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탐방] 충정교회 옥성석 목사
충정로에서 일산으로 이전, 성시화 감당

일산 성시화 북한선교 전진기지로 사명감당하는 충정교회와 옥성석 목사

리폼드뉴스 | 기사입력 2013/03/06 [16:25]

[교회탐방] 충정교회 옥성석 목사
충정로에서 일산으로 이전, 성시화 감당

일산 성시화 북한선교 전진기지로 사명감당하는 충정교회와 옥성석 목사

리폼드뉴스 | 입력 : 2013/03/06 [16:25]
리폼드뉴스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 소속된 교회를 탐방하는 [교회탐방] 시리즈를 연재합니다(리폼드뉴스 편집부).
 
▲일산에 위치한 충정교회 전경     © 리폼드뉴스
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죠셉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존재했거나, 존재해 온 또는 존재하고 있는 인류 문명의 수는 모두 28개이고 그 중 완전히 성숙한 문명이 21개, 문명으로 잉태되기는 했지만 탄생하지 못하고 유산된 문명이 2개, 문명으로 탄생하였으나 충실하게 자라나지 못하고 저지당한 문명이 5개라고 주장했다. 그는 완전히 성장한 21개 문명 중 현재 살아남아 있는 7개 이외의 문명은 다 멸망하였고 현존하는 문명들도 서구문명에게 절멸되었거나 동화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문명의 쇠퇴하는 원인은 창조적인 소수가 창조적인 힘을 잃고 단순히 지배적인 위치의 소수로 변화함으로써 이를 따르던 다수들이 모방을 중단하게 되고 그 결과로서 사회 전체의 통일성 상실 등으로 꼽았다.

사회학자 토인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교회 역시 교회 내 창조적 소수가 창조적인 힘을 잃고 단순히 지배적인 위치에서 교권을 가지면서 교회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므로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므로 사라져가는 교회, 무너진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일산에 위치한 충정교회는 담임목사와 더불어 창조적인 소수인 장로, 기타 집사 권사들과 더불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로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섬김의 본을 보일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섬김으로 교회 전체가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교회로 성장해 가고 있다.

◈충정교회의 설립

충정교회의 전신은 죽첨교회로 시작했다. 1945년 10월 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의 옛 이름인 ‘죽첨마을’이었다. 죽첨교회는 조기선 전도사와 이북에서 월남한 7명의 성도(정만복, 장동빈, 박옥래, 안명희, 이대련 외 2명)로 시작하였다. 조기선 전도사는 일본에서 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신학교 학장의 딸과 결혼을 하여 해방과 더불어 조국에 돌아와 죽첨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충정교회로 명칭변경은 1946년 4월이었다.

당시 일제에 의해 1942년을 끝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방의 해인 1945년까지(1943-1945) 폐쇄됐고, 대신 ‘일본조선장로교단’이라는 명칭으로 일제가 한국교회를 장악했다. 해방을 받은 이후 1946년에 와서 폐쇄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복구되고 그 무렵 초대 담임목사인 조기선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교회 명칭을 ‘죽첨교회’에서 ‘충정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노회소속과 제1차 성전건축

▲충정로에서 건축한 충정교회 © 리폼드뉴스
충정교회는 일제에 의해 폐쇄된 경기노회가 1946년에 복구된지 3년째되던 해인 1949년 4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장로회 신학과 운영은 장로회 정치에 근거한 교회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충정교회의 전신인 죽첨교회 설립은 당시 일본 신사(홍법사)였던 터를 2만원에 구입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22년만인 1967년 7월 1일에 충정로 3가 3-44번지 대지 162.7평을 매입하고 교회건축을 시작했다. 1968년 1월 21일에 기공식을 거행했지만 교회의 혼란과 담임목사의 변동으로 성전건축은 지연되다가 1970년 8월 10일 2년여 간의 건축기간이 소요된 가운데 예배당이 준공되었다.

1대 목사는 조기선 목사(1945. 10. 3-1948. 5), 2대 목사는 김동욱 목사(1950. 5 - 1951. 7). 제3대 목사는 황봉찬 목사(1953. 11-1955. 4), 4대 목사는 김순풍 목사(1957. 8. 15-1970. 10. 3)가 충정교회의 담임목사로서 그 시대의 교회를 이끌어왔다.

