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임승원 목사와 총회의 교육

발제자: 정성구(총신대 명예교수, ICSK원장)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20 [10:41]

공적연구논문: 임승원 목사와 총회의 교육

발제자: 정성구(총신대 명예교수, ICSK원장)

김순정 | 입력 : 2021/05/20 [10:4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
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1. 사무실 무상 사용

 

교단의 분열과 혼란은 총회사무실을 을지로 2가 안나스 제과점 비좁은 2층에 이르게 하였고 방문자마다 민망히 여겼겠지만 임승원 목사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1975년 봄부터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건물의 건축을 시작하였다. 서울역 앞 동자동 3514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이었으며 경제적 여건으로 고달팠던 건축 중에도 총회사무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기적적으로 준공예배를 마쳤다.

  

2.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간행

 

1980년대초 언제부터인가 신용산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이 있었다. 참여자는 대부분이 교역자들이었고 본 교단 소속이었다. 모임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고 이미 연로하여 현직에서 물러나신 박형룡박사의 업적과 공로를 기리는 문제를 토의하다가 자연스럽게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곧 사업에 착수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이유는 경험부족이었다. 이 때 적임자가 나타났다. 그가 임승원 목사다. 간행계약은 곧 체결되었고 내용은 임승원 목사에게 전권 일임하되 간행에 대한 판권료(40만원)는 두 분 박형룡 박사 내외의 생활비로 별세시까지 임승원 목사가 부담하기로 했다.

 

3. 최초의 계단공과 발행

 

1960년대 말경 김창인 목사는 당시 충현교회 교육담당이었던 임승원 목사에게 교회교육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일학교공과임을 임승원 목사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도 만국통일공과를 사용하는 주일학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김창인 목사는 그것을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재정만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자 쾌히 승낙하게 되었고 일사천리로 진행하게 되었다.

  

김창인 목사는 이를 수락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장 박찬목의 이름으로 발행되었고 이후 6년에 걸쳐서 유년부에서 고등부까지 완간되었다. 이를 통하여 김창인 목사의 믿음의 도량과 임승원 목사를 비롯한 참여자의 기독교교육에 대한 애정과 집념, 그리고 열심을 볼 수 있었다. 그후 전해진 바로는 새 총회회관 건축비로 계단공과 판매 이익금이 한 몫을 했다고도 했다. 총회는 2001831일 총회장 김동권 명의의 공로패를 임목사에게 수여했다.

  

4. 전 과정의 계단공과 발행

  

최초의 계단공과는 초교파적으로 환영을 받으며 팔려나가자 이권 다툼이 일어나 간행되었던 공과를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과를 급조, 발행했으나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총회 결의에 의하여 임승원 목사에게 실무총책을 맡기어 약 10년에 걸쳐서 유아부부터 소망부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공과를 완간하여 현재 사용하고 있다.

  

5. 월간 교사의 벗 발행

 

일제말 저들의 극악한 핍박으로 순교자가 속출하고 이어 한국동란으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피폐해졌다. 그러므로 교회 복구와 교육 정상화는 필연적이고도 절박한 과제였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승원 목사는 이 문제를 우선 해결하기로 하고 교육현장에서 직접 도움이 되는 월간 교사의 벗지를 발간하기로 했다. 임승원 목사는 서울에서 속초까지 국도 가의 교회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교사의 벗지를 나누며 구독을 권유했다.

 

교사의 벗지를 배포하던 중 해가 저물면 길가 차 속에 잠시 눕기도 했다. 그러나 19858월 발생한 교통사고로 15년이나 계속하던 교사의 벗 발행 일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평소 그보다 훌륭한 기독교교육자로 생각해 오던 강정훈 목사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병상에 누워 치료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6. 있는 힘을 다해서

 

그는 사고 발생 1년 후 아직은 부자유한 몸으로 퇴원했다. 산적한 교육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보려고 목발을 짚고 나섰다. 기독교학교 설립을 장려하고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개교회나 교육연합체나 어떠한 교육 모임에서라도 기독교 교육에 관한 문의 또는 강의나 토의를 요청할 때 이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때로는 이러한 성격의 행사를 정기적으로 시행하기도 하였으며 공개강좌도 적극적으로 열었다. 한국교회교육은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고 본다. 임승원 목사는 때를 가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군산지구 연합집회에 강사로 초청되었으나 식중독으로 초대 측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멀리 흑산도 연합집회에 수차 초청받았으나 가지 못하였음을 지금도 미안하고 죄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도 주일학교 공과 또는 교사의 벗이나 당시의 집회를 통해서 훈련받은 이들이 주일학교 교사직을 계속해 오거나 교역자나 교회의 중직을 감당하고 있다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고도 했다. 이 외에도 임승원 목사의 공적에 대해 적을 말이 많으나 이로써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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