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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인쇄술과 종교개혁 2
정원래(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5/23 [12:29]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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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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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원래 박사가 개혁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저자는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연구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3.2 평신도에 대한 성경 보급과 로마가톨릭의 금지령

중세는 성경의 모국어 번역이나 그 번역을 사제나 평신도가 사용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교의 관할지역 수준에서 불가타판과 모국어 번역판들이 평신도들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제들에 의해 읽혀지는 것을 종종 제한하였다. 왜냐하면 성서를 이렇게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단이 생기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5세기 후반의 모든 독일어성경은 라틴어성경『불가타』를 원본으로 하고 있음을 공공연하게 밝힌다. 이는 당시 라틴어 성경『불가타』만을 공식 성경으로 인정했던 로마교회의 정책에 가능한 한 따르려 했음을 보여준다. 평신도들을 위한 번역 성경 역시 이『불가타』를 기본으로 하였다.

중세의 교회는 성경의 내용을 문맹자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림을 활용하였다. 중세의 필사본 등에는 거의 빠짐없이 그림이 첨가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인쇄술이 보급된 이후에도 여전하였다. 특히 인쇄업자들은 삽화를 넣거나 채색을 하는 것이 훨씬 더 구매력이 크다는 것을 인지했다. 따라서 초창기부터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사본들에 삽화들이 실려 보급되었다. 1478년의『쾰른 성경』, 1494년의 『뤼벡 성경』, 1497년의 말레르미의『베네치아 성경』이 이러한 예들에 속하며, 종교개혁 직전에 발행된 17종의 독일어 성경들 가운데 15종이 삽화를 수록했다.

명시적으로 독자층을 평신도로 잡은 최초의 독일어성경이『쾰른 성경』이다. 1478년의『쾰른 성경』은 머리말에서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성경을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아주 경건하고 아주 열심히 읽어야 한다. ... 따라서 이 책을 읽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 즉 배운 사람이나 안 배운 사람, 성직자나 세속인은 성경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영혼 구원과 위안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게 누구나가 읽어야 한다.”

『쾰른 성경』이 출간되고 1년이 지난 후인 1479년 3월 17일 쾰른 대학성직자들은 성경 강독에 반대하는, 특히 여성의 성경 강독에 반대하는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의 교서를 받게 된다. 이 교서에는 쾰른 대학이 민중어로 제작된 종교적 서적의 인쇄에 대한 검열권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비록 교황의 교서와『쾰른 성경』과의 긴밀성은 약해 보이지만, 최초의 평신도 독일어 성경을 표방한『쾰른 성경』의 출간과 더불어 로마교회의 교서가 나왔다는 사실은 독일어성경의 확산에 위기감을 느낀 로마가톨릭의 반응으로 해석된다.

로마가톨릭의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1494년의『뤼벡 성경』역시 풍성한 주해를 통해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다. 또한『뤼벡 성경』은 성경독서에 대한 안내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들 독일어로 출판된 성경은 평신도들이 능동적으로 독서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나중 종교개혁에서『루터 성경』이 출현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 초석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의 보급은 당시 로마가톨릭의 우려와 더불어 금지를 낳기도 했으나, 성경은 평신도들에게 지속적으로 보급되었다. 때로는 이들을 대상으로 성경의 보급을 독려하는 글들도 등장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신분과 민족을 넘어 모두가 각자의 언어로 성경을 보급하려는 열망도 등장한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저서인『보혜사』(Paraclesis)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나는 무식한 자들에게 자기 나라 언어로 번역한 성경을 읽히기를 꺼리는 자들에게 철저히 반대한다. 그들의 생각은 마치 기독교 신앙의 힘이 사람들의 무지에 근거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 나는 배우지 못한 여성이라도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 들을 읽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책들은 모든 언어로 번역하여 스코틀랜드인들과 아일랜드인들뿐 아니라 터키인들과 사라센인들까지도 읽고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농부가 밭을 갈면서, 베 짜는 여인이 베틀 앞에서 성경의 한 대목을 읊조리고, 나그네가 고되고 지루한 여행길에 성경의 교훈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어 걸어가는 모습을 갈망한다.”

