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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어거스틴 이전의 기독교 역사에서 칭의 교리의 소외에 관한 연구 1
박영실(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5/30 [09:4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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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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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거스틴     © 리폼드뉴스

이 논문은 박영실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어거스틴 이전의 신학적 조류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 이전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나는 칭의 교리의 소외에 대하여 연구하여 제시한다.

1. 들어가는 글

종교개혁 500주년이 다가오는 이 시점에 필자는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믿음의 조항(articulus stantis vel cadentis eccesiae)”으로 간주했던 칭의 교리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하고자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칭의 교리의 강조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들에게 있어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칭의에 대한 법정적 진술”은 기독교 근원으로의 접근로였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칭의 교리의 태동은 바울 서신들의 연구와 더불어 이루어져왔으며, 그 칭의 교리의 성격 역시 바울의 서신들의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일관성 있게 이뤄져 왔다. 그런데 역사신학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은 “바울이 교회 역사의 처음 350년 동안 교회의 사상에서 비교적 사소한 비중을 갖는 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가 존중되고 인용되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서방 신학적 시각에서 볼 때, 이신칭의에 관한 바울의 놀라운 통찰력은 이 시기에는 잊혀졌던 것 같다.” 라고 언급하였다.

사도바울 이후부터 어거스틴이 등장하는 5세기까지, 바울의 칭의 교리가 소외되어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먼저 칭의 교리를 소외시켰던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론적 상황이었고, 또 그런 여건의 조성은 영지주의와 마니교로 기인된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그런 운명론적 상황에 직면하여 그 3세기 반 동안 기독교 저술가들의 칭의교리를 포함한 구원론적 진술들을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칭의란 어거스틴 이후의 신학적 용어이다.

따라서 어거스틴 이전의 칭의론 등장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면, 칭의와 관련주제들일 수 있는 인간의 타락, 원죄, 자유의지, 은혜, 예정론 등에 관한 이해들을 포괄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운명론적 상황

바울 이후 350년 동안에 기독교 저술가들의 칭의론적 진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은 바로 결정론적 운명론상황이었다. 이런 운명론의 부상을 야기한 것이 바로 영지주의와 마니교였던 것이다.

2.1 영지주의

3세기까지의 초대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연 영지주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영지주의는 기독교 이상으로 오래된 영육 이원론적 경향성을 띤 사상으로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이 사상은 1세기의 신약성경 형성에서부터 3세기까지의 기독교 사상 전개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영지주의를 간단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잡다한 사상들이 혼재된 혼합주의(syncretism) 양상을 띠고 있고, 통일된 조직체가 없는 다양한 종파들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많은 종파들을 망라하여 영지주의라 칭함은 지식(Gnosis)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세계와 물질계의 관계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였다. 영과 정신은 선하고, 물질과 육체는 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그리고 인간을 문제가 있다는(problematic) 시각에서 인식한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인 인간의 상황을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 칭한다. 이처럼 초대교회를 괴롭힌 위험한 사상이었던 영지주의는 이레니우스(Irenaeus)나 터툴리안(Tertullian)과 같은 교부들이 남긴 논박(論駁)이나 논설(論說)을 통해서 파악되어 오다가 1945년 이집트 나그 함마디(Nag Hammad)에서 발견된 나그 함마디 자료들을 통하여 현재는 이 사상에 대하여 많은 연구들이 이뤄졌다.

이런 영지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같은 학자는 영지주의를 “기독교의 예리한 헬라화”(acut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라고 규정했지만 영지주의를 헬레니즘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편향된 것이다. 헬레니즘은 영지주의에 용해되어 있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주의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제설혼합주의를 표방하며 이를 근거로 세상과 인간 운명의 문제를 설명하고자 했다. 영지주의에서의 세상 지배 원리와 관련하여 한스 모나스(Hans Jonas)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영지주의의 주요한 특징은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지배하고, 따라서 (두 개의 근본 원리 또는 실체가)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지배한다는 급진적 이원론이다.”
 
이런 원리들에 근거하여 영지주의자들은 인간과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다. 영과 물질 즉 선과 악이 날카롭게 대조되는 이원론적 세계 사이에서 인간 존재의 상태는 혼란과 곤란인 것이다. 이런 인간과 세상의 구조는 개인의 능력과 선택을 초월한다는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결정론적 운명론의 색채를 띤다고 하겠다.

