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교회 역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장로교회'

934년 6월 7일에 ‘소록도성결교회’에서 ‘소록도기독교’로 개칭하여 연합체를 구성했다. 소록도에 가톨릭교회가 1935년에 설립되었다. 가톨릭교회가 설립된 그해인 1935년 10월에 공회당 신축으로 연합예배가 시작되었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9/30 [14:05]

소록도교회 역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장로교회'

934년 6월 7일에 ‘소록도성결교회’에서 ‘소록도기독교’로 개칭하여 연합체를 구성했다. 소록도에 가톨릭교회가 1935년에 설립되었다. 가톨릭교회가 설립된 그해인 1935년 10월에 공회당 신축으로 연합예배가 시작되었다.

소재열 | 입력 : 2021/09/30 [14:05]

  

 소록도 중앙교회 © 리폼드뉴스

 

소록도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소속 지교회이다.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방문 자체가 전면 통제되고 있다.  소록도교회가 일제 강점기로부터 인권을 위해 싸웠던 그 처절한 모습들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을 간직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필자가 본 교단(예장합동) 중심의 한국장로교회 역사를 집필 중에 소록도 교회에 관한 기록의 일부이다. 

  

(리폼드뉴스) 영조 때에 “고흥은 예부터 별칭 영주(한라산)와 같은 이름으로 산과 바다가 맑고 아름다우며 기승이 많다.”라는 기록이 있다. 예부터 등과자(과거에 급제한 사람)가 많을 뿐 아니라 용력이 뛰어난 역사가 많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종 26년(1895) 지방제도 개혁에 의하여 흥양현을 흥양군이 됐다. 고흥을 ‘흥양이라 했다.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돌산군의 득량도 등을 합하여 고흥군으로 개칭되었다.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도양(녹동)이 있고 남쪽으로는 소록도와 거금도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득량만이 위치해 있다. 소록도는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의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고흥10경 중 제2경으로 손꼽힌다. 소록리에는 한센병 전문 진료 기관인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다.

 

▲ 거금도 기념탑에서 바라본 거금대교와 소록도이다.  © 리폼드뉴스


거금도는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큰 섬이다. 고흥군에서는 첫 번째로 큰 섬이기도 하다. 거금도는 고흥반도 도양읍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해상에 있다. 소록도와 마주하는 녹동(鹿洞)을 그 지형이 사슴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옛날에는 녹도(鹿島) 또는 녹두(鹿頭)라 불렀다. 녹동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한 소록도는 어린 사슴의 머리 모양을 닮아 소록도(小鹿島, 작은 사슴섬)라 불렀다.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선교는 1884년 이후였다. 선교사들은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교육과 의료사업을 최대한 활용했다. 미국 북장로교선교회 소속인 알렌 선교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입국했는데 그는 의료선교사였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가 의료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계기가 바로 알렌의 입국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알렌은 조선정부와 상호교섭을 통하여 서양식병원인 광해원이라는 이름으로 1885년 4월 10일에 개원되었다. 4월 12일에 고종이 병원의 공식 명칭을 광해원이라 붙였다. 4월 26일에는 광해원을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했다.

 

소록도 해안가에서 바로본 거금대교, 건너편은 녹동이다.  © 리폼드뉴스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인 포사이드와 윌슨 선교사가 한국 땅에서 한센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1909년 애양원을 설립하였다. 그해에 전국 18개소에 일반 국민의 구료의 목적으로 하는 일반병원인 자혜의원(慈惠醫院)이 설립되었다. 

 

1916년 소록도 자혜의원은 19번째로 한센병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병원이 설립되었다. 병원의 초대 원장은 아리카와토오루가 부임(1916. 7. 10)였으며, 제2대 원장으로 하나이젠키치가 부임(1921년 6월 23일)하였다. 하나이 원장의 부임 후 원생 중 대구지방에서 온 장로교인 최재범, 김금영 씨와 부산 지방에서 온 박장영 등 3인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도주하다가 잡히는 사건이 발생되었다. 

 

이때 심문 과정에서 “우리는 기독교 교인(장로교)인데 신앙의 자유가 없어서 이 병원에는 못살겠다”고 이유를 말하자 하나이 원장은 3인의 말을 참작한 후 삼 밖의 요양소를 순회하고 돌아와 일반 환자의 의사를 탐문하고 다수의 열망에 의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였다(『소록도교회사』 (소록도연합교회, 2019), 29.).

