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51인 신앙동지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그 성격

발제자: 소재열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20 [10:44]

공적연구논문: 51인 신앙동지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그 성격

발제자: 소재열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김순정 | 입력 : 2021/05/20 [10:44]

 

 

시진위쪽부터 남평교회 51인 신앙동지회 기념석(남평교회), 동지회가 발행한 불기둥(창간호) 51인 신앙동지회 일동(중간), 아래 왼쪽 2005년 생존해해 계신 신앙동지회, 아래 우측 남평교회에서 있었던 신신앙동지회 제2회 수련회 주보(1953. 7. 24)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1. 서론

 

한국에 천주교회는 개신교회보다 100년 전인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00년 동안 천주교의 많은 신부와 신자들이 피를 흘리며 순교를 당한 이후 개신교 의료 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1884920일에 입국했다. 이듬해에 최초로 목회(목사) 선교사인 미국 북장로회 소속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가 입국하여 본격적이 선교가 시작되면서 가톨릭교회가 받은 탄압은 상대적으로 면제되어 선교조직을 마련하여 활동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평양신학교가 1901년에 평양에 설립되어 1907년에 최초로 7인의 목사를 안수하여 임직하여 독노회가 조직되었으며, 선교사 공의회 시대의 7인 대리회를 7개 노회로 조직하여 19129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일제는 끊임없이 한국의 교회를 억압하여 장악했으며, 신사참배와 창씨 개명을 요구했으며 총독부는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1939. 9. 8.)는 폐쇄된 평양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하고 인가신청을 내어 194029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농후한 채필근을 교장으로 하여 새 출발을 하였다.

 

총회직영신학교로 승인받은 조선신학교는 그동안 선교사들을 통해 전수된 정통 보수신학에 반한 자유주의 신학, 파괴적인 고등비평으로 교육되고 있었다. 하지만 확고한 정통 보수신학의 입장에 선 정통신학을 고수한 일부 학생들은 자유주의 신학적 교육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총회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가 총회의 신학적 입장을 거부한 교육을 하고 있다며 반기를 든 학생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1947. 4. 16.)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신학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데 역할을 했던 일련의 사건중심에 있던 학생들이 바로 ‘51인 신앙동지회이다. 본고에서 51인 신앙동지회가 박형룡과 함께 총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2.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서로 다른 신학적 정체성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는 교회 재건과 노회, 총회 재건을 위해 분주했다.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전수된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한 정통보수신학에 의해 운영되었다. 서울에서 1939년 가을에 조선신학교가 개교되었다.

 

해방 직후 조선신학교는 한국에서 유일한 신학교육 기관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신학교는 김재준과 송창근, 함태영, 윤인구, 김영주, 김대현 등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설립의 실무를 담당했던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의 건학정신에서 신앙양심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 ‘세계 석학들의 제학설 소개등 과거 보수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정통보수신학과는 전혀 다른 내용과 성격을 추구하였다.

  

김재준은 194612새사람에 발표한 진리와 신앙-정통의 도취란 글에서 정통보수신학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정통보수신학을 정통적 이단’,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 ‘정통신학을 사탄의 위장술리고까지 하였다. 이같은 김재준의 정통보수신학에 대한 전면전은 그가 1946331일 조선신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1946612일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가 총회직영신학교로 결의된 6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일련에 이러한 행동은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3. 조선신학교 학생들의 진정서 사건

 

학교 내 정통보수신학을 견지하던 학생들은 19466월 남부총회로부터 직영신학교가 된 이후 대담하게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친 김재준 외 여러 교수들의 강의 내용에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날 밤에 모인 학생은 강용서, 임창희, 이성권, 손치호, 박요한, 박신규, 엄두섭, 이치복, 정규오, 최윤조 등이었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을 바탕으로 한 이상촌 동지회에 맞서는 한편, 조선신학교 내의 자유주의 신학과도 대응하기 위해 정통신학과 신앙을 수호하는 신앙동지들이 결속되었다. 정통신학을 사랑하는 동지들은 1947418일 대구제일교회에서 개회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33회 총회에 이상촌지에 실린 주일성수 문제와 김재준의 갈등 문제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 내용 중에 핵심으로 등장한 현재 조선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신학사상에는 첫째, 성서관 문제, 둘째, 교리문제(정통공격), 셋째, 신관(종교관) 이다. 구체적으로 성서관의 문제에서는 첫째, 신구약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것, 둘째, 성서에 오류가 많다는 것, 셋째, 신약 공관복음 자료 문제였다.

 

교리문제로는 9가지를 지적하면서 김재준, 정대위, 송창근 등이 가르친 교리적인 문제를 언급했다. 신관 문제 역시 6가지를 언급하면서 유일신 엘로힘에 대한 칭호 문제와 기독교가 계시종교가 아니라 원시종교에서 그 근원을 찾고 있는 문제 등에 대한 진정이었다.

  

진정서 사건은 제33회 총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어 결코 작은 일로 보지 않았다. 총회는 8인 심사위원회(위원장 이자익, 위원 이창규, 계일승, 문승아, 노나복, 노해리, 김원희)를 조직하였으며, 심각성을 인식하여 총회장을 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총회가 파한 후 그해 512-15일 피어선성경학교인 전 총회 사무실에서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검증하는 심사위원회가 회집되었다. 심사위원회는 김재준의 진술서 외에 김재준의 진술서에 대한 박형룡의 비판적으로 검토한 내용도 제출받았다. 박형룡은 김 교수의 답변 내용을 검토한즉 성경의 파괴적 고등비평의 옹호자와 자유주의 신학자의 옹호자로써 자현()함이 명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4. 남산장로회신학교와 51인 신앙동지회

  

박형룡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88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약 4년 후 1941년 만주 봉천의 봉천신학교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윤선 역시 봉천신학교에서 19414월부터 신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윤선은 19437월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다가 19458월에 국내로 돌아와 고향에서 머물게 되었다. 19464월에 서울에서 한상동을 만나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었다. 1947년 박형룡은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조선신학교 측은 총회 진정서에 대한 조사를 하여 1947512일 주동자 6명 퇴학처분을 했다. 그러자 60명의 학생은 자퇴하였다. 조선신학교를 자퇴하고 나서 곧바로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고려신학교에 편입하지 않고 5개월을 노량진에서 합숙생활을 했다. 이때 박형룡이 19471014일에 부산 고려신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71125일 밤에 32명이 부산에서 모여 구체적으로 동지회를 조직하게 되었으며, 명칭은 신앙동지회였다.

