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2)

박아론 박사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7/08 [09:29]

[논문] 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견해(2)

박아론 박사

김순정 | 입력 : 2021/07/08 [09:29]

  

▲ 박아론 박사     ©리폼드뉴스

 

 

이 글은 박아론 박사가 신학지남에 기고한 것으로 여성의 목사안수에 관한 여권주의자들의 주장과 개혁주의의 견해를 제시한다. 이에 요약 소개한다.

 

1) 종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의 이야기

 

종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 중 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여성신학자 레지나 콜은 세 가지 기본원리를 종교적 여권주의를 위하여 제시하였다. 첫째,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전통에 대하여 충실하면서도 우리는 시대의 징조와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파괴적인 가부장적 성경해석학을 극복하면서 기독교 메시지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신학의 이성적이며 학구적 연구가 신학의 초이성적이며 관계론적이며 종교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활용하는 경험적 연구와 병행함으로 기독교에 대한 보다 원만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원리이다. 셋째, 아세아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제3세계 여성들의 여권에 대한 갈망과 여권적 주장의 목소리들을 경청하는 가운데 바람직스럽고 보다 역동적 여성신학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로마 가톨릭신자인 콜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여성을 결함이 있고 잘못 태어난 남성으로 본 것은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의 빛에서 볼 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면서 교회의 전통적 신학이 편견이 없고 시대적 문화적 해석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함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권주의자들 또는 여성 해방신학자들 다수가 교회와 성직자들이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으며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가 남성중심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회, 특히 가톨릭교회를 속속히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해방신학은 기독교의 근본적 메시지와 기본원리들이 자유적이요 해방적이기 때문에 남성우월주의로서 교회 안에서 여성들을 탄압하는 교회의 가부장적 지도자들을 결코 좌시하면 안된다고 하며 맹렬히 성토하고 비판한다. 이미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바 이는 로즈매리 래드포드 루터와 같은 여성해방신학자는 기독교와 성경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기독교와 성경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바 인류를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키는 메시지의 빛에 비추어 역사적 기독교의 가부장적 진리관과 문화관을 공격하고 현실교회의 지도자들의 여성을 탄압하는 행위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기본정신으로서 기독교를 비판하고 성경을 성경의 여권주의적 메시지로서 해석하여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여성해방신학자들은 명백히 종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의 부류에 속한다고 봄이 옳다.

 

그러면 여성해방신학자들을 포함한 종교적 여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여성들을 탄압하는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남성들의 행위란 어떤 것인가? 이는 여성은 남성보다 인간성과 능력과 존재구조에 있어 열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 속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며 문화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기회를 여성들에게 줄 것을 거절함으로 여성들을 자신들에게 예속시키는 남성들의 여성들에 대하여 지배자로 군림하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남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또는 사회구조적으로 지배당하는 여성들의 상황 가운데서 여성들에게는 죄의 개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성적 사고로 만들어진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 있어 죄는 교만이요 권력욕이요 남에 대한 침략과 착취인 반면 여성들의 경험에 비추어서 도달하게 되는 죄의 개념은 남성에 대한 맹종과 의존성, 남성우월주의적 가치관 수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적 자아의 저조한 개발상이다.

 

그리고 여성들을 위한 죄의 개념의 수정은 여성들을 위한 은혜의 개념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여성들과 같은 종속적이고 피지배자로서의 삶을 사는 인류들에게는 은혜는 여성들의 여성들 자신들에 대한 긍정과 존경과 능력개발의 형식으로 찾아온다. 이것은 인간적 측면에서 표현하면 여성들의 개종경험을 의미한다. 가부장중심적 사회와 남성우월주의적 교회 안에서 살며 여성들은 이와 같은 남성지배적인 죄악의 실재로부터 자신들을 벗어나게 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와 같은 여성들의 행위가 바로 여성자신들에게는 개종의 행위요 경험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현재 토의중인 여성의 목사안수를 추진하는 일은 여성의 열등을 주장하면서 일반사회에서와 별로 다를 것 없이 남성들의 여성들에 대하여 지배자 또는 우월자로 군림하는 우리교회 안에서 특별히 여성들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며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 사고와 이데올로기를 갖고서 여성들을 탄압하는 죄악의 실재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는 여성들의 개종의 행위의 일환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여성의 목사안수를 추진하는 일은 여성의 영적인 능력화의 사실이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권주의자들은 보편적으로 주장하기를 여성의 능력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데 이 여성의 능력화란 여성들이 자기 자신들의 인격적 존엄성과 사회적 책임성, 그리고 사회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대각성의 과정을 뜻한다.

