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번 포이트레스(Vern S. Poythress)의 성경해석학이 맞고 있는 도전들

김순정 | 기사입력 2021/08/21 [09:35]

[논문] 번 포이트레스(Vern S. Poythress)의 성경해석학이 맞고 있는 도전들

김순정 | 입력 : 2021/08/21 [09:35]

  

  번 포이트레스 교수 © 리폼드뉴스



번 포이트레스 교수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그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신학석사를, 남아공 스텔렌보스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의 유명한 신약학자이며 대구동신교회의 권성수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I. 서론

 

포이트레스 박사는 현대 사회 속에서 성경해석학이 맞고 있는 도전들에 대해 그의 저서 God-Centered Biblical interpretation(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에서 다루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성경해석에 대한 도전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속학문에서도 성경해석에 도전을 하고 있다. 포이트레스는 다음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성경해석 관점을 열거한다(Vern S. Poythress,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19-25를 참고하라).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통해 인간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범적 인간으로 생각하고 그 예수님처럼 선하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반면 설화주의자들은 성경을 단지 설화로 본다. 그래서 성경의 이적과 기사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설화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것이 그들의 성경해석의 관점이다또한 비평주의자들은 초대교회가 인간 예수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그리고 예수를 신적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고, 예수님을 신적 존재로 승화시켜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이다비신화화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신화적 요소를 다 제거하고 비신화적 내용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내용만 발취해 그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한다.

 

심리치료자들은 성경의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는 관심이 없고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자아존중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님은 그런 심리치료자였다는 것이다. 나약한 사람들, 질병으로 인해 자아존중감이 낮아지고, 존중감이 상실된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해주고 그들이 자아존중감을 갖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심리치료를 통해서는 인간의 내면적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직 명상과 같은 영적인 방법을 통해서 치유를 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상대주의자들은 성경의 진리는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각자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토대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체주의자들은 언어가 유동성을 가지고 본질적으로 애매하기 때문에 단어의 의미, 언어의 의미를 해체하여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막스주의자들은 성경의 기록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신들에게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기록을 했다고 주장한다이러한 도전들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그 깊은 고민을 포이트레스 박사는 우리에게 던지고 함께 고민한다.

 

II.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읽기

 

1. 지극히 선하시고 흠모할 하나님

 

힌두교의 경우는 계시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힌두교는 브라마를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고 세계안에 존재하는 존재로 보아서 계시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 또 인격적 신을 배제하기 때문에 계시를 배제한다. 그리스 철학의 경우도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보편운동을 말하고 그 운동의 영원성을 말하여 창조에 의한 세계의 존재와 계시를 거부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을 부정하고 존재만 존재한다고 하여 존재 일원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존재는 어떤 시점에서 창조에 의해 존재된 것이 아니고 영원히 존재한다고 하여 창조와 계시를 부정한다. 플라톤의 경우는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들어오지 않아 참 실재를 보지 못하고 벽에 비쳐진 그림자를 실재로 착각하고 산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시에 둘러싸여 살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신의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다(서철원, 신학서론, 214-215).

 

이신론의 경우도 특별계시를 부정한다. 이신론은 기계적 세계상을 조성함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했다. 그래서 이신론은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여 특별계시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또 특별계시를 부정했다. 영국의 경험주의도 특별계시를 부정한다. 존 로크와 흄은 경험주의를 체계화했다. 이들은 지식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고 지각을 모아 지식을 얻는다. 그래서 특별계시와 같은 것은 배제되었다. 임마누엘 칸트도 하나님의 계시를 배제했다. 그는 이성이 알 수 있는 지식의 영역은 감각기관이 접촉하는 현상세계에 국한한다고 보았다. 즉 시간과 공간의 세계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공세계를 넘어가는 예지세계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진화론은 창조와 계시를 배척한다. 다윈으로 시작하는 진화론은 계시의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한다. 그러므로 계시도 부정한다. 무신론은 창조주와 특별계시를 부정한다.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창조도 계시도 다 부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계시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기저술에는 세계 밖에 계시가 존재한다고 하여 계시를 부정했다. 후기저술에는 하나님의 계시는 언어의 한계 밖에 있다고 하여 계시를 배제하고 부정했다(서철원, 신학서론, 216-218).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과 계시를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나 계시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죄인인 인간들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눈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보기에 없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눈을 감고 태양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어리석음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계시는 분명히 우리 손에 주어졌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분의 권능과 자비, 주권은 모두 그분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고 우리가 흠모할 만한 분이시다(Vern S. Poythress,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24). 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

 

