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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
[논문] 어거스틴 이전의 기독교 역사에서 칭의 교리의 소외에 관한 연구 2
박영실(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기사입력: 2018/06/06 [17:57]  최종편집: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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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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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박영실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논문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어거스틴 이전의 신학적 조류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어거스틴 이전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나는 칭의 교리의 소외에 대하여 연구하여 제시한다.

3. 어거스틴 이전의 신학적 조류

본란에서는 어거스틴 이전의 기독교의 저술가들을 사도적 교부들, 변증가들, 헬라교부들, 그리고 라틴 교부들로 나누어 그들 각각의 주장에서 칭의론이 어떻게 진술되는 지를 살펴볼 것이다. 1∼5세기는 고대사상 형성기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신학적 진술들이 명쾌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는 서로 부조화스럽게 언급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또한 칭의란 후대에 등장하는 신학적 용어란 점을 감안하여 칭의의 관련주제들일 수 있는 인간의 타락, 원죄, 자유의지, 은혜, 예정론 등에 관한 이해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1. 사도적 교부들(The Apostolic Fathers)

사도적 교부들은 그 호칭적으로는 사도들을 직접 알았거나 그들로부터 직접 배웠던 사람들을 일컫고, 대략적 1세기 말에서 2세기 중반에 활동하였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지칭한다. 하지만 불란서인 장 코텔리(Jean Cotelier)가 1672년에 출간된 그의 책에서 기술한 대로 그것은 이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기독교 저술들까지도 포괄하여 사용된다. 신약성경의 정경화 작업은 아직 진행되지 않았으며 신약성경의 외경(Apocrypha)이나 위경(Pseudepigrapha)들의 등장함으로 기독교 신학의 변질이 우려되던 시대였다.

사도교부들이 인간의 죄인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겠지만, 인간의 죄인의 상태와 구원의 근거를 분석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사도적 교부들의 저술들 중에서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에 의해서 저술된 것으로서 일부 교회에서는 정경에 포함시킬 정도로 권위 있었던 『클레멘트 1서』 가 대표적으로 고려할만하다. 이서신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을 무렵인 9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신약성서를 제외하고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클레멘트 1서』의 저술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클레멘트는 필경 로마에서 이 서신을 작성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순례자 신분을 강조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보냈는데,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서 겪었던 (고전 1: 12 이하) 바로 그 질서의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이 분열에 대해서 로마의 클레멘트는 주로 구약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데 그 논조가 바울의 그것과는 다르다. 바울은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다면 로마의 클레멘트는 헬레니즘적이나 스토아적 분위기에 젖어서 도덕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윤리적 권고에 집착한다. 또한 로마의 클레멘트가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주도한 자들을 선택된 엘리트들에게만 주어진다는 비밀스런 지식인 영지(gnosis)를 자랑하는 자들로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로마의 클레멘트가 영지주의자들로 인한 악영향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클레멘트 1서』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익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바나바의 서신』(Epistle of Barnabas)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직면한 문제들의 논의를 담고 있다. 이 서신과 관련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기원설이 가장 유력하고, 또한 알렉산드리아적 풍유법에 대한 강조가 특색이 있다. 역시 익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12사도에 의한 이방인들에 대한 주의 교훈』(The Teaching of the Lord to the Gentiles by the Twelve Apostles) 혹은 『디다케』(Didache)는 교회의 요리문답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데, 이집트나 시리아에서 작성되어졌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작성 시기에 대해서는 70∼90년이라는 매우 고대 시기가 고려되어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디다케』에서 『바나바의 서신』의 내용이 분명히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서 『디다케』는 분명히 『바나바의 서신』의 생성 이후에 기록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디다케』는 유대교적 경향인 도덕적 교훈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바나바의 서신』과 『디다케』에서 공통적으로 기독교적 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길”에 대한 설명이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이 두 문헌에서는 전반적으로 도덕주의적 경향이 감지된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클레멘트 1서』, 『디다케』, 『바나바의 서신』과 같은 속사도 교부들의 문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구속의 가치를 은혜의 관점에서 충분히 다루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은혜의 관점에서 조명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칭의론의 핵심이라면, 그런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3.2. 변증가(The Apologists)

2세기 중반부터 박해의 주원인인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고자 했던 기독교 저술가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저술가들을 기독교 변증가들이라 부른다. 변증가들에게 이르러서 인간의 이해가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대체로 이들은 일치하여 자유의지를 옹호했다.

2세기에 변증의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의 변증가는 단연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대략 100∼165년)이라 할 수 있다. 회심 이후 저스틴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왜곡된 시각에 반(反)하여 기독교를 위대한 철학으로 제시한다.

그는 자유의지를 변호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이나 거부의 방식으로 선택하여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인간의 자유의지의 변호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2세기의 운명론에 대한 전형적인 이교도적 반박의 경향성을 지닌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도 있다. 그는 스토아적 운명 이해에 반대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각자는 자기 잘못으로 죄를 범했다”고 한다.

저스틴은 플라톤과 그리스도교의 예언 관계를 언급할 때 기본적으로 양자의 사상은 상통(相通) 한다는 전제를 한다. 하지만 양자의 선후를 가린다면, 플라톤이 그리스도인의 예언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 이유는 예언이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서 발원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에서 보건데, 저스틴에서는 분명 헬라 철학적 이해가 보이면서도 교회의 전통에 기초한 교회 신학자로서의 면모 또한 돋보인다고 하겠다.

