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1주년, 나주 남평교회 엄두섭 목사 전쟁 피난일기

나주 남평교회에서 전쟁 중 피난과정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다.

소재열 | 기사입력 2021/06/21 [01:51]

6.25전쟁 71주년, 나주 남평교회 엄두섭 목사 전쟁 피난일기

나주 남평교회에서 전쟁 중 피난과정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다.

소재열 | 입력 : 2021/06/21 [01:51]

 

▲ 엄두섭 목사 피난일기  © 리폼드뉴스


(리폼드뉴스엄두섭 목사는 이북 함흥출신이다. 월남하여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여 정규오 목사와 만났다.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송창근 박사의 고등비평과 자유주의신학에 맞서 싸운 정규오 목사(광주중앙교회 원로목사)와 신앙동지회(회장 정규오, 서기 엄두섭)를 조직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1947. 4. 16-22)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정서 내용은 1946년 남한의 유일한 신학교인 조선신학교를 총회 목회자를 양성하는 직영신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총회의 정통보수신학에 역행한 신학과 교리를 가르친다면 문제 해결을 위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 엄두섭 목사  © 리폼드뉴스

그 진정서는 총회적으로 이슈화 되어 조선신학교는 총회 직영신학교에서 취소되었다. 결국 김재준 박사의 목사직 파면과 교단분열로 이어졌다. 이 교단이 바로 조선학교를 전신으로 하고 있는 한신대학교이다.

 

엄두섭 목사는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남평교회와 동명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1950년 6ㆍ25 전쟁 당시 남평교회를 담임목사가 되었다. 당시 호남의 정규오 목사와 더불어 51인 신앙동지회를 함께 하면서 엄두섭 목사가 자연히 광주와 나주지역에서 목회를 했다.

 

남평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6ㆍ25 전쟁을 맞이했다. 전쟁 발발 후 이북 인민군이 광주 전남지역에 지입한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남겼다. 그 일기는 피난일기로서 1950. 7. 22.-10. 14.까지의 기록이다. 그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950년 6월 25일, 주일날 이른 새벽 전국적으로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국국은 38선 접경 수비에 겨우 13개 부대 3만 8천명의 병력만이 베치되어 있었다. 6.25 이른 새벽 북한 군대가 38선을 넘어 한국군을 압도하는 막강한 병력으로 물밀 듯이 공격해 내려올 때 한국 측은 아무도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전남 광주까지는 천리나 되는 먼거리인데도 국군이 후퇴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정보를 가장 빨리 알아낸 것은 교회의 목사들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장교들의 어머니나 부인들이 남편에게 정확한 정보를 듣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 목사에게 알렸다.

 

▲ 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 남평교회(담임 엄두섭 목사)  © 리폼드뉴스


장교 가족이 군트럭애 짐을 싣고 부산으로 피난가는데 목사들도 가족과 짐을 싣고 그들의 트럭을 타고 누구보다 먼저 부산으로 피난갔다. 전남 광주에 있는 큰 교회 목사들은 교회 사찰더러 교회를 지키라 명하고 누구보다 먼저 부산으로 도망을 쳤다.

 

광주 시내에서 피난 못가고 남은 목사라고는 제일 나이 많은 양림교회 김창국 목사 뿐이었다. 그 어른은 광주에 남아 있다가 6.25 난리 중에 광주 방직공장이 폭격 받는 소리에 놀라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때 광주에서 30리 거리에 있는 시골 나주군 남평교회를 맡고 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교회였다. 거기서 30세 목사 안수를 받고 첫 딸 성옥이를 낳았다. 

 

6.25가 터지면서 얼마 안되어 각 교회에 노회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국군과 전투경찰이 인민군과 전투하다가 부상을 당해 광주 도시공장에 후송되어 있으니 각 교회에서 위문을 가 달라는 통지가 있어서 나는 교회에서 빵을 구어 한 상자 가득 넣어 자전거에 싣고 혼자 한태재를 넘어 광주로 가서 도시공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사이 인민군은 계속 쉬지 않고 물밀 듯 뒤쫓아 내려오고 상이군경은 광주에서 다른 대로 다시 후송해가고 없었다. 빵 상자를 자전거에 실은 채 광주 시내 중앙교회로 친구 P목사를 찾아가니 그는 벌써 부산으로 가족을 데리고 도망가고 사찰만 남아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사찰은 비겁한 목사를 비난하고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된 줄 나는 전혀 몰랐다. 할 수 없이 아는 빵 실은 자전거를 끌고 처량한 심정으로 남평 사택에 되돌아왔다.