반대로 로마가톨릭의 입장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성경을 보급하자는 주장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이 성경을 사용할 경우 따르게 되는 위험에 대한 경고들이 강력했다. “스트라스부르그의 가일러(Geiler)도 성경을 평신도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어린이들에게 칼을 주어 딱딱한 빵을 썰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마인츠 대주교 베르톨드(Berthold)가 1486년 1월 10일에 독일어 성경번역과 그것을 평신도들에게 보급하는 행위를 격렬히 단죄한 것은 독일과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신적인[종교적] 서적 인쇄술은 온 세상에 교리와 구원을 위한 서적의 사용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런 기술을 명예욕이나 금전욕으로 오용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 기술이 인간성을 계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시킨다. 그래서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종교의 최고 서적들의 가치 하락이 민중의 손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성스러운 율법과 정경은 현명하고 달변의 남성들에 의해 아주 세심하고 숙련되게 편집되며, 그 이해는 너무 어려워서 그것을 완벽하게 습득하기 위해서는 아주 명석한 사람조차도 평생 동안 거의 도달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뻔뻔하며 무지한 자들이 학자들조차도 자기의 작업을 통해 커다란 오해로 들어가기 쉬운 그 서적들을 형편없이 단순한 독일어로 감히 번역하고 있다.”

이 유명한 포고령에서 독일의 이 고위성직자는 독일어가 그리스와 라틴 저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표현한 차원 높은 사상을 전달하기에는 너무나 미개한 언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경을 단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무엇보다도 여자들의 손에 쥐어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늘이 내리신 인쇄술이라는 선물을 사용하여 일반에 금지된 것들을 펴내려 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뒤, 성경을 펴내는 인쇄업자들을 명예욕이나 탐욕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대주교는 열정의 도가 지나쳐 모든 헬라어와 라틴어 저작들의 번역을 금지하고, 마인츠 대학교와 에어푸르트 대학교 교수들의 승인이 없이는 원서들을 판매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포고령을 어기는 자에게는 파문과 도서 압수, 그리고 100길더의 벌금에 처했다. 이 포고령은 효과가 대단히 커서 1488년부터 1522년에 루터가 신약성경을 펴낼 때까지 독일어 성경이 불과 4종밖에 출판되지 못했다.

1498년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이단의 책들을 출판하거나 읽는 행위를 파문의 벌로써 금지했다. 그리고 1501년 6월 1일에 주로 독일을 겨냥해서 모든 종류의 도서출판을 주교의 감독과 검열 하에 두었고, 쾰른과 마인츠, 트리어, 막데부르크의 대주교 4인과 그들의 관리들에게 모든 원고를 면밀히 조사한 뒤에 출판을 허가하라고 요구했다. 기존에 출판된 책들도 조사하여 가톨릭 신앙에 위배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면 압수하여 소각하도록 했다.

영어성경의 번역, 출판자인 틴델(Tyndale)는 영국에서 가톨릭이 영어 성경을 갖기를 원치 않았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교황주의자들 가운데 더러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더러는 평신도들이 모국어로 된 성경을 소지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말하며, 더러는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는 행위 자체를 이단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틴델은 영국에서 인쇄를 할 수 없어 외국에 가서 인쇄할 수밖에 없었다. 1527년의 주교 톤스톨(Tonstall)은 당시에 압수할 수 있었던 모든 성경 역본들을 세인트 폴 성당 뜰에 쌓아놓고 불태우기도 했다. 프랑스의 사정 역시 비슷했다. 1535년에 프랑수아 1세는 인쇄소들을 폐쇄했고, 프랑스에서 소르본 대학교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종교 서적을 출판하는 행위를 중벌로 다스렸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 과정과 후에 일관되게 취해온 태도는 성경의 자유로운 보급을 막는 것이었다.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태도는 19세기에도 여전하였다. 교황 피우스 9세의『오류목록』(Syllabus, IV)은 “성서 공회들”(Societes Biblicae)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비밀 결사체들과 같이 분류하면서, 이것들을 “자주 가장 혹독한 용어로 책망 받은 악한 역병”이라고 정죄했다.

