없다.” 이에 제너럴 셔먼호는 “누가 감히 우리를 막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이내 “우리는 곧바로 가려고 한다. 만약 서풍을 만나면 바람을 따라 곧 떠나겠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종실록〉에 실린 보고서에는 제너럴 셔먼호가 어떤 외관을 갖고 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배의 모양은 길이가 18장(丈), 넓이가 5장, 높이가 3장이었고, 돛대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높이가 15장, 하나는 높이가 13장이었으며, 굵기는 세 아름 정도 되었습니다. 두 개의 큰 돛은 흰색이었으며, 돛대의 밧줄에는 또 작은 돛 두 개를 얽어매었는데 역시 흰색이었고, 숙마(熟麻) 줄을 돛대와 돛 좌우에 각각 12줄씩 늘어뜨려 놓았습니다. 나머지 배에서 사용 하는 잡다한 물건들에 대해서 모두 물어봤으나 저들이 글로 써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잡다한 물품들과 기계들, 각 사람들의 소지품 외에도 배 안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이 많았으나 보여주지도 않았고 또 자세히 대답해 주지도 않았으므로 그 수량을 맞추어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큰 배에 딸려 있는 작은 배는 길이가 3파(把), 넓이는 2파였으며 푸른색으로 칠하였는데, 돛대와 돛은 없었습니다.”

“배의 모양과 규격을 보면, 안은 하얗게 칠하고 밖은 검게 칠하였는데 그 위에 옻칠을 하듯이 기름을 발랐으며 위에는 흰 가루가 있었습니다. 사면을 판자로 만든 집이 두 칸 있었는데, 한 곳에는 관인(官人)들이 거주하고 한 곳은 종복들 이 거주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판옥 벽면에 창문이 있었는데, 모두 유리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두 개의 돛대는 모 두 소나무로 만들었는데, 잘 다듬고 그 위에 기름칠을 하였으며, 배의 위에는 백양목의 네모진 깃발을 달아 세웠고, 돛 은 흰 색의 올이 굵은 서양 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좌우의 두 켠에 각각 대포(大砲) 1문씩을 설치하였으며, 하가(下架)와 목륜(木輪) 위에는 철통을 놓았는데 윗부분은 좁고 밑이 넓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시범적으로 쏘아보였는데, 그 소리가 마치 요란한 천둥이 치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의 이목을 몹시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 밖에 또한 밤에 순찰할 때에 메는 장총이 3자루 있었는데, 총구멍 끝머리에 1척(尺)쯤 되는 칼이 꽂혀 있었습니다. 조총은 차고 다니는 자그마한 것과 메고 다니는 큼직한 것 등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환도(環刀)는 서양인 4명이 각각 한 자루씩 찼는데, 모두 번쩍번쩍 빛이 났습니다. 방안에는 책과 그림책, 금(琴)과 종(鍾), 고약(膏藥) 등 잡다한 물건 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한번 죽 훑어보아서는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종복들이 거처하는 방을 보려고 하자, 예의상 가서 볼 필요가 없다고 하며 막고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배 밑에는 작은 배를 매어 놓았는데, 우리나라의 작은 고깃배 모양이었으며 푸른색이었습니다. 거기에 실은 물품들은 양목 (洋木) 등 무역할 물품들이라고 말하였으나, 배 안은 보지 못하게 하여 물품을 실은 실태와 그 수량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었습니다.”

〈고종실록〉은 제너럴 셔먼호가 어떤 모양을 갖추었는지, 얼마의 규모인지를 밝히고 있다. 돛대가 둘이고, 길이가 18자[54.54m], 넓이가 5장[15.15m], 그리고 높이가 3장[9.09m]이었다. 게다가 제너럴 셔먼호에는 상당한 무기들이 탑재해 있었다. 무엇보다 대포가 장착되었다.90 이날 문정관에게 셔먼호는 “청하건대 당신들이 사람을 보내서 우리에게 대미(大米), 우육(牛肉), 닭, 청채(菁菜), 시목(柴木) 등의 물품을 준다면 양포(洋布)로 답례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문정관은 어쩌다 표류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우라면 고려할 수 있지만 “서양인들이 함부로 우리나라 앞바다에까지 넘어 들어온 것은 뜻밖의 일이라 또한 아랫사람으로서 마음대로 처리하기에 곤란한 점이 있었다.”고 답했다. 식량을 요구하자 “이처럼 외진 마을에서 갑자기 그런 물품을 마련하는 것은 어렵고 또 순풍을 기다려서 곧장 출발한다는 것은 더욱 시행하기 어려운 일이다.”고 대답했다. 최난헌이 제공해줄 의사가 있다면 줄 수 있을텐데 의사가 없는 것 같다며 성낸 표정으로 문정을 하던 종잇장을 접어서 품에 넣고 떠나자고 재촉하자 문정관은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배에서 곧 마련해 보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최난헌이 “화를 풀고 기뻐하면서 문정(問情)을 하던 종잇장을 꺼내주고는 다시 물품을 보내주면 틀림없이 답례하겠다.”고 말하였다. 문정관은 “꼭 답례할 것까지는 없다고 말하고, 대미 1석, 우육 30근, 계자 60알, 청채 20묶음, 시목 20단을 헤아려서 들여보냈다.” 지방관리로서는 최선을 다해 제너럴 셔먼호에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이다.