 

엄두섭 목사의 일기는 1950. 7. 22.부터 시작된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지 한 달도 채 안되어 인민군이 광주까지 왔다. 7. 22.자 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 엄두섭 목사의 일기에 직접 그린 인민군들  © 리폼드뉴스


△ 1950년 7월 22일(토)

 

사택방 침대에 누워서 독서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굵은 목소리로 “엄목사님! 계십니까?”하고 찾았다. 뛰어 일어나 나가보니 군데군데 뜯어진 낡은 밀짚모자에 막대 지팡이를 짚고 얼굴이 까맣게 타고 야윈 청년이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헌 밀짚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보니 “아! 이거 웬일이오?”

나는 달려가 그의 손목을 쥐었다. 김○○ 형이다. 

 

마루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으니 서울에서 이곳까지 쫓겨 피난 왔다는 것이다. 동네 어구 가마니 창고 있는 데에 또 누가 함께 와서 기다린다고 하기에 나가보니 이○○ 형과 그의 네 아들이다. 헌 자전거 한 대에 짐 보따리와 막내아들을 싣고 천리 길을 걸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6월 27일 이북 인민군이 서울에 쳐들어오는 소리에 탈출하여 그 가족들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에서 처자들을 내버리고 수원 논산 정읍 광주를 거쳐 내가 여기 있다기에 이 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세수물을 주고 씻게 하고 아내 보고 점심을 속히 지으라 명하고 그들 일행 6명이 거처할 방 준비를 하고는 동란 얘기를 주고받다.

 

그들의 의견은 이곳 광주나 남평까지는 괜찮을 것이라는 것이다. 평택에서는 호주 공군의 공습도 받고, 오면서 시체도 여러 개 보았다고 한다. 밤엔 교회 제직회로 모여 전날 처분하지 못한 위문 빵의 처분책과 피난민에 대한 대책 등을 논의하다.

 

▲ 남평교회 당회, 뒷줄 왼쪽 두번째가 엄두섭 목사, 세번째는 당시 담임인 소재열 목사  © 리폼드뉴스


△ 7월 23일(주일)

 

새벽 5시 50분 종을 치고 6시에 새벽기도회를 열다. 교인들의 출석이 매우 적었다. 11시 주일 대예배회에는 광주와 기타 타처로부터 오신 피난교인으로 집회수가 많았다.

 

‘때를 알라’는 새벽기도회 후 느껴지는 설교로 상을 치며 열심히 설교하다. 예배 폐회 후 서울 신학 다니다가 광주까지 피난 왔다는 평안도 청년 한 분을 만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광주에서는 급히 피난하라는 방송 때문에 오늘 주일예배도 못 보고 모두 떠났다고 한다.

 

광주에서부터 피난민이 자꾸 모여 들다. 오후에 전영래씨(함평군 산남교회)가 국방색 바지에 웃저고리는 벗어 던지고 뛰어와서 “엄목사님 계시오”하고 찾다. 내가 나가니 와락 달려들어 내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말을 못했다.

 

오늘 새벽 밤중에 광주시를 포위한 이북군의 습격에 놀라 광주를 탈출하다가 그의 호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권총과 신분증을 개천에 내버리고 오던 중 인민군에게 잡혀, “직업이 무엇이냐?” “빵장사올시다.” “참말이야?” “예”하고는 수고한다고 굽실굽실 인사해 주고 놓여나왔는데 엉덩이를 한번 꽝 차서 보내드더라고 했다.