◈재5대 김영춘 목사 시대의 교회분쟁 사태

제4대 목사인 김순풍 목사가 사임하고 당시 부목사인 김영춘 목사가 제5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1971. 10. 25 - 1977. 2. 24). 광명시 철산리에 기증받은 교회 대지와 건물을 모 장로가 사적용도로 부당하게 사용하자 교인들은 공금횡령 등의 명목으로 당회에 징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담임인 김영춘 목사는 이를 거부하자 교인들은 소속인 서울노회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서울노회는 법에도 없는 대표 고소인에게 수찬정지 6개월을 선고했다. 그리고 담임목사인 김영춘 목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횡령혐의를 받고 있는 장로는 1심 재판의 관할이 노회가 아니라 당회라는 이유로 고소장을 당회로 환송했다.

교인들은 이에 불복하여 총회에 상소하였다. 총회재판국은 담임목사에게 책임을 물어 김영춘 목사에게 ‘목사직 위임해제 및 6개월 간 목사직 정직’에 처했다. 횡령혐의를 받고 있는 장로에게는 ‘장로면직 및 1년간 수찬정지에 처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김영춘 목사를 따르는 500명의 신도중의 약 150명은 총회재판국의 판결에 불복하였다. 그 이유는 ‘헌법 규정에 위반된 재판’이기 때문에 ‘재판이 시정될 때까지 장로회 총회나 그 산하 서울노회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된 교회가 됨을 선언’하며, “어떠한 교단의 간섭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교단탈퇴를 결의하고(1977. 2. 14) 일간신문에 공고하였다. 이들은 독립으로 있다가 합동 보수측 총회에 가입하였다.

▲ 초기충정교회 교우일동 제1대 조기선 목사(가운데) © 리폼드뉴스
그러자 서울노회는 김영춘 목사에 대해 ‘목사제명’에 처하고 대신 임시당회장을 파송하였다. 그러나 임시당회장은 직무집행을 방해당하여 부득이 충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별도로 임시 예배당을 마련하여 김영춘 목사에게 동조하지 않는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충정교회는 김영춘 목사 외 10명에 대해 직무집행방행금지 등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법원 판결(대법원 1981. 9. 22. 선고 81다276 판결)은 첫째, 김영춘 목사의 목사직 상실과 서울노회 임시당회장 파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명백하므로 그 효력은 인정했다. 둘째 500명의 신도중에 150명이 서울노회를 이탈하여 타 교단에 가입결의를 했다면 그 효력은 150명에게 미치는 것이지 참여하지 않는 교인들에게는 효력이 미친다고 볼 수 없다. 셋째, 탈퇴 결의는 전체 교인들의 결의라고 볼 수 없으므로 충정교회는 서울노회 소속이며, 김영춘 목사는 충정교회 당회장과 시무목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서울노회가 임시당회장을 파송한 것은 적법하다.

이로서 재판이 마무리될 때까지 4년이 소요되었으며, 분쟁발생시로부터 6년 동안 법정 다툼으로 교회는 엄청난 아픔을 겪게 되었다. 이같은 대법원 판결은 본안의 전제문제로서 종교단체의 결의의 효력이 문제된 사안에서 그 효력의 유무를 심리판단할 수 있으되, 이 때에도 종교단체 내부의 결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존중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는 판결이었다. 이는 교회에 대한 대법원의 중요한 판례로 남게 되면서 교회 권징재판에 대한 사법심사에 대한 교과서와 같은 판례였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교회가 교회재정과 교회재산(처분과 취득) 관리에 부정이 드러날 경우 교회는 엄청난 혼란과 분쟁이 휩쓸리게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목사와 장로가 교회재정을 임의로 사용하거나 교회관련 대지를 구입 및 처분할 때 횡령의혹을 받을 경우 교회는 파멸에 가까운 분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교훈이다.

충정교회는 이렇듯 약 10년 세월 동안 뼈아픈 시련을 겪는 등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제6대 담임목사로 한원엽 목사가 부임했다(1977. 11 -1984. 10. 21). 교회가 법원의 재판이 진행중일 때 부임해 와서 재판이 종결된 후 약3년간 목회를 하다가 교회에 사임을 하게 되었다. 한 목사는 브라질로 떠나게 되자 옥성석 목사가 부임하기 까지 부목사 체제로 이끌어갔다.

◈제7대 목사로 현 옥성석 목사의 부임과 일산으로 출애굽

제6대 목사인 한원엽 목사가 1984. 10. 21.에 사임했지만 제7대 옥성석 목사는 1989. 6. 4.에 이르러 부임했다. 그 공백 기간이 무려 5년이란 세월이었다. 10년동안 교회의 분쟁과 법정공방, 그리고 좌절과 절망과 상처로 가득한 교회에 사랑의교회(옥한흠 목사)에서 부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던 옥성석 목사가 36세의 나이에 충정교회에 부임한 것이다.