 

1922년 하나이 원장 부임 후 조선총독부의 선교 허가를 받아 일본성결교회 다나카신자부로 목사가 자진하여 1922년 10월 2일에서 2일간 전도한 것이 소록도에 최초로 복음이 전해졌다. 1922년 11월 10일에는 다나카 목사의 설교를 통역하여 남자 40명, 여자 4명이 예배를 드렸다. 소록도에 최초의 교회 설립(현 소록북성교회)은 1922년으로 기록된다.

 

1925년 4월 2일에는 설교 통역자인 박극순의 사회로 최초의 소록도교회의 전도원(4명)과 집사(2명), 방문원(4명)을 선임하였다. 1926년 1월에 이르러 소록도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조직되었다. 1926년 7월 3일에 다나카 목사가 사임하고 일본 성결교회의 순회부흥 전도목사인 고이데토모하루 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 리폼드뉴스


고이데 목사는 1932년 5월 25일에 성결교단 본부에 의하여 서울로 전임하여 본국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2년 일제 말기에 오사카 경찰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구속되어 1944년 3월 10일에 징역 4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1945년 9월 10일 사카이 형부소 가수에게 민족 반역자라고 무수히 많은 고초를 당해 순교했다. 

 

고이데 목사가 떠난 이후 1932년 12월 1일 감리교회 소속인 야다분이치로 목사가 본원 관목으로 부임하여 상주하며 사역했다. 야다분이치로 목사는 53세 때 조선총독부 사회국장의 추천으로 소록도병원에 전임목사로 부임했다. 조선총독부는 1932년 12월 27일 재단법인으로 조선나예방협회를 설립한 이후 소록도 전역을 매수하여 소록도는 재단의 소유가 되었다. 

 

1934년 6월 7일에 ‘소록도성결교회’에서 ‘소록도기독교’로 개칭하여 연합체를 구성했다. 소록도에 가톨릭교회가 1935년에 설립되었다. 가톨릭교회가 설립된 그해인 1935년 10월에 공회당 신축으로 연합예배가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전인 4월부터 8월 21일 까지 80여 명이 총살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소록도에서의 비극은 “나병 치료 역사상에 전무후무할 건강한 동포가 병든 동포를 학살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자손 치고야 감행할 수 없는 비인도적 살육지막은 전개되었던 것이다”라는 비극은 새로운 소록도의 새로운 자치의 시대를 열었다(『소록도교회사』 (소록도연합교회, 2019), 68-73.)

  

해방 후 소록도에서 참극으로 인하여 소록도의 분위기가 과히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공포속에서도 서서히 복음의 희망이 가슴 저미도록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전해졌다. 1945년 8월 21일 오후 4시에 총살로 인한 비극이 중지된 후 9월에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른 고흥 거금도 명천 출신으로 명천교회 설립의 주역이었던 오석주 목사 전도단 일행이 소록도 공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1946년 4월 말경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른 손양원 목사가 출옥하여 고흥길두교회 오석주 목사 일행이 1946년 5월 1일부터 10일간 공회당에서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강사는 손양원 목사였다. 소록도의 신자들에게 회개와 희망의 복음은 그들을 치유해 가기 시작했다. 

 

 소록도 기념탑 © 리폼드뉴스

 

소록도교회는 해방을 전후하여 시무하는 목회자가 없었다. 1946년에 이르러 소록도교회의 재건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때 소록도에서 가장 가까운 고흥읍교회에서 시무하는 김정복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여수 애양원교회에 시무하고 있는 손양원 목사의 도움이 컸다. 

 

손양원 목사는 김정복 목사(1882)보다 20년 연하이다. 김정복(金正福)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출신으로 평양신학교에 1915년에 전라노회의 추천으로 입학하여 1923년 평양신학교 제17회로 졸업했다. 손양원(孫良原) 목사(1902)는 평양신학교 제33회(1938) 졸업을 했다. 소록도교회는 김정복 목사를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1946년 5월 1일부터 10일간 진행된 부흥회를 마친 후인 1946년 6월 10일에 소록도교회는 공동의회를 개최하여 8명의 장로를 피택하고 6월 12일에 피택장로 시취와 임직식과 위임식을 거행했다. 이때에 비로소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의한 교회 직제로 운영하였다. 1946년 6월 13일에 당회로 모여 김정복 목사를 당회장으로 하여 당회가 조직되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소록리교회 당회록(1946년 6월 12일). 

