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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인쇄술과 종교개혁 1
정원래(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5/17 [12:53]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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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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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원래 박사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저자는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1 들어가며

2013년 12월 3일 독일 비텐베르크의 루터하우스에서 토마스 카우프만(Thomas Kaufmann)은 “Ohne Buchdruck keine Reformation?”(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도 없었을까?)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는 질문 중의 하나가, 출판 인쇄술이 종교개혁의 사상을 이끌어오고, 나아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는가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당사자들과 해석자들 역시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매우 강조한다. 예를 들면, 루터는 한 탁상담화(Tischreden)에서 인쇄술을 ‘하나님의 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로 설명한다.

“인쇄업의 커다란 호의에 대하서는 말로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거룩한 성경이 모든 언어와 방언으로 열려졌으며, 보급되었다. 이를 통해서 모두가 예술과 학문을 보유하고, 증가시키며,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복음의 일을 전파시키기 위한‘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 (summum et postremum donum)이다. 그것은 세상의 멸망에 앞선 마지막 불꽃이다....”

이처럼 루터는 종교개혁의 사상의 전파에 있어서 출판인쇄술이 지닌 역할이 매우 컸음을 설명한다. 당시 전단지, 설교텍스트, 교회찬송 그리고 성경 번역본 등 루터의 신학적 주장-종교개혁의 정신-이 전 지역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인쇄술이었다. 종교개혁시기에 인쇄술이 낳은 결과에 대한 평가에서, 필립 샤프는 “헬라어 신약성경과 인쇄술-인쇄술의 발명은 역사의 모든 시대를 둘로 나누되, 모든 시대를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었다-은 마틴 루터를 위해 섭리로써 준비된 두 가지 주된 도구들이었다.” 고 주장하였다.

19세기의 헨리 스티븐슨(Henry Stevens)은 성경의 보급과 인쇄술의 보급이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설명하며, 인쇄술은 성경의 인쇄로 시작되었고, 성경의 인쇄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의 세속사는 인쇄술의 종교사이다. 성경은 최초로 인쇄된 책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인쇄된 책이다. 1450년부터 1877년까지 4세기 반이 흐른 기간 동안 성경은 다른 어떤 서적도 능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쇄술의 진보와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성경의 판본목록은 적어도 처음 40년 동안 성경이 발행 부수에서 다른 모든 서적들을 합친 것보다 능가했음을 입증한다. 하지만 번역의 질과 문체, 다양성은 발행부수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과 후대의 연구자들은 모두 인쇄술과 종교개혁의 연관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오늘날 연구자들 역시 이에 공감하고 있다. 빈프리트 슐체는 “종교개혁 운동은 활자를 통한 인쇄가 제공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없었더라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단정하고 있다. 베른트 묄러는 이런 생각을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서적인쇄 없이 종교개혁 없다”(Ohne Buchdruck keine Reformation). 이 명제는 1995년 베른트 묄러(Bernd Moller)의 특강인 “책의 종교개혁”(Reformation der Bucher)에서 도식화 되었다. B. 묄러의 특강은 영국의 역사가인 아더 G. 딕킨스의 명제인 “독일 종교개혁은 북-이벤트였다”(The German Reformation was a book-event.)에 대한 반론적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딕킨스의 주장은 종교개혁의 신앙적 측면이 주를 이루고 인쇄술이 도구적/수단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쇄술이 주이고 종교개혁을 그 매체의 혁명이 낳은 부대효과로 보려 한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필자는 당시의 상황에서 오히려 신앙적, 정신적 측면이 주이며, 출판인쇄술은 중요한 도구였음을 보다 명백히 하려 한다.

이 주제에 관하여 국내에서 인쇄술과 종교개혁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인문학이나, 문학 혹은 서양사 분야에서 관심을 보였다. 권태경은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분석하며, 종교개혁에서 활판인쇄술이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을 다루는 연구 등에서 소 단락으로 다루어지고, 대부분의 교회사 책들에서 개괄적으로 결론을 제시하는 것에 그쳤다. 신학에서는 단일한 주제로 다루어진 적은 없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먼저는 인쇄술이 당시 사상의 전파에 얼마나 커다란 기여를 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나아가 인문주의 정신이 전파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였음을 제시한다(II장). 이어서 성경의 보급을 통한 사상적 준비와(III장), 또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인쇄술을 간략하게 그려보려 한다(IV장). 즉 필립샤프가 서술한대로, 인쇄술은 시대의 정신을 “이전과 이후로”로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이 두 시대를 다시 “아우르는[연결시키]”요소임을 드러내려 한다. 인쇄술은 신앙적 측면에서 종교개혁의 시대를 이전과 다른 시대로 만들지만, 동시에 고대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다시 연결시키는 중요한 요소임을 살펴보려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인쇄술 보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변화의 더 핵심적 요소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2 인쇄술과 인문주의

