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인 신앙동지회 조동진, '호남선 열차에서'(1948. 7. 27.)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4/30 [20:15]

52인 신앙동지회 조동진, '호남선 열차에서'(1948. 7. 27.)

소재열 | 입력 : 2021/04/30 [20:15]

 

▲ 51인 신앙동지회가 발행한 창간호 불기둥 표지(19     ©리폼드뉴스

 

194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남부대회)의 직영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는 김재준 교수 후임으로 송창근 교수가 교장이 되었다.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항거하다 학교를 퇴학 및 자퇴한 학생들이 51인 신앙동지회로 구성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교단의 신학을 지켰다. 51인이 학교를 떠난 후에 조동진 목사 역시 학교를 떠났다. 조동진 목사까지 포함하여 52인 신앙동지회라 한다. 당시 신앙동지회 학생들이 불기둥이라는 잡지를 출판하였는지 출판국장은 조동진이 맡았다. 1948년 7월 발행한 불기둥에서 부심이라는 필명으로 조동진이 "호남선 열차"라는 수필을 게재했다. 이 내용은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편집자 주)

  

비가 내린다. 차창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레일을 달리는 차바퀴 소리와 조화되어 한토막의 행진곡을 이루곤 한다. 때로는 쾌속조인 군대행진을 연상시키다가 무슨 그 슬픈 애조 띄운 곡조로 변하기도 한다.

 

나는 지루한 장마속에 10여 일 쉴틈 없이 장안을 뒤쓸며 겨우 일을 마치고 지금 호남선 차에 몸을 실었다. 그래도 예정보다 별로 늦지 않게 일을 끝낸 것은 한 조사와 나 선생의 수고하시 덕택이리라.

 

비뿌리는 차창! 유리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이따금 들리는 기적소리는 복잡한 사색에 잠겨 무거운 머리를 힘없이 뒤로 재치고 있는 나에게 주는 위로인 듯 느껴진다.

 

아마도 나와 호남선 열차와는 퍽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3년 전 북쪽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 짐을 부린 후 수십차 호남선 열차의 신세를 졌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들 가운데는 나를 전라도 출신으로 아는 이들도 많다.

 

실상 나는 전라도에 어머니와 동생들을 두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보다 또 다른 원인이 있다. 지난해 봄 일이다. 조선신학교에 있을 때 몸이 괴로워서 전라도에 와서 약 1주일을 휴양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50여명학생이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하여 그날로 교장 S박사를 찾아 갔다.

 

교장실에서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S박사는 그 때 분명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기억한다.

 

조군! 군은 어느 편인가?”

? 어느 편인가고요? 글세요.”

나도 군의 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침묵만 지켜주게 .”

침묵이라고요? 벌써 오랜 침묵을 깨뜨릴 때인 줄 아는대요 .”

 

나는 이렇에 반문하고 내일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고 여유를 두었던 것이다. 다음날 나는 학교 당국에 장문의 건의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건의문 말미에는 나의 태도를 선명히 하는 성명서까지 첨부하였다.

 

이 건의문은 테잎프로 인쇄하여 1통은 교장 S박사에게 1통은 K목사에게 또한 통은 퇴학 처분을 당하여 학교를 쫓겨나간 동지들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통은 내가 간직하여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내가 이 건의문을 가지고 S박사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자못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으나 그래도 그자들을 다시 복교시킬 의사는 전연 없노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섭섭한 일이었으나 S박사와 사제로서의 최후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 수속을 하러 갔을 때부터 나는 S박사에게 많은 후대를 받았던 것이다. 나의 형편을 아는 S박사는 입학식 당일에도 모씨를 소개하여며 앞으로 어려운 사정을 고하며 부형같이 의지하라고 위로까지 하여 주셨던 것이다. 과연 나는 그에게 적지않은 도움을 받았다.

 

이렇듯 나에게 힘이 되는 S박사였고, 내가 애써 입학한 이 학교였는데 어찌하여 떠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가? 그곳에 머물렀던들 S박사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억울한 누명도 않았으리라! 이제 S박사와 또한 그의 소개로 나를 돕던 분들의 호의는 잊을 수 없는 한개의 추억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들을 존경도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사랑으로 대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달콤한 데에 언제까지나 취하여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 그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이 사건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학교를 나온데 대하여 일반은 그 동기 여하를 묻지도 않았었다.

 

일부 학생들은 51명에게 동정하여 퇴학하였다고 동정퇴학자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까지 붙여 주었다. 좌우간 학교를 물러 나오게 된 이유를 길게 늘이고 싶지는 않다. 학교를 나온 나는 얼마 후에 다시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우연히 한 차에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R형을 만났다.

 

나는 그날도 폭풍과 함께 빗방울이 사납게 차창에 부딪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R은 나와 마주 앉아 여러 말로 논쟁하였다. 세 시간 이상이나 말을 주고 받고 하였으니 그 전부를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그는 아직 배우는 도중에 있으니 좀더 배워 보라는 것. K교수는 사회적으로도 학자라는 것.과거 평양신학교의 교수는 너무 고루하고 단순하여 세계 사조에 뒤떨어졌다는 것.금번 사건에 관계된 학생들은 무식하고 영자하나도 변변히 모른다는 것 지방관념에 따르는 대립이라는 것 사실상 성경은 단순히 신언(神言)으로 무조건 받을 수는 없다는 것 보수주의 신앙은 현대 과학 문명의 세대에 존립하기 어렵다는 것 등을 말하였고.