 

자기와 같이 나오던 순경 한 명은 카빈총을 든채 한방 쏴 보지도 못하고 총살당했다고 한다. 광주 점령의 놀라운 소식에 안심하고 있던 김, 이 양형은 즉시 “우리도 또 가자”하고는 보따리를 자전거에 싣고 애기들을 내 세우고 마당에 나서다. 나보고 함께 피난하자는 것이다. 이북 사람이요 더구나 목사는 잡히기만 하면 영락없다는 것이다.

 

긴급 제직회를 소집케 전달시키고는 내 의복과 책 등 얼마 안 되는 짐을 대강 꾸려 예배당 천정에 감추었다. 지방 폭도와 도적이 두려운 것이다. 김, 이 양 친구는 내 아내가 나와 함께 떠나려 함을 보고, “도저히 방향 없는 길에 애기 업고 따라 다니기 어려우니 어느 교인 댁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아내는 울고 대답이 없다. 

 

친구들은 가자고 재촉하고 아내는 울고 섰고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친구들 보고 “그럼 나는 가는 것을 그만 두겠다”하고 친구들게 빵떡 수십개를 주고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이별함에 우리는 더러는 마당에 서고 더러는 마루에 앉고 이○○ 형의 비장한 기도가 있은 후 그들은 떠났다. “부디 살아서 또 만납시다.”하고 마지막 말을 주고 그들을 능주 쪽으로 보냈다.

 

○○ 씨가 또 떠나겠다기에 쌀과 빵과 양복바지 두 벌을 주어서 보냈다. 그의 손목을 쥐고 “꼭 살아야 하오. 신앙을 잃지 마시오”하고 보냈다.

 

나는 최○○ 집사를 시켜 임시 그가 은신할 장소로 교회 강단 옆 골방 지하 마루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자리를 깔게 하였다.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동시에 나는 책상과 의자를 주어 올려놓고 교회 천장 밑에 올라가 교회 문서와 내 많은 일기와 작품과 서적과 의복을 정리해 놓느니라고 땀을 흘렸다.

 

광주에서 도주해온 부인 하나가 아내의 소개로 예배당에서 일하고 있는 나를 찾았다. 만나보니 자기는 서부교회 계화삼 목사의 아내라고 했다. 발을 구르며 눈물을 흘리며, “우리 같은 것이야 죽어도 괜찮지만 창창하신 목사님이 죽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벌써 만주에서부터 이북과 38선을 넘어 이곳까지 왔기 때문에 그네들의 내용을 잘 압니다. 있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 필자가 남평교회 담임목회 시절 칼빈대학교에서 51인 신앙동지회와 관련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당시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하여 남평교회를 담임했던 엄두섭 목사가 필자에게 많은 사진과 자료를 주었다. 그 중에 하나가 전쟁 피난일기 원본이다.  © 리폼드뉴스


김제 목사도 목사님은 피했으나 그 가족을 내놓으라고 교인을 총살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거처를 알려 주었더니 아홉 살 된 남아만 도망하고는 가족이 전멸했습니다. 이리에서도 개성에서도 그랬습니다. 광주 김창국 목사도 피했는데 그 집에 찾아와 적어 갔답니다”하고 간곡히 나를 떠나라고 권했다.

 

조금 있다가 김○○씨(그는 전에 남노당에 가입했다가 매도 수없이 맞고 교회에 들어와 현재는 진실한 세례교인이다.)가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오늘 오후에 광주에서부터 이○○(전 일민애청년단원이요, 일시 교회에 들어와 학습까지 받았으나 1, 2개월간 행방불명 됐던 분)씨 외 한 명이 땀에 젖어서 오더니 자기 보고, “남평청년 단원을 전부 소집시켜! 들은 놈은 듣고 안들은 놈은 내버려둬!”라고 하는 것을 봤는데 필시 연락원으로 온 것 같다고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밤 9시 교인들이 예배하러 모여 왔으나 기도만 하고 돌려보냈다. 변전소가 파괴됐기 때문에 전기도 안들어 왔다. 최○○ 씨를 이○○ 회계집사에게 보내어 여비로 얼마 달라고 했더니 이집사댁은 벌써 피난 가버리고 집이 비었다는 회보다. 할 수 없이 밤 9시경 아내에게 아기를 업히고 나는 반바지에 내의 하나 입고 헌 밀짚모자 하나 주어 쓰고 (뒷마당 쓰레기 속에서) 배낭을 메고는 계화삼 목사 가족 6명과 박○○ 씨(형사) 부인과 애기를 데리고 예배당 대문을 나섰다. 