(2)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9일(양력 8월 18일) - 송산리 출발〈고종실록〉 음력 7월 15일[8월 24일]자 황주 목사 정대식이 올린 첩보 기록에 의하면 음 7월 9일[8월 18일] 오후 3시 30분과 5시 30분 사이 즉 신시에 제너널 셔먼호는 송산리를 출발해 평양으로 떠나갔다. 황주 목사 정대식은 쌀과 고기 등 물품을 배에 싣고 제너럴 셔먼호에 가서 물품 제공의사를 전달했다.

물품 제공 이 면에는 동정을 탐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나자 그 지역 지방 관리들은 각 고을에 이양선의 소식을 전하고 감시와 방어를 할 것을 공문으로 전달했다.

(3)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9일 저녁~11일[8월 18~20일] 오후 - 평양 초리방 사포구 음력 7월 9일 오후 송산리를 출발한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고종실록〉은 7월 9일 저녁부터 7월 11일 술시(저녁 7시 30분-9시 30분)이전까지 2일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제너널 셔먼호가 7월 11일에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정박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아마도 셔먼호는 음력 7월 9일 저녁에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도착하여 그곳에 정박하여 7월 11일 오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셔먼호가 어느 다른 곳에 정박했다면 분명히 보고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1~12일 [8월 20~21일] - 평양부 신장포구〈고종실록〉의 1866년 음력 7월 18일자[양력 8월 27일] 평양 병사 이용상이 평양 서윤 신태정에게 한 보고에 의하면 이용상과 신태정이 음력 7월 11일[8월 20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 사이에 확인하니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정박해 있던 제너럴 셔먼호는평양부 신장포구로 옮긴 상태였다. 이용상과 신태정은 너무 시간이 깊어 그 다음날 음 7월 12일[8월 21일] 오전 7시 30분-9시 30분에 배에 올라 문정을 했을 때 제너럴 셔먼호는 이렇게 답변했다:

“이양선(異樣船) 1척 이 평양 경내의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11일 술시(戌時) 쯤에 그들의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에 가보니, 이미 본 평양부의 신장 포구(新場浦口)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밤이 깊었기 때문에 12일 진시(辰時)에 그곳에 달려가서 문정(問情)을 하니, 서양 사람으로서 자기들은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역하는 한 가지 문제로 말하면 법적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지방관 이 마음대로 허가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7월 12일[8월 21일] 유시(酉時)에 그 나라 사람 6명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물깊이를 탐지하기 위해서 상류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18일) 유시는 저녁 5시 30분에서 7시 30분 사이를 가리킨다.”

여기서도 제너럴 셔먼호는 통상과 무역이 입국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재차밝혔다. 중무장을 한 상선으로 계속해서 의심의 눈총을 받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셔먼호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입국 목적이 통상과 무역이라는 사실을 전달했다. 우리는 〈고종실록〉에 이 사실이 분명히 명기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과의 무역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고, 게다가 지방관리가 마음대로 허가해 줄 수 있는 사항은 아니었다.

(5)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3일[8월 22일] - 평양 만경대 아래 두로도

“그리고 7월 13일 인시(寅時)에는 배를 출발시켜 본 평양부 만경대(萬景臺) 아래 두로도(豆老島) 앞에까지 다다랐는데 그대로 그곳에 정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떠나고 머무는 것과 일의 경위에 대해서는 계속 탐지하여 치보(馳報)를 올리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제네럴 셔먼호의 음력 7월 13일의 행동을 잘 보여준다. 셔먼호는 전날 6명이 물깊이를 탐지하기 위해 상류로 올라갔다 날이 저물어 돌아와서는 그 다음날 음력 7월 13일[8월 22일] 새벽 인시[새벽 3시 30분-5시 30분]에 이동을 해서 만경대 아래 두로도에 정박했다. 두로도에서 셔먼호가 며칠을 정박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신태정이 음력 7월 19일에 가서야 이양선 한 척이 한사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고 보고한 것을 보면, 제너널 셔먼호는 만경대 아래 두로도 앞에 적어도 5일 이상을 정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고종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문환은 이 기간 목격자들을 인용하여 토마스가 성경과 기독교 문서를 전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측 다른 문헌에 이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그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8일 [8월 27일]-평양 양각도

