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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역사이야기
예장합동 교단총회, 교권 중심의 영남측 인사들
초기 선교의 역사와 장로회 교단총회의 역사 속에서 영남 교권의 계승
기사입력: 2018/06/06 [15:08]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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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의 독노회(1907년 9월 17일)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금년 9월로 제103회 총회를 맞이한다. 1912년에 총회가 조직되었으니 매년 총회를 1회 실시한다고 보면 금년은 제107회 총회여야 한다. 그런데 제103회 총회인 이유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으로 4회가 소집되지 못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본 교단(예장합동)은 정통성과 정체성을 계승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교단 내 교권은 매우 중요하다. 그 교권이 무너지만 교단의 신학적 노선도 무너진다. 교단의 정체성과 신학과 교리를 위해서라도 교권은 살아 있어야 한다. 이 교권은 호남세력과 영남세력이 꾸준이 투쟁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영남측의 교권을 역사적으로 회고해 본다.

◈ 이 땅에 들어온 개신교회 복음의 전래

개신교회 복음의 첫 전래는 1994. 9. 20.에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알렌선교사가 중국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본국인 미국의 북장로회선교회로부터 승인을 받아 선교지를 중국에서 조선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미 북장로회선교회는 언더우드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하기로 결의한 이후였다.

알렌선교사가 입국한 1884. 9. 20.을 개신교 선교의 전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 다음해인 1885. 4. 5.에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입국하였다. 알렌 선교사는 평신도 의료선교사인 반면 언더우드 선교사는 목사 선교사이다. 선교의 첫 시발점음은 알렌선교사 입국으로 잡는 대신 목사로서 선교사의 첫 입국은 1885. 4. 5.이다.

알렌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첫 입국한 해에는 이미 가톨릭교회의 선교는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한 해에는 이미 가톨릭의 100년 역사 중에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있었다.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조선에서의 가톨릭교회의 복음전도와 그로 인한 핍박과 순교는 이미 이 땅에 점차 복음 전도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개신교회 선교 전에 100년 동안의 가톨릭교회 선교역사

이미 조선에서 가톨릭교회가 1882년부터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1886년에 조선과 맺은 「한불수호통상조약」, 1899년에 조인된 천주교 신자들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인정한 「교민조약」(敎民條約), 이같은 조약을 체계화되고 보완된 1904년에 체결된 「선교조약」(宣敎條約) 등에 의해 선교사들은 개항장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조선에서의 이같은 결과들은 가톨릭교회가 100년 동안 이땅에서 전한 선교활동과 그로 인한 핍박, 순교 등으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열매가 성문법인 조약의 형식으로 체결된 그 시기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초기 가톨릭선교가 개신교 선교에 미친 영향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을 도왔던 한국인 어학선교사들은 이미 신부들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으며, 가톨릭교회의 각종 출판사역에 일했던 한국인들이 개신교 선교사들과 일하게 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실들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위와 같은 가톨릭교회의 100년 동안의 선교 활동과 역사는 개신교회 선교사들의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가톨릭교회가 조선과 맺은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용인되고 성문법으로 체결된 그 시점에 개신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했다. 그래서 선교활동 초기부터 많은 결실의 열매들을 맺을 수가 있었다.

한글어 성경번역, 각종 사전 편찬 등은 선교사들의 개인 어학선생들과 더불어 진행된 작업들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활동과 주변에는 언제나 조선인의 한글어 어학선생들이 있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임금을 받아 일했던 조선인들이 개신교회 선교사들에게로 일자리를 옮겨 일했던 관계로 이에 대한 선교사들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 장로회 정치를 사용한 장로교회와 치리회 정착

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장로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했다. 교회가 설립됨과 동시에 교회를 섬기는 항존직으로 목사와 장로를 임직하게 되었다. 조선교회에서 조선인 목사와 장로가 세워지자 선교사들만의 공의회를 통하여 조선에 세워진 교회를 관리감독을 조선인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최초의 노회, 이 노회를 '조선국장로회독노회'라 한다. 이 시기가 1907년이었다. 이후에 7개 노회를 중심으로 1912년 9월 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설립됐다.

1912년에 이르러 조선에서는 장로회 정치원리와 체제로 장로교회를 설립하고 그 교회를 관리 감독하는 치리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장로회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장로회 선교사들의 이 땅에서의 복음전도로 교회를 세워가는 무렵 일제는 한국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까지 말살하며 한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본격화하였다.

