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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폼드뉴스 5분 인터뷰] 김만규 목사-'회고록'
‘성역 70년 회고록’, ‘한국 최대 교단의 역사기행’
기사입력: 2018/05/11 [18:06]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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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규 목사가 성역 70년 회고록을 출판했다. ‘한국 최대 교단의 역사기행이라는 부재를 달은 본서는 그의 목회인생을 회고한 회고록이다.

 

그는 193541. 경북 대구시 중구 덕산동에서 출생하여 1944년 대구봉산교회(당시 최종철 목사 담임) 최진영 장로의 인도로 유년주일학교 학생이 되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신앙에 입문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 해인 1949419일 제35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당회 최재화 총회장) 현장인 대구제일교회에서 중학교 2학년 어린 나이로 난장판이 된 총회 현장을 수습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이 성역의 입문으로 보아 그로부터 70년 성역이 산출되었다.

▲     © 리폼드뉴스

김 목사는 1997815일부터 기독신보를 발행하는 발행이기도 하다.

 

저자의 회고록 중 1980년대 정화파와 총화파에 대한 그의 생생한 기록을 여기에 옮겨본다.

 

“3천 원과 5천 원으로 5만 원을 대항할 수 없었다.”

 

70회 총회에서 18년간 이영수 목사 체제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새로운 총회 질서를 외치는 정화가 총회를 장악하였다. 정화파의 리더는 김현중 목사와 이봉학 목사, 권봉태 목사, 한명수 목사 등이 주축이 되었다. 여기에 비해 반 정화파에는 한석지 목사와 유인식 목사, 이영희 목사와 필자가 동참하였다.

 

정화파는 제일 먼저 총신대학교의 재단이사회 이사들을 전원 해임하고, 그 다음 기독신문사를 점령했다. 그런 후 김현중의 지시하에 이영수 목사를 배임횡령으로 검차에 고소하고, 기독신보(당시 교단지) 1면에 이영수, 김만규, 홍태우 목사 등은 면직이라고 기사를 게재하고는 부정 처리를 위한 전권위원회를 구성하여 김만규를 면직하려고 시도하였다.

 

죄목은 김만규는 빨갱이, 부산 남포동 사창가의 포주 앞잡이, 깡패 폭력배였다. 이것은 탁명환의 <현대종교>에 개재된 기사 내용이었다. 필자는 전권위원장 권봉태 목사를 상대로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즉각 동부지방검찰청에 고소를 제기하였다. 이때 김현중 목사가 두 번 검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바 전혀 사실무근인데 탁명환의 현대종교를 근거하였다고 하여 무고죄가 성립이 되었다.

 

김현중은 필자에게 두 손으로 빌면서 잘못되었다고 용서를 구하였다. 사실 김현중은 이영수 목사의 최측근이면서도 항상 이영수 목사를 죽이기 위해 허점을 캐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김현중이 필자에게 급히 서울에서 만나자고 제의하여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가 시청 건너편에 있는 외교구락부의 양식당에서 만났다. 필자에게 분에 넘치는 대접을 하고는 이영수 목사의 비행 13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사실 털어서 먼저 안 난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사람마다 허점이나 비행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뜻을 같이한 동지에 대한 비행을 말할 수는 없었다. 김현중은 필자에게 두툼한 여비(20만 원)를 주면서 집에 가서 생각하고 답을 달라고 하였다.

 

며칠 후 김현중은 어때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 해 달라고 하였다. 필자는 김현중에게 목사님, 저에게 대접한 것은 감사한데 밥 주고 돈 주었다고 사람을 팔수는 없습니다. 목사님이 준 여비는 사용하였으니 돈을 돌려줄 수 없게 되었다.”고 한 일이 있었다. 김현중은 필자가 이영수 목사와 가장 가깝게 있으니 비행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70회 총회) 이영수 목사 체제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4인방, 5인방은 숨어버리고 이영수 목사에게 정치자금을 공급하던 장로들도 다 흩어져버렸다. 필자는 이것은 아니다. 숨고 뒤로 도망갈 것이 아니라 정화와 대결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다고 생각하고 총화파를 구성하고 <총회소식>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다.