2.1 인쇄술의 발명과 전파

기섹(M. Giesecke)은『근대 초기의 인쇄술』(Der Buchdruck in der fruhen Neuzeit)에서 한 사회에서의 정보를 생산하는 방식과 종류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위해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평가하며, 그는 인쇄술을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매체의 혁명”(Medienrevolutionen)으로 서술한다. 특히 그는 이 저서의 1장에서 중세를 ‘세미-구전 문화’(semi-orale Kultur)로 정의하고, 인쇄술의 발견을 새로운 변화이자 혁명으로서,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들을 검토하고 있다. 인쇄술 이전의 책은 독자와 책의 일대일 관계로 이해된다. 필사하는 사람마다 서체도 달랐고, 엄청나게 큰 사이즈에 권수도 많고 두꺼웠다.

가격도 워낙 비싸 도서관에서는 양피지 필사본을 쇠고리로 묶어놓고 열람하게 했을 정도다. 즉 지식은 권력층만의 독점이었다. 당시의 책들은 필사자들이 양피지에 한자씩 기록한 것으로 책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했다. 예를 들면, 8세기에 제작된 대표적인 서적의 하나가 codex amiatinus이다. 이 서적은 비드(Bede, 672-735)가 있던 영국의 재로우(Jarrow)수도원에서 제작했다.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책 가운데 하나인데, 송아지가죽으로 된 1030장 2060 페이지의 책으로 각 장이 한 마리의 송아지로 만들어 졌으며, 가로 세로가 27.5, 20,5 인치에 달한다. 두께가 10인치에 무게는 75,5파운드이고 책 표지는 약 90 파운드이다. 이러한 서적들이 지닌 가치와 제작에 들인 정성은 중세의 서적들이 일반대중들과 괴리감을 반증한다. 지식은 권력의 독점적 소유였다.

13세기에 들어와서 수제로 제작된 도서들은 문화를 전달하는 핵심적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도서를 제작하는 활동의 중심지는 이전의 수도원 등에서 대학과 왕궁 등으로 옮겨졌다. 특히 대학의 발달은 책에 대한 수요를 급증하게 했으며, 중요한 경제 활동이 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책에 대한 거대한 수요에서, 15세기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의 첫 인쇄물인『구텐베르크 성경』(1456)은 미적이고 예술적인 면에서 격찬을 받았다. 이 성경은 라틴어로 된 불가타 성경으로 마인츠에서 처음 인쇄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은 대량으로 서적을 보급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서적의 가격은 매우 실용적이게 만들었다.