교부들은 영지주의가 무엇보다도 결정론적 운명론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신앙을 위협했기 때문에 이 사상을 반대하였다. 2세기 중반에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로마에 왔다가 로마교회의 주교직에도 지원했다 실패했던 발렌티누스(Valentinus. 100∼160/180경)는 가장 뛰어난 영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세 형태로 분류하였다:

영에 속한 사람들(Pneumatics); 혼에 속한 사람들(Psychics); 육에 속한 사람들(Somatics).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세계로 복귀한다. 또한 혼에 속한 사람들도 선하게 산다면 영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육에 속한 사람들은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 영과 물질 사이의 이원적인 대조 속에서는 이처럼 영과 육의 결합체인 인간을 위한 어떤 가능성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런 영지주의가 어거스틴 이전 시대의 운명론의 상황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운명론은 개인의 범위와 능력을 초월하기에 결정론적 경향을 보인 것이다. 어거스틴 이전의 다수의 교부들이 인간의 책임이 실종되는 바로 이런 결정론적 운명론에 직면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칭의론 방향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2.2. 마니교

3세기 이후에 영지주의와 더불어, 혹은 영지주의적 강조점을 가지고 결정론적 운명론을 조장하면서 기독교 칭의론에 악영향을 미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또한 마니교이다. 실제로 마니교는 2∼3세기경에는 여러 영지주의의 분파를 흡수한 상태였고, 3세기 말엽에 마니교가 이태리와 북아프리카에서는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와 더불어 대단히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볼 수있다. 마니교(Manichaeism)는 메소포타미아 크테시폰(Ktesiphon) 출신 마니(Mani: AD c.210(?)∼276)에 의해서 창시된 종교이다. 마니는 24살 때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섭렵한 사상들을 혼합하여 마니교의 교리를 형성시켰다.

주로 조로아스터교와 고대바빌로니아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불교, 기독교의교리뿐만 아니라 점성술까지도 포함시켜서 마니교 사상을 이뤄나갔다. 그는 조직의 천재였고 열정적으로 포교하였으며, 그의 종교 의식은 밀의의 종교 의식들로 여겨졌지만 이후 상당한 양의 마니교 자료들이 발견되어 쾰른 마니코덱스(Kölner Mani-Kodex)로 편집되었다.

마니교는 영지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또한 마니교의 우주관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세계는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 간의 투쟁이다. 이런 세상 구조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운명은 개개인의 선택 경계를 넘어서서 결정론적이고 운명론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이원론적 특징은 마니교의 주요한 저작인 『피흐리스트(Fihrist)』에 잘 진술되어 있다.

마니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두 개의 실체가 세계의 시작을 형성하는 데, 하나는 빛이며 나머지 하나는 어두움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빛은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이며, 어떤 수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으며, 신 자신이며, 빛의 낙원의 왕이다… 나머지 하나는 어두움 속에 있다… 마니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빛이란 실재는 양자를 구분해 주는 벽이 없이 바로 어두움이란 실재와 닿아 있다. 빛은 그 가장 아랫면에서 어두움과 접촉하지만, 그 위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는 무한하다. 그래서 어두움도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 왼쪽으로는 끝이 없다.

물론 마니 자신이 그런 이원론은 창안한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종교적 의도에 맞게 각색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제설혼합주의 형태인 마니교와 기독교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까? 마니교에서 예수는 전적으로 유대인의 악마적 메시야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가현설적(docetic)으로 해석된다. 마니 자신이 지식의 메신저로서, 최후 최고 선지자로 내세워진다. 그는 바로 빛의 대사이며, 보혜사인 것이다. 마니교 우주론은 고대 바빌로니아 원천에서 파생된 영지주의이고 마니교의 구원론, 즉 구원의 계획도 영지주의적이다. 마니의 가르침에는 또한 점성술도 포함되어 있다. 점성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마니교의 운명론적 경향을 반증하는 것이다. 마니교는 비인격적이고 결정론적인 운명론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4세기 후반에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들어가서 그의 나이 19∼27세까지 청문자의 신분으로 지냈다. 한 천재의 지식적 황금기인 이 시기를 무엇이 그토록 9년이나 그곳에 억류할 수 있었는가? 마니교의 결정론적 운명론은 어거스틴의 죄책감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대립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실제로 어거스틴은 그 마니교에서 죄책감은 느낄 필요없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후에 마니교에서 벗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니교 이슈가 그의 생애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니교 논쟁”에 관여하는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결정론적 운명론인 마니교야말로 허구이자 기만이라고 매도하였다. 요약하자면, 3세기 후반부터 영지주의의 색채를 띤 마니교가 그 이전의 시대에 영지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결정론적 운명론을 조장하였다. 이런 숙명론적 분위기에서 그 시대 교회 저술가들은 인간의 자율성 특히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칭의론의 강조점에 크게 배치됨은 물론이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