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연구논문: 실업인 신앙동지회의 헌신

발제자: 박창식(대신대 객원교수, 달서교회 담임목사)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5/22 [09:13]

공적연구논문: 실업인 신앙동지회의 헌신

발제자: 박창식(대신대 객원교수, 달서교회 담임목사)

김순정 | 입력 : 2021/05/22 [09:13]

 

  © 리폼드뉴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와 제105회 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 훈장 상훈위원회),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발표 세미나가 2021.4.16.()에 새에덴교회당에서 열렸다. 공적연구발표 세미나에서 발제한 논문들을 요약하여 소개해 본다.

 

1. 서론

 

본고는 1959년 한국장로교회의 대분열 이후 당시 승동측(현 합동교단)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교회의 재건에 앞장섰던 교단 내의 실업인(장로) 신앙동지회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이다. 한국장로교회는 해방 후에 연거푸 세 차례나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다.

 

1951년에 고려파 분열, 1953년에 기장파 분열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학적 문제로 인해 깊어졌던 갈등이 제44회 총회에서 표면화되면서 당시 연동측(현 통합교단)이 이탈하는 대분열을 초래하였다. 대분열은 말 그대로 전국교회를 일거에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하였다. 이에 총회는 19591124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제44회 총회를 속회하고 조직을 보강하는 한편 혼란한 교회를 수습하기 위하여 증경총회장 7명과 회장이 지명한 5명을 합한 12명의 수습위원을 세웠다.

 

수습위원회를 중심으로 총회가 수습해야 할 부분은 전 방위적이었다. 하지만 총회의 수습방면은 크게 조직적인 면과 그에 따른 재정적인 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조직적인 면에서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원칙과 정책이라는 제목의 5개 원칙과 4개 정책을 천명함으로 교단의 방향성을 분명히 하였다.

 

칼빈주의 신학을 원칙으로 성경이 믿음과 삶에 최고의 지침임을 고백하였다. 이처럼 총회의 신학적인 원칙이 분명해지자 한국장로교회 거시적 지형 변화에 대한 새로운 요구에 총회는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 신학을 달리하던 연동측이 이탈해 나감에 따라 신학적 노선이 같으면서도 이전에 분열되었던 고려파와의 합동이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고려파와의 합동을 위해 제45회 총회는 정회하고 19601213일에 승동교회에서 역사적인 합동 총회를 성취하였다.

 

2. 총회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자구책

 

한국교회의 대분열은 신학적인 문제나 교단의 조직적인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것은 고스란히 경제적인 문제였으며, 현실적인 고통이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주한 외국인 선교부가 거의 에큐메니칼을 지지함으로 통합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주관했던 학교, 기관, 병원 등이 모두 떠나게 되면서 합동교단이 겪는 재정적인 압박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합동교단은 보수신학을 지키려는 일념 하나 가지고 맨주먹으로 광야로 나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긴급한 현안은 신학교문제였다.

 

총회는 이러한 난관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다양한 자구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제45(1960) 총회에서 총회 임원과 증경 총회장 연석회의에서 총회의 자립을 위한 방안으로 경제자립헌금 일억 환 모금 책정서를 작성하여 총회수습위원장인 이대영 목사의 명의로 총회에 청원하였다. 총회 폐회 시에는 이 경제자립을 위한 12천만 환 헌금을 위하여 일동 기립해서 총회수습위원장 이대영 목사로 기도하기로 가결할 정도였다.

 

외부적인 도움도 절실하였는데, 주한 외국인 선교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칼 매킨타이어가 이끄는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원조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는 이미 ICCC의 근본주의적 성격문제로 총회 안에는 이견이 드러나는 때였다. 결국 제45회 속회 총회는(19601213) “본 총회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앞으로도 관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관계 단절을 결의하였다.

 

3. 총회신학교 재건을 위한 각계의 노력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단의 문제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은 신학교였다. 1960년 봄 남산에서 쫓겨 내려온 총신이 잠시 대한신학교 임시 건물에서 수업을 하다가 다시 용산으로 온 것은 그해 822일이었다. ICCC 총재 매킨타이어가 원조한 10만 달러로 용산역 앞 4층 빌딩을 구입하여 사용하였으나 계속 머무를 곳은 못되었다. 우선 총회는 전국교회의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대상으로 ‘5천만 환 모금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의무 헌금이 모금될 것을 전제로 총회는 신학교 이사회와 별도의 조직으로 ‘(가칭) 신학교 운영위원회26명의 장로들로 조직하고, 회장에 곽현보 장로, 부회장에 백남조 장로, 서기에 현호택 장로, 회계에 박산석 장로, 부회계에 양재열 장로를 선임하였다. 이렇게 신학교 운영위원회가 장로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교단 내 전국의 실업인 장로들 중심으로 신학교를 돕겠다는 의지가 발동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학교 발전을 위해서 교단 내 실업인 장로들의 자발적인 동기와 또한 그들에 대한 기대가 충만한 때에 가장 먼저 부산 부전교회의 백남조 장로가 믿음의 기치를 들었다. 한편 1963년 벽두에 고려파가 합동한지 불과 1년 수개월 만에 다시 환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총회는 고려파가 환원하자 굴욕과 배신감에 젖어 한동안 허탈감에 빠졌다.