성경과의 관계에서 점차 평신도들은 단순히 지도를 받거나, 방향성을 제시받는 그런 피동성에서 능동적으로 바뀌어 갔다. 인쇄된 성경을, 무엇보다도 모국어 성경과 시편, 복음서, 사도서신들의 부분적 편집판을 점차로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또한 그들은 이제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었으며, 성경의 “시금석”을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들은 성경에 관한 ‘전통적 주석’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성서의 구절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들을 듣기를 원했다.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당대의 교회를 원래의 신약성경의 교회와 비교하게 하고, “순수한 말씀”에만 기초할 때 무엇이 “참된 기독교”인지를 결정한 종교개혁자들의 대중적 설교는 훨씬 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520년대 초에 “재발견된”성경은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경의 재발견에서 커다란 한 부분이 평신도들의 성경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를 낳게 된 것은 인쇄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4 인쇄술을 통한 종교개혁의 확산

본 장은 종교개혁이전 형성된 성경의 보급이 낳은 성경에 대한 능동적 태도들이 하나의 동력을 지닌 사상으로, 문화로 자리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대한 검토이다. 즉 앞서 보급된 평신도 성경보급과 성경에 대한 능동적 태도들이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드러난 특성을 살핌에 있다.

4.1 표준화되고 통일된 성경의 보급

인쇄술 덕분에 서적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무형의 포럼이 되었다. 이 확산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여론과 비평’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출판과 문헌학의 발전은 번역이 주를 이루던 초기 휴머니즘 이후 한 세기가 지나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는데, 그것은 문헌들 사이의 대조와 비교를 통해 바로잡으려는 운동이 활발해진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여론과 비평’의 형성은 양면성을 지녔다. 즉 로마가톨릭도 혹은 종교개혁진영도 유용한 도구였다.

“인쇄술이 발달하자 가톨릭교회는 기록적인 속도로 면죄부를 인쇄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루터의 소책자들도 대량 인쇄되어 교황과 구교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었다. 여러 모로 인쇄술은 구교와 신교 양측 모두에게 상대방을 공격하는 ‘이론적 무기’로 쓸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의 성경의 필사본들은 여러 구절에서 오류와 잘못이 발견된다. 필사자에 따라서 수많은 오류가 나타났다. 때문에 인쇄술 이전의 성경은 통일된 성경이 아니고 ‘여러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루터는 초기에 인쇄된 번역본들의 많은 오류로 인해 루터성경은 불가타를 참조하지 않고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성경과 히브리어 성경을 원본으로 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1522년 9월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 3000부가 출판되었으나, 약 3개월 만에 매진되었다. 이어서 1522년 12월에 재판에 들어갔으며, 1534년 루터는 전체 성경전서를 독일어로 번역되기까지 16-17판에 50쇄 이상 출판하였다. 1534년부터 루터가 죽던 1546년까지 약 10만부의 독일어 성경이 인쇄되어 판매되었다. 이로 인해 종교개혁은 인쇄술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해진다. 종교개혁진영은 종교개혁이전 15세기 동안 필사되었던 것보다 더 많은 성경을 단 일 년 안에 유포시켰다.