 

그리고 이 여성의 능력화를 특히 종교적 여권주의자들은 영적이요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신구약 성경에서 이 여성의 영적 능력화 또는 여성의 영성개발을 통해 이스라엘과 사도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 부상한 여성지도자들을 열거하는 일을 힘주어 하고 있다. 구야과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는 특히 하갈, 왕후 와스디, 히브리산파 십보라와 부아, 바로의 집에서 모세를 길러낸 바로의 딸, 그리고 심지어는 베냐민의 폭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죽은 뒤에도 그 시체까지 찍어 덩어리를 만들어 이스라엘 전국에 보냈다고 하는 어떤 레위사람의 첩을 여성의 능력화 또는 여성의 의식화를 위한 희생자로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과 사도시대에서는 빌립보의 루디아와 같은 빌립보에 거주하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와 또 바울에 의하여 겐그레아교회의 일꾼으로 소개된 뵈뵈, 바울의 동역자들로 알려진 부리스가와 아굴라와 바울과 같이 옥에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의 시기로 올라가보면 예수의 열두 제자 외에 막달린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로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예수의 여자 제자들이 언급을 받고 있다.

 

또 수가성의 우물곁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눈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을 받은 귀신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 그리고 남동생 나사로의 기사회생의 사건 중에서 믿음의 주역을 담당했던 마르다 등이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면 이렇게 종교적 여권주의자들과 여성해방신학자들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현사회와 특히 남성우월주의로 말미암아 여성들을 탄압하는 기성교회의 죄악으로부터 해방을 도모하는 여성들의 개종의 행위의 일환으로서 여성의 목사안수를 추진하는 일을 높이 평가하며 강조하고 있는데 그들의 여성의 의식화 또는 여성의 영적인 능력화로 말미암아 국가사회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지도층에 오른 많은 여성들을 신구약 성경과 이스라엘과 사도 시대의 역사 속에서 발견하고 있으니 그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 여성 목사안수를 받는 일은 반대할 이유가 없는 마치 탄탄대로를 가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강력히 목소리를 높여 여성 목사안수를 주장하는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 또는 여성해방신학자들에게 있어서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가 하나 있다면 그는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의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지도적인 역할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그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극복하는가?

 

기독교적 여권주의자인 레지나 콜은 사도 바울의 여성들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적 역할에 대한 부정적 가르침에 대해 세 가지 해석을 제시한다. 첫째,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이 있으니 이 해석을 따르면 바울의 여성에 대한 가르침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콜은 다행히도 이것 외에 세 가지 다른 해석 또는 접근법이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바울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가르침과 발언들은 바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바울의 제자들이 쓴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울의 여성천시사상이 나타나 있는 바울서신 본문들은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 한정된 것임으로 성경의 보편적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이 남성우월주의와 싸우며 어떤 때에는 그 싸움에 실패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여권주의자인 콜이 바울의 가르침을 영감된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받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그와 같은 해석 또는 접근법을 근본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하며 비웃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종교적 여권주의자들과 여성해방신학자들의 공통적 입장이다. 그리고 콜에 의하여 제시된 바 세 가지 다른 해석 또는 접근법에 대해서는 콜 자신은 세 가지 해석 또는 접근법을 삼자택일할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세 가지를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기독적 여권주의자들과 여성해방신학자들의 생각을 잘 대변해 주는 말인 것 같다.

 