 

이에 명신홍 목사는 196387일에 직장암 4차 수술을 받은 후 투병 중에 있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미국 개혁파교회와의 친선관계 수립, 신학교 건축을 위한 모금, 선교사파송 청원, 교수 교류, 유학생 알선 등의 목적으로 개혁교회 세계대회에 맞춰 도미하였다.

 

이 결과 이듬해인 19662월에 미국 개혁장로교회 친선위원회로부터 총회신학교 신축을 돕기 위해 헌금하기로 약속했던 3만 달러의 모금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3월 중순부터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친선위원회는 약속한 3만 달러 중에 1만 달러는 미리 보냈으며, 나머지 2만 달러도 개혁장로교총회의 한국주재 대표인 볼렌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송금될 것이라고 하였다.

 

4. 실업인 신앙동지회의 조직과 활동

 

실업인 신앙 동지회의 태동은 대구의 우성기 장로가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대구중앙교회를 떠나 대구 서성로교회를 개척하면서 전국의 큰 교회들을 상대로 후원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취지에 동의한 13인의 장로들이 처음으로 196379일 부산 백남조 장로 댁에 모이기로 하였다.

 

이날 회원들은 모두 해운대로 가서 기념촬영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면서 교단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의논들을 하였다. 예배 후 장로들은 신학교의 재건을 위해 여러 가지 안으로 토의하던 중 앞으로 신학교 재단이사회는 회비 100만원을 헌납하는 장로들로 구성하고 운영이사회는 노회를 대표하는 목사들이 맡아서 운영해야 한다는 결론은 내리고 헤어졌다.

 

그 후에 이 문제는 김윤찬 목사의 반대로 목사와 장로를 반반으로 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그날 모인 장로들은 서울의 김인득, 양재열, 김정국, 대구의 정규만, 장기동, 김추호, 권운현, 박기수, 우성기, 부산의 백남조, 방남준, 박찬수 장로 등 13인이었다.

 

실업인 신앙동지회의 교단을 위한 헌신에서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것은 총회신학교를 위한 헌신이었다. 이들은 1959년의 교단분열을 온 몸으로 겪었던 분들인 만큼 개혁주의 신앙의 소중성을 체득한 분들이었다. 총회신학교 본관 건축 기공식이 1965322일에 있은 후에 전국교회가 마음을 모았지만 환율 인상 등의 요인으로 미급액 220만원 발생하였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신학교 실행이사들이 회집하여 전국을 5개 지구로 나누어서 심지어 모금원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총회신학교 본관은 기공예배를 드린 지 약 1년만인 1966715일에 외부공사까지 마무리 되었다. 이러한 전국교회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동인 중에 실업인 신앙동지회 회원들의 헌신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기독신문을 위한 헌신이다. 교단의 분열로 교단기관지였던 기독공보는 통합측으로 넘어가게 되자 총회는 긴급하게 1960528일부로 기독교 뉴우스를 인가받아 10호까지 발행하고 이것을 총회 기관지로 인준하여 줄 것을 총회에 보고한 바가 있다. 하지만 당시 주간 신문의 신규허가를 받는 일이 어려워 안용준 목사가 발행인으로 있던 파수군’(The Watchman)을 인수하였고, 46회 총회(1961) 시에 이것을 총회 기관지로 인준하였다.

 

파수군은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순간(旬刊)지였고, 교계소식과 인터뷰를 비롯해 설교, 논설 등 다양한 내용을 게재한 일종의 종합매거진이었다. 196514일 탄생한 기독신문은 바로 이 파수군을 인수받아 발행되기 시작되었다. 신앙동지회는 19633월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부부수련회 기간에 신문의 창간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서울 장충동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신문의 명칭을 기독신문으로 정하였다.

 

5. 결론

 

지금까지 1959년 장로교회의 대분열 이후 교단이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때 전국의 교회들은 교회의 재건을 위해서 한 마음이 되어 분투하였다. 이때 교단 내의 신실한 신앙인들이며 건실한 실업인들인 신앙동지회 회원들은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교단적인 사명에 충실하였다.

 

첫째, 실업인 신앙동지회는 총회신학교의 본관 건축을 위해서 전국교회의 기대에 나름대로 부응하였다.

 

둘째, 실업인 신앙동지회는 기독신문을 창간하는데 산파 역할을 하는가 하면, 그 외에도 총신대학교 기숙사 건축 등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셋째, 실업인 신앙동지회 회원들은 교단이 가장 어려운 때에 앞장서서 이후 30여 년 동안 교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교단의 다양한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교단의 새로운 정초를 놓는데 크게 일익을 감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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