옥성석 목사는 부임한지 6개월이 지나서 본격적으로 제자훈련에 돌입하였다. 제자훈련으로 200명, 300명으로 부흥이 됐다. 교회분쟁으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전의 상태로 점점 회복해 갔다. 제자훈련을 통해 평신도 지도자를 세우면서 충정교회는 변화되고 있었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평신도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강력한 신뢰의 끈이 형성됨은 물론 이를 뒷바라지하는 당회의 행정정책은 일사분란하게 섬김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충정교회의 금요기도회, 금요성치회 © 리폼드뉴스
옥성석 목사는 제자훈련과 교회의 성장, 그리고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 목사는 충정교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해서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국 풀러신학교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를 담아냈다. 그는 과거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분쟁의 역사까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아픔이 컸던 만큼 치유와 회복의 가치에 대한 소중함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교인들의 아픔을 안아주면서 미래의 꿈을 그려나갔다.

이러한 미래의 꿈과 비전을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사실관계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옥 목사는 충정교회의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 박사학위논문에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충정교회가 위치해 있는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도심지역의 절대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둘째, 절대 인구의 감소 가운데 실제 충정교회 주변에는 18개의 교회들이 밀집해 있다. 셋째, 교회의 위치도 현재 대로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넷째, 현재 예배당 건물이 정식 허가를 받지 못한 무 등기 건물로서 차후로 요구되는 교육 공간 및 시설 확충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다섯째, 주차 공간이 절대 부족한 상태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미래 비전 있는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교회를 이전하는 길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옥 목사는 교회 이전에 대한 비전을 담아낼 때 교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고 강조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으며, 아무런 기회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담고 있으면,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이 나올 것이며, 수많은 위기나 어려움이 오히려 기회와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옥 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미래의 꿈꾸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두려워 말고 포기하지 말며,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는 것이었다. 물고기가 있는 곳에 그물을 내려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실 때는 언제나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러한 힘이 있는 설교, 꿈이 있는 설교는 성도들을 움직였고 당회를 움직였다. 교회 창조적인 소수의 꿈과 비전계획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당회원의 의지는 교인 전체에 누룩과 같이 퍼져 나갔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충정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여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갔다. 여기에 모두가 아멘했고,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에 아낌없는 지원과 격려를 보냈다. 결국 충정교회는 서울 충정로시대에서 경기도 일산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 일산 제2차 성전건축

▲현 교회 기념석     © 리폼드뉴스
1945년에 충정로에서 터를 잡아 설립되었던 교회 관련 건물들이 1999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모두가 순조롭게 매각 처리됐다. 200년 4월 13일에 일산 현 충정교회의 부지 위에서 기공예배가 드려졌다. 교회건축을 완공하고 2002. 3. 1에 헌당예배가 드려졌다. 이때 설교는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는 ‘새 일을 담당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했다. 대지구입과 건축비를 포함하여 60억 원은 적은 재원이 아니다. 그러나 충정교회는 이를 해결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 즉 헌당예배를 드린 것이다.

지하 3층과 지상 5층으로 건축된 충정교회는 지하 2층과 3층에 본당으로 설계하여 1000석의 좌석으로 동시에 10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다. 아파트 입구 종교부지에 바닥평수를 최대로 살려 본당으로 설계하므로 지상 5층을 교육을 위한 각종 공간으로 활용하는 등 실용적으로 건축되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옥목사는 충정로에서 일산으로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성도들 중에 어느 누구도 이전을 반대하거나 중도 탈락자 없이 신앙을 이어오게 되었으며, 이것이야 말로 일산으로 교회를 이전하는 일은 인간적인 욕망의 발로가 아니라 믿음의 결단이었음을 강조한다.
 
일산에서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은 인간적인 계산과 그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기적의 역사들을 온 교우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므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체험한 신앙은 오늘의 충정교회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특히 교회내에 기득권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 특징이었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특정 그룹들이 기득권 행세를 할 때 새로 등록한 교인들은 정착할 수 없다. 그러나 충정교회는 참 좋은 교회일 수밖에 없는 것은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섬기며, 희생하며 사랑의 열정을 갖고 교회중심, 하나님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는 열정이다. 이런 교회 구성원으로 가득한 교회는 좋은 교회일 수밖에 없다.
 