우리가 하나님을 흠모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여기 생명은 단지 살아 숨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살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던져지게 되는데 거기서 건짐을 받는 길, 영생의 길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생명의 길(오라흐 하이욤)이 있고 충만한 기쁨이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영생의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시편 기자는 한 가지 소망을 구한다. 그것은 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살며 하나님이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그의 유일한 소망으로 구하고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4:8)

 

또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선하심(토브 아도나이)을 맛보아 알라고 강조한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여호와의 선하심이 얼마나 크고 복된 것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 세상의 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악이 더 강하고 힘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다. 어디에도 위로가 없고 소망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분에게 피하는 자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 복은 세상에 없는 것이며 따라서 세상에 줄 수도 없는 복이다. 부자가 되고 명예를 누리고 권세를 가지고 장수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유한한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84:10-12)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궁정에서 사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고 한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문지기는 온종일 문을 지키는 자이다. 얼마다 피곤하고 다리가 아프고 목이 마르겠는가? 그런데 그 하루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이유는 11절 이하에 나온다. 하나님은 태양이시다. 방패이시다. 그분은 은혜와 영화를 주시고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되 아끼지 않으신다. 은혜와 영화가 풍성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불감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 기독교의 실수 때문이다. 포이트레스 박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두 알다시피 기독교는 서구 사회에서 수 세기에 걸쳐 하나의 주도적 종교였다. 그간 역사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큰 죄악들을 저질렀고 믿음의 가치를 실추시키는 부끄러운 실수들을 범했다. 더구나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 많은 사람들이 수 세기에 걸쳐 하나님을 가리게 만드는 그럴싸한 문화적 전력들을 만들어 냈다. 어떤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 교묘한 것들도 있다. 이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과 그 메시지에 대해 불감증에 빠지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빈곤을 감추기 위해 수많은 방법들을 가지게 되었다.”(Vern S. Poythress,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25).

 

2. 그리스도인들의 성경 읽기

 

이러한 분위기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많은 유혹을 받게 한다. 때로는 자연주의자들과 같이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책으로 읽기 시작할 수도 있다. 또 세속의 심리치료사들처럼 우리의 자아존중감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지혜로운 충고를 얻기 위해 또 하나의 출처로 성경을 사용할 수도 있다. 또는 뉴에이지 신봉자들처럼 성경을 통해 천사나 마귀에 대한 생각, 의식 변성 상태를 추구하기도 한다. 또 쾌락주의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성경을 사용하기도 한다(Vern S. Poythress,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25-26).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온갖 희한한 일을 행한다. 성경을 통해서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성경을 바르게 읽을 수도 있고 잘못 읽을 수도 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히 제시해 주셨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34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119:33-34)

 

포이트레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성경 자체가 우리의 기초 자료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채널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때로 우리는 다신의 기존 경험을 활용하기도 한다. 다른 교인들과의 교제가 우리를 영적으로 살찌우기도 한다. 가르침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에게 모범을 제시하기도 한다. 좋은 책들이 실제적 면에서 우리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Vern S. Poythress,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34).

 

우리에게는 다른 것이 없다.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만이 우리의 기초 자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외의 것들은 모두 2차적 자료들이다. 이것을 우리는 오도할 수 있다. 이것들은 어떤 경우 불확실한 기초 위에 놓인 것들이 많다. 언어나 의미, 역사, 인간, 본성 등에 있어 통속적인 이론들이나 검증이 되지 않은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전제들은 성경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현시대의 생각들은 전적으로 재검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Vern S. Poythress,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35).

 

성경은 인간의 언약성과 세상에 지배하는 오류의 세력 때문에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성경이 없다면 바른 진리에 이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구원에 결코 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기록되므로 계시의 진리가 순수하게 보존되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계시된 진리가 분명히 명기되지 않고는 교회는 진리를 상실하여 구원의 사역을 다 이루지 못하다. 성경계시는 세상 구원에 필수적이다. 성경이 없이 구원은 불가능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믿을 수 없다. 성경은 구원 얻음과 하나님 섬김에 필수적이다(서철원, 신학서론, 249-250).

 

III. 결론

 

포이트레스 박사는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 실제적 기술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기술들을 바르게 작동시키는데는 우선 바른 기초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통제된 방향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처럼 어리석은 사람처럼 굳건한 기초도 없이 모래 위에 그 집을 세우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Vern S. Poythress, 하나님 중심의 성경해석학, 35).

 

번 포이트레스 박사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해석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그 시각에 기초한 도전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에 대비하여 바른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과 이해를 가지고 저들의 도전에 응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경에 대한 바른 기초적 지식에 근거해 성경을 해석해 나가야 한다. 그럴 때 바른 성경이해와 해석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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