일제 통치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이민자는 증가했다. 한국인들이 주로 이민해간 곳은 하와이, 멕시코, 간도 등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이민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간도였다. 1915년에 이르러 서간도 한국인 10만명, 교회 53개처 교인수 2,739명이었으며, 북간도 한국인 14만명, 교회 14개처 교인수 5,000명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21년에 이르러 함남, 함북 등의 노회에서 간도노회로 분립되기도 했다.

일제 말기인 194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폐쇄하고 일본기독교장로교단에 편입시켜버렸다. 1945. 8. 15. 광복과 더불어 폐됐던 총회는 복구되고 각 교파별 교회를 재건하는 등 활발한 교회 재건운동이 전개되었다(소재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폐쇄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총회와 교회복구 연구’-1942년~1946년 총회 역사를 중심으로- 논문 참조).

◈ 해방이후 교회⋅총회 재건과 분열

1945년 해방이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 강점기의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하여 신사참배한 자들과 이를 거부한 자들 사이에 신앙의 정체성, 정통성 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 논쟁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고민했던 교회론에 대한 무형교회, 유형교회 논쟁이었다.

결국 이 논쟁은 해방이후 5-6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1951년에는 교단총회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1951년에 소위 신사참배를 거부한 부류 중심의 고신파는 기존 장로회 총회가 이교도적으로 흐름으로 별도의 교단을 설립한다는 이유로 고신교단을 출범시켰다.

이후 1953년 일명 자유주의 신학과의 논쟁은 김재준 박사 중심의 기장측이 분열해 나갔다. 그리고 1959년에 이르러 WCC를 옹호하는 자들 중심의 통합측이 분열했다. 1959년 분열당시 교단지인 기독공보는 통합측 소속이 되어 버렸고, 합동측은 1965년 1월 5일에 이르러서야 교단지인 기독신문이 창간되어 총회 소식을 대변해 주었다.

연동측인 통합측과 분열된 이후 합동측은 모든 재원과 교세는 통합측에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열악했고 그러한 가운데 총회는 나름대로 정통성 계승과 총회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합동측도 서서히 안정권에 들어갔다. 안정권에 들어가자 교권의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에 대한 싸움이 번졌다. 이러한 교권 장악에는 언제나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빠른 교권 장악의 지름길이 된다. 이러한 교권의 재편현상이 진행되면서 1959년 제44회 총회 이후 교단 내 주류와 비주류의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교권투쟁이 진행되었다

◈교권투쟁-황해 호남 vs 평안도 영남

1959년 통합 측의 분열 당시까지만 해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교권의 한 중심에 황해도 세력과 호남세력, 평안도 세력과 영남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세력분포는 1959년 분열로 인하여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분열해 나간 통합측(연동측)은 평안도 세력과 영남 일부 세력이 주축을 이었고, 합동측(승동)은 황해도 세력과 호남세력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44회 총회(1959년)이후 합동 측 내 주류 세력 교권의 중심 세력은 황해도와 호남세력이었디. 이 세력들이 총회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세력은 박형룡 박사를 등에 업고 교단의 실권을 장악해 가면서 넓게는 무지역노회까지 포용하는 정치교권을 형성해 가면서 영남세력을 따돌렸다. 영남세력은 비주류로 전략되어 서러움을 삭혀야 했다.

총회 교권세력에서 열세로 몰린 영남지역의 노회들은 총회 교권을 주도하기 위한 방안을 세워 그대로 실천해 나갔다. 그 전 단계로 “무지역노회 폐지”안을 가지고 나왔다. 이는 이북지역의 무지역노회들이 황해 및 호남세력과 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지역노회를 폐지하고 그 세력을 영남세로 편입시켜 흡수한다면 호남세를 견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따라서 무지역 노회 폐지는 중요한 정치적 이슈였다.

이런 상황하에서 무지역 노회 폐지안이 청원되어 상정된 총회는 1963년 제48회 총회 때에는 경북노회, 경안노회가 헌의했다. 1965년 제50회 총회 때에는 경북노회가 단독으로 헌의했는데 문제는 헌의 때마다 경북노회가 이같은 헌의에 참여하였다.

