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청암(⾭岩) 이환수 목사의 생애와 사역

발제자: 장영학 한국교회 역사자료박물관 관장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04 [12:24]

공적연구논문: 청암(⾭岩) 이환수 목사의 생애와 사역

발제자: 장영학 한국교회 역사자료박물관 관장

김순정 | 입력 : 2021/05/04 [12:24]

 

  이환수 목사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들어가면서

 

이환수 목사는 우리 총회가 가장 어려운 때인 1959년 제44회 총회 시에 경기노회장으로 참석하여 혼란의 현장에 있었으며 불법으로 총회를 이탈하는 자들을 직접 목격한 후 총회 수습에 앞장서서 일하였기에 고려파 합동과 재이탈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시기인 1962년 제47회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개혁주의 신학을 사수하며 총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앞장선 인물이다.

 

1. 이환수의 신앙적 배경

 

이환수(李煥秀, 1909-1985) 목사는 190928일 황해도 안악군 안곡면 북삼리 573번지에서 부친 이익범과 모친 김익성의 3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악군에는 1889년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전래 되어 안악군 대원면에 지능교회가 세워지고 5년 후 1894년에 안악읍교회와 무석교회가 세워졌다.

 

이환수 목사의 신앙생활은 언제부터인지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모친이 먼저 믿었지만 온 가족이 믿지 않아서 어린 시절 교회 출석을 하지 않았다. 14살이 된 1923년 가까운 재령군의 명신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환수는 명신중학교를 입학 후 사정에 의해 명신중학교 2년 중퇴하였으며 나중에 교원자격증을 획득한 후 1932년부터 월산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환수는 193425세에 5살 연하인 최선희와 결혼하였다.

 

2. 이환수의 소명과 신학

 

이환수가 믿음 생활을 시작할 무렵 재령은 황해도의 미북장로교 선교부가 설치되어 선교 사역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명신학교를 비롯한 성경학교들이 활발하게 운영될 시기였다. 특히 이환수가 믿고 세례받을 당시 재령읍교회가 부흥하여 1922년 재령서부교회를 분립하였으며 재령읍교회는 재령 동부교회로 불렀다.

 

이후 1934년 재령읍교회의 자매인 최선희를 만나 결혼 후 재령에서 신혼생활을 하는 중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서 소명을 받고 1938331일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40년에 새롭게 개교한 평양신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였다. 이환수 전도사는 신학교 재학 때인 1940년 당시 황해노회의 3개 교회의 담임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그 후 이환수 전도사는 1942년 말 황해노회를 떠나 황동노회 용현리()교회(황주군 흑교면 용현리) 담임으로 부임하였으며 1943520일 황동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이환수 전도사는 고향과 노회를 떠나 외지인 황주군 흑교면의 용연교회로 부임하여 황동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본격적인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다.

 

3. 이환수 목사의 목회 사역

 

이환수 목사가 안수를 받고 사역을 시작한 곳은 황주군 흑교면 용연히 용연리교회이다. 이 교회는 1896년 이길함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 교회이다. 이환수 목사는 용연리교회에서 일제말기 3년동안 목회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용연리교회를 목회하는 중 공산당의 핍박이 일어나자 일제의 핍박으로 엄청난 신앙적 시련을 겪으면서 목회하였기에 이듬해 1946610일 월남하여 서울에서 새롭게 목회를 하였다.

 

4. 이환수 목사의 청암교회 목회

 

이환수 목사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공산화 정책과 기독교도연맹의 비성경적 주장을 공산당과 함께 억압적으로 추진하는 것을 보고 일제보다 더한 핍박을 예상하고 1946610일 신앙의 자유와 바른 목회를 위해 월남하여 서울 청암동에 정착하였다.

 

처음에는 황해기독동우회를 조직하여 황해도 출신 학생들을 돕는 일을 위해 원효로에 덕영학사를 운영하였다. 이환수 목사가 한국교회와 총회적으로 일하기 시작하는 발판은 청암교회의 개척이다. 월남 후 정착을 위해 기도하던 중 서울에서 과거 평양 장로회 신학교 스승인 박형룡 박사의 귀국과 신학교 설립이 진행되었다.

 

19495월에 정초식을 한 후 2개월 만에 724일에 헌당식을 하였다. 이때 청암교회는 1949510일 남대문교회에서 열린 제7회 경기노회에 임시 목사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1950129일 청암교회 위임목사로 당시 경기노회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6. 25전쟁이 일어남으로 제주도로 피난가서 피난민을 위한 피난민 제주읍교회를 설립하고 섬겼으며 대한신학교 제주분교로 함께 섬겼다. 이환수 목사는 전쟁이 끝나고 19539월 서울로 완전복귀하여 청암교회의 본격적인 목회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5. 이환수 목사의 노회 사역

 

이환수 목사는 1949년 경기노회에 가입하여 19501월 위임목사가 된 후 노회와 총회를 섬기는 일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경기노회는 1946년 제1회로 시작하여 1949년 제7회로 남대문교회에서 모였다. 이때 청암교회와 이목사가 정식으로 가입하였다.

