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환 박사 소천 11주기를 맞이하면서

총신대학교와 칼빈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5/09 [18:59]

김의환 박사 소천 11주기를 맞이하면서

총신대학교와 칼빈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소재열 | 입력 : 2021/05/09 [18:59]

 칼빈대학교 총장 재임시 기념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2021년 5월 10일은 김의환 박사가 2010년 5월 10일 오후 2시 30분에 향년 77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소천한지 11주년이 되었다.

 

김의환 박사가 칼빈대학교 총장에 재임 중일 때 필자의 “51인 신앙동지회의 자유주의신학과의 투쟁”이라는 주제의 한국교회사 철학박사 학위 논문에 지도교수였다. 논문 지도를 받으면서 51인 신앙동지회 회장이었던 정규오 목사의 관계에 대해 설명을 듣곤했다.

 

김의환 박사는 <도전받은 보수신학>을 1970년 11월 30일에 내놓았다(생명의말씀사 刊). 이때 박형룡 박사의 추천사가 있었다. 박형룡 박사는 추천사에서 “저자 김 박사는 미국 유학에서 귀국하여 우리의 고군분투에 참여하여 선모용전(善謀勇戰)하신 지 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 교회의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수호하는 노력에 수고를 비상히 하여 왔다”라고 했다.

 

이어서 “출장입상(出將入相)격으로 교내에서 교수와 교외에서 순회 강연에 추가하여 교회의 국제적 회합들애 왕래도 자주 있어 과로가 될 정도의 수고를 담당하고 계신다”라고 하면서 “다장(多忙) 중에 붓을 잡아 본서를 저술하심은 그의 바른 신앙 수호를 위한 열정의 소치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1970년 초판에 대해서는 문제를 지적하지 않다가 1971년 재판 때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 리폼드뉴스


초판 이후 4개월이 지난 1971년 4월 10일에 재판인쇄가 되어 출간되고 박형룡 박사는 재판된 책에 자신의 견해를 표시하여 저자인 김의환 박사에게 전달되었다. 김 박사는 박형룡 박사의 의견표명한 원본을 필자에게 주어 필자가 간직하고 있다.

 

김의환 박사는 1967년 6월 15일 총회신학대학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을 설립하고 제1회 이사회가 1967년 6월 15일 오후 3시에 서울 순화동 평안교회당 회의실에서 소집됐다. 이날 박형룡, 박윤선, 이상근, 최의원, 차남진, 안용준 교수는 정교수로, 김득룡 교수는 부교수로 임명됐다.

 

이날 조교수로 간하배, 김의환, 박병춘, 김혜라 교수가 임명되었다. 김의환 박사가 조교수로 임명된 때가 바로 제1회 학교법인 이사회 때였다. 제1회 이사회에서 명신홍 박사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제9회 이사회(1969. 5. 27)에서 명신홍 박사가 교장에 사임하고 박형룡 박사가 교장에 선임됐다. 이듬해 2월 9일 이사회에서 박형룡 박사를 총회신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됐다. 이날 이사회에서 박형룡, 박윤선, 명신홍, 이상근 최의원, 안용준 이상 6명의 교수가 정교수로 임명되고, 김득룡 박사를 부교수로, 간하배, 김의환, 박병훈, 최종수 이상 4명이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김의환 박사는 1970년 2월 9일에 총회신학대학의 부교수로 임명된 후 1973년 3월에 정교수로 임명됐다. 1976년에 교수직을 사임한 후 1995-99년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봉사했다. 이어 2002년 3월에 칼빈대학교 제3대 총장을 역임했다.

 

김 박사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공헌을 교회사적으로 기리고 싶은 심정으로 두 분의 사진을 촬영하여 1995년 총신대학교 총장 부임과 함께 ‘라이브 사이즈’로 확대하여 종합관 2층 로비에 계제했다. 이 사진이 김의환 박사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총신대학교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있다. © 리폼드뉴스


그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설립에 참여한 관계로 교단 지도자들로부터 타교단 교수들과 신학운동을 같이 하느냐며 일부 교단 지도자들에게 노여움을 샀다. 1968년을 전후하여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을 설립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참여한 김의환 박사의 폭넓은 차원의 선교적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1959년 통합측과 분열 이후 교단 내부적으로는 철저히 WCC를 반대하고 있던 입장에서 타 교단 신학자들과 연대하고 있었다. 이때 김의환 박사를 신복음주의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김 박사는 1967년 3월 부교수로 재직 후 이듬해인 1968년 <기독교사상> 6월호에 “비판적 입장에서 본 WCC”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제59년 총회(1974)에서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과 관계단절을 결의했으며, 이같은 결의는 제68회 총회(1983)에도 계속되었다. 이 결의가 아직까지 번복되는 결의가 없었으므로 지금도 이 결의가 유효하며 관계자들을 제재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문제이다.

 

  © 리폼드뉴스


김의환 박사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설립 추진에서 손을 떼고 나서 보수신학이 단순하고 옹고집만 피우는 방법의 보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을 그 유명한 <도전받은 보수신학>란 책에 속타는 마음의 중심을 밝혔다. 이미 전술한 대로 박형룡 박사는 이 책에 추천사를 써 주었다. 본서는 두 번의 증보를 거쳐 무려 30판이 넘게 발행되기도 했다. 

 

그의 추천사 말미에는 “필자는[주, 박형룡 박사] 저자의 바른 신앙을 수호하려는 열정에 공감하여 본서의 나타남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바이다. 전국 교계는 본서의 열렬한 호소에 천응백락(天應百諾)하여 바른 신앙 수호의 선전(善戰)에 일층 더 강대한 합심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저자의 수고에 만강(滿腔)의 감사를 드리며, 교계의 애독과 혜고(惠顧)를 강요하는 뜻으로 이 몇 줄을 권두에 기입한다”라고 추천했다.