무지역노회 폐지안으로 교권의 향방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제44회 총회(1959년) 이전에도 시도되었다. 1957년 제42회 총회에서 영남지역인 경북노회, 경동노회, 경안노회, 마산노회, 진주노회 등 5개 노회가 무지역노회 폐지를 헌의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6년 제51회 총회 때에는 경북노회가 단독으로 무지역 폐지에서 대회제 실시로 선회하여 헌의하였다. 무지역노회 폐지는 무지역노회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런 이유로 교권의 주도세력으로 입지를 위해 이제 무지역노회 폐지에서 대회제 실시 쪽으로 선회하였다. 경북노회가 제51회 총회에서는 대회제 시행에 대한 헌의를 받아들여 대회연구위원 5인을 선정하여 조직하였다. 5인 중에(양화석, 손계웅, 김윤찬, 정봉조, 정규오) 호남이 3인을 차지하고 있어서 대회제 실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남세는 1966년 12월 5일 대구서현교회에서 대회조직이 헌법적으로 명문화 되어 규정을 들어 영남대회를 조직해 버리는 정면 돌파로 나갔다. 이 사건은 총회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었고 이슈였으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제51회 총회(1966년) 임원회는 곧바로 “영남대회 조직에 대한 권고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이 발표문은 전국 각 노회장과 제51회 총회들에게 발송됐고, 대회조직이 불법임을 공포했다.

총회 중진들은 대구로 내려가 동부교회(손계웅 목사)에서 영남교계 지도자들 소집하여 회합을 열고 영남대회 조직을 보류하고 대회제연구위원 5인의 연구결과를 기다려 줄 것과 총회 결의에 순종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 연석회와 아랑곳 하지 않고 12월 5일에 영남대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대회장은 손계웅 목사, 부대회장은 감상도 목사, 서기는 이영수 목사였다. 여기서 영남대회 조직을 돌파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사는 바로 그 유명한 이영수 목사였다. 이영수 목사의 등장은 앞으로 총회의 판도의 변화를 예고하였다.

1967년 제52회 총회는 대회제에 대한 어떤 결과를 내려야 할 총회였다. 계속해서 제52회 총회에서도 영남세로 형성된 경북노회, 경중노회, 경안노회, 경청노회는 무지역 폐지안을 헌의했다. 이는 피난노회의 존폐를 가름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같은 헌의는 무지역노회인 이북노회의 총대들로부터 대회제 관철을 위한 견제용으로 무지역 폐지안을 가지고 나왔다.

누가 말했던가. 정치는 흥정이라고.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 약점을 들고 나오면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 약점을 봐 주는 것처럼 하여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통했다.

1967년 봄 노회가 끝난 후 10여년 넘게 총회 교권을 장악했던 이영수 목사가 우성기 장로와 함께 등장하면서 총회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이는 황해지역과 호남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영남세인의 교권 장악을 위한 깃발이었다. 이 깃발은 황해지역과 호남세가 장악하고 있는 총회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영남세력의 교권에서 볼 때에 문제는 당시 부총회장이었던 김세영 목사가 대회제 실시를 반대한 인사라는 점이었다. 김세영 목사가 총회장이 되면 대회제 실시가 관철될 것 같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속에서 총회가 개혁되어져야 한다고 외친 영남 실세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남세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대회제를 실시하여 총회교권의 중앙집권적 횡포를 막기 위하여 교권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영남세의 입장에서 볼 때 당시 대회제 반대 입장을 고수한 부총회장인 김세영 목사가 총회장이 될 경우 자신들의 교권 장악이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지 자파 사람을 총회장으로 옹립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때 황해도와 호남세력의 교권에 소외되었던 영안세력을 자파 세력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영남교권의 반전, 김윤찬 목사 제52회 총회장 당선

영남세력은 이러한 정치적인 이해 관계 속에서 당시 평안도 출신인 평안교회 김윤찬 목사를 찾아가 제52회 총회는 중대한 안건이 많음으로 총회장에 출마해 줄 것을 요구했다. 대회제를 실시한다는 조건만 허락해 주면 총회장으로 밀겠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제52회 총회는 목사 115명, 장로 117명, 선교사 4명, 옵서버 2명 등이었다. 제52회 총회(1967년 9월 21일)는 정회하고 속회(1968년 3월 1일)한 총회로 기록되었다. 경북노회, 충남노회는 제52회 총회에 통합 측과의 합동을 추진하여 달라고 청원하여 합동 원칙에 대하여 위원 15명을 선정하여 일임하고 합동을 위하여 금번 총회를 정회하고 합동을 추진하는 중 합동이 가능하지 않을 때에는 자동적으로 폐회되는 것으로 결의됐다. 그러나 속회와 이후 총회에서 논의하였으나 결국 통합측과 합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영남의 이영수 목사 시대 도래

영남세력은 평안세력인 김윤찬 목사와의 쌍방간 합의가 성사되어 영남세의 지원을 받은 김윤찬 목사가 총224표 가운데 119표를 얻어 과반수에 7표가 많은 표로 당선되었다. 이는 영남총대들의 승리였다. 이 승리는 총회 교권이 호남에서 영남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30대의 젊은 목사인 이영수 목사가 총회임원인 회의록서기에 당선됐다는 점이다. 이는 이영수 목사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영수 목사는 이렇게 시작한 총회 임원을 제52회 총회(1967년)부터 제65회(1980년)에 총회장에 이르기 까지 무려 14번이나 총회임원을 했던 전무후무한 정치인이었다.