 

이환수 목사는 경기노회 회원으로서 19521118일 영등포교회에서 모인 제59회 정기노회에서 총회 부총대로 선정되었으며 19531117~19일까지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61회 정기노회에서 총회 총대로 선정되어 총회 일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7년 부노회장을 거쳐서 1958년 제71회 노회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선출된 총대 문제가 노회 내에서 갈등을 일으켜서 처음 선출된 정기노회의 총대와 다음 임시노회에서 재선거하여 선정된 총대 문제가 제44회 총회 개회 벽두부터 분쟁이 일어나 결국 정회와 함께 통합총회의 이탈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환수 목사는 비롯하여 여러 명의 목사 장로들이 합심하여 오늘의 우리 총회와 경기노회를 지키며 새롭게 부흥하는 일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하여 1972년 경기노회 100회 기념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6. 이환수 목사의 총회 사역

 

이환수 목사는 1954년 제39회 총회의 총대로 참석하여 총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경기노회장이 된 후 이듬해 제72회 노회시 총대 선출의 문제를 가지고 1959년 제44회 총회 총대로 참석하여 총회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1960년 제45총회 총대로 참석한 후, 고신과 합동하여 열린 제45회 총회에서 부회장으로 당선되어 합동총회 임원으로 총회장 한상동목사와 함께 총회를 섬겼다.

 

1962년 제4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일을 시작한 후 10월 말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합동해온 고신 교회들이 다시 이탈 환원하였다. 1963년 제47회 총회를 다시 은혜롭게 개회하여 총회가 안정되었으며 46회 임기중 총회 설립 50주년 기념대회를 실시하고 기념행사들을 은혜롭게 주도하였다.

 

7. 이환수 목사의 연합운동 사역(N.A.E 활동을 중심으로)

 

NAE(복음주의협회,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활동은 1942년 미국교회협의회가 WCC운동이 자유주의 경향을 띤 것에 대해 반기를 든 근본주의 내의 젊은 학자인 칼 헨리(Carl Henry), 헤럴드 오켄가(Harold Okenga)등이 조직한 모임이다.

 

한국 NAE19518월 유엔을 통해 미국NAE 구제위원회의 전쟁 구호물자를 보내옴으로써 관련을 맺기 시작했으며,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반대하면서 모임을 가진 신앙동지회의 회원들이 NAE활동을 지지하고 수용했다. 1952724-31일까지 나주 남평교회(엄두섭목사 시무)에서 개최돤 신앙동지회 하기수양회에서 한국NAE를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429일 서울 남산감리교회에서 열린 제5회 총회에서 이환수 목사가 제5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8. 이환수 목사의 사역 공헌

 

이환수 목사의 사역은 1938년에서 197840년간의 활동이었다. 1938년 안악군의 원동교회를 담임하면서 성역을 시작하였고 1948년 월남하여 청암교회를 설립한 지 30년이 지나면서 사역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정년제를 실시하기 전이었기에 4년이 지나서 1982174세가 되면서 담임목사를 사임하게 되었다. 그는 혼란기이며 신학적으로 총회적 갈등이 요동칠 때 항상 성경적 바른 신앙을 고수하며 목회하였기에 신앙동지회 후배들을 지지하여 기독교선교협회(NAE) 회장까지 지냈다.

 

장로회신학교의 박형룡박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보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경기노회황해도목회동우회그리고 신앙동지회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오늘의 총회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셨다. 특히 통합총회의 이탈과 고신총회의 합병과 환원이탈 등으로 더욱 혼란스러웠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총회를 지킨 것은 가장 큰 성역 공헌으로 볼 수 있다.

 

맺는말

 

이환수 목사는 1948년 박형룡 박사가 상경하여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으며 신학교 숙소 옆에서 1948919일 박형룡 박사와 함께 청암교회를 개척하였다. 또한 이환수 목사는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면서 당시 일어난 자유주의적인 에큐메니칼(WCC)운동에 맞서며 총회의 신학적 정통성을 지키는 일에 앞장서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 사상과 신학교육의 사역을 헌신적으로 보필하였다.

 

1958년 경기노회장과 1962년 제47회 총회장으로 일하면서 1959년 통합 이탈의 혼란한 상황과 1961년 고신 합동과 1962년 환원 이탈의 어려움 속에서도 경기노회와 총회를 지키는 일에 헌신적으로 수고하였다. 이후 198274세로 청암교회를 은퇴하였으며 3년 후 19856307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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