1450년 초반 파우스트(Paust)라는 성경 판매상은 성경 한 권을 500크라운(Crown)에 판매할 수 있었으나,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이 많이 출판되자, 그 다음에 나온 책은 10분의 1 가격인 60 크라운, 그 다음에는 30크라운, 그리고 맨 나중에는 구매자가 원하는 가격에 매매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최초의 독일어 성경인『멘텔 성경』은 1466년 슈트라스부르크의 요한 멘텔(1410-1478)의 인쇄소에서 제작되었다. 한권으로 이루어진 이 성경은 비교적 작은 활자를 사용하고, 종이로만 인쇄를 하였다. 이로 인해 구텐베르크의 미학적이고 소장 가치를 지닌 성경과는 달리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강화되어, 성경 역시 소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읽기 위해 보급되었다. 종교개혁 직후 루터의 신약성경은 1522년 약 1.5길더에 판매되었다. 교회사가인 휴튼(Sidney M. Houghton)에 따르면, 1522년부터 ‘목수나 노동자들의 약 일주일 품삯’ 으로 루터의 신약성경이 판매되었다. 인쇄술의 발명은 이제 평신도들 역시 인쇄된 자국어 성경을 구입할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15세기 발명된 인쇄술은 인류문명에 기여한 독일의 위대한 공헌으로, 초기에는 독일의 예술이라고까지 불렸다.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금은세공사로 일하던 구텐베르크는 인쇄와 관련된 연구를 지속하여 결국 활자를 만들에 내는데 성공한다. 여러 시험을 거쳐, 구텐베르크는 결국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첫 작품을 인쇄하였는데, 그것이《42행성서》였다. 이 책은 1450~1455년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구텐베르크의 첫 완성작이 바로 성경 인쇄였다. 곧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게 된다. 특히 라인 강 연안의 도시들인 밤베르크, 스트라스부르크, 퀼른 등에 이어, 아우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등의 도시로 인쇄술이 전파되었다. 필립 샤프는 15세기의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로서 뉘른베르크와 스트라스부르크가 현저한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아우구스부르크와 더불어 독일에서 가장 왕성한 인쇄시설을 보유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들 도시 중 뉘른베르크는 초기에 인쇄술이 발달한 대표적인 도시이다. 구텐베르크로부터 인쇄술을 배운 하인리히 케퍼(Heinrich Keffer)가 1470년 인쇄소를 개업했다. 또 다른 인쇄 출판업자였던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는 판화가들의 협력을 얻어 삽화가 대거 수록된 인본을 간행하기도 했다. 코베르거는 국제적인 규모로 출판업을 이끌었는데, 전성기에는 24대의 인쇄기를 보유하고 바젤. 스트라스부르크. 리옹. 파리를 비롯한 다른 많은 도시들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코베르거는 당대 가장 성공한 인쇄업자가 되었다. 뉘른베르크의 인쇄소들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의 인쇄업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인쇄술 발달초기에 독일지역의 역할은 매우 컸다. 예를 들면, 15세기 중에 유럽에서 간행된 총 4만여 종의 서적 가운데 3분의 1이 독일에서 인쇄되었고, 그 중에서도 3분의 2가 스트라스부르크, 퀄른, 아우구스부르크,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의 다섯 도시에서 인쇄되었는데, 당시에 사용된 활자의 종류만도 1천여 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2.2 인쇄술과 인문주의의 전파

알프스 이남의 이탈리아 인문주의가 점진적으로 북부 유럽에 유입된 것은 부분적으로 새로운 인쇄 기술에 기인한다. 인쇄술 덕분에 북부학자들은 고전 문헌들 편집판을 포함하여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저서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민혜련은 르네상스의 정신을 매우 잘 표현하고 있는데, 도시의 식자들은 다시 고대 언어를 배워 이 모든 것을 원본으로 이해하고 싶은 열망에 몸살을 앍기 시작한다. 이는 열망을 넘어 트렌드가 되고, 교양인이라면 꼭 이루어야 할 시대의 ‘열병’이 되었다.

민해련의 요약은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인문주의를 함께 포괄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프스 이북의 인문주의자들은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비록 그들이 이탈리아 인문주의를 어느 정도 모방하기는 했지만, 북부의 인문주의자들은 고전학문과 성경의 경건을 독특하게 결합시켰다. 이를 W. 워커(W. Waker)는 특별히 “기독교 인문주의”로 표명하였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와 라틴 고전 문헌들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문법, 수사학, 역사, 시 등에 대한 문학적인 저술들에 주목하고, 종교적이거나 신학적 주제에 거리를 둔 반면에, 북유럽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 명시적으로 성경적 학문과 고전학문을 결합시켜서, 의도적으로 고대 고전 문헌들뿐만 아니라, 고대 기독교의 문헌들에로 돌아가고 자 하였으며, 이런 ‘성스러운 글들’과 ‘인간적인 글들’의 결합을 통해 대중적 경건과 신학적 교육을 재정립하는 것을 포함하여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려는 포괄적 계획을 형성하였다.”

알프스 이북에서 초기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문주의자 루돌프 아그리콜라(R. Agricola, 1444-1485)는 독일과 네덜란드 중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데 기여했다.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1455-1522)은 독일에 있는 비유대인 학자로서 최초로 히브리어 연구를 통해 구약의 이해를 도왔다. 그는 20여년에 걸친 연구를 거쳐 1506년 발간된『히브리어 기초』(De rudimentis Hebraicis)는 신학생들에게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을 전달했다.