콜은 말하기를 여성에 대해 문제가 되는 바울의 발언들 중에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의 저자는 바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그것들을 바울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잘못이며 고린도전서 11:2-16까지의 내용은 바울의 것이라고 해도 여기서는 성경적 변론들과 철학적 변론들이 섞여 있어 혼란스럽게 바울 당시의 가부장적 문화가 바울에게 끼친 영향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콜은 바울도 우리들처럼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가운데 담겨 있는 높은 이상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교적 여권주의자들과 여성해방신학자들의 여성의 목사안수를 주장하는 변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중요시한다고 하면서도 여성의 목사안수를 위해 유리하도록 그것을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동시에 여성의 목사안수는 발전하는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의 기정사실이요 돌이킬 수 없는 오늘날의 교회적 현실이라고 믿는 듯한 자신감에 넘치는 어조를 띠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여성들이 교회 내에서 교역하기를 원했을 때 반대의 장벽을 넘기 위해 사용한 말과 개념이 부르심이었다면 오늘날에도 여성의 목사안수를 저항하거나 금지하는 교회와 교단들 가운데서 여성들의 신적소명에 대한 강조는 바람직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여권운동을 기독교와 성경의 테두리 안에서 하기를 바라는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로서의 카롤노렌이고 보면 역사적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여 그토록 강조하였고 가르쳐온 바 주의 종으로서의 사역을 맡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언어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개념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전혀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2)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의 이야기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여성의 목사안수를 주장하는 다른 여권주의자들과 그들이 다른 것은 그들은 성경이 막연한 종교적 저술이거나 문화적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확무오하고 권위적인 말씀임을 믿는 일이라고 한다.

 

다른 여권주의자들은 성경을 여성의 경험의 시각에서 해석하나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성경을 그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차별주의는 성경을 남성의 경험에 입각하는 가부장적 사고로 보는 해석학의 결과로 생각할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을 가리켜 성경적 여권주의자들이라고 칭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된다.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세속적 여권주의자들이나 종교적 또는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과 여권주의라는 이름 때문에 연대적 죄책의 오해를 받는다고 하여 그 억울함을 호소한다. 가령 세속적 여권주의자들과 기독교적 여권주의자들이 여성이 낙태권을 주장하는 반면,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하고 생명지상주의를 부르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모두 동일한 것으로 인식될 경우가 많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특히 여성해방신학이 여성의 목사안수와 동성애자의 목사안수를 연계시켜 주장하는 것과 달리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여성의 목사안수만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동일한 입장으로 오해를 받는 일이 흔하다.

 

여성의 목사안수를 찬성하는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이 모든 에큐메니칼 자유주의 교회가 여성들에게 목사안수를 베풀고 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성경관이 유오설적 성경관이라고 하여 역시 유오설적 성경관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사고 있음을 우리는 빈번히 보게 된다이것이 연대적 죄책의 오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복음주의적 여권주의는 자유주의라는 비판을 보수주의자들에게 받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의 큰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에 가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에레인 파젤즈가 쓴 영지주의 복음은 영지주의에 대해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영지주의야 말로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성경적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치적으로 왜곡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 영지주의자들은 여권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이야기가 오늘날 많은 보수주의자들 또는 전통주의자들에 영향을 끼쳐 복음주의적 여권주의를 영지주의적 이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치도 않은 말이나 설혹 영지주의자들이 여권주의자들이었다 해도 현금의 모든 여권주의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라는 말은 아닐 것이며 더욱이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이 영지주의자들이라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그럼에도 피터 존스와 같은 보수주의자 또는 전통주의자는 복음주의적 여권주의를 영지주의와 여성해방신학과 뉴에이지 여신종교와 연계시켜 기독교의 영지주의적 수정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러면 이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에 대한 연대적 죄책의 부과가 정당한가를 살펴보자. 루이스 부리톤은 여성의 목사안수는 영지주의 이단이라고 갈파한다. 초대교회에 대해 큰 이단자들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남성이면서 또 여성이라고 생각해 여성의 목사안수를 단행하였다는 것이다. 부리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 양성의 소유자로 생각하는 영지주의의 하나님관은 하나님의 개념과 상징적 표현들에 있어 여성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정통적 기독교와 그것의 토대가 되는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과 전적으로 위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리톤은 크게 오해하고 있다.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양성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영지주의와 전혀 유사성을 갖지 않는다.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은 자격을 갖춘 여성들이 목사가 되어 사역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한 개인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이 그 개인이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서는 문제와 상관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다르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을 따르면 여성들이 사제들이 된 것은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여성들을 영적 지도자의 자리에 앉게 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어떤 영지주의적 종파 중에는 여성적 영적 원리가 신적 은혜의 중보 또는 매체의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영지주의가 여성적 원리를 신적인 것으로 찬양하면서도 여성들에 대해서는 남성보다 월등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남성과 같이 될 것을 힘쓰는 조건으로 사제직을 허락했다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인용해 여성의 교회내 지도자적 위치와 역할을 반대하며 여성의 복종과 침묵을 주장하는 전통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들의 해석은 옳은가? 복음주의 여권주의자 카테린 허우벌트는 사도바울이 여성을 싫어하거나 열등시하지 않으면 여성의 교회 내에서의 지도자적 위치와 역할에 대해 긍정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허우벌트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복음을 모든 민족들과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위착하였다고 가르쳤다.

