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칼빈주의적 예배의 원리 II

김순정 | 기사입력 2019/09/28 [20:12]

정성구 박사, 칼빈주의적 예배의 원리 II

김순정 | 입력 : 2019/09/28 [20:12]

▲     ©리폼드뉴스

 

3. 칼빈주의적 예배의 특성

 

사실 예배를 논할 때 반드시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보면 예배란 제목으로 별도로 취급한 장도 없다. 그러나 칼빈 이후 모든 개혁교회가 지켜온 예배의식도 있고 또 예배에 대한 확실한 특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장에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의 예배의 신학이 무엇이고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예배를 논한다는 것은 반드시 칼빈의 입장만 따른다거나 칼빈주의적 입장에 있는 교회들의 전승만을 따른다는 것은 아니다. 개혁교회의 예배의 뿌리는 멀리 구약과 신약, 초대교회와 종교개혁까지 연결된 하나의 흐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로 다름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칼빈의 입장과 칼빈주의적 예배의 특성만 논하기로 한다. 어쨌거나 칼빈이 당시 예배에 대한 입장과 그의 주일 예배 형식이 후일 개혁주의 예배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우선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예배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칼빈은 예배에 대해 성경적인 것과 신학적인 것에 성실하려고 한다. 우선 그는 교회의 모든 실제적인 것들이 철저히 성경적 뒷받침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성경이 명령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칼빈은 신학적 의미 부여를 하는 모든 문제들이 언제나 성경 원리에 적용하도록 하였다. 모든 참된 예배는 사람들의 욕망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에 근거해야 할 것을 말했다.

 

둘째, 칼빈은 예배의 원리가 신학적으로 명백하다. 예배는 확실해야 할 뿐 아니라 반드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예배에 있어 감정적 요소를 부인하지 않았다. 신앙에서와 같이 예배란 전인격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적 예배의 특징은 잘 이해되어진 예배여야 할 것을 주장한다. 칼빈은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말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어지럽히는 꼴이 된다”고 했다.

 

셋째, 칼빈에게 있어 예배신학은 교훈적이다. 예배의식이 교훈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다.

 

넷째, 칼빈에게 있어 예배는 단순성이 있다. 특히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 요란한 의식이나 성명없는 의식을 반대했다. 칼빈은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칼빈의 예배에 대한 태도는 성경 중심으로 보면서 명료성, 단순성, 교훈적인 것을 원리로 삼았다고 볼 수 있겠다.

 

칼빈 또는 칼빈주의의 예배의 특성들은 하나님 편에서 예배자를 향해 오심의 원리가 강조되고 그 후에 이것을 근거로 해서 예배자 편에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인도되는 원리가 예배의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4. 칼빈주의적 예배의 강조점

 

예배에 있어 칼빈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로우심을 높이는 일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림은 그의 의에 기초를 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예배이다. 그런데 칼빈의 예배에 있어 강조점은 달리 말하면 천지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의 요구에 대하여 인간 편에서의 순종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응답하는 예배의 불가결의 요소는 어떤 것인가? 칼빈은 “교회의 어떤 집회도 말씀의 설교와 기도와 성만찬의 집행, 헌금의 봉헌 없이는 열릴 수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적 예배의 강조점을 몇 가지로 분류해 생각해 보자.

 

1)하나님의 말씀 선포로서의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다.

 

칼빈의 예배의 최대의 강조점은 말씀 전파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개혁자들이 가장 강조한 내용이다. 실제로 종교개혁은 다른 말로 한다면 설교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이 성경에 대한 재발견이었다면 이 성경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운동은 강단을 통한 말씀 전파에서 시작되었다. 실제로 개혁자들은 엄청나게 많은 설교를 감당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방은 주일날에는 두 번 또는 세 번의 설교가 있었고 주간에도 여러 차례의 설교가 있었다. 어떤 때는 설교자들은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설교하기도 했다. 설교 시간이나 회수는 대개가 회중의 요구에 따랐고 제네바에서는 세 교구로 나누어져 매주 15회의 예배와 설교가 행해졌다. 사실 당시 설교의 원고들을 살펴보면 설교가 퍽 길었다는 판단을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그 당시로서는 긴 것은 아니었다.

 

종교개혁 당시 말씀에 대한 의미는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을 모두 포함했다. 그때의 말씀 전파의 불길은 성경의 재발견과 때를 맞추어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새 번역의 시도가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말씀 증거의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사실 중세시대는 성경을 단편적 인용으로 겨우 알려졌으나 종교개혁 후부터 성경에 대한 놀라움, 뜨거움으로 대하였다. 그래서 전파된 말씀은 성경과 거의 동일시 되었으므로 개혁교회에서는 성경을 읽는 것과 설교는 포괄적인 의미로서 말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경에 충실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성경을 잘 해석하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개혁파적 설교는 강해설교로 특징지을 수 있고 이것은 달리 말하면 케리그마적 설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자들은 성경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하려고 힘썼다. 개혁자들에 있어서는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식이었다. 성경봉독 다음에는 바로 설교를 했고 찬송과 기도를 함께 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장로교회의 예배의식의 주축을 이루었을 것이다.