[고종실록] 1866년 음력 7월 19일 [8월 28일]-평양 황강정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2일]

7월 13일 새벽 만경대 아래 두로도로 이동한 후에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에 대해 〈고종실록〉이 다시 언급한 것은 5일이 지난 음력 7월 18일의 행적이다.

〈고종실록〉 음력 7월 22일[양력 8월 31일] 신태정의 보고에는 제너럴 셔먼호 관련 기록이 담겨져 있다.

평안 감사(平壤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방금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이 이달 19일 술시(戌時)에 치보(馳報)한 것을 보니, ‘큰 이양선(異樣船) 1 척이 한사정(閒似亭)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으며, 어제[7월 18일] 유시(酉時)[17:30∼19: 30] 쯤에는 그들 6명(鳴)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점점 위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에 순영중군(巡營中軍)은 그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타고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갑자기 오더니 중군이 타고 있던 배를 끌어갔고 중군을 그들의 배 안에 억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윤(庶尹)이 그들의 배 옆에 가서 밤새도록 효유(曉諭)하였지만, 끝내 돌려보내 주지 않았습니다. 그[다음]날[19일] 사시(巳時)[9: 30∼11:30] 쯤에 그들의 배가 또 출발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대완구(大碗口)와 조총을 마구 쏘아댔으며 황강정(黃江亭) 앞에 이르러 그곳에 정박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 5명은 작은 푸른빛 배를 타고 물의 깊이를 탐지하기 위하여 오탄(烏灘) 일대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온 성안의 백성들이 강변에 모여들어 우리 중군을 돌려보내 달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들이 성안에 들어가서 분명히 알려주겠다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돌을 마구 던졌으며, 장교와 나졸들이 혹 활을 쏘아대기도 하고 혹은 총을 쏘아대기도 하며 여러 모로 위세를 보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도망쳐 돌아갔으며 그 큰 배는 이에 양각도(羊角島) 하단(下端)으로 물러가서 정박하였습니다. 신시(申時) 쯤에 퇴직한 장교 박춘권(朴春權)이 앞장서서 배를 타고 그들의 배에 돌진해 들어가 중군을 구원해가지고 돌아왔는데, 중군이 찼던 인장이 물에 떨어져 분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군이 잡혀갈 때 따라간 시종 유순원(兪淳遠) 과 통인(通引) 박치영(朴致永)은 그들이 배에서 강물 속에 던져 넣은 후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군이 자기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수치를 끼친 데 대해서는 더 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선 파출(罷黜)시키고 그의 죄상에 대해서는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중군(中軍)이 그들 배에 붙잡혀가 곤욕을 당한 것은 그 잘못한 바를 논하여 마땅히 엄하게 감처(勘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뜻밖에 벌어져 미처 손 쓸 수가 없었으니, 이는 우직하고 지략이 부족한 소치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어떻게 깊이 책망할 것인가? 그러나 수치를 끼친 것은 크니, 그 벼슬에서 체차시키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양주태(梁柱台)를 차하(差下)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되, 조정에 사직하는 것은 그만두고 역마(驛馬)를 주어 밤을 새워 내려가게 하라. 퇴직 장교 박춘권이 앞장서서 있는 힘을 다하여 그들의 배에 뛰어들어가 중군을 구출해서 돌아온 것으로 말하면, 그 공로가 가볍지 않으며 매우 가상(嘉尙)한 일이다. 그런 만큼 은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어서 특별히 상가(賞加)하니 오 위장(五衛將)을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에 수록된 이날 기록을 시간의 선후관계를 고려해가면서 면밀하게 검토하다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음력 7월 18일 제너럴 셔먼호의 몇몇 승무원들이 셔먼호를 감시하던 중군이 타고 있던 배를 끌고 가서 그를 셔먼호에 억류했다. 둘째, 같은 날 서윤 김태정이 제너럴 셔먼호에 가서 중군을 풀어달라고 밤새 간청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 셋째, 그 다음날 음력 7월 19일 사시에 제너럴 셔먼호는 황강정으로 가면서 대완구와 조총을 마구 쏘았다. 넷째, 같은날 음력 7월 19일 황강정에 정박한 후 5명이 푸른 배를 타고 물의 깊이를 탐지하기 위해 오탄 일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 강변에 모인 온 성안의 백성들이 “중군을 돌려달라”고 외쳤고, 이 때 제너럴 셔먼호는 성안에 들어가서 정확히 답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민관들이 돌, 화살,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다섯째, 셔먼호 일행 중 일부가 제너럴 셔먼호로 돌아갔고 이어 셔먼호가 음력 7월 19일 양각도 하단으로 이동했다. 여섯째, 바로 그날 음력 7월 19일 양각도 하단에 정박해 있을 때 박춘권이 신시에 제너럴 셔먼호에 올라 중군을 구출해 왔다.