제52회 총회는 김윤찬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임하고 회무에 들어가자 예견했던 대로 무지역 노회 폐지와 대회제 실시 건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회제 연구 위원이 보고하자 대회제에 대한 토론과 논쟁이 저녁 8시부터 그날 밤 11시 10분까지 치열하게 계속됐다.

결국 논의를 중지하고 연구위원회의 보고 내용인 제1항인 “본 총회의 대회제를 합헌적인 절차를 따라서 실시함이 가한 줄 아오며”라는 내용을 표결에 붙인 결과 찬성 95표, 반대 117표로 대회제가 무의로 끝나고 말았다. 대회제 실시가 무의로 끝나자 화살이 무지역노회 폐지건으로 옮겨 붙었다.

감정싸움까지 제기되면서 3일 동안 격론이 계속되었다. 무지역노회를 폐지하면 “서북총회”를 조직하여 칼빈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교단을 만들겠다는 강경한 발언들이 나왔고 총회는 분열을 막고 화평을 위해 두 안건을 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힘을 얻어 무지역노회 폐지건은 “피난노회에 관한 문제는 자진해서 지역노회에 가입하든지 휴전선이 철회되든지 하기까지 본 총회에서는 다시 거론하지 아니하기로 하다”라고 결의했다.

대회제는 연구위원 보고대로 총회의 적법한 절차를 밟아 실시하도록 하고 헌법 개정, 대회규칙 재정, 기타 일체의 준비를 위하여 위원 15인을 회장 자벽으로 선정했다.

제53회 총회는 대회는 5대회를 하고 명칭은 중부대회(경기, 강원) 충청대회(충청남북도) 호남대회(전라남북도) 영남대회(경상남북도) 서부대회(무지역 노회일원)로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하여 영남대회(1969. 5. 27), 충청대회(1969. 6. 10), 호남대회(1969. 6. 17), 서부대회(무지역일원, 1969. 6. 24), 중부대회(경기,강원, 1969. 7. 1)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실시된 대회제는 1971년 제71회 총회 때 순천노회, 강동노회의 폐지 청원을 시작으로 다음해인 제72회 총회에서 총회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대회제 실시를 주장하여 헌의했던 경북노회의 폐지헌의와 여기에 가세한 전서노회, 군산노회가 폐지안을 헌의하여 총회에서 투표를 부친 결과 폐지찬성 159 표, 반대 106표로 결국 대회제는 폐지되었다.

대회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셈이다. 총회 교권 장악을 위해 대회제 실시를 관철하여 교권을 장악하자 다시 그 대회제를 폐지했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총회장의 3개 지역순환제 도입 원년

이북출신 안용준 총무 후임으로 영남의 황규석 목사를 제52회 총회 후(1967. 11. 7) 임원회에서 총무로 선임한 사건, 총회장을 6년 동안 황해와 호남세가 독점을 저지하고 영남, 호남, 중부(서북포함)의 3구도로 정착시켜 그 지역 안에서 경쟁토록 하였다.

제52회 총회 임원선거에서 승리한 영남과 평안남도 세력이 총회 교권을 장악해 갔으며, 이같은 교권의 변화는 총신 박형룡 박사가 물러나고 김희보 박사가 교장으로 들어옴으로 총신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총회에 비주류로 완전히 전락한 호남세(호대회장, 정규오, 순천노회장, 조용호, 전남노회장, 김재복)가 때 늦게 무지역노회 철폐(제57회, 1972년) 헌의를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남세에 가담한 무지역노회를 좌천시켜 보복하려는 카드였음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그 헌의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것이 총회에 마지막 올린 무지역노회 폐지헌의였다.

교단의 주류, 비주류의 싸움은 계속해서 총신, 신문사의 주도권 쟁탈에 초점이 되어 치열하게 전개되다가 끝내 세에 몰린 정규오 측과 노진현측이 1979년, 1980년에 각기 총회를 이탈해 감으로서 막을 내렸다.