 

신약시대의 예배가 희생 예배의 형태가 아니고 말씀 중심의 예배라면 칼빈주의적 예배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재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개혁자들이 이해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도구로 인식했다. 그래서 루터는 “내가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오를 때나 성경을 봉독하기 위해 강당에 섰을 때 그때는 이미 나의 말이 아니라 나의 혀는 이미 쓰신 분의 편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칼빈은 “영으로 계신 하나님은 설교의 말씀 선포 가운데 그리고 그 말씀을 드는 청중에 꼭 같이 일한다”고 했다.

 

어쨌든 이미 보아온 대로 칼빈주의적 예배의 핵심은 두말할 필요없이 말씀 중심의 강조를 내세우게 된다. 그리고 언약의 말씀 선포 없이는 성찬도 사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루터와 같이 “말씀과 신앙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고 성만찬까지도 결국 말씀의 표로서 이해했다. 칼빈주의자들의 예배의 원리로서 설교들 가운데 둔 것은 성경 외의 것에다 무엇을 첨가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칼빈주의자들이 생각한 설교란 마치 예술가가 음악작품에 대해 해석을 하는 것과 같다고 이해했다. 쓰여진 작품은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연구해서 그 작품의 내용대로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설교라고 인식했다. 즉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길은 설교를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 중심의 예배는 단순성을 요구하면서 그 말씀 증거를 통해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적 예배에 있어서는 말씀 선포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2)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임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은 1차적으로 예배에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열망과 욕구충족에서 종교를 끌어내는 것을 거절했다. 칼빈은 십계명을 가르치는 선언에서도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주권을 이해하는데서 시작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강조하는 원리는 가견적 교회나 불가견적 교회를 막론하고 다함께 적용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원리에 순종해야 하며 예배의 원리도 1차적으로 그 의식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냐 아니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예배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에 대한 고백과 순종으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말한대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은 순종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적 예배에 있어서 기도와 찬송도 하나님께 대한 영광 개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3)셋째는 예배순서의 단순성이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와 비교해 볼 때 칼빈의 예배의식은 매우 단순하다. 특히 예배의 순서를 숫자적으로 단순화시켰다. 칼빈주의적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찬송과 기도이다. 그런데 이 둘을 하나로 보았다. 외냐하면 찬송은 기도의 노래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양도 주로 시편에다 곡을 부친 것을 사용했다. 칼빈은 쯔빙글리와 달리 음악은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선물”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시편찬송을 “종교의 중요한 요점”으로 말하기도 했다.

 

특히 예배음악은 “더 열렬하고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움직이고 작용할 수 있는 위대함 힘과 능력을 가졌다”고 칼빈은 말했다. 물론 기도도 성경봉독 이후에 기도하거나 설교 이후에 기도하기도 했으나 가톨릭의 미사처럼 복잡성을 띠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칼빈 또는 칼빈주의자들이 예배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인위적인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 예배의 순서는 단순했던 것이 사실이다.

 

4)조화로서의 예배

 

칼빈의 예배의 우리는 언제나 공동체로서의 예배와 예배의식의 조화를 찾아야 할 것이다. 사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 증거로서의 설교와 성만찬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칼빈은 생각하기를 성만찬은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물론 믿음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기나 성만찬을 통해 즉 보는 것을 통해 큰 도움을 입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듣는 말씀, 보는 말씀은 상호 영향을 주고 이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그리고 제네바에서 그의 교역 처음부터 끝까지 교부들에 호소하면서 매주일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 전파와 성찬식을 겸하려 애썼다. 그러나 실제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칼빈은 매일 한번 정도 밖에는 성찬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 그 후 제네바에서는 성찬식을 1년에 3회 혹은 4회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기도, 찬송, 그리고 성만찬이 예배의 합당한 순서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만 목회의 형편상 성찬의 횟수가 줄었을 뿐이고 그것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결론

 

우리는 위에서 칼빈주의적 입장에서의 예배의 원리와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결국 예배는 인간의 욕구나 편의에 의한 것도 아니고 즐기기 위한 것도 아니며 결국 신학적 문제이며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예배신학의 문제일 것이다. 개혁주의 예배 원리는 인간 중심의 요서를 제거하고 하나님 말씀 자체를 강조함으로 말씀을 통한 은혜의 체험을 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말씀 중심의 예배이며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 말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오신 원리가 강조될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을 바탕으로 해서 오직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에게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요약정리: 김순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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