이레니우스(Irenaeus. 약 130∼200)는 목회자로서 그의 시대의 교회에 큰 악영향을 미쳤던 영지주의자들과 논쟁할 수 밖에 없었다. 현존하는 그의 중요한 저서인 『이단논박』(Adversus omnes Haereses)의 1∼2권에서 그는 여러 영지주의들의 교리를 설명하고 그들의 결정론적 운명론의 모순을 논박하고자 한다. 이레니우스 구원론의 요체가 되는 총괄갱신(recapitulatio)은 총괄(總括)하여 갱신(更新)한다는 것이다. 그는 “총괄”의 의미와 관련하여 바울의 본문인 에베소서 1:10을 언급하고, 갱신과 관련해서는 창세기 1:26을 지적한다.

특별히 창세기 1:26에 언급된 “형상(image)”의 의미와 관련지어 아담이 이성과 의지의 자유(free-will)을 갖춘 존재였음을 강조한다. 요약하자면,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의 결정론적 운명론을 논박하면서 최초로 인간의 죄론과 의지의 자유 양 측면을 균형있게 강조하고자 했던 교회의 신학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3 헬라교부(Hellenistic Fathers)

4∼5세기 이르러는 헬라교부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이해가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관점에서 활발하게 조명되었다. 인간의 현재적 상태에 관하여 헬라교부들은 대체로 헬라인들의 기질에서 비롯된 낙관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4세기에는 영지주의적 경향이 수용된 마니교가 유행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헬라교부들의 그런 경향은 마니교의 결정론적 운명론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헬라교부들은 성서적이기보다는 철학적 기반에 근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그들은 플라톤과 필로의 전통에 서서 그 시대의 운명론에 대항하고자 했던 것이다.

헬라교부들에게서는 죄와 관련된 아담과의 연대 교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헬라 교부들로는 먼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신학과 철학은 상통한다고 전제를 가졌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상태에서 창조되었지만 단계적으로 향상되어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됨으로 창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그의 사상에서는 사실상 원죄를 위한 여지는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의 결정론적인 오류를 의식한 나머지, 각자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클레멘트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을 완성시켰다는 오리겐(Origen. 185?∼253?년)은 “영혼 선재설(the theory of the pre-existence of souls)”을 가르쳤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나 영혼이나 귀신을 막론하고 일정수의 이성적인 존재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들의 본질은 같았고, 단지 다른 자유의지를 받았을 뿐이라 한다. 여기에서 오리겐은 영지주의자들의 결정론을 의식하여 분명히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여 그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은 하나님께 순종 혹은 불순종여부는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존재들의 결론적인 선택은 불순종이었다. 오리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본성은 이전의 죄로 말미암은 죄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초월적인 세계에서의 각자의 잘못된 선택에서 기인된 것이지 아담의 불순종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라면 결과적으로 오리겐은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오리겐의 설명은 클레멘트의 그것보다도 더 자유분방해 보인다. 그래도 클레멘트에게는 역사적 실체였던 창세기의 기사가 오리겐에게서는 설화로 변질되는 양상을 빚기 때문이다. 대체로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에게서는 희랍 사상의 특징적인 낙관적인 색채가 분명히 드러난다. 4세기 헬라 신학계의 경향은 죄는 인간의 자유의지 오용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이해는 바울의 칭의론적 이해와는 크게 차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세기에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논쟁은 단연 아리우스 논쟁일 것이다. 그 논쟁과 관련하여 니케아 신학의 챔피언이랄 수 있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3?∼373년)의 현주제와 관련된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아타나시우스의 인간이해는 성경적 기사에 분명히 기초하면서도 플라톤 철학적 경향성이 온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결과 스스로 부패하게 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그의 자유의지에 관한 견해는 약간 다른 톤을 유지한다. 처음 인간의 창조 시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분명히 선과 악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의 전적인 파괴를 주장하지 않는다.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사상이 그를 계승하여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에서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삼위일체적 진술에 관한 신학적 작업을 완수했다는 카파도키아 교부들(The Cappadocian Fathers)에게 영향을 미친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기아 교부들 사이에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보면 예상과는 달리 얼마의 차이점이 노출된다. 이들의 공통적 관심사는 성자의 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들의 신성을 구원론적 관점에서 해결해 보려고 하는 반면에,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굳이 그 주제를 구원론적 관점에서 고찰할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파도키아 신학자들 역시 알레고리를 도입하여 창세기 기사의 해석이 가능케 하고자 한다. 그들은 아담의 에덴에서의 삶을 자유의지가 부여된 완전한 생존으로 묘사한다. 아타나시우스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이처럼 공통적으로 의지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을 보면 그들 또한 결정론적 운명론의 상황을 의식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하겠다.

안디옥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역사적, 문자적 해석에 근거함으로 쉽게 영해로 가는 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년)으로 알려진 안디옥의 존은 과연 안디옥의 신학자답게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의 구절의 문자적 의미를 탐구한다. 창세기 1장 26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아담의 통치권을 의미하고, 또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표현에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 반복된 것은 사실상 인간이 노력한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첫 사람 아담은 의지의 남용 때문에 타락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악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마니교적 오류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담의 범죄의 죄책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상에 대해 헬라교부들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헬라교부들은 자유의지를 옹호했고 모든 인간의 죄의 뿌리는 바로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다, 이들 헬라 교부들은 후대의 정통신학 원죄의 교리를 그대로 강조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된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크리소스톰 모두 신생아는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헬라교부들에게서는 바울의 칭의론의 핵심인 아담의 죄의 유전을 명시한 구절을 찾기가 쉽지 않다. 헬라 교부들의 공통적인 사상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헬라교부들의 이해는 바울의 칭의론적 강조점과는 근본적으로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계속)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