 

이때로부터 ‘소록도기독교’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록리교회’로 명칭을 사용했다. 6월 14일에는 중앙리예배당에서 연합제직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소록도에는 신생리교회, 구북리교회, 서생리교회, 남생리교회, 동생리교회, 중앙리교회, 장안리교회로 하여 소록리교회라 하였다, 

 

1946년 6월 12일에 김정복 목사가 소록리교회 위임식을 거행한 후 소록리교회는 성장해 갔다. 1947년 4월 26일에 순천노회에 가입하였으나 1949년 7월 15일에는 나노회(癩老會)에 소속되어 조직위원을 선정하여 여수 예양원으로 파송하기로 했다.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발생되었다. 전쟁의 비극은 소록도까지 미쳤다. 1950년 8월 5일에 북한군이 소록도까지 침략해 왔다. 17세를 전후한 인민군 40여 명이 소록도를 점령하였으며, 교회를 탄압하였다. 장로들은 김정복 목사에게 피신을 권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1950년 8월 28일 김정복 목사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고흥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렇게 하여 김정복 목사는 소록도교회와 작별했다. 김정복 목사가 65세에 부임하여 4년 3개월 동안 시무한 후 70세가 되는 해에 공산군에 의해 소록도교회를 떠나 고흥경찰서로 끌려간 것이다. 

 

1950년 9월 27일에 소록도 공회당 앞에서 6명의 장로 외에 22명의 교인들이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나 재판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비행기 한 대가 낮게 날면서 삐라를 뿌렸다. 이 삐라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조금만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재산을 시작하려고 했던 공산군이 당황하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30일 새벽에 고흥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김정복 목사와 우익 청년들은 인민군들에 의해 고흥경찰서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여 순교하게 되었다. 여수 예양원 손양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에 순교하였다. 김정복 목사는 이틀 뒤인 30일에 순교를 한 셈이었다. 김정복 목사의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김정복 목사는 전북노회(제14회, 1924. 1. 22.)에서 강도사 인허 후 전남노회로 이명하였으며, 전남노회 제13회(1924. 2. 5.) 정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시무지를 벌교읍교회로 옮기면서 순천노회로 이명했다(1926. 11. 2.) 순천노회 제13회(1930. 6. 2.)에 노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51년 1월 23일에 고대작 목사가 부임했다. 1950년 8월 30일에 순교한 김정복 목사에 대한 순교 추도예배가 1951년 3월 3일에 고대작 목사의 집례로 소록도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고대작 목사는 1951년 1월 21일에 부임하여 1953년 2월 5일까지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소록리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에 소속되었으나 독립노회인 독노회로서 성진노회가 설립됨에 따라 1962년 9월 이후부터 성진노회에 소속이었으며, 지금은 성진노회가 남중노회로 명칭이 변경되어 남중노회 소속이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7회 총회(1962. 9. 20.)에 소집된 총회에서 “박손혁 목사 외 12명이 청원한 나환자 교회에 독노회 조직 청원건은 허락심이 가한 줄 아오며, 소집장을 김두영 목사로 하고 지도위원을 박손혁, 문재구 두 목사로 하여 소집일자와 장소는 소집장에게 일임하심이 좋은 줄 아오며”라고 결의했다.

 

소집장인 소록리교회 김두영 목사는 노회 조직을 소집했다. 성계제일교회에서 목사 8명, 장로 8명으로 하여 노회를 조직하였으며 소록도교회 6대 담임인 김두영 목사를 설립노회 초대노회장이 되었다. 노회 명칭을 성진노회로 하였으며, 제49회 총회에서부터 김두영 목사를 총대로 하여 참여하였다. 

 

성진노회는 제78회 총회(1993. 9. 21.)에서 “성진노회장 박창훈 목사가 청원한 노회 명칭의 남중노회로의 개칭 청원의 건은 허락하기로 하다”라는 결의에 따라 성진노회가 남중노회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소재열 목사(한국교회사,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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