특히 “표준화되고 통일된 성경은 인쇄술이 낳은 산물”이다. 동일하고 표준화된 성경을 통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통찰이 개별성 혹은 지역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루터 이전에 인쇄된 독일어성경이 없었다면 과연 ‘오직 성경만으로’(sola gratia)라는 루터의 생각이 평민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어성경은 평신도들이 능동적으로 독서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최초의 서적이기도 하였으며, 종교개혁의 매체인『루터성경』이 출현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 초석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역사를 기록한 존 폭스는 인쇄술을 “신성하고 신비로운 고안”으로 찬사를 하였다. 종교개혁의 정신의 확산에 인쇄술이 끼친 영향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쇄술이 일반 대중의 의식에 끼친 영향을 잘 서술한다:

“교황으로서는 인쇄술을 말살하든가 아니면 자신이 다스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든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다. 세계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에는 인쇄술이 그를 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과 모든 추기경들은 세계가 인쇄술의 빛으로 말미암아 볼 눈과 판단할 머리를 갖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파하도록 인쇄소를 열어두셨으므로, 교황은 삼중관의 권력을 다 동원해서도 그 음성을 막을 수 없다. 방언의 은사와 성령의 유일한 역사와 마찬가지로 인쇄술에 의해서도 복음 교리는 하늘 아래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울려 퍼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계시하신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고, 한 민족에게 알려졌던 것이 모든 민족에서 알려지고 있다.”

인쇄술이 표준적이고 통일된 성경의 보급과 더불어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신시킴에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었을 때, 로마 가톨릭 진영의 작센의 공작 게오르크, 바이에른의 공작 빌헬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기들의 영지에서 루터 성경을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하기도 했으나, 성경 보급의 물길을 제어할 수 없었다. 로마가톨릭의 옹호자였던 코클레이우스(Cochlaeus)는 루터의 번역에 대항하여 이렇게 푸념한다.

“인쇄업자들이 루터의 신약성경을 마구잡이로 찍어 보급하는 바람에 재단사들과 구두장이들, 심지어는 여자들과 무식한 자들까지도 독일어를 조금만 읽을 줄을 알면 이 성경을 구하여 모든 진리의 샘을 대하듯이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어떤 자들은 통째로 외우고, 가슴에 품고 다녔다. 몇 달만 그렇게 공부하고 나면 저마다 학식이 생긴 줄로 여겨 신앙과 복음에 관하여 가톨릭 평신도들뿐 아니라 사제들과 수사들, 신학박사들과도 논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인쇄술은 성경을 모든 사람에게 들어가게 했다. 코클레이우스의 푸념처럼, 표준적이고 통일된 모국어 성경의 보급은 동시에 그 말씀에 대한 이해와 말씀에 대한 해석과 말씀에 따른 삶에 대한 열망들을 낳기에 이른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의 문자적-역사적 해석과 “옛날 교부들” 로 되돌아갈 것을 계획적으로 요구함으로써 스콜라박사들과 중세의 “유비적”주석들의 해석의 권위를 효과적으로 무너뜨렸다. 루터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여전히 교회의 모든 가르침의 전통이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종종 성경만의 가르침에 비추어볼 때 잘못을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직 성경만이”(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성서와 전통, 즉 성경과 오래된 교회의 권위 있는 해석이 일치하고 모순이 없다는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은총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된다는 그 중심적 메시지가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는 성경은 그 자체가 성경의 해석자였다. 인쇄술은 ‘Sola Scriptura’에 대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이 구호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실재가 되도록 했다.

4.2 종교개혁의 확산

인쇄술은 종교개혁 정신을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사상이나 이념을 전파하고, 관련 지식과 정보를 재생산함에 가장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루터가 독일에서 시작한 거대한 영적 자극은 그 확산에 새로운 수단(Medium)에 의지하였다. 종교개혁의 정신과 확산에 있어 인쇄술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를 들면, 1520년 전까지 약 30종류의 루터의 저작은 대략 370개의 서로 다른 인쇄로 소개되었다. 종교개혁 초기에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산시킴에 비중 있었던 인쇄소로 비텐베르크에 있던 크라나하(L. Cranach, 1472-1553)의 인쇄소를 들 수 있다. 1519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멜키오르 로터(Melchior Lotter)가 비텐베르크에서 대부분의 루터 저작들을 인쇄했다. 그러나 1522년 9월에 출판된 성경은 크라나하의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이후 크라나하의 인쇄소는 종교개혁 당시의 중요한 루터의 성경과 수많은 종교개혁의 문서들을 인쇄하여 전파하는 중심 역할을 했다. 이러한 문서들은 약 2주면 엘베 강의 수운을 통해 독일 전역에 전파되었다. 상대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로마교황청의 공식적인 반응이 나오기까지는 약 6개월이 소요되었다. 크라나하의 인쇄소에는 예술가들, 인쇄업자들 그리고 출판업자들이 모여 종교개혁의 정신을 공유하고 보급하는 소위 종교개혁 ‘언론도시’(Medienstadt)였다.

