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고흥 오마간척 소록도 한센인 추모공원

"아흐 슬프도다. 오호 통재라!", "고향 그리워 보리피리 불며"

소재열 | 기사입력 2021/11/01 [01:06]

[역사탐방] 고흥 오마간척 소록도 한센인 추모공원

"아흐 슬프도다. 오호 통재라!", "고향 그리워 보리피리 불며"

소재열 | 입력 : 2021/11/01 [01:06]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 공원 정문 © 리폼드뉴스


전남 고흥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이 있다. 이 추모공원은 고흥 도덕면 오마안길 73(오마리 산 78-12번지) 일원 1만9,980㎡에 총사업비 31억 원을 투입하여 지난 2012년 6월에 준공돼 추모 단과 테마관, 전망대, 휴식공간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오마(오마도, 고발도, 도동도, 분매도, 만새도)는 다섯 섬을 잇는 간척공사였다.

 

 오마 삼거리 위의 언덕에 추모공원이 세워져 있다. © 리폼드뉴스


고흥군에서는 방조제가 끝나는 지점인 오마도 삼거리 언덕 위에 당시의 한센인들이 이루지 못한 꿈과 그들의 소망과 염원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추모공원이다. 오마간척사업은 한센인 농경지 조성 및 정착을 위해 1962년 6월 1일 국립소록도병원 주도로 오마간척사업을 시작, 사업 주체 변경 및 인근 주민의 반대로 사업 중단 이후 1988년 일반 간척지로 간척사업을 완공했다. 국립 소록도 병원 주도로 간척 사업간 한센인 강제 노역을 기리기 위해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현재 완공된 오마 간척지 © 리폼드뉴스


소록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이 풍부하며 일정한 지역에 환자를 격리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 의해 1916년 소록도에 나환자를 위한 치료병원이 개원되면서부터 시작된 한센병 환자의 치료와 정착을 위한 터전이 되었다. 이 병원은 ‘소록도 갱생원’, ‘중앙 나요양소’, ‘국립 나병원’에 이어 현재는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 탑은 원형의 호수 위에 S자형의 경사진 땅을 파내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땅을 파내고 운반하고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 리폼드뉴스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환자에 대한 국가의 체계적인 관리는 행해지지 않고, 대다수 환자들은 각지를 배회하는 유랑 생활을 하였다.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알렌의 입국과 더불어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에 의한 구라사업(救癩事業)을 시작하였다. 1909년 광주제중병원장 R.M.윌슨이 광주나병원을 설립하였고, 1911년 스코틀랜드 선교사 매켄지가 부산나병원을, 1913년 미국 선교사 A.G.플레처가 대구나병원을 설립하였다. 그 뒤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남 고흥 소록도에 자혜병원(慈惠病院)이 설립되었다.

 

  © 리폼드뉴스


외국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구라사업은 1928년 최홍종 목사 중심의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최초로 조직한 민간 구라 단체였다. 그러나 4년 후인 1932년 12월 27일 조선총독부는 나환자를 위한 사업을 일원화한다는 구실로 조선나병예방협회를 만들었다. 이는 위 민족의 자주성을 말살하려는 수단이었다. 

 

  © 리폼드뉴스


일제는 자혜병원을 갱생원으로 개칭하고, 1936년에는 환자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나병요양원을 완공, 전국에 흩어져 있는 나환자를 수용하였다. 1945년 8ㆍ15광복을 맞아 수많은 수용나환자들이 수용소를 탈출하여 전국의 거리를 떠도는 등 부랑 나환자 문제는 사회문제로까지 확산하였다. 1947년 대한나예장협회를 창립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대한나관리협회의 전신이다.

 

  © 리폼드뉴스


1962년 당시 7개 마을에 거주하는 개신교 환자들은 예배드릴 공간이 없어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노천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사였고, 새벽기도회는 먼 연합예배당(중앙공화당)에까지 가야 하는 등 환자들의 고충이 많았기 때문에 교회 건립이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 리폼드뉴스


1962년 5월 20일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성전건축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기금 마련을 위하여 1년간 교회 건축을 위한 헌금이 진행되었다. 이듬해 2월 5일 소록도병원의 허가를 받아 6 교회(신생리, 구북리, 서생리, 남생리, 동생리, 장안리) 신축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당시 모금된 건축기금 총액은 겨우 7만 원에 지나지 않아 6 교회의 건축에 턱없이 부족한 재원이었다.

 

  © 리폼드뉴스


그 무렵 노동력이 있는 대부분 환자는 오마도 간척공사에 동원되어 섬에 남아있는 노약자와 신체 부자유자들이 교회 건축공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이 없는 환자들은 도구를 팔목에 동여매고 일을 했으며, 앞을 보지 못한 환자는 앞에서 인도하는 대로 손수레를 끌면서 일하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 리폼드뉴스


10개월간의 공사 기간을 통하여 1963년 완공되었는데 불과 70,000원으로 시작했던 공사비가 환자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여섯 교회당을 건축하고도 367,500원이 남았다. 또한 중앙리에 연합예배당을 건축하기로 계획하고, 1964년 3월 10일 공사를 착수하여 그해 11월 15일 준공이 이루어졌다. 이 연합예배당(중앙교회)의 규모는 건평 358평(지하 1층, 지상 3층)에 총공사비는 6,706,438원이 소요되었다. 이 공사비에는 여전도회원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판 80,081원이 포함되었다.