당회원은 최충식 강달성 문종수 이성현 지윤구 김경제 동재호 장현덕 장로(이상 8명) 등이 담임목사와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다. 

◈ 충정교회 옥성석 목사 목회 리더십

옥성석 목사는 고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B.A)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M.Div). 그리고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사랑의 교회 부목사를 거쳐 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1989년 6월부터 현재까지 충정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  충정교회 담임 옥성석 목사   © 리폼드뉴스
현재 총신대학교 운영이사이며, 한국교회봉사단 공동단장이며, 교회갱신협의회 상임회장이다. CTS 기독교TV 고양본부장을 맡고 있으며, 예장합동 기관지인 기독신문 논설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옥성석 목사는 부산 온천제일교회(당시 장차남 목사)와 사촌형인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밑에서 무려 16년 동안 부교역자로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난 이후 충정교회에서 적용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신도시인 일산지역에서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의 건강성을 보여준 교회이다.

이미 옥 목사는 충정교회의 <충정 2020 비전>을 통해 해외 선교사들을 단독으로 30명을 파송하며, 100여명의 선교사를 돕는 교회, 100개의 농어촌 교회를 지원하는 교회를 향하여 쉬임 없이 달려가는 교회이다.

특히 충전교회의 탄생은 월남한 분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통일을 대비한 북한선교에 대한 비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교회이다. 즉 충정교회가 일산으로 교회를 옮기면서 틍일을 대비한 선교비전을 갖고 있으며, 이를 실천해 가고 있다. 북한 외에도 이슬람권에 대한 선교활동에 대한 계획도 갖고 있다. 현재 이슬람 최대 국가 중 하나인 인도네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세워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육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지에 1만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효율적으로 현지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비전센터도 건립 중에 있다.

옥 목사가 목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말씀과 기도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인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자신에게 설교하여 먼저 은혜를 받고 성령충만한 가운데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패턴은 언제나 파워 넘치는 설교로 교인들에게 전달되었다.

특히 적용일변도의 설교인 교훈적 설교의 약점인 본문 말씀을 외면하거나 등한시 하곤 하는데 그의 설교를 듣게 되면 언제나 성경을 먼저 주해하고 본문의 뜻을 본문의 원래 기록된 의도대로 분석 및 해석한 다음, 그 말씀을 교인들에게 적용해 주는 방식의 설교는 성경 본문 말씀과 성도들의 삶의 현장을 연결 시켜주는 역동적인 설교로 유명하다.

▲충정교회 집회 안내     © 리폼드뉴스
지난 2월 24일의 설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교를 통해 교인들의 삶을 말씀으로 적용하고 있다.

“영이신 하나님은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곧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비결입니다. 이 진리를 일찍 터득했던 다윗은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그래서인지 그는 일생동안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사울 왕과 대항하지 않았고, 원수 갚지도 않았습니다(삼상 24:5-7). 왕위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던 요나단과는 생명같이 서로 사랑했습니다(삼상 20:17). 요나단의 아들, 장애인 므비보셋과 같이 식사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를 용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다윗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습니다(삼상 22:1-2).”

옥 목사의 설교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의 나타남으로 인하여 치유와 제자도로 헌신과 섬김이 있다. 옥 목사는 그리스도인을 제자훈련으로 양육하는데 혼신을 기울인 목회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강단에서 보여준 복음의 열정은 영혼의 갈증과 황폐화를 경험한 성도들에게 생수와 같은 담비로 은혜를 받는 5천명에 이르는 성도들과 함께 오늘도 일산 성시화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외선교사역과 대 사회적인 복음사역에 매진하는 교회로서 예장합동교단에 차세대 교회,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학의 혼재(混在)현상이 확산되어져 가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자유주의와 신신학 운동,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신학들로 말미암아 복음적 교회들이 위기를 겪게 되면서 교회가 쇠퇴해 가는 상황속에서 충정교회의 옥성석 목사는 이를 극복해 가면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차세대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옥 목사는 향후 휴전선 가까이에 아늑한 수양관을 마련해 도심생활에 지친 영혼들이 쉼을 얻어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비전도 갖고 있다. 그는 교계발전은 물론 열정적인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2012 대한민국 올해를 빛낸 혁신인물'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옥 목사의 저서로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사람 “야곱”, 어처구니를 붙잡은 “삼손”, 은혜의 타작마당에 누운 “룻” 외 다수가 있다.

충정교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722 / (031)908-1490/ www.choongju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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