 

박형룡 박사가 1971년 9월 총회에서 이후 1972년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교장직에서 물러난 후 박형룡 박사의 정치적인 후원자들인 정규오 목사와 황해도 출신 교권 지도자들이 총회 내 중심에서 벗어난 소수파가 되었다.

 

▲ 깁의환 박사가 촬영한 사진을 총장 취임시 종합관 2층에 설치했다.  © 리폼드뉴스


장동민 교수가 평가한 대로 박형룡 박사와 그의 정치적 후원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반대하는 입장에 섰던 사람 중에 김의환 박사와 김희보 박사가 있다고 믿었다. 총회 교권 중심인 다수파에 의해 박형룡 박사와 그의 정치적인 후원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두 신학자의 신학사상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며 신복음주의에 대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56회 총회(1971. 9. 23)에 경기노회를 통해 “총회신학대학 교수 신학동향”이 헌의되었다. 이 헌의는 김의환 박사와 최의원 교수를 목표로 신복음주의 신학과 토착신학에 관한 건이었다.

 

이 헌의는 김의환 박사가 1970년 11월 30일에 발행한 <도전받은 보수신학>에서 신복음주의를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형룡 박사가 이 책에 추천사를 써 줄 때에는 총신에서 아직 박형룡 박사가 의원면직 되기 전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때까지만 해도 추천사에서 김의환 박사의 신학이 문제 없다고 했다.

 

김의환 박사 문제에 대한 경기노회 헌의가 제56회 총회(1971)에서 처리될 것으로 알고 박형룡 박사는 총회 개최(9월 23일) 16일 전에 정규오 목사에게 편지하여 51인 신앙동지회 회원들과 대응할 것으로 호소하면서 자신도 “기도로 후원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제57회 총회(1972) 정치부는 권면으로 이 사건을 일단락 되었다.

 

박형룡 박사와 함께 김의환 박사를 공격한 정규오 목사는 김의환 박사가 신복음주의자로 몰아 세웠다. 그런데 어느날 정규오 목사는 미국을 방문하여 김의환 박사를 만나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전남노회 정기회 중에 정규오 목사는 “미국가서 김의환 박사를 만나보니 보수신학자더라”고 발언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 동명교회 담임목사였던 최기채 목사가 이어서 정규오 목사를 겨냥하여 발언하기를 “언제는 신복음주의자로 몰아세우더니 이제 와서 보수신학자라고 말하니 도대체 신학에 대한 정확한 판단기준이 무엇인가”라고 되묻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규오 목사가 전남노회를 장악하고 있던 때라 젊은 최기채 목사의 발언은 회원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려왔다(소재열, 박사학위 논문 235쪽 참조).

 

  필자가 정규오 목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03. 10. 25) © 리폼드뉴스


정규오 목사는 1978년 총신이 좌경화 되었다면 총신복구신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으로 취임할 때 취임사에서 “현 총신대학은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로서는 완전히 이탈하여 신학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운영적인 면에서 사실상 관계가 없게 되었으므로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총회신학교를 복구하여 명실상부하게 총회가 직영하는 총신을 만들기 위하여 지난 12월 7일 서울시 방배동 영광교회당에서 총신을 복구하는 이사회가 모여 불초한 종이 이사장에 피선이 되었다”라고 했다(장로회총회보, 1919. 1. 10).

 

복구위원회의 공고문에서는 “신학이 정치를 지도하지 못하고 정치 밑에서 신학이 지배되고, 유린되고 있다. 그런고로 본 위원회는 총회신학교 복구를 착수한다”고 했다(1978. 11. 10. 총회신학교 복구위원회 공고문).

 

총신이 문서설과 신복음주의로 좌경화되었다며 1979년에는 분열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의환 박사는 1995년 3월에 총신대학교 총대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며, 2002년 3월에는 칼빈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이는 모두 구개혁측과 분열한 이후의 일이다.

 

김의환 박사의 신학사상을 거명하면서 총장직을 수행한 총신대학교와 칼빈대학교가 좌경화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 구개혁 측과 합병이 이루어졌다.

 

이미 살펴본 대로 박형룡 박사는 김의환 박사를 제재할 때 51인 신앙동지회와 회장인 정규오 목사의 도움을 얻게 되었다. 정규오 목사는 광주중앙교회 후임자인 변한규 목사와 김의환 박사를 불러놓고 1979년에 분열된 개혁측과의 합동을 간곡히 부탁했다. 정치적 교권에 의한 갈등을 화해로 이끌어가는 모습들은 필자가 김의환 박사에게 논문 지도를 받으면서 확인한 내용이었다.

 

필자는 칼빈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면서 2005년 합병 이전 2003년에 정규오 목사를 만나 인터뷰한 일이 있다. 1979년 1월 전남노회 개편노회와 관련하여 김길현 목사와 최기채 목사 측과 심한 분쟁이 있었는데 그때 김길현 목사 측과 최기채 목사 측은 “구원도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같은 입장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정규오 목사는 2003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감정이 앞설 때 무슨 말인들 못했겠느냐”라고 말하면서 “신학과 신앙이 같으므로 합병하지 못할 일이 아유가 없다”라고 했다. 

 

김의환 박사는 구개혁 측이 떠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와 직영신학교인 총신대학교 총장, 칼빈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 신학적인 문제는 지적되지 않았다.

 

김의환 박사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88세이다. 현재 총회 내에서 일고 있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분의 리더십을 그리워 하는 것은 그만한 리더십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 11년이 지났음에도 그 어르신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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