 

사장에 한석지 목사, 주필에 이영희 목사, 편집국장에 필자가 맡고, 손경수 장로와 류성고 장로의 도움을 구하여 주간지로 출발하였다. 첫 호에 이단 축도는 안 된다라는 특집기사를 썼다. 당시 김현중 목사는 축도할 때, 어려운 한문을 써가면서 족지족혈이 어떠하며라고 하다가 주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를 찾다가 성령은 빼고 축원합니다라고 축도를 하곤 했다.

 

그 다음호에는 정화파는 정화조다라는 제목으로 정화파 쪽의 잘못된 것을 기사화하였다. 결국 정화가 형사 고소하여 사장과 주필이 고소를 당하였다. 그 후 총화파의 재건을 위해 사람을 모았다. 서울권, 충청권, 호남권, 대구경북권, 부산경남권에 목사 1인과 장로 1인을 책임자로 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지역별 총화파의 단합대회를 가졌다.

 

70회 총회에서 총화가 실패했으나 지역별로 단합한 결과 능히 제71회 총회는 다시 교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다. 그때 차기 총회장은 유인식 목사를, 장로부총회장은 정동원 장로를 선임키로 하고 작업을 하여 전국적으로 크게 호응을 받았다.

 

총회를 이틀 앞두고 서울의 63빌딩에서 총화파 전국 단합대회를 가졌다. 이때 필자는 경리담당인 전주의 최00 장로에게 식사는 3만 원으로 교통비는 5만 원을 준비하라고 하였다(그때는 총화파 복구를 위해 몇몇 장로들이 거금을 염출하여 그만한 재력을 확보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국단합대회 때 식사가 도시락 3천 원짜리였고, 여비가 5천 원씩이었다. 필자는 이건 안 된다. 지금이라도 여비를 보충하라고 하였으나 보충하지 아니했다. 그런데도 단합대회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참석자 500여 명을 총회 현장인 승동교회로 옮겨 총회 장소에서 기도회를 하자고 제의하고 승동교회로 옮겨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날 총회 현장에서 할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파한 뒤에 각각 숙소로 돌아갔다. 그때 우리 모임을 시정 시켜보고 따르던 정화파의 중요 참모인 서기행 목사와 윤재동, 문원채 장로 등이 승동교회 예배당 문에서 나오는 총대들에게 봉투를 나누어 주었다.

 

봉투에는 5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총화로 다졌고 또 기도까지 했으니 제71회 총회는 정화를 꺾고 총화로 만회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투표를 한 결과 총화파는 한 사람도 임원을 내지 못하고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

 

패인이 무엇인가 분석하니 첫째, 밥과 여비에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필자는 교직자(목사, 장로)에게조차도 양심의 논리가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 양심이 뭐냐하면 양심(兩心) 곧 더러운 기회주의적인 마음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3천 원짜리 밥과 5만 원짜리 봉투를 받은 이들에게 5만 원의 봉투가 들어가니 돈의 숫자가 양심을 빼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놈의 양심, 필자는 전에도 지금도 선거에 돈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돈을 쓰되, 돈의 한정선을 정하고 투명성 있게 돈을 주자는 것이다. 벼슬을 하는 사람, 단체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면 자기의 것으로 공공연하게 합리적으로 약한 사람에게 돈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총회와 정화의 차이점은 결국 돈이었다. 금권선거라고 규탄하지 말고 동일한 대가를 공식으로 나누어주는 것도 민주주의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총회 역사에서 금권선거의 첫 케이스가 제71회 총회로 기록된다. 이 금권은 제83회 총회 때 절정에 달하여 옥00 목사는 “20억 원을 썼다고 발언하고 김윤배 목사는 거간꾼의 돈 노름이 총회를 망친다.”고 외쳤다.

 

한때 총회 선거제도가 제비뽑기로만 이루어진 적이 있다. 그때도 돈이 투자되었다. 그래서 총회발전기금이라는 것을 1억 원 가깝게 거출하였다. 그렇게 하여 임원이 된 이들은 총회의 권리와 돈을 쓰는 데 특권층을 이루었다.

 

총대들은 총회돈은 임자가 없다.’, ‘총회돈은 임원들이 쓰는 돈이지 다른 사람의 돈이 아니다.’고들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선거제도의 필수 요건은 공정한 선거와 투명한 자금관리이다. 이 두 요소야말로 새롭게 구성되는 총회임원회의 정직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