데지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교육을 통해 고대 성인들의 윤리적 지혜와 본래적인 기독교적 진리의 원천인 성경과 교부들에게로의 되돌아감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도모했다. 그의 저서들인『기독교 병사의 핸드북』(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1503),『 우신예찬』(Moriae Encomium, 1509),『 친근한 토의』(Colloquia Familiar, 1529)는 이러한 목적을 지향한다. 그중에서도 에라스무스의 최고의 걸작은 1516년에 편찬한 새 라틴어 번역과 비평적 각주를 첨부한『그리스어 신약성경』이다.

종교개혁 직적의 성경 보급에 있어서 에라스무스의『그리스어 신약성경』은 새로운 역사의 장을 개척한다. 앞서 샤프의 지적처럼 루터를 위해 [종교개혁을 위해] 예비 된 가장 중요한 한가지였다. 에라스무스는 1516년 자신이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으며, 개정본을 합해 모두 다섯 번을 발행하였다(1516, 1519, 1522, 1527, 1535).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1516년에 아인지델른의 수도원에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성경 초판 가운데 바울 서신들을 필사하기도 했다. 루터는 1519년 제 2판을 토대로 1522년 바트부르크에서 독일어 번역을 하였으며, 1526년에 틴들은 영어 번역을 하였다. 필립 샤프는 그의 신약성경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저자들이 내놓은 모든 번역들과 저작들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은 바젤의 요한 프로벤(Johan Proben)에 의해 출판되었다.

또 다른 바젤의 아메르바하(Amerbach) 출판사는 1490-1506에 걸쳐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 11권을 편집 출판하였다. 이는 후에 에라스무스가 프로벤(Froben) 출판사를 통해 다시 편집 출판하게 된다(1528). 이 외에도 에라스무스는 힐라리우스(1523), 이레나이우스(1526), 암브로시우스(1527), 에피파니우스(1529) 그리고 크리소스토무스(1530) 등의 교부들의 글을 차례로 출판했다.

이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의 “ad fontes”에 대한 노력은 인쇄술을 통해 북유럽 사회에 광범한 영향력을 끼치고 새로운 대중적 정신의 자각을 낳았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과 더불어 인쇄술의 통한 성경의 보급과 교부들의 저서들에 대한 접근은 종교개혁의 가장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인쇄소는 15세기 말경에는 독일에 52개소, 이탈리아 80개소, 프랑스 40개소, 네덜란드에 21개소,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31개소 등 전 유럽에 걸쳐, 시민 계급이 번영한 3백여 지역에서 약 1천개에 이르는 인쇄소가 가동되었다.

3 종교개혁 직전의 성경 보급

3.1 종교개혁 이전의 성경 인쇄와 보급

중세교회는 중세 내내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보급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관되게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1199년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는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성경을 만지거나 그 교리들을 설교하려고 할 때’ 처벌할 것을 편지하였고, 또한 그의 견해는 제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 그 사도가 ‘보냄을 받지 않고 그들이 어떻게 선포하겠느냐(롬10:15)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설교의 권세를 가로채려고 한다. 이 때문에 (설교가) 금지된 자들이나 보냄을 받지 않고 사도 보좌나 지역 주교의 권한도 없이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설교권을 취한 자들은 모두 파문의 줄로 결박당하여야 한다. ...”(라 테란 공의회 회의록 3. 6).

또한 1299년 툴루즈 공의회의 법령은 ‘원서든 번역서든 구약과 신약성경을 평신도에게 보급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다.’ 또한 스페인에서의 페르난도와 이사벨라 여왕은 종교개혁 직전, 성경 번역과 성경 책 소유를 엄한 형벌로서 금지하였다. 종교개혁 직전 독일의 마인츠의 대주교는 1485년에 독일어 성경 보급을 금지했다.

중세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서 성서의 규범적 권위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 권위는 교부들과 교회공의회, 교회의 박사들, 교황의 공식칙령에 의해 해석된 것으로서 성경에 부여된 것이었다. 요컨대, 성경의 권위는 교회 가르침의 전통과 성서를 “올바로”해석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위자로서의 교회 자체의 권위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15세기 후반 이전의 성경은 거의 성직자의, 보다 정확히는 교회의 독점적 권위 아래 있었다.

이러한 성경의 이해에 대한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나타난 변화는 성경의 번역과 보급의 영향이 매우 크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인문주의자들의 원전에 대한 강조의 결과이지만, 그보다는 인쇄기술의 발명의 영향이다. 즉 15세기 후반부터 불가타판 성서와 번역본이 인쇄되어 폭넓게 전파되었다.