 

나는 이에 대하여 “K교수이거나 S박사이거나 그들의 배운 신학과 가르치는 신학은 장로교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 그런고로 그들에게서는 배울 수 없다는 것. 금번 학생에 대한 처사 한 가지만으로도 그들의 과오가 크지 않느냐는 것 우리는 지방관념이라고 떠드는 모략의 출처를 안다는 것 K교수의 교안에 대하여 심사위원회에서도 지적하지 않았느냐는 것 그대가 신학에 입학할 때의 신앙과 현재의 신에 대한 태도와 관념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 .

 

사회적으로 큰 학자라고 신학자로서도 그러하지는 못하다는 것 평양신학교에서 배우지도 못한 자가 어찌 비난할 담력이 있느냐는 것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어찌 신의 대변자될 용기가 있느냐는 것보수주의 정통신앙만이 현대의 타락된 문명과 싸울 수 있고 속화된 인본주의 신학은 타락된 사회와 합작을 꾀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 등의 반박을 하였다고 기억된다.

 

그날 나는 흥분된 가슴을 억누르며 차에서 내려 비뿌리는 길을 R형과 같이 걸었으나 헤어질 때까지 작별 인사 밖에는 별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호남선 열차를 괴롭힌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부산에 있을 때 일이다. 회지편집에 여념이 없는데 난대없는 편지 한 장이 날라왔다. ○○노회에서의 소환장이었다. 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만사를 물리치고 달려갔다. 또 역시 호남선 열차를 탔을 때 온 종일 비가 내려 차창을 적시는 것이었다.

 

나는 당일 그 노회 ○○부에 찾아 갔다가 여기서도 어이없는 소리가 나의 청신경을 놀라게 했다. 그야 교회를 사랑하심으로 하신 말씀들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좀더 아량있는 충성으로 했으면 좋을뻔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회 대중 앞에서 큰 죄인을 잡은 듯이 소리치며 귀에 피도 안 마른 놈-” 이니 되지 못한 놈이니 하는 인신공격까지 하였다 한다. 내가 이것을 어찌 한탄하랴마는 그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그다지 잘한 일은 못될 것이다.

 

듣건대 모목사가 그 글이 문제된다면 문학자들에게 심사를 받은 후에 오류를 지적케하자고 하는데 - 그리 문학적도 아니다는 등 젊은 것들이 되지 못하게등 담지 못할 말이 쏟아졌다고 들었다. 문학적이던 문학적이 아니던 그래도 지상에 나타난 기사이니 오류를 지적하려면 그 문장의 본의를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러한 글을 쓰게 된 필자의 동기도 어느 정도 살펴야 할 것이 아닌가?

 

개인의 인신상에 공격까지 하여 가며 일을 하여야 할 이유는 어디있는가? 그나마 상대자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 신학도가 아니었든가? 진정 교회를 사랑하신다면, 개인의 생명을 귀히 여기신다면 좀더 다른 방도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교회에 충성키 위하여 그 문장을 문제 삼았다면 우리도 교회를 사랑하는 까닭에 그런 글을 쓴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 기사가 우리 회지에 실려졌기 때문에 문제된 것이 아닌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를 부인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들의 우리회에 대한 증오심이 모교 혹은 그 비슷한 배후관계에 기인함인 것을 규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도 긍정하고 싶지는 않다.

 

일개 잡지의 기사가 그리 문제가 된다면 오늘날 조선교회에는 그러한 사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유해무익의 인쇄물을 그들 앞에 적잖게 증거물로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우리에게 신경을 집중시킨다면 그들 신경에 자극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장시간 노회 결의에 의한 것이라 하여 수다한 질문을 받았고 나는 이에 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도 하였다. 나는 최후로 그들에게 본의 아닌 물의를 귀노회에 일으킴을 사과한다고 말한 후 소환책임측으로서는 나에게 잘못 없음을 관하 교회에 선언하여 주기를 요청한다고 말하고 또 다시 서울행 호남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날 역시 비오는 날이었다.나는 비에 젖은 비옷을 벗지도 않고 입은 채로 자리에 걸터 앉아 차창으로 지나가는 전신주를 헤이면서 서울로 향하였던 것이다. 서울에서 나는 전기 노회의 목사로 나를 소환한 직접책임자인 G목사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일체의 경과를 들은 후 나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를 표하였고 그들의 고집에 나는 할 수 없이 순응한 것 뿐 본의는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비오는 호남선!

비뿌리는 차창!

길게 뽑는 기적소리!

철로를 달리는 차 바퀴의 요란한 소음!

그리고 땅을 기어가는 화통의 연기아마도 이 모두가 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비 오는날 호남선 열차를 타지 않으면 아니되던 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 한개의 환상이 될 것이다

 

아직도 끝없이 비는 내린다. 퍼붓는 비와 함께 흩어진 나의 머리 속은 더 많은 사색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때마침 기-인 기적소리와 함께 철교를 건너는 요란한 소리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기운 나의 가슴을 더욱 난마(亂麻)같이 흔들어 준다.

 1948.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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