여기 중군이 누구인지 다른 기록은 이익현이라고 밝히고 있다. 중군 이익현은 제너럴 셔먼호에서 이틀을 볼모로 잡혀 있다 구출된 셈이다. 중군 이익현을 볼모로 잡고 간청하는데도 불구하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를 볼모로 성안에 들어가 협상하겠다는 것은 민관군을 지극히 자극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장교와 나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활을 쏘고 총을 쏘며 맞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 어떻게 이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남긴 자료가 전혀 없어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이익현을 볼모로 가두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임스 게일이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1895년에 기술한 “제너럴 셔먼호 운명”(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에는 조선군이 무장 태세를 갖추는 것을 보고 경계해서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패강록〉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협의 배가 중군 이현익의 배보다 앞서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했을 때 소청선이 이들을 납치하여 휴대한 공식문서를 탈취해 번역하니 셔먼호 모든 승무원들을 평양으로 유인 상륙시켜 몰살시키라는 계획을 탐지하고는 승무원들이 놀라 순시대장 이익현을 억류해 셔먼호에 가두게 되었다. 〈평양지〉에는 제너럴 셔먼호에서 글을 보내 중군과 상의할 것이 있다고 유인한 뒤에 억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밀톤(Floyd E. Hamilton)의 “The First Protestant Martyr in Korea”에 의하면 제너럴 셔먼호를 방문한 중군 이현익의 인신을 탈취하고 나서 반환을 요구하자 그를 억류했다. 〈통문관지〉는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들이 중군 이익현을 풀어주는 대신 쌀과 금, 은, 인삼 일천 자루를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오문환은 평양감사 박규수와의 협상을 요구하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말한다. 이 때 어떤 기록에 의하면 선주 프레스톤이 이익현을 계속 볼모로 잡아두려하자 토마스가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국내 각각의 문헌들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국내 자료들이 사건 기술에서 통일성이 없기는 박춘권의 잠입과 이익현의 구출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고종실록〉은 위 기록에 있듯이 제너널 셔먼호가 양각도에 정박해 있을 때 박춘권이 잠입해 구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패강록〉에는 퇴교 박춘권이 중군의 아들로 변장해서 셔먼호에 올라 강변의 군민들이 공격을 하자 셔먼호 승무원들이 중군에게 공격을 중지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신인을 돌려받은 뒤에 중군 이익현이 박춘권이 대기시켜 놓은 배로 뛰어 내려 탈출했다고 기록한다. 〈평양지〉에 따르면 박춘권이 제너널 셔먼호에 접근하여 장문의 편지를 던진 뒤 그 편지를 선원들이 읽는 사이 중군을 구출했다. 다른 기록과 달리 게일의 “제너럴 셔면호의 운명”은 박춘권이 먼저 화공작전을 전개했고, 혼란한 틈을 타서 박춘권이 제너럴 셔먼호에 잠입하여 중군 이익현을 구출했다고 말한다.

신인을 잃어버린 것도 기록에 따라 상이하다. 〈고종실록〉은 중군이 탈출할 때 물에 빠뜨려 분실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패강록〉은 중군이 가지고 탈출한 것으로 그리고 〈평양지〉는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화공이 시작되기 전에 토마스가 관가에 찾아와 반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박춘권이 이익현을 구출하는 구출과정, 신인의 분실과 취득에 대해서도 국내 사료들이 약간씩 차이가 있고, 어떤 자료는 일어난 사건의 순서마저 다르게 기록되었다. 셔먼호 관련 국내 사료들 대부분이 다량의 출판이 아닌 개인들이 친필로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고 소문을 들은 정보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사건의 순서가 바뀌고 사건의 묘사와 기술이 서로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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