 

  © 리폼드뉴스


오마도(五馬島) 간척공사는 고흥군 도양면 봉암반도와 풍양반도에 이른 총 2,753m를 그 중간의 오마도와 오동도를 연결하여 둑을 쌓는 것이다. 기대효과는 1,000정보(330만 평으로 소록도의 2배 정도 크기)의 농토가 새로 생기어 음성 나환자 1,500세대 및 일반 영세농가 1,500세대를 입주시켜 일반인과 음성 나환자들이 함께 생활하는 이상적인 농촌을 건설하여, 벼 3만석, 보리 2만석 등 총 5만 석(약 2,500여 톤)의 양곡을 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5개의 말 형상들이 세워져 있다. 다섯 마리의 말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발돋움하고 있다. 말이 마치 힘차게 뛰며 활동할 수 있는 마을이란 의미로 오마도 마을 유래에 대한 상징물이다. © 리폼드뉴스


이와 같은 계획에서 1962년 3월 이 공사에 동원할 환자들을 선발 조직하여 사회반이라 칭하고, 6월 8일에는 환자 및 직원 각 4명을 선발대로 파견하여 오마도 산봉우리에 공사 현장 사무실을 건축하는 한편, 기술자를 초빙하여 공사에 대비하였다. 또한 공사에 소요될 제1차연도 예산 5,000만 원의 재원도 확보하여 필요한 준비를 하였다.

 

  © 리폼드뉴스

 

드디어 1962년 7월 10일에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 간척공사는 먼저 가장 물살이 세게 흐르고 수심이 16m나 되는 풍 남 반도와 오동도를 연결하는 제1차 방조제(843m) 공사에 300명, 폭이 가장 넓은 봉암반도와 오마도 사이의 제3호 방조제(1,560m) 공사에 600명을 15일 동안 투입하고, 대기조인 제2 작업대와 교대하는 2교대 방식으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 리폼드뉴스

 

제1호 방조제 공구는 풍 남 반도와 백석리 뒷산을 헐어 레일을 깔고 무동력 화차로 흙과 돌을 운반하였고, 제3호 방조제 공구는 무인도인 만제도를 헐어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를 메워 나갔다.

 

  © 리폼드뉴스


환자들의 작업은 강도를 더욱 높여 갔으나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안전사고가 발생하여 흙더미에 압사하거나 작업선의 전복으로 익사하거나 중ㆍ경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환자대표들은 오마도 간척공사의 성공을 위해서는 소록도뿐만 아니라 전국 10만 동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작성하여 전국의 각 정착장으로 발송하였다. 그 결과 1963년 8월 28일에는 국립익산병원에서, 그리고 뒤를 이어 나주 호혜원과 현애원에서 근로봉사대 파견하여 각각 한 달 동안씩 간척공사장에서 근로봉사를 하였다.

 

땅을 파내고 운반하고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 리폼드뉴스

 

이보다 조금 앞선 8월 1일에는 국제 International Work Camp 단원 남녀 대학생 133명이 25일 동안 이 간척공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들은 간척공사장의 근로봉사 외에도 중앙공원에서 환자들과의 대화시간도 가져 환자들의 투병 의지 고취 등에도 노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근로봉사 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중앙공원에 기념탑인 구라탑(救癩塔)을 세웠다. 이 탑은 ‘현대의학은 능히 나병을 무찌르고 정복한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리폼드뉴스


이렇게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2, 3호 방조제의 투석공사가 모두 끝나고 성토공사가 한창이던 1963년 12월 연 사흘 동안 불어 닥친 돌풍으로 제1호 방조제는 10m나 침강했고, 제2호 방조제와 제3호 방조제 공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만큼 그 흔적마저 바닷속에 잠겨버렸다.

 

  © 리폼드뉴스


설상가상으로 작업 선박이 전복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일반 근로자 한 사람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사고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계속되었으나 현지 주민들의 반발과 공사 재원 및 기술력 부족 등으로 1964년 7월 25일 전라남도에 이관되고 말았다. 음성 나환자들의 자립 터전을 마련해 주겠다던 오마도 간척공사는 2년 동안의 진척에도 불구하고 사업 주체가 바뀌게 되면서 환자들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래도 님들은 영웅이었습니다

 

무인도였던 5개의 섬, 오마도

간척으로 육지를 만들어 삶의 터전 삼고자

소록도에서 오마도로 모였습니다.

 

그 희망의 작은 불씨 앞에 강제 노역의 설음도

차가운 오마도의 바닷바람과 출렁이는 물결도

두려움과 절망 모두를 소록도 앞바다에 매장했습니다.

 

무모한 도전으로 바다를 메워가는 날

그래도 희망이 있기에 서러워 말자고 다짐해 보며

오마도의 바닷속은 흙과 돌들로 채워져 갔습니다.

 

! 무심해라

태풍이 오마도의 바닷속을 뒤집어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않고 모두 휩쓸어 갔습니다.

 

다시 16미터 수심을 메우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그날

오마도를 떠나 꿈꾸던 희망을 포기하란다

오마도를 떠났지만 그래도 님들은 영웅이었습니다.

 

소록도에 남아있던 님들이

오마도에서 못이룬 꿈은 

중앙교회 건축으로 희망의 불씨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소재열 목사(리폼드뉴스 발행인)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