이때부터 성경은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하였는데, 1500년 이전에 불가타판이 92판 이상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서는 1522년에 인쇄되었나, 그 이전에 이미 17종의 인쇄된 독일어 성경이 존재했다. 1534년에는 신구약 모두 번역된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보급 되었다. 불어로 된 신약성서는 1477년에 최초로 인쇄되었으며, 신.구약 성서 전체는 그보다 10년 후에 인쇄되었다. 스페인어 성서는 1478년에 인쇄되었으나, 금서가 되어 불태워졌다. 또 다른 번역본이 1492년에 나왔다. 서로 다른 독립적인 2개의 이탈리아 번역판이 1471년에 인쇄되었다. 네덜란드 시편을 제외한 구약성서가 1477년에 인쇄되었으며, 뒤이어 1480년에 시편까지 인쇄되었다. 2종류의 체코어 성경이 1488년과 1489년에 인쇄되었다. 영국은 상대적으로 조금 뒤쳐져, 비록 캑스턴(Caxton)이 1477년에 웨스트민스터에 인쇄소를 세우긴 했으나 최초의 영어 신약성경 인쇄본이 출판된 것은 훨씬 뒤인 1526년의 일이다.

성경전서의 인쇄본들을 소개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은 플레나리아(Plenaria: 복음서 사본들)와 프살텔리아(Psalteria: 시편 판본들), 그리고 포스틸라이(Postillae: 주해가 붙은 성경 본문)에 수록된 성경 부분들의 인쇄본들이다. 1470-1520년에 103종이 넘는 포스틸라이가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단일 인쇄본에 성경 사본들을 몇 권이나 수록했는가 하는 것은 짐작밖에 할 수 없으며, 그것을 평신도들이 널리 소유했는가하는 것도 추정상의 문제일 뿐이다.

필립 샤프는 많은 신학자들이 인쇄된 성경의 사본들이 많이 보급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수고하였다고 적는다: 얀센(Janssen)은 발행부수가 무수히 많았다는 견해를 사실로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코클레이우스(Cochlaeus)의 라틴어 문법서(1511)가 1,000부 인쇄되었고, 아놀디(Bartholomew Arnoldi)의 저서(1517)가 2,000부 인쇄되었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브란트(Sebastian Brant)는 온 나라가 성경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고, 인문주의자 셀티(Celti)는 사제들이 여인숙에 숙박하게 될 때 마음만 먹으면 어느 곳에서든 성경 한 권쯤은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틴델(Tyndale)의 영역 성경은 한번에 6,000부가 발행되었다. 뉘른베르크의 코베르거(Koberger) 인쇄소는 1475-1520년에 무려 25판을 발행한 영예를 누렸다. 그 인쇄소에서 출판된 불가타 성경은 런던에서 일찍이 1580년에 판매되고 있었다.

이처럼 15세기 후반에 인쇄된 독일어성경들은 초기 인쇄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콘텐츠를 끊임없이 제공해 주었고, 또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만든 평신도 계몽에도 지대한 기여를 했다. 그 당시 성경은 ‘책 중의 책’으로 초기 인쇄문화를 주도해 나간 콘텐츠였다. 최경은의 연구에 따르면 종교개혁 이후 독일어 성경은 점차 그 크기가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인쇄와 종이의 질도 점점 더 나빠졌으며, 성경은 더 이상 필사본을 모방하려 하지 않고, 실용서가 되어갔다.

성경의 인쇄와 더불어 많은 신앙지침서들과 교훈서들이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그 내용들은 주로 평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일상의 삶에서 요청하는 것들을 설명하거나, 교회의 신앙의 주요 조항들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들이었다.

인쇄술은 성경과 교부들의 글, 교훈과 경건에 관한 서적들을 널리 보급하고, 새로운 정신의 자각과 더불어 현재의 전통과 가르침에 대해 ‘원본’과 대조하려는 시도들이 점증하였다. 에라스무스의 노력들이 그 좋은 예들이다. 게다가 자국어로의 성경의 보급은 교양인이 아닌 일반인들 역시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읽고 사유하도록 하였다. 인쇄술은 모두에게 성경 해석과 신앙 전통의 현재를 넘어 과거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했다. 인쇄술은 성경을 교회의 독점에서 해방시켜, 신자들에게 돌려주었다. (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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