 

○○ 여 집사가 떠나는 우리 일행을 보고 흐느끼더라. 달이 유난히 밝은 동네 안 들판으로 은행나무 밑을 지나 국민학교 뒷길로 해서 능주 가는 대로로 빠졌다. 함께 떠나겠다는 김○○ 씨께 애기가 먹을 미음과 설탕가루 등을 넣은 주머니를 맡겼더니 지석강 위로 갈 때까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아 아내와 둘이서 애기 때문에 걱정했는데(아내는 임신 중이어서 젖이 안나오니) 지석강 송림 근처에서 어둠 속에서 자전거 타고 마주 오는 사람을 만나보니 그가 김○○ 씨였다. 

 

우리보다 먼저 갔다가 우리를 찾아 도로 오는 것이었다. 그를 길 안내자로 앞세우고 15리를 걸어 그의 처가에 이르러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널마루에서 하룻밤을 잤다. 이 댁은 김씨의 처가요 이 댁 아들은 좌익 운동하다가 잡혀 죽기까지 했다는 집이다(유○○ 댁). 생각과 모기, 더위로 새벽까지 잠을 못 잤다.

 

▲ 전쟁의 아픔을 딛고 1952년 3월 남평교회 부흥회(강사 정규오 목사)     ©리폼드뉴스

 

△ 9월 17일(주일)

<중략>

등정교회에서는 그간도 예배보고 있고 이북인 목사 2명이나 와서 숨어 있는데 교인들이 합심하여 잘 숨겨 주고 또 김흥순 장로는『이때에 신자들이 일 않고 언제하나』하며 열심  한다고.

 

○○씨 4촌 형 되는 이가 인민군의 통신병으로 왔는데 그로 통해 새어나온 정보에 의하면 미군은 여수와 군산에 상륙했고 법성포에서도 상륙하려다가 격퇴되었다고 한다. 또 근일 군산에서 온 이의 말을 들으면 군산은 재가 되고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남평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을 따라 갔다온 우차꾼들의 말에 의하면 장성 방면으로 갔다고도 하고 법성포에 갔다고도 하는데 아마 그 방면에 상륙이 있는 듯하다.

 

군량이 모자라서 요사이는 군인도 보리만 먹고 이곳 평산리만 해도 호수 90호에 집집에서 군량으로 강제로 걷어 들인 량이 70가마라고 한다. 얼마 전에 교회에 찾아 온 인민군 하나는 유년주교 선생인데 그이 말을 들으면 이북에서는 이남군대가 북벌해 주기를 천사 같이 기다리고 있다하며 그 때 30분간 여유 얻고 왔다는데 자기분대에도 신자 3명이 있어 모아 앉으면 기도한다하고, 이북은 무기도 없고 강제로 징발되어(17~37) 왔는데 서울 와서 겨우 총을 주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탄약도 부족하다고 한다.

 

오늘 주일 낮에 또 인민군 1명이 숨을 헐떡이고 땀을 씻으며 교회에 오더니 목사를 찾아 없다하니 장로를 찾아 집이 멀다하니 최집사 보고 당신은 누구냐 하기에 나는 교회 소제하는 사람이라 하니 최집사에게 이북 지폐 백원짜리 10매를 내 놓으며 교회에 연보하라하고 이름도 대지 않고 갔다고 한다. 감격(感激)되는 일이다. 아마 오늘 출발 하면서 온듯하다.