종교개혁 직후 출판물의 대부분을 종교개혁 진영의 저작들이었다는 것은 인쇄술이 종교개혁의 정신의 확산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잘 드러낸다. 16세기 초반의 전체 독일어 출판물의 1/3은 루터의 저술에 해당되었고,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전체로 약 50만부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1524년 2400종의 전단에 약 240만장이 인쇄되었다. 출판은 좋은 사업에 해당되었으며, 특히 종교개혁진영에 속한 도시들, 뉘른베르크, 라이프치히, 쾰른, 슈트라스부르크, 하게나우, 바젤, 막데부르크 등등에서 출판업이 성행하였다.

1518년부터 1523년에 걸쳐 출판된 모든 책들 가운데 6백종 이상이 비텐베르크에서 보급되었다. 특히 1523년에 출판된 책들 가운데 450종이 개신교 진영에서 나온 것이었던 반면에, 딱히 로마 가톨릭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20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인쇄된 종류에 비교하면, 종교개혁진영의 서적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1518년에는 146종, 1519년에는 252종, 1520년에는 571종, 1521년에는 523종, 1522년에는 677종, 1523년에는 944종의 독일어 인쇄물이 있었다. 그중에서 절반이상이 개신교 진영에서 쏟아졌다. 묄러는 종교개혁의 확산에 대한 인쇄술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한다:

“인쇄술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책들은 역사를 만들었는데, 이 상황에서 온전히 첫 번째로 일어났고, 그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여기서 출판된 도서는 각각의 특징을 지녔고, 이러한 특징들은 처음부터 고유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다시 한 번 반복하면, 인쇄술은 텍스트의 확산에 있어서 어떤 것도 그보다 광범위하지 않았다.”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독자들을 전국의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자가 누구인지 확정되지 않으며, 책의 생산자와 인쇄업자처럼 저자의 관점에서는 독자는 원칙적으로 정의할 수 없고, 제한되지 않는 익명의 대중이었다. 독자가 어디에 속하는지,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어떠한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서 출판업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한 걸음 더 묄러는 인쇄술은 종교개혁에, 종교개혁은 인쇄술에 상호의존적이라고 보았다. “나는 초기의 종교개혁은 널리 확산된 텍스트의 환경 없이는 그 역동성과 추진력을 지니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의 지엽적인 현상으로 혹은 전체로 확산되었더라도 앞서 있었던 수많은 이단들처럼 정죄를 받았을 것이다. 즉 이러한 새로운 인쇄술의 물리적이고 기술적 전개가 하나의 영적인 작용을 가져왔다...”

종교개혁에서 인쇄술이 지녔던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그 신학과 의의를 사회저변에 확산시키고, 대중들의 동력을 이끌어 내는데 있어 인쇄술의 공로는 매우 크다.