◈ 황해, 호남세력의 약화와 분열과 다시 합병

주류에서 1971년 비주류가 된 호남세는 1979년에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 다시 합동했다. 김희보 박사의 성경관이 비성경적이라는 이유와 겹쳐 분열했던 비주류는 2005년 “신앙과 신학이 같기에 합동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합동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79년 총신의 신학적인 문제가 분열의 원인이었다는 말이 퇴색케 되었다.

◈ 현 본 교단 내 영남세력의 교권 상황

1979년에 분열되었던 일명 비주류(개혁 측)는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 다시 합병되었다. 호남세력이 강화되면서 숫자적으로 호남세는 영남세에 비해 월등해 졌다. 그러나 호남세의 교권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반대로 영남세의 교권 역시 독자적으로 행사하여 교단의 실권을 장악해 갈 수 없다. 영남과 호남이 연대하는 길 밖에 없다. 충청권의 세력은 미미해서 충청권의 교권은 본 교단의 실권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이다.

현재 영남측은 대구와 경북, 부산과 울산으로 구분되면서 교단을 이끌어 가는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52회 총회 후(1967년)에서 총회장은 영남, 호남, 중부(서북포함)권으로 순환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같은 3개구도는 나중에 영남, 호남중부, 서울서북으로 순환 구도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2005년 구개혁 측과 합병한 이후 호남세력은 영남세력보다 우위에 있다. 그렇다면 이제 영남 지역을 한 축으로 한 이상 호남 지역 역시 한 축으로 하여야 한다.

◈ 본교단의 영남 교권의 중심 인사들

현재 본 교단을 이끌어가는 영남교권의 중심인물들은 대구에서 박무용 목사, 이승희 목사, 남태섭 목사 등이다. 경북 쪽에서는 김형국 목사, 이기택 목사, 부산 지역은 김정훈 목사, 울산지역에서는 강진상 목사, 이성택 목사 배광식 목사 등이다.

특히 서울서북지역에서는 허활민 목사, 장봉생 목사, 이영신 목사, 김재호 목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권순웅 목사 등이며, 무지역노회인 서부지역노회협의회에 소속하면서 대구에서 목회하고 있는 강태구 목사 등이 있다. 또한 충청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오정호 목사가 있다.

당분간 이러한 인사들이 영남지역의 교권 세력으로 교단을 이끌어가는 중심의 한 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사들 중에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의 규모에 따라 리더십을 인정할 것으로 보인다. 자금동원력이나 검증된 리더십은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의 규모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영남지역의 교권을 위한 강력하고도 특출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영남지역이라 할지라도 대구, 경북, 부산, 울산 등으로 지역적인 분산은 하나의 영남교권으로 교단의 중심의 한 축으로 가기 위한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점이다. 영남지역의 각 협의회를 개최할 때에도 호남측 인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후원을 받을 정도라고 자체적인 비판이 있기도 하다.

영남교권은 어찌하든지 호남교권과 연대할 때에 빛을 발할 수 있다. 반대로 호남교권은 영남 교권과 연대할 때 그 빛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금번 제103회 총회에서 부총회장 후보 지역은 서울서북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이번에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인사는 호남지역과 영남지역이다.

영남권이 영남지역 출마자인 인사의 특출한 리러십을 인정하여 몰표를 줄 것인지, 아니면 영남권 인사들이 자신들의 차기 대권을 위하여 호남 교권과 연대하기 위하여 호남권 인사에게 표를 주어 연대할 것인지에 대한 경우의 수는 정치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호남권이 호남지역 출마자인 인사의 리더십을 인정하여 몰표를 줄 것인지 아니면 호남권 인사들이 자신들의 차기 대권을 위하여 영남 교권과 연대하기 위하여 영남권 인사에게 표를 주어 연대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과거처럼 영남의 이영수 목사, 호남의 정규오 목사 등과 같은 특출한 지도자가 없는 이상 각 지역 교권들이 집단 지도 체제로 연대하여 교단의 교권을 이끌어 갈 것이다. 집단 지도체제는 지역교권 중심일 수 있고 정치적인 성향 중심일 수가 있다. 그리고 신학과 신앙의 동질성이 중심이 수 있다.

과연 영남교권의 중심축이 어떤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교단을 이끌어 갈 것인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소재열 목사(리폼드뉴스 발행인, 한국교회사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