 

  © 리폼드뉴스


△ 10월 4일(수)

밤에 꿈이 고약했다. 아내 병은 좀 나았다. 오전 앞길로 사람들이 달려가는 소리가 나길래 내다보니 죽창(竹槍)을 든 자위대가 숨을 헐떡이며 오산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뒤에는 탈모(脫帽)에 국방색 옷 입은 장대한 청년이 망원경 같은 것을 목에 걸고 쫓아가다. 앞집 주인이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여보, 누구요!』하고 고함지르다. 이 청년이 지금 남평에서 호랑이 같이 무섭게 돌아다닌다는 신○○씨라 한다.(보안서원)

 

낮 2시경 아내와 함께 점심상 받고 먹기 시작하는데 앞길에서 사람들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양복입은 청년들이 5, 6명이 국방색 모자에 적성(赤星)을 단 것을 쓰기도 하고 각색 차림으로 이 댁에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 던지고 아내보고 그들이 온다고 일러 주고는 그들이 감나무 그늘에 가리워 안 보이는 틈을 타서 미리 만들어 둔 창고 안 가마니 무더기 위에 기어 올라가고 머리 위에 가마니를 덮어 놓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니 『목사ㅡ목사』하는 것이 분명히 목사를 찾고 있었다. 그들이 약 30간 있는 동안 나는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저들의 눈을 멀게 하시사 나를 보지 못하게 하소서』하고 열열히 기도했다. 

 

얼마 후 조용해졌고 아내가 그들이 갔다고 하길래 내려가다. 아내 말을 들으면 아내가 우는 아기를 안고 뒷문 앞에 가서 서니 어느새 그중 한 사람이 뒷문 앞에 막아섰다가 동류에게 알려 주었고 앞마당에서는 원만 씨가 『목사는 없다. 부인도 얼마 있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하는데 아내가 발각되어 할 수 없이 애기 안고 앞마당에 나갔다. 

 

그들은 아내를 보고 『목사가 어디 갔느냐』 묻기에 보성쪽에 정처 없이 떠났다하니 『서울에는 언제 왔느냐』 하기에 해방 전에 와서 학교에 다녔다 하고 이번에도 떠나지 않겠다 하는 것을 광주에서 누가 와서 목사를 다 죽인다 하여 떠났다고 말했다 한다. 

 

그들은 인민국 헌법 30 몇 조에도 종교를 믿는 것은 자유라고 뚜렷이 썼고 목사는 설교도 나쁘게 않고 종교적으로만 했는데 왜 도망가느냐고. 예수님은 십자가도 졌는데 목사 자격 없지 않느냐고. 목사 부인도 고등교육 받은 것 같은데 나와 협력해 달라고. 그리고 목사께도 연락해서 나와 협력하게 하라고 말하다가 공손히 인사하고 갔다 한다.

 

▲ 남평교회 옛 모습  © 리폼드뉴스

 

모두 떨고 있는 중에서 아내가 담대히 그들에게 답변하고 돌려보냄을 어깨를 두르려 칭찬해 주다. 그들은 대개 내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다. 강(전보안서장), 정○○(길 씨 동생), 강○○ 아들 외 2명. 이 댁에서는 놀라서 박○○집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라하고 오매 그와 의논하고 나를 다른 데로 옮기려고 박○○ 집사가 오산쪽으로 가다. 

 

숨었다가 나온 내 모양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일이 있기 전 낮에 평산리 전 동네를 집집마다 자위대가 뒤져서 수상한 사람들을 잡아냈다. 듣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벌써 태극기 복장까지 만들어 가지고 있더라 한다. 

 

그들은 수색해 잡아 낸 포로를 앞세워 평산리 앞 광장에서 정렬하고 점호하고 인민공화국 만세와 김일성 장군 만세와 조선 빨치산 부대만세 삼창하고 총 한방 놓고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부르며 개선장군 같이 남평 거리 안으로 가다.

 

 맨위쪽부터 남평교회 51인 신앙동지회 기념석(남평교회), 동지회가 발행한 불기둥(창간호) 51인 신앙동지회 일동(중간), 아래 왼쪽 2005년 생존해해 계신 신앙동지회, 아래 우측 남평교회에서 있었던 신신앙동지회 제2회 수련회 주보(1953. 7. 24) (신앙동회 회장 정규오 목사, 서기 엄두섭 목사) ©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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