 

갈라디아서 3:26-29절까지를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참여하는 모든 인류들은 새로운 신원성과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평등성에 입각하는 본질적 통일성을 부여받음을 선언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의 새 자유와 평등성에 입각하여 통일성을 소유함에 대한 선언을 함으로 바울은 인종적 차별주의와 사회적 차별주의와 성적 차별주의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소해 버렸다. 그럼에도 바울이 여성을 싫어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우벌트는 고전 11:3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녀는 머리를 출처, 근원을 보는 해석이 원만한 해석이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형성되었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인류 가운데 거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고전 11:3의 머리는 출처를 의미할 뿐 상하계급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고전 11:2-16절까지의 내용은 고린도교회의 특수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울이 여자가 머리에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할 것을 권고한 것은 머리에 쓰는 것은 여성의 사회적 상징으로 그 당시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우버트는 여자가 머리에 쓰는 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예속된다는 뜻이 아니라 여자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영광)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상을 상징하는 뜻이 있다는 것을 바울이 가르치고 싶어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하우버트는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고전 14:34절 이하의 말씀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는 딤전 2:11 이하에 기록된 바울의 권면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우버트는 바울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절대적 침묵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남자 성도가 예언할 때에도 그 예언이 소란스럽거나 덕이 안될 경우 잠잠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뜻이 있다고 해석한다. 또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 후반절)라는 말씀은 복종의 대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고로 예배의 질서와 분위기를 따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에 이른 것 같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어디에서나 또 모세의 율법에서 여자의 복종을 명하는 단일구절을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고로 우리가 이것을 1세기의 유대적 전통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에 이른 것을 바울이 절대시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존재했던 여자들에 대한 제한과 규제들을 옹호하는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생각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율법에 이른 것의 절대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우리가 딤전 2:11 이하에 가서 하우버트의 의견을 들어보면 여자의 일절 순종함으로 배우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는 여자들이 교회에서 예배시 가져야 할 태도와 자세가 배우는 자의 자세와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의 여자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시대의 로마, 헬라인의 사회에서는 여자를 교육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유대인들도 여자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여자들로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에베소의 여성들이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순종의 자세 또는 태도로서 배우라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딤전 2:12에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명령에 대해서는 그것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적합하지 않은 일로 여겼다는 뜻이며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자에 대해 지배적인 행동으로 나오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이다이와 같은 사람의 사람에 대한 지배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쳤고 바울 자신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삼간 것을 알 수 있다(고후 1:24).

 

또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딤전 2:13절과 14절에서 그 두 가지 이유를 찾는다. 첫째, 여자는 남자에게 대해 예속적이라는 것이며 둘째, 여자는 남자보다 꾀임을 잘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우벌트는 반박하기를 여자가 후에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 남자에게 예속적이라는 뜻이 될 수 없고 여자가 꾀임을 쉽게 받는다면 바울 당시 교회들의 여자가 다른 여자들과 아이들을 가르치토록 허락한 일과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 여자는 고후 11:3에서와 같이 고린도교회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성의 목사안수를 주장하는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인 하우벌트의 창세기 1, 2, 3장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의 가르침들 중에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예속성과 교회에서 여성의 지도적 위치에 오르는 것, 여성이 가르치면 안된다는 것 등을 가르치거나 명한다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구절들에 대해 재해석과 설명을 들어보았다.

 

우리는 카테린 하우벌트와 같은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의 여성의 인권과 평등성, 우수성의 시각에서의 성경의 가르침들에 대한 재해석을 그 기교와 기발한 착상들 때문에 감탄해 마지 않는 바이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여성의 목사안수를 부르짖는 복음주의적 여권주의자들의 성경재해석에는 여권의 옹호와 여성의 우수성의 증명을 의도하는 조작적 해석학의 작태가 연출되어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크게 실망에 빠뜨리고 있다는 말을 우리는 꼭 힘주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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