4.3 평신도의 성장

이렇게 전파된 출판물들은 대중들의 성경이해와 문헌들에 대한 독서를 증가시켰고,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저변에, 특히 평신도 층에 확산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종교개혁 당시의 인물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인지했다: “... 프란츠 본 지킹엔(Sickingen, 1481-1523)은「카르스탄 대화집」에서 1521년 루터의 교리를 어떻게 전파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많은 평신도들이 루터의 교리를 귀로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종교개혁가인 J.E. 귄츠부르크(Guenzburg, 1470-1533)도 같은 해에 모든 경건한 기독교인은 자율적으로 “개신교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동시에 “자신의 집에서 홀로 하는 독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뮐러의 연구에 따르면 초반의 루터의 저작들은 약 절반 이상이 라틴어로 출판되었으며, 주로 신학적 내용들은 비평적인 음조로 다루었다. 이것은 ‘교양인들’과 더불어 말하였다. 그의 저술들의 나머지 절반은 독일어로 되어 있으며, 여기서는 주로 그리스도의 구원과 기독교인의 삶의 형태들을 다루었고, 논쟁적이고 교회비판적인 글들은 오히려 뒤로 밀렸다. 이러한 주제들과 경향들은 그때까지의 도서출판과 ‘단절’이었다. 이러한 독일어 저술들은 루터 자신의 의지에 따라 ‘평신도’를 위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평신도들에게 그 종교개혁의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고심했고, 인쇄술은 그들에게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루터의 주장인 “평신도들이 서신서와 복음서를 잘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집에서 스스로 읽으며, 우리가 앞서 설교를 통해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는 평신도들의 신앙적 성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5 나아오며

위에서 살펴본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들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5.1 표준적이고 통일된 성경과 교부들 저서의 제공

인쇄술은 사람들에게 중세의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오류 혹은 그릇된 해석을 넘어 성경을 직접 접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은 인쇄술은 통해 제공된 표준적이고 통일된 성경을 교회의 가르침들과 전통에 대한 시금석으로 사용했다. 또한 표준적이고 통일된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는 신학자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서로 비교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는 중세의 필사본들인 ‘여러 성경’에서 벗어나, 인쇄술은 ‘표준적이고 통일된 성경’을 낳았고, 연구자들은 이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원전과 대조를 통한 연구를 통해 새로 번역함으로 온전한 성경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낳았다.

나아가 인쇄술은 이러한 표준적이고 통일된 성경을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가난한 자든, 부요한 자든, 여성이든, 농부이든 심지어 나그네라도 쉽게 성경을 접하고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sola scriptura’는 실제로 이러한 인쇄술의 도움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웠다. 인쇄술은 이 원리를 당시의 모든 인물들에게 실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5.2 종교개혁 정신의 확산

인쇄술을 통해 성경과 수많은 종교개혁의 문서들은 출판되었다. 16세기에 종교 개혁적 저술의 인쇄들이 절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절반의 저술을 모국어(독일어)로 출판한 사실은, 인쇄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정신은 대중성을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쇄술을 통해 새로운 신학적 사유나, 전통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이나, 성경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지적이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아가 대중들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이해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데 까지 이르렀다. 신학적 동기를 지닌 대중성의 요청은 매우 명백해서, 종교개혁의 성취와 인쇄술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 양자는 근본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의 확산은 인쇄술에 크게 빚지고 있다.

5.3 평신도 계층의 확산

동시에 인쇄술로 인해 성경은 중세의 성직자들만의 독점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모든 신자에게 접근이 가능해졌다. 만인 제사장의 주장이 성립 가능하게 되었다. 성경은 모든 지역의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졌고, 여성과 농부로 대표되는 평신도들과 나그네에게도 들려졌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로 종교개혁의 정신과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시대의 정신이 되기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인쇄술의 의미를 강조한다고 해도, 묄러의 견해처럼, 그것을 곧 모든 원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미 인문주의의 시대 사람들의 지식은 새로운 역사를 낳을 정신적 자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지식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새롭게, 종교개혁의 성공의 ‘핵심’이 신학적 혹은 종교적인 본성이 아니라, 본질상 매체의 역사인 것처럼 주장되나, 나는 이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을 단순한 ‘매체의 혁명’으로 보려는 시도를 비판하면서도, 묄러는 그 상호의존은 매우 크다고 이해한다. 이와 같이 인쇄술은 종교개혁 직전의 전통을 넘어 고대 교부들의 전통과 연결시켰고, 서로 연결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는 핵심적 수단이었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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