  

결국 박형룡은 1948527일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4863일에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였으며, 개교한지 1개월만인 194879일에 편입생 25명에 대한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박형룡이 고신을 떠나자 당시 120명의 학생 중에 약 60명이 박형룡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박형룡을 따라 고려신학교에 편입한 학생이 34명이었지만, 서울로 올라올 때에는 60명이었다.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개교하면서 총회적인 물밑작업이 계속 진행되었다. 1948315일 대전제일교회에서 총회 산하기구인 신학교문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차적으로 총회직영신학교인 조선신학교 이사진 개편과 현 교수진 퇴진을 내용으로 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마련하여 제34회 총회(1948. 4. 20.)에 제출되었다.

 

5. 51인 신앙동지회에 평가

 

해방 후 ‘51인 신앙동지회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신앙동지회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이렇게 다른 이유는 평가하는 쪽의 신학적 입장 차이 때문이다. 한국 역시 미국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이탈한 현대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앞에 한국장로교회는 커다란 혼란을 몰고왔다.

 

김재준의 고등비평적 성경해석방법과 성경의 유오설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신앙동지회를 평가절하 한다. 반대로 김재준의 성경관과 신학사상을 거부한 보수주의 계열의 지도자들과 신앙동지회가 그 시대 진리를 보수하고 전승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전투적으로 투쟁하였다.

  

신앙동지회는 박형룡이 만주에서 귀국한 19479월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했고 신앙동지회는 박형룡을 앞세워 한국장로교회의 정통성을 보수하려는데 앞장섰다. 이 같은 사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한국장로교회를 위해서 목숨과 바꿀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진리수호에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형룡이 평가한 것처럼 정규오와 신앙동지회는 천신만고를 무릅쓰고 투쟁하고 활동한 결과, 남한에서 잠자고 있던 교계의 보수세력이 각성하게 하는 일을 담당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로 인해 한국장로교회는 자유주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정통보수신학의 전통을 이어가며 계승하게 되었다.

 

6.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한국장로교회 보수신학을 위해서 박형룡은 고군분투하였는데, 그 박형룡 뒤에 신앙동지회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박형룡과 함께 했던 51인 신앙동지회를 단순히 교권투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총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고 계승하기 위한 교권투쟁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는 어려운 터널 속에서도 역사적인 정통성과 신학적인 정체성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한 몸부림이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의 니케아 회의(325년)로부터 제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종교회의는 이단자들과의 투쟁을 통해 정통신앙을 정립하려는 회의였고 종교개혁 역시 본래의 복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정통보수신학과 개혁신학에 서있는 사람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신학을 바라볼 때 분리와 대결과 논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 이러한 입장은 어떻게 보면 너무 투쟁적이고 과격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신학과는 벌써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분명한 선을 긋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분명한 논쟁과 대결(dispute and confrontation), 그들과의 분리선언은 보수신학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

 

이덕주(감리교신학대학교)는 해방 후 장로교의 신학갈등과 교회분열에 대해 “신앙고백과 신학의 다양성이 갈등이나 분쟁의 요인이 아니라 조화와 일치의 조건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자세를 벗어나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개방적인 표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데 “신앙과 신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신앙훈련과 신학교육에서 미숙했다”고 평가했다(이덕주, “신학이 정치를 만날 때: 해방 후 신학갈등과 교회분열”, 『한국기독교와 역사』통권 제44호(2016.3), 155-156).

 

이런 형식논리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표용주의를 주장한 것인데 이는 진리의 본질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다. 

 

오늘날은 교파를 초월한 교회연합운동(Ecumenism)이 지배정신이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바티칸 2차 회의 이후에 교회론의 변화를 시도한 결과 이제는 타종교와도 대화와 교류를 주장하고 적극적인 실천에 나서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는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신학적 변화의 분기점이 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티칸 제2차 공의회는 공식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개방과 동정적 이해를 촉구했는데, 그 내용은 1965년 10월 28일에 ‘다종교간 대화를 위한 헌장’(Nostra Aetate)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선언서는 제2차 공의회 이전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의 일정한 차이를 분명히 했는데 구원의 조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로 한정짓는 것을 포기하고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an anonymous christianity)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구원론적 포괄주의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 후로 로마가톨릭교회가 다분히 종교 다원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이 종교 다원주의를 기독교 선교의 위해로 간주하는 것은 타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바른 성경적 신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교단이 이러한 가톨릭교회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신학, 현대신학, WCC와도 표용정책을 펴야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총회와 총신의 정통보수신학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과 같다. 이 즈음에 과거 해방 후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통보수신학을 지키고 보존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박형룡과 함께 했던 51인 신앙동지회를 단순히 교권투쟁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총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교권투쟁이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오늘의 총회를 되돌아보는 계시로 삼아 교회의 본질과 지난 100년 넘게 지켜왔던 정통신학을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사명이 본 교단총회와 우리들에게 있다. 이같은 본질에 반